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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오늘은 “나는 좋은 목자이다”라는 제목을 갖고 말씀을 살피려 합니다. 오늘은 “I am ~”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좋은 목자 예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크리스천들에게 충분하게 사랑받기에 마땅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크리스천들에게 사랑받기에 마땅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좋은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예수님의 목자 설교’입니다. 새로운 단락을 9장 39절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나는 좋은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18절에 “나는 그 좋은 목자(the good shepherd)라, 그 좋은 목자는 양(羊)들을 위하여 그의 목숨(life)을 놓으며(lay down). 품꾼은 목자도 아니며 자기 양들이 아니며 이리가 오는 것을 지켜보고서 그가 양들을 버려두고 도망하고, 이리가 그것들을 잡아채고 흩뿌리노라. 그가 품꾼인 것 때문이고 그가 그를 위해 그 양들에 관해 돌보지 않노라. 나는 그 좋은 목자고, 내가 나의 것들을 알고 그 나의 것들도 나를 아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그 아버지를 아는 것에 따라서고 내가 양들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놓으며. 이 안뜰에서 있지 아니하는 다른 양들도 내가 반드시 인도하여야만 하고 나의 음성의 그들이 들을 것이고 그들이 한 떼, 하나의 목자가 되겠노라.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니 내가 나의 그 목숨을 다시 취하기 위하여 내가 그것을 놓는 것 때문이라. 아무도 나에서 들어 올리지 아니하지만 내가 그것을 나 자신에서 놓노라, 내가 그것을 놓기에 권위를 가지고 다시 그것을 취하기에 권위도 가지며 이 계명을 내가 나의 아버지로부터 받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좋은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1). 좋은 목자는 양(羊)들을 위하여 그의 목숨(life)을 버립니다(요 10:11).
도둑은 만일 그가 훔치고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면 오지 아니하지만,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립니다(요 10:10-11). “목숨”이라는 말은 목으로 숨을 쉬면서 살아 있는 힘으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에, “좋은 목자”십니다.
모세가 말씀드리기를 “하나님께서 사람을 회중 위에 임명하실 것이며. 그가 그들의 앞에 출입할 것이고 그가 그들을 출입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되지 아니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민 27:16-17).
하나님께서 그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안에 영(Spirit)이 있는 사람 눈(Nun)의 아들 여호수아를 너에게 취하고 그에게 너의 손을 얹고”라고 하셨습니다(민 27:18).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즉 예수님을 회중의 목자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목자를 저속하고 하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 여겼고,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과 메시아를 목자로 부르는 것과 대조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양 떼의 목자로 묘사되십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위험하여서 남자다운 다부짐이 요구되었습니다.
“목숨을 손바닥에 놓는다”라는 말은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를 뜻하며 구약성경에 이 관용구가 여러 번 사용되었습니다(판 12:3, 삼상 28:21).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나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예수님께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좋은 목자”입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놓으시기 때문에 “좋은 목자”십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빼앗기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영생을 얻게 자기 목숨을 죽음에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처한 자들을 위해 그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양들인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 때문에 “좋은 목자”입니다. 그의 죽음은 양들을 위해 대신 죽는 대속(代贖)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해 대신 죽는 특별한 죽음이었는데, 우리는 그 특별한 사람들에는 누가 속하였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양들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그 양들을 위해 형벌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좋은 목자”로 만드는 것은 대신 속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는 우지 기관단총(sub-machine-gun)이 아닌 십자가를 드셨습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며 자기 양들이 아니며 이리가 오는 것을 지켜보고 그가 양들을 버려두고 이리가 그것들을 잡아채고 흩뿌립니다(요 10:12).
지난번에 “양들의 문”에서는 “목자”와 반대되는 자가 “도둑”이었다면, 오늘 “좋은 목자”에서는 “좋은 목자”와 반대되는 자가 “삯꾼”입니다.
“삯”이라는 말은 “일한 데 대한 대가로 주는 돈이나 물건”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당’이나 ‘월급’입니다.
“삯꾼”은 이런 “삯을 받고 일하는 사람”, “돈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삯꾼(hired servant)”(미스도토스)은 “고용된 하인”을 뜻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양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농사지으려고 나가야 하니까 나의 양을 돌보아 주시오, 내가 그 대가를 주겠소’라고 하며 고용한 때에 그 고용된 사람이 바로 “삯꾼”인 것입니다.
“삯꾼”은 돈을 받고 양을 대신 돌보고, 그 양들은 자기 양이 아닙니다.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지켜보는 때에 양들을 버려두고서 도망갑니다.
“삯꾼”은 위험한 때에 양을 버리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양이 공격에 쉽게 희생당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뜻합니다. 돈이 목적인 삯꾼에게 양 떼를 위해 목숨 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리가 오는 때 그가 양들을 버려두고 도망하는 것은 삯꾼인 까닭이고 그가 그 자신을 위하여 그 양들에 관하여 돌보지(care) 아니합니다(요 10:13).
삯꾼은 위험한 때 양 떼를 버리고 자기 이익을 앞에 세울 것입니다.
“삯꾼”은 들짐승에 찢긴 가축을 배상할 책임이 없습니다(출 22:13).
자신의 소유가 아닌 양들은 삯꾼들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삯꾼”은 양이 자기 소유가 아니므로 양이 죽어도 손해가 없습니다.
“삯꾼”은 자기 사리사욕을 챙기는 데 더 열심인 자들을 비유합니다.
그는 삯꾼이기에 자신을 위하여 양들에 관하여 돌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목자이시고 그는 자기 것들을 아십니다(요 10:14). 그의 것들도 그를 압니다.
앞에 10장 7절에서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이 단락 10장 11절과 14절에서는 “나는 좋은 목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좋은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4).
목자와 그의 양들의 상호적 인식은 관계가 친밀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아시고 그가 그 아버지를 아시는 것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그의 목숨을 놓으십니다(요 10:15).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하여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5절에 그 자신의 완벽한 희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속하여 알려지는 것은 동시에 그의 양 떼의 하나가 된다는 것이며 그 결과로써 예수님의 죽음의 효력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목숨을 놓으신 일로 그 사랑의 증거를 확증하셨으며, 예수님께서는 다른 의문의 여지 없이 그 자신을 죗값으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두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그 죽음은 그 사랑의 계획이 효력을 발생할 수 있게 할 이유입니다. 그가 우리 대신에 죽음으로써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안뜰에서 있지 아니하는 다른 양들도 그가 반드시 인도하셔야 하고 그의 음성의 그들이 듣고 그들이 한 떼 하나의 목자가 됩니다(요 10:16).
교회는 “안뜰(courtyard, 아울레), 즉 양우리입니다. 이 땅 위에는 이 안뜰에서 있지 아니하는 다른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 주권적으로 창세 전부터 선택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목숨을 그 값으로 지급하여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마지막 날에 양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의 손아래 지나가는 때 그의 양 떼에 속한 자 중의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지만, 예수님께 속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아직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전도하여야만 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당에 데려와야 한다고 느껴지는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들이 와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양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니 예수님께서 그 목숨을 다시 취하시려고 놓으시기 때문입니다(요 10:17).
아무도 그에서 그것을 빼앗지 않으나 그가 그것을 자신에서 놓으시며, 그가 그것을 놓게 권위를 가지시고 다시 그것을 취하게 권위도 가지시며 이 계명을 그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습니다(요 10:18).
2. 이 말씀들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9절에 “분열이 다시 일어났으나”라고 하였습니다.
10장 19-21절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반응’입니다.
바리새인들에서 어떤 자들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나, 나머지 자들은 “어떻게 죄인이 표적들을 행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였고, 분열이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요 9:16).
“유대인들”은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포함하는 사람들로 판단됩니다.
그들 중에서 많은 자가 말하였기를 “그가 귀신을 가지고 그가 미쳤으며 너희가 그의 무엇을 듣느냐?”라고 하였습니다(요 10:20).
고대 세계에서는 미치는 것과 귀신을 가지는 것을 연관시켰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하였기를, “이 말은 귀신 들리는 자의 것이 아닌지라 귀신이 눈먼 자들의 눈을 열 수 있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요 10:21).
“눈먼 자들의 눈을 열다”라는 말은 이 내용을 앞에 9장과 잇습니다.
귀신 들리는 것과 미치는 것이 고대 세계에서 반드시 똑같지는 않지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말은 9장에서 눈먼 자가 말한 내용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3. “나의 양들은 나의 음성을 듣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5-30절에 “내가 말하였고 당신들은 믿지 아니하노라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이름에 행하는 일들이 나에 관하여 증언하나. 너희가 믿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나의 양들에서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나의 양들은 나의 음성의 듣고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에게 따르고.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고 결코 그들이 영원 안으로 멸망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그들을 나의 손에서 잡아채지(snatch) 아니하겠노라. 나에게 주신 바의 나의 그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의 더 크시고, 아무도 그 아버지의 그 손에서 잡아챌 수 있지 아니하노라. 나와 그 아버지께서는 하나(one)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안에 그 봉헌의 절기가 되었으며 겨울이었습니다(요 10:22).
성전 봉헌의 절기는 등불로 기념하여, ‘빛들의 절기’로 불렸습니다.
그 헌당식의 절기(the Feast of Dedication)는 성전 봉헌 기념 절기로, 그 봉헌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힌 날부터 3년 뒤입니다. 요세푸스는 이 절기를 “빛들의 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 봉헌의 절기는 기원전 164년에 있은 성전 재봉헌을 기념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좋은 목자 말씀을 하시고 몇 달 뒤에 이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방에 머무시다가 그 도시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솔로몬의 기둥 복도 현관 안에 걸으셨습니다(요 10:23).
“기둥 복도 현관”(스토아)은 “행각(行閣)”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주랑 현관”(portico), “현관”(porch), “주랑”(colonnade)을 의미합니다.
이 “솔로몬의 기둥 복도 현관”은 이방인 뜰 동쪽 끝에 있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은 그의 사역을 수행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솔로몬의 주랑(柱廊)은 성전 동편에 있었습니다. 주랑은 바깥뜰을 둘러싸는 지붕 있는 거대한 구조물 일부였습니다. 이곳은 나중에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모임 장소가 됩니다(행 3:11).
그때 그 유대인들이 그를 에워쌌고 그에 말하였기를, “언제까지나 너는 우리의 영혼을 빼앗으려고 하느냐(keep in suspense), 만일 너는 그 크리스트면 우리에게 명백히 대답하라”라고 말하였습니다(요 10:24).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담이 죄의 책임을 여자에게 넘긴 것은 죄의 특성이 그렇기 때문이며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믿지 않는 것의 책임을 예수님께 떠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혼을 아무도 빼앗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요 10:18), 이제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예수님이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질문하였던 내용은 ‘너는 메시아냐’는 질문이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메시아”라는 용어가 지닌 정치적 함의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기를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의 이름에 행하신 일이 그에 관하여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믿지 않은 것입니다(요 10:25).
그들은 예수님의 양들에서 있지 아니하기에 믿지 아니하며(요 10:26),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양들로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양들은 그의 음성의 듣고 그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그에 따르나, 예수님의 양이 아닌 불신자들은 예수님께 따르지 아니합니다(요 10:27).
칼뱅주의로 알려진 선택의 교리는 칼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이 진리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셨으며 파울에 의해 확증된 것입니다.
선택의 교리는 많은 사람의 피를 끓게 하고 분하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의 교리를 모든 사람 앞에 밝히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의 특별한 소유인 예수님의 양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양들과 예수님의 양들이 아닌 자들로 나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자가 거기서 그 안으로 믿었습니다(요 10:42).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느냐에 달렸습니다. 악마는 기다리기를 원하는데 말씀의 씨앗을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자가 “거기서” 믿었듯이 사람은 지금 있는 “거기서” 믿어야 하며,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서 믿고 영생을 받는 복된 자가 됩시다!
1) Andreas J.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신지철·전광규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408.
2) James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서문강 옮김 (파주: 쉴만한 물가, 2017), 102.
3) Gerhard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시리즈, 송다니엘 옮김 (서울: 토브북스, 2021), 443.
4) J. Ramsey Michaels, 『NICNT 요한복음』, NICNT 성경주석, 권대영·조호영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22), 704.
5) G. K. Beale·D. A. Carson 편집,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시리즈 2권, 우성훈·배성진 옮김 (서울: CLC, 2012), 600.
6)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3.
7)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7.
8) D. A.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박문재 옮김 (서울: 솔로몬, 2017), 709.
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36.
10)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22.
11)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23.
12)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10.
13)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37-138.
14)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39.
15)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10.
16) Beale·Carson 편집, 『누가·요한복음』,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602.
17)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7.
18)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18.
19)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54.
20)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23.
21)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11.
22)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23.
23) G. R. Beasley-Murray, 『요한복음』, WBC 성경주석 36, 이덕신 역 (서울: 솔로몬, 2001), 380.
24) C. H.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서문강 옮김 (서울: 도서출판 로고스, 2001), 523.
25) C. H. Spurgeon, 『요한복음Ⅰ』, 스펄전 설교전집, 이광식 옮김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20), 776.
2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42.
2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23.
2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24.
2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35.
3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37.
3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38-539.
3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40.
3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43.
3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49.
35)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17.
36)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17.
37)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21.
38)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21.
39)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30.
40)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30.
41)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19.
42)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33.
43)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21.
44)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62.
45)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63.
46) Michaels, 『NICNT 요한복음』, 734.
47)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22.
48)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69.
4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70.
50) Köstenberger, 『BECNT 요한복음』, 423.
5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61.
52)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177.
5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88-589.
5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9』, 591.
5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29-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