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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이
고통의 뿌리를 끊는 경전인지
그 누가 물어도 스스로 명확히 설명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분들이 반야심경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절에서 들었고 법회에서 들었고 기도할 때 외웠습니다.
그런데 누가 갑자기 묻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그 순간 말문이 막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
반야심경은 짧지만 그 안에 불교의 심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온 무와 연기 열반 도 그리고 깨달음의 핵심이
이 짧은 경전 안에 모두 압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반야심경 한 구절 한 구절 따라가며 이 위대한 구조를 정확히 살펴보겠습니다.
어렵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얕게도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 한편으로 반야심경의 핵심을 완전히 끝내겠습니다.
특히 오늘 여러분은
공
이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색즉시공에서 말하는 공과
공중무색에서 말하는 공이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인연화합으로 생겨난 현상이 공하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공
즉 법
다시 말해 도 그 자체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아는 순간 반야심경은 여러분에게 그저 외우는 경전이 아니라
괴로움의 뿌리를 끊고
깨달음으로 건너가게 하는 살아 있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 지리산에서 이제까지 열심히 수행하며 깨달은 것을 토대로 반야 심경 각 구절을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이 현상계에서 뭐가 가장 클까요? 허공입니다.
허공은 경계가 없기에 무한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마하라는 것은 허공을 의미하며 무한을 상징합니다.
반야는 지혜를 의미하죠.
그럼 과연 지혜란 뭘까요?
지혜라는 것은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것들의 본질 실체 실상을 정확히 아는 것 이게 바로 지혜이며 반야입니다.
그럼 모든 것들의 본질 실상은 무엇인가? 그걸 딱 한마디로 하면 공이다.
불자 여러분 절대 주의해야 할 것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든 것들의 실상 본질은
무상 고 무아가 아니고
공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무상 고 무아는
현상계의 겉으로 드러난 특성이고
공은 현상계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상 고 무아만으로는 해탈이 절대 불가능하죠.
공을 깨달아야 해탈이 가능합니다.
이런 이유로 초기 불교 경전 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공이 해탈문이다.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단순 무식한 뜻이 아니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내재된 실체가 없어서
비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자연이 스스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겨났지요.
대표적으로 나 자신의 몸이 그렇습니다. 몸은 창조주가 만든 것도 아니고
또 자연이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부모의 의지에 의해서 생겨난 게 몸이죠.
이게 바로 연기법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긴 몸에는 내재된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긴 것에
뭔 실체가 있겠는가?
다른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을 수 없다.
그런 몸은 뭐라고 표현해야 옳을까요?
몸을 없다고 표현하면 바보죠.
그렇다고 몸의 실체가 있어서 영원하다고 말해도 역시 바보입니다.
몸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기에
몸은 공하다고 표현하면
완벽한 정답입니다.
어떤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내재된 실체가 없기에 그 대상을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공의 완벽한 뜻입니다.
이해하기 쉽죠?
물론 공의 뜻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 말씀드린 것은 세간의 공을 의미합니다.
대상의 공함을 아는 게
반야
즉 지혜입니다.
반대로 공함을 모르는 게 무명이죠.
아예 없다거나 영원하다는 이 양극단도 역시 무명입니다.
공을 알면 지혜고
공을 모르면 무지
즉 어리석음 무명입니다.
왜냐하면 제법 실상 즉 모든 것들의 실상이 바로 공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알라.
모든 것들의 실상 즉 정체가 바로 공입니다. 그래서 일체개공이죠.
이 세상의 모든 것들 겉으로 보기엔 모두 다 진짜 같고 사실처럼 보여지지만
그 본질은 모두 내재된 실체가 없기에 공한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 모든 것에 내재된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그 증거는 무엇인가?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매 순간 변화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증거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것이 완벽한 증거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저절로 자연이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에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
왜 모든 것이 공한 것인지 이해되셨습니까?
바라밀다는 도피 아닙니다. 피안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죠.
피안이라는 것은
마음의 무한 대자유를 의미합니다.
실제 어떤 장소가 아닙니다.
마하라는 것은 오로지 반야바라밀다에만 붙습니다. 육바라밀이 있는데
나머지 오바라밀은 마가 붙지 않고
오로지 반야바라밀에만 마하가 붙습니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이 가장 중요하기에 금강경에서는 반야바라밀 앞에 금강을 붙였고 반야심경에서는 마하를 붙인 것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이 뜻은 무한의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간다.
심경은 핵심이 담겨 있는 경전이란 의미죠.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무한의 반야
즉 공을 닦고 익힘으로써
무한대자유인 해탈로 나아가는 핵심이 담겨 있는 경전
이것이 마하바냐 바라밀다심경의
뜻입니다.
마음의 해탈 즉 걸림없는 무한대자유를 성취하려면 공을 닦고 익혀야 합니다.
공.
이 공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초기 불교 경전인 니까야에 부처님께서
공이 곧 해탈문이다
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도반 여러분 엄청 재밌죠.
저 역시 처음 봐야 심경을 배울 때는 참 어려웠었는데
꾸준히 수행을 하고 경전과 논설을 보며 점점 더 본질을 깊이 알아갈 때
정말 큰 행복을 느꼈었습니다.
저는 사실 공사상을 배울 때가
가장 환희스러웠습니다.
2부
관자재보살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구절입니다.
관자재보살행 신바니아 바라밀다시 조견호은계공 도일체고액
뜻은 이렇습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너셨다.
여기서 관자재보살은 관세음 보살님을 말합니다.
도반 여러분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해탈하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오온의 공함을 보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고온의 무상고 무아를 보는 게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해탈의 문은 그래서 공입니다.
이게 바로 초기불교 경전인 니까야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강조하신 겁니다. 공이 곧 해탈문이다.
조견 오은개공 도일체고액
오 온의 공함을 비춰보아야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무한대자유를 누리려면
오온을 관찰해야 합니다.
오온을 관찰하려면 오온의 뜻부터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불자들조차 오온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번역하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말로 설명하기 때문이죠.
불자 여러분 이제부터 오은의 뜻을 정확히 알려드릴 테니 빤스 고무줄 꽉 붙잡고 자세히 들으십시오.
오온은 색수상행식을 말합니다.
색은 물질로 구성된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내 몸이 바로 색입니다.
이건 쉽죠.
수는 느낌입니다.
이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느끼니까 말이죠.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통증도 느낍니다.
이런 느낌이 바로 수입니다.
상은 생각입니다.
상을 번역자마다 제각각 다른 용어로 설명하는데
가장 정확하고 가장 쉬운 용어는
바로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각하죠
그게 바로 상입니다.
그럼 생각이란 뭘까요?
기억에 떠오름 바로 이것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건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
행도 많이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행은 행위라고
번역하면 가장 적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위 의지라고 표현하는데
행위 의지는 생각
즉 상에 속합니다.
실제로 뭘 하는 행위가 행입니다.
아셨죠?
식은 분별하는 의식입니다.
이건 좋다 저건 싫어.
이렇게 이리저리 따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따져드는 그 의식이 바로 식입니다.
색수상행식
오온에서 가장 헷갈리는 게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상과 식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정확히 알려드릴 테니 잘 들으십시오.
상 즉 생각이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죠?
그게 바로 상입니다.
또 여러분 스스로 기억을 떠올려도
그게 상입니다.
그렇게 기억이 떠오르고 나서 그 기억에 대해서 아 정말 괴로워. 그때 왜 그랬을까? 이렇게 신세한 탄을 하며 분별하는 게 식입니다.
이렇게 상과 식은 서로 다른 기능입니다.
상은 기억에 떠오름 지금 그 대상에 대한 해석 즉 분별
아주 쉽죠?
잊지 마십시오.
다음 내용 외우십시오.
색은 내 몸이다
수는 느낌이다.
상은 생각이다
행은 행위이다.
식은 분별하는 의식이다.
이걸 똑끼리 모르면 어떻게 조견 오은 개공이 가능하겠습니까?
마음으로 오은의 뜻부터 아주 정확하고 명확하게 알아야 하는 겁니다.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합니다. 생각도 관찰하고 행위도 관찰하고 의식도 관찰합니다. 오온이란 색수 상행식을 말하며 사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작용입니다. 몸 느낌 생각 행위 이식 우리는 이 다섯 가지 묶음을 나라고 부릅니다. 모험이 있으니까 나라고 하고 느낌이 있으니까 나라고 하며 생각이 있으니까 나라고 합니다. 행위가 있으니까 나라고 하고 분별하는 의식이 있으니까 나라고 하지요. 하지만 바냐 심경은 이 다섯 가지를 깊이 비추어 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바로 이 다섯 가지 작용 즉 오늘날하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은 몸도 자신으로 여기고 느낌 생각 행위 의식도 자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걸 완전한 착각이라고 가르치셨죠. 몸은 너가 아니다. 느낌도 너가 아니고 생각도 너가 아니다. 행위도 너가 아니고 분별하는 의식도 너가 아니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완전히 정반대죠.
그렇습니다. 이렇게 진리라는 것은 상식과는 정반대입니다. 도반 여러분 장식을 믿지 마십시오. 장식에 속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것들에 속지 마십시오.
관자재보살 즉 관세 음보 살림은 이오온을 깊은 지혜로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오은계공 오은이 모두 공하다. 여기서 공화당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몸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느낌과 생각이 없다는 말도 아니죠. 대기나 의식이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공허하다는 것은 그것들이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셨나요?
몸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입니다. 느낌도 인연 따라 일어나지요. 생각도 인연 따라 떠오르고 행위도 조건 따라 움직이며 의식도 대상과 조건이 있을 때 분별합니다. 이렇듯 모든 것들은 다른 조건 즉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발생하죠. 그러므로 색수상행 시 오오는 모두 독립된 실체로서의 나가 아닙니다. 책수산행 시계는 나라고 여길 만한 실체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보면 고통의 구조가 무너집니다. 오운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면 그동안 내가 나라고 붙잡았던 것이 사실은 인연 따라 일어나는 작용의 묶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도일 최고의 즉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너는 것입니다. 여기서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말은 몸이 절대 아프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의 어려움이 전혀 오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괴로움의 뿌리 즉 이것이 나다라는 착각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몸은 아플 수 있죠. 감정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생각은 떠오를 수 있고 장황은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라고 붙잡지 않을 때 즉 동일시 하지 않을 때 고통의 중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온을 보라. 오늘날하고 착각하지 말라. 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라. 그러면 모든 고통의 뿌리가 흔들린다. 여기서 오늘의 댓글 수행 문장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댓글에 짧게 이렇게 적어 보십시오. 마하반이야. 바람이 이 문장을 댓글에 남기는 것은 단순한 참여가 아닙니다. 지혜를 손으로 새기는 수행입니다. 내 몸도 느낌도 생각도 행위도 의식조차도 인연 따라 일어나는 작용이지. 고정된 내가 아닙니다. 마하반야바람이 이 한 문장을 마음에 새기고 계속 들어 보십시오. 참부 살이자 색보리공 공부리생 다음 보절입니다. 자리자 샛불이공 봉부리색 색즉시00즉시색 수상행식이었부여 씨 뜻은 이렇습니다. 자리자요 작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느낌 생각 행위 의식도 또한 이와 같다. 여기서 먼저 제게 뜻을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색수상행식 즉 오온에서의 색은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반면에 육경 즉 색성향 미초법에서의 색은 논의돼하는 대상 곧 형체와 색깔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색즉시공에서의 색은 바로 우리가 내 몸이라고 부르는 이 물질적 몸입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믿고 삽니다. 몸이 젊으면 내가 괜찮은 사람 같고 몸이 늙으면 내가 무너지는 것 같고 몸이 아프면 내 삶 전체가 망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묻습니다 정말 이 몸이 너인가
이 몸은 혼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인연 음식과 물과 공기 수많은 세포의 작용 이 지구 전체의 조건이 모여 잠시 몸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있습니다. 몸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똥 마려우면 쌓아야 하고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병들면 치료해야 합니다. 불교는 몸을 보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몸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몸은 인연 따라 생기고 2년 따라 변하고 2년 따라 늙고 2년 따라 흩어집니다. 그러므로 몸은 있지만 몸 안에 고정된 나는 없습니다. 이것이 색즉시공입니다.
책 즉 몸은 공화다. 몸이 공하다는 것은 몸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몸의 고정된 자성 즉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몸을 붙잡고 이것이 나다라고 말합니다. 즉 몸을 자신과 동일시하죠. 바로 그 착각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몸이 변해서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몸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몸의 변화가 나의 붕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냐 심경은 가장 먼저 몸을 비추어 보라고 합니다. 내가 나라고 못 잡는 그 몸을 보라. 그 몸은 인연 따라 모인 것이다. 잠시 나타난 것이다. 계속 변하고 있다. 그 몸 안에는 붙잡을 수 있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이 색즉시공입니다. 그런데 반야 심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공즉 시세. 공이 곧 색이다. 몸이 공하다고 해서 몸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몸을 함부로 대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몸은 나의 영원한 실체는 아니지만 조행과 자비를 실천하는 소중한 인연입니다. 이 몸으로 절하고 이 몸으로 법문을 듣고 이 몸으로 보시고 이 몸으로 부처님 법을 실천합니다. 그러므로 몸은 공허하지만 어릴 대상이 아닙니다. 몸은 나가 아니지만 소중한 인연입니다. 이것이 공직 시세계입니다. 이제 이어서 말합니다. 수상행식 역부여 씨 주는 느낌이고 장은 생각이고 행은 행위이며 지금 분별하는 의식을 말합니다. 몸만 공한 것이 아닙니다. 느낌도 공하고 생각도 공하고 행위도 공하고 의식도 공허합니다. 국민 여러분 왜 수상행식도 공하인지 이해하셨습니까? 몸이 다른 조건 즉 다른 인연에 의존하여 생겨났듯이 수상행식도 역시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다른 조건 인연에 의해 생겨났기에 초상행식 그 자체에는 내재된 실체가 없어서 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창조주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자연이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른 것 다른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싸그리 깡그리 전부 다 공한 것입니다. 겁나기 쉽죠? 느낌은 나가 아닙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내 존재가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불안이 올라온다고 해서 내가 보란 그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느낌은 몸 상태 기억 관계 말 한마디 비록 과거의 상처 등 수많은 조건이 모여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생각도 나가 아닙니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생각이 떠오를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이 곧 나는 아닙니다. 생각도 인연 따라 떠오르는 작용입니다. 행위도 공합니다. 내가 했던 실수 성공 실패 과거의 행동도 이 년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세속적으로는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가 내 존재 전체는 아닙니다. 질수했다고 해서 내 본질이 실수인 것은 아니고 실패했다고 해서 내 본질이 실패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그런 것 따위에 전혀 영향받지 않고 언제나 완벽한 그대로입니다.
의식도 공합니다. 여기서 의식은 알아차림이라기보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작용입니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내 편이다. 남의 편이다. 이렇게 나누고 판단하는 의식을 우리는 참된 나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의식도 대상과 조건이 있을 때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의식도 공합니다. 이렇게 보면 제 수상행식 전체가 공합니다. 몸도 내가 아니고 느낌도 내가 아니고 생각도 내가 아니며 행위도 내가 아니고 의식도 내가 아닙니다. 중생들은 몸 느낌 생각 행미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 작용의 묶음을 나라고 착각하죠.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인연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이 년 따라 생긴 것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는 공합니다. 결국 내가 괴로운 이유는 몸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죠. 몸을 나라고 붙잡기 때문입니다. 느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느낌을 나라고 붙잡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생각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죠. 생각을 나라고 동일시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죠. 행위가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내 존재 전체라고 믿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의식이 분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분별을 참된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눈 지치셨나요? 왜 중생들이 괴로운지 말입니다. 중생들은 엉뚱한 걸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남 때문에 환경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올시다. 당신 자신이 엉뚱한 걸 자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요
이걸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사람의 고통을 정면으로 해부하는 말씀입니다. 이 모험은 공화다. 하지만 공은 이 몸을 떠나 따로 있지 않다. 느낌 생각 행위 의식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알면 반야 심경은 더 이상 어려운 경전이 아닙니다.
바냐 심경은 내가 나라고 붙잡던 오온의 착각을 끊어내는 위대한 지혜의 경전입니다. 그리고 그 착각이 무너질 때 거무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보고 느낌을 느낌으로 보고 생각을 생각으로 보고 행위를 행위로 보고 의식을 의식으로 보는 맑은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 자리에 공의 밝음이 드러나고 진열의 지혜가 드러나며 법제 도가 현연합니다.
여진 자리 분별과 집착이 사라진 자리 생멸의 착각을 넘어선 근원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도 그 자체에는 색 수상행식이라는 세속적 범주가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은 여기서 목표 면적 공에서 근원적 공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처음에는 몸은 인연화합이므로 공화당을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는 공 즉 도 그 자체에는 몸이라는 자성도 느낌이라는 자성도 생각이라는 자성도 행위라는 자성도 의식이라는 자성도 없다고 밝힙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의 깊은 순서입니다. 재간의 공에서 출세간의 공으로 파도의 공에서 바다 그 자체의 공으로 현상의 공에서 도의 공으로
이것을 모르면 반여 심경의 뒤 구절들이 단순히 없다. 없다. 없다는 허무의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반야심경의 문은 허무이 없다가 아닙니다. 공중 즉 도 그 자체에는 세속적 범주들이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공중무색은 몸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몸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또 그 자체에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무수상행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느낌 생각 행미 의식이 제 속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그 자체에는 그 모든 것에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문은 현상은 공화당은 문입니다. 두 번째 문은 공 즉 도 그 자체에는 현상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문입니다. 이 두 문을 함께 알아야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을 세 간에 공과 출세 간의 공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은 내가 운영하는 이 괴로움은 허구다. 채널이 유일할 것입니다. 6 보 무한이비 설실의 무색 성향 미초법
다음 구절입니다. 무한이비 설신의 무색성 향미초법 대신 이렇습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고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그때 또 없다. 경색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법도 없다. 여기서 반야 심경은 온을 넘어 감각 세계 전체를 비웁니다. 논 귀 코 혀 몸 뜻은 육근입니다. 즉 우리의 감각 기관입니다.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은 육경입니다. 즉 외부의 감각 대상입니다. 노는 형색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고는 냄새를 맡고. 저는 맛을 보고 몸은 감촉을 느끼고 뜻은 법 즉 마음의 대상을 인식합니다. 여기서 다시 제게 뜻을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앞에서 셋즉시공의 색은 온 가운데 새깁니다. 즉 인간의 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색 성향 미초법의 색은 육경 가운데 색입니다. 눈이 대하는 대상 곧 형체와 색깔입니다. 우리 눈은 두 가지를 봅니다. 첫째는 형체를 보죠. 둘째는 색깔을 봅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개를 볼 때 개의 형체와 개의 색깔을 봅니다. 이해하기 쉽죠.
그러므로 오혼의 색은 몸이고 육경의 색은 형색입니다. 이 구분을 놓치면 반야심경의 뜻이 흐려집니다. 이제 이 구절의 깊은 뜻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무한이비설신이 이 말은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 세속적으로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속적으로는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봅니다. 전실적으로는 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귀로 들으니까요.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야 심경이 말하는 자리는 제 속의 감각기관을 단순히 분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리는 공중에 자리입니다. 공 가운데 즉 공 그 자체입니다. 줄세간의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열반의 공이며 법칙 도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공중 즉 도 그 자체에는 논이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 귀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고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결안은 고정된 자성도 없고 몸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뜻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다. 또한 또 그 자체에는 책 즉 형체와 색깔이라는 자성도 없고 조리라는 자성도 없고 냄새라는 자성도 없고 맛이라는 자성도 없고 감촉이라는 자성도 없고 뜻의 대상인 법이라는 자성도 없다. 이것은 도의 관점에서 세속 세계를 분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도 그 자체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또 그 자체에는 제 속에서 말하는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구분이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 그 자체에는 경생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라는 대상의 구분도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세 속에서는 눈이 있고 보이는 대상이 있습니다. 체속에서는 귀가 있고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제 속에서는 몸이 있고 감촉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 그 자체를 말하는 자리에서는 그 모든 이름과 구분과 자성이 본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눈이라는 범주로 제한될 수 없고 귀라는 범주로 제한될 수 없고 책성향 및 촉법이라는 감각 대상의 범주로도 가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열번 돈은 다 같은 의미입니다. 열반 즉 도는 감각기관도 아니고 감각 대상도 아니고 분별하는 의식의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 그 자체에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뜻도 없습니다. 경색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법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한이비설신해. 무색 성향 미초법의 깊은 뜻입니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생각과 행위와 의식이 이 년화 합의므로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간의 공입니다. 파도를 보며 그 본질이 바다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간걸음 더 들어갑니다. 또 그 자체에는 파도라는 이름도 파도라는 자성도 파도의 높고 낮음이라는 구분도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다 그 자체를 말할 때 이 파도 저 파도 큰 파도 작은 파도라는 구분이 본질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또 그 자체를 말할 때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구분은 본질이 아닙니다. 경생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라는 구분도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감각 세계를 보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 그 자체가 감각 세계 이름과 구분 안에 갇히지 않음을 명확히 밝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한히 비설신의 무색 성향 미초법의 핵심입니다. 칠보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
다음 구절입니다.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 뜻은 이렇습니다. 눈의 인식 요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도 없다. 이 고절은 18개를 말합니다. 18개란 육근 육경 육식입니다. 육군이란 나의 감각기관을 말하고 육경이란 나의 감각기관으로 접하는 외부 대상들을 말하고 육식이란 그 대상들을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지 8개에서 개를 씌운 단어로 표현하면 인식 요소입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초 법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저희 의식 몸의 의식 뜻의 의식 이 여덟 가지가 바로 18개입니다. 이렇게 감각기관 감각 대상 감각 이식이 합쳐져 우리가 경험하는 인식 요소가 만들어지죠. 계속적으로는 눈의 인식 요소가 있습니다. 눈이 있고 논의돼하는 대상이 있고 보는 의식이 있죠. 계속적으로는 귀의 인식 요소가 있습니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고 듣는 의식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는 뜻의 인식 요소가 있죠. 뜻이 있고 뜻의 대상이 있고 분별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수많은 인식 요소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말합니다.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 눈의 인식 요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도 없다. 여기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눈으로 보는 경험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귀로 듣는 경험이 없다는 뜻도 아니죠. 생각하고 분별하는 의식이 세속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공중 즉 또 그 자체에는 눈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 자체 어떤 특정한 자성이 있다면 그것말이 전혀 안 되는 겁니다. 그건 더 이상 도가 아니게 됩니다. 도 그 자체에는 귀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코의 인식요소 혀의 인식요소 몸의 인식 요소 뜻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습니다. 또 그 자체에는 눈의 의식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주의의식이라는 고정된 자성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 전체가 고정된 자성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의 관점으로 제 소개 인식 요소를 분석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열반 즉 도 그 자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또 그 자체를 말할 때 눈의 인식 요소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습니다. 비의 인식 요소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의식의 인식 요소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은 제간적 인식 요소의 어느 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은 눈의 인식 요소 안에 들어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귀의 인식 요소 안에 들어있는 소리가 아니고 의식의 인식 요소 안에 떠오르는 생각도 아닙니다. 돈은 감감 인식 요소에 어떤 한 조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 그 자체에는 눈의 인식 요소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인식 요소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아주 깊은 통찰을 줍니다. 우리는 자기 경험을 절대화합니다. 내가 본 인식 요소 내가 들은 인식 요소 내가 겪은 인식 요소 내가 기억하는 인식 요소 내가 해석한 인식 요소 이것을 모두 묶어서 내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인생 이야기를 절대적인 나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반이야 심경은 그 인식 요소 전체를 비워버립니다. 세속적으로는 경험 인식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 그 자체에는 그 경험 인식 요소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지속적으로는 나의 과거가 있습니다. 하지만 도 그 자체에는 과거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는 나의 상처가 있죠. 하지만 도 그 자체에는 상처라는 고정된 자성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여러분의 본성은 본래 상처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한계 내지 무의식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를 자기 경험의 감옥에서 풀어줍니다. 경험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 인식 요소가 나의 본질은 아닙니다. 장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처의 인식 요소가 법즉 돈은 아닙니다. 기억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인식 요소가 나의 첫 모습은 아닙니다. 이걸 정말 안다면 마음에 무슨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의식은 분별합니다. 하지만 분별의 인식 요소가 궁극의 진리는 아닙니다. 또 그 자체에는 그 모든 인식 요소에 자성이 없습니다. 이것을 알 때 사람은 에고의 이야기에서 훈련하기 시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