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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84] [연재] 삼류무사-31 첨부파일 :
* * *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장추삼은 오누이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터덜터덜, 그들은 은신해 있는 나무쪽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장원을 벗어
나는 발걸음은 어딘지 허탈한 것이었다. 덩치 큰 노인이 뒤따라 사라지자
커다란 정원엔 모추와 그들을 내려보는 두 남녀만 남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어쩐지 좀 안되보여요.”)
(“무인에게 동정은 안 주느니만 못한 것, 이제 가자.”)
특별한 경공을 써야할 일도 없고 해서 둘은 나무를 내려와 그냥 걸었다. 아
무 말도 없이.
“내참! 완전히 속았다니까. 그 인간이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는 걸 누가 알
았겠어?”
북궁설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 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장추삼의 위상은 사기꾼같은 놈에서 능구렁이로 전락해서 벌레로까지 급락
했다.
그때까지도 북궁단야는 입을 꼭 다문 채로 말없이 걷기만 했다.
이상한 건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고있는 것인데 북궁설
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지가 무슨 베일에 쌓인 신비고수쯤 되는 줄 아나보지? 흥! 흥! 그런다고
멋있는 줄 안다면...”
“설아!”
한참 툴툴대던 북궁설은 오빠의 항거할 수 없는 나직한 부름에 말을 끊고
북궁단야를 쳐다보았다.
‘! ’
이글이글.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매사에 냉정하고 분석적이던 북궁단야로
선 좀체로 보이지 않던 투지의 불꽃이 온몸을 태우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
도로.
"이번 강호행... 정말 유익할 것 같구나. 비천혈선지 하는 책이 문제가 아
니다. 천산 한 귀퉁이에서 알량한 수련으로 목에 힘이나 주고 있던 내게 말
이야.”
“오빠...”
우우우웅.
희미하게 북궁단야의 애검 적설(赤雪)이 울었다.
그의 다짐에, 그의 각성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나는 이런 오빠가 너무 좋아요.’
여기 달조차 무색할 눈빛을 뿌리는 젊은이와 말없이 그 모습을 격려하는 아
름다운 누이가 있다.
* * *
“내게 말 걸지 마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노부는 자네가 너무 반가운데... 자네는 안 그런
가?”
노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세상에 양상군자 노부도 다 있는가?
“에잇!”
구렁이같은 노인네랑 말을 섞어봤자 득볼 게 하나도 없을 터, 장추삼은 입
을 봉하기로 했다.
옆눈으로 지청완을 쑥 보고 장추삼은 나직한 탄식을 했다.
‘에구, 허우대가 아깝다!’
지청완을 보라.
팔척에 가까운 거대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 그 나이 또래의 노인네라곤 믿
기 어려울 정도로 군살이 없는 몸과 멋들어진 수염!
세월이 여류하여 깊게 패인 주름살도 오히려 중후함을 더해주는 뚜렷한 부
리부리한 호목!
가히 일대종사의 풍모로 조금도 모자랄 것 없지 않은가?
‘남지, 남어...’
“오오옷, 배고프다. 자네도 한바탕 몸을 풀었으니까 시장할텐데 어디 가서
요기라도 할까?”
“노인이나 많이 드슈.”
한마디 쏘아붙이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지청완이 제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추삼이.”
노인의 표정을 보니 기가 죽거나 하진 않았다.
“아까 자네의 보법은 정말 멋졌네. 오늘 내가 개안을 했어.”
다시 울컥하는 장추삼 이었다. 도둑 노인네가 뭘 안다고...
“조일동정산무영, 월야독작관추뢰... 무언가 빠졌나?”
쿠쿵-.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방금 전 노인이 뱉은 말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도 아는 이가 없는 싯구이거늘.
“자네의 보법을 보면서 그냥 떠올랐었어. 어? 왜 그렇게 놀라나? 나도 소
시적엔 글줄 꽤나 읽었다구.”
지청완이 씨익 웃었다.
‘우연이겠지?“
그럴거다. 모추에게 산무영과 추뢰보라고 말을 한 걸 듣고 도둑노인이 제멋
대로 붙인 걸 거다.
‘생각보다 예리한 경향이 있는데? 그냥 무시하기엔 역시 껄끄러운 노인이
야.’
“조일동정산무영... 월야독작관추뢰...”
어디에 정신을 팔았는지 지청완이 계속 같은 싯구를 읊어댔다.
자신이 짓고 스스로 감탄하나보다, 장추삼은 무시했으나 그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청완의 눈엔 어떤 감정이 뚜렷이 어려 있었으니까.
“조일동정산무영... 월야독작관추뢰...”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싯구 들은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닿을 수 없
는 아련한 곳을 응시하는 사슴의 슬픈 눈망울처럼 고즈넉이 대기를 적셨다.
파천이서.
아침 출근길은 싫다. 간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잤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한시진도 자지 못하고 일어난 장추삼이 걸음을 옮기는 건 오로지 보기 싫은
집법당주 철무웅에게 눈도장을 찍자마자 어디든 쳐 박혀서 잘 수 있다는
십삼조원의 긍지(?) 때문이었다.
‘아, 뒷골이야!’
숙취의 기본이면서 모든 남성의 적!
어젯밤, 끝내는 지청완과 야간영업을 하는 반점에 들어갔었다.
맥풀린 음성으로 미친 늙은이마냥 같은 말만 중얼대는 그를 그냥 버려 두긴
그렇고 해서, 옷 한 벌 빚진 것도 있고 해서 구운 오리에 박주라도 한 잔
사려고 했었는데...
딱 한병으로 시작된 술자리는 병수가 늘고 시간이 갈수록 마냥마냥 이어졌
고 깨보니 집이었다.
‘아, 속 쓰려.’
숙취의 기본이면서 만인의 적!
본시 술을 즐기지만 폭주는 안하는걸 원칙으로 삼는 그였거늘 어제는 술에
미쳐 환장을 한 주귀처럼 잔을 비워댔다.
왜 그랬는지 정확한 연유도 모르겠다.
노인네가 좀 추켜 세워줬고,
“강호 서열 오십위권의 고수를 발만으로 침묵시키다니. 자네는 엄청난 일
을 한거야. 대단해!”
여태껏 원망만 했던 사부에게 조금이나마 죄스러움을 느꼈고,
“자네의 사부는 분명 은거고인 이었을거야. 암, 그렇고말고! 표출한 신법
하나만 봐도 엄청난 분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구.”
스스로에게 좀 대견했었다.
“친구를 위해서 대가없는 싸움을? 오오, 아직도 이런 젊은이가 남아있다니
. 훌륭해!”
그 다음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노인네의 이빨에 이리저리 놀아
난 건 틀림없는데 과히 싫은 기분은 아니였다.
저녁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바쁜 청빈로였다.
며칠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거머리같던 사령전의 놈들이 얼씬거리지 않게
되었음을.
일장 정도 앞에서 왠 유생이 이쪽을 보며 히죽 웃고있었다.
“어? 우형 아니오. 이런 아침에 왠일로?”
언제나 단아한 우건이지만 오늘은 더욱 깨끗하고 고아했다.
“출근하나 봐요?”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우건은 그림 그 자체였다. 남자라곤 도저히 믿기 어
려운 뽀얀 살결과 크고 맑은 눈망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선계의 정취를 안
겨주었다.
“언제 봐도 눈이 부십니다. 하하하!”
장추삼의 칭찬에 우건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이자가 설마...’
“간밤에 술을 먹었더니 속이 쓰리군. 어떻소? 아침을 안 했다면 탕이나 한
그릇 하지 않으려오?”
“아, 아니 됐소이다.”
손까지 내저으며 사양하는 이에게 음식을 권할만한 이유가 없다.
“그래요? 그럼 또 봅시다.”
멀뚱이 서있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불쑥 내밀어진 손 하나.
“뭐요, 이건?”
우건이 씨익 웃었다. 근데 제 딴엔 이물없이 웃는다고 웃는 것 같은데 장추
삼에겐 아무리 봐도 ‘배시시’ 다.
‘에쿠, 이러면 안 되는데.’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다시 한번 장추삼이 물었다.
“뭐냐니까?”
“악수도 모르오?”
모를 리 있겠는가. 문제는 이른 아침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왜 우건이 악수
를 청해오느냐, 이거다.
의혹 어린 눈초리로 우건을 훑어보자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고개를 절래절
래 흔들며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에휴, 내 눈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지. 어디서 저런 머저리를....”
“뭐요?”
“아니요! 아니요! 됐소!”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고 우건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났다.
목을 한 번 좌우로 소리나게 꺾고 장추삼도 가던 길을 가는데 우건이 불러
세웠다.
“장형!”
‘또 뭐야?’
“어쨌든 고맙게 됐소.”
‘뭐?’
총총히 사라지는 우건을 말없이 지켜보던 장추삼이 다시한번 목을 좌우로
꺾었다. 물론 소리나게.
* * *
왁자지껄-.
집법당주 철무웅에게 눈인사를 찍자마자 예정대로 어딘가에서 짱박혀 늘어
지게 자고 기울어가는 태양에 놀라 서둘러 대기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무슨 일이 터졌는지 십삼조 대기전이 부산했다.
‘실주(失珠)...? 출동이구나!’
꽈당!
“장소는? 탈취된 물건의 가액(價額)은 얼마요?”
기운차게 문을 열어젖히고 속사포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처음 맛보는 긴장
감. 그런데....
멍-.
‘엥?’
그곳엔 어떠한 긴장감도 여하의 급박함도 없었다.
침상 두 개의 모여있던 여덟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장추삼을 바라보다가 제
각기 흩어졌다.
“쳇!”
“뭐야?”
“잠이 아직 덜깼나?”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여덟쌍?
눈을 한 번 부비고 천천히 사람 수를 세었다.
강시, 바른생활, 얼음, 노처녀, 털보, 도인, 싸가지...
절대 미남인 자신은 여기에 있고, 좌중의 한가운데서 주절거리고 있는 덩치
큰 노인, 덩치 큰 노인?
“엑!”
어제 술을 사주는 게 아니었다. 진드기 같은 노인네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
만 근무처까지 쫓아와서 넉살을 떨고 있다니.
더 기가막힌 건 좌중의 얼간이들이다.
고담과 단사민은 바보니까 그렇다 치고, 하운과 당소소와 사마검군은 예의
범절상 어거지로 그러고 있다손 치더라도 십삼조의 이대 방관자라는 북궁단
야와 적괴까지 노인의 말에 빠져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으... 으....’
실로 가공할 이빨이요, 통천할 혀라 하겠다.
“호오, 그래서요?”
언제나 얘기꾼을 자처하던 고담이 오랜만에 청중의 입장에서 뒷말을 제촉하
는데 오십줄을 바라보는 나이답지 않은 천진난만함마저 느껴질 정도니 나머
지 일곱명의 상태는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래, 절명궁 여섯 대를 어쨌는데요?”
방방 뜨는 단사민은 아예 할아버지를 만난 손자다.
“허험. 모두들 잘 알겠지만 일명 절명궁이라 불리는 귀매궁에 재인 혈시를
동시에 석대 이상 감당할 인물이 강호 상에 몇이나 있겠나. 그런데 여섯
대가 날아왔네. 여섯 대!”
‘어딘가 에서 본 것 같은 광경인데....’
지청완은 눈으로 좌중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명을 요하는 부분에서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단사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얘기의 전개가 급박해지면 두 눈에서 화광을 뿌리면서 불특정의 누군가를
응시한다.
“오오....”
지적 받은 학동 마냥 적괴의 입에서 감탄사가 희미하게 샜다.
‘강시가 미쳤구나! 오오 좋아하네.’
“힘만으로, 공력 가지고는 상대가 안되는 상황. 그렇다고 피하자니 기회를
잃었다고 누구나가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 신비인의 발이 기묘하게 교차
되며 하나밖에 없는 육신이 무려 여섯 개로 불어나는 것 아니겠어?”
‘ ! ’
그렇다. 뻔뻔스런 노인네가 입방아 찧고 있는 건 어제 장추삼이 싸우던 광
경이었다.
그 뒤야 뻔했다. 마환장이 직접 손을 쓰고 무한삼면이 신비인의 절세보법에
파훼 당하고... 십단금이란 이름이 나왔을 때 좌중은 경악했으나 장추삼은
하품을 했다.
아무튼 노인의 이빨은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밖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
을 정도로 기막힌 수준인 게 싸운 당사자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게
상황을 풀어냈다.
말을 마치자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정말 엇저녁에 일어난 사건입니까? 당최 믿기지 않는데.”
“그 신비고수는 누구랍니까?”
“지노선배께선 직접 목격하셨으니까 말 한마디라도 나누었겠지요?”
지청완이 온화하게 웃었다.
“허허허... 낸들 아나. 신비고수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
다네. 정말 신비로왔지.”
웃기지마요, 어제 나랑 밤새도록 펐잖아요, 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나서기엔
너무 늦었기에 콧방귀 밖에 날릴 게 없었다.
“흥! 흥!”
문득 조용히 고소 짓는 북궁단야가 보였다. 그 역시 우스운 일이 있나본데
본래의 성정이 그러하여 말없는 미소로 대신하는 듯 했다.
“아이구, 한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다 뻐근하네, 그려.
어? 이게 누군가? 추삼이가 여긴 웬일인가?”
‘어, 이게 누군가, 추삼이가 여긴 웬일인가...? 하! 미치겠네.’
적반하장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려고 생겨났나 보다.
“지노선배님과 장형이 아는 사이였어요? 이거 우연이네! 장형도 실회조 소
속입니다.”
“그것 잘됐군.”
하운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지청완이 밖으로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장추삼에게 모아졌다.
“장형, 장형, 지노선배랑 아는 사이였어요?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좌중을 대표하려는 듯 단사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지청완에 대해서라면 말조차 꺼내기 싫었지만 모두의 시선에는 무서운 압박
감이 담겨 있었다.
‘돌겠네....’
특히나 두눈을 번쩍이는 이대 방관자와 당소소를 무시할 담량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냥 오가다 만났었어.”
“에이-.”
“정말이야. 한 며칠 같이 다닌 것 빼면 나도 잘 모른다구.”
한 며칠 같이 다닌 것... 장추삼의 말실수였다. 비단 남자끼리 서로를 아는
데 술 한잔이면 족하고 주먹 한 번을 나눠보면 아는게 강호의 생리다. 그러
니 며칠간이나 붙어 다녔다면? 그것도 오가다 만난 사이끼리 뭐 볼 게 있다
고 동행을 했다는 건가.
“어? 어? 왜들 이래?”
스산한 살기, 위로는 고담에서부터 가장 어린 단사민까지 모두의 눈에 스물
스물 안개같은 기운이 어렸다.
“알았어, 알았다구. 젠장!”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입을 열려니까 달리 할 말이 없다.
“노인이야.”
도둑 노인이라고 말하긴 미안하지 않은가. 그래서 있는 것 없는 것 생각나
는 대로 주어 삼켰다.
“끈질기기는 거머리보다 더하고 성격은 얍삽해. 삼류사파 노인인줄 알았는
데 이제 보니 세력도 없는 것 같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걸 보면 방
랑벽이 있는 것 같아. 전직이 뭔지 지극히 의심스러운데 한가지 참고로 삼
을 건 달리기가 무지 빠르다는거야.”
후반부에선 아예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언부언 떠드는 장추삼을 보며 북궁단
야가 먼저 나갔고 그 뒤로 적괴, 당소소, 고담...
“이쯤 하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사람은 노인
이라는 거... 어? 뭐야?”
대기전엔 한사람만 남아 있었다.
[10503] [연재] 삼류무사-32 첨부파일 :
기분이 흐릿한 날엔 친구밖에 없다.
도둑 노인은 어찌나 수완이 좋은지 십삼조의 아홉번째 조원이 되었다.
이력서를 쓰지않은 속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표국주 이효는 무슨 생각으
로 허우대와 달리기 빼고 쓸 곳이라곤 찾아볼 게 없는 노인을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전생에 거대한 악연이 있었던 게야.
어쩜 그렇게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끼어들려고 하는지, 그렇다고 자신이
돈이 많거나 큰권력이 있어서 같이 다니다 줏어먹을 걸 바라는건 아닐텐데.
남색을 생각 안해본 것도 아니지만 며칠동안 면밀히 지켜본 결과 그건 지나
친 억측임이 판명났다.
지청완이 새로 오고 사흘이 흘렀지만 실회조는 여전히 할 일이 없었고 따분
했다.
그러던 차에 배금성의 방문은 무척 반가운 것이었다.
"무슨 바람이야? 요즘 농기구가 안 팔리는 거냐? "
"나 없다고 우리 대장간이 끄떡이나 하냐. 오랜만에 땡땡이 한 번 쳤다. "
"땡땡이라... 나처럼 매일이 본의 아닌 땡땡이가 되면 어느새 감각이 무뎌
져서 땡땡이가 본업같고, 그것 하러 출근하는 것 같다. "
"팔자 늘어진 소리마라. 너, 약올리는 거지?"
"오? 이제 알았어? 여전히 느리군. "
둘이 떠나가라 웃으며 봉황루 주렴을 걷고 들어갔다.
"이게 누구야? 추삼이랑 금성이 아냐?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는거야? 어서
앉아, 앉으라고."
노칠의 안색은 변해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칠년전 장추삼이
길을 떠나기 전 그 모습 그대로라고 할까?
웅성웅성.
달라진건 노칠 뿐이 아니었다. 양손 가득 접시를 나르는 점소이들의
얼굴도, 먹고 마시며 토론하는 손님들의 태도에서도 얼마 전과는 다른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좋구나."
밑도 끝도 없이 배금성이 한마디 던졌다.
"그래."
장추삼이 화답했다.
우육교자와 안주를 곁들인 술상이 차려졌다.
"들어. "
술 한잔을 따르며 배금성이 말했다.
"배 좀 채우고."
교자에 젓가락을 올믹며 장추삼이 반대 손으로 병을 뺏아 들었다.
우육교자는 일인분이 세 개일 정도로 컸지만 장추삼은 일곱 개를 먹어치웠
고 그 사이 배금성이 죽엽청 한 병 반을 홀로 비웠다.
"여전하구나. 니 주량은."
"술까지 없었다면 이 험한 세상에 무슨 낙이 있겠냐."
배금성은 술이 쎘다. 세 명의 친구들이 연합을 해서 덤빈다고 해도 그 하나
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대작 가능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들 중 장추삼이지만 그건 어디
까지나 입안으로 털어넣는 양의 조절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반잔과 한잔은 다를지언정 둘 사이엔 묵약처럼 비워내고 채워지는 술잔만이
존재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인지, 누가 먼저 안주에 젓가락을 옮길 것인지...
'뭔 일이 있었나보군.'
노칠 영감은 이런 모습이 낯선게 아니었다.
말이 좋아 네 명이지 실질적인 주도권은 장추삼과 배금성이 나눠지고 있었
고 - 싸움 실력이 가장 떨어진다는 배금성의 무게감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 그 중 우두머리격인 장추삼이 집을 나서기 전엔 이런 술자리를 자주 보
아왔던 터였다.
따르고 비우고, 따르고 비우고... 식어만 가는 안주.
장추삼은 느낄 수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자신과의 대화를 피하
는 친구의 몸짓과 기운을. 아니면, 아니라면...
자신이 물어봐 주길 바라는 것을.
도대체 뭘 말인가?
친구 사이에 자존심은 하등 필요가 없지만 억지 또한 싫다.
"사령전대... 정말 네 놈이 부신거 맞아? "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말 한마디 꺼내기 어렵네. 그래, 그걸 묻자고 이렇게 폼잡은 거냐?"
"대답해."
농담을 잘라버리는 배금성이 서운했지만 어쩌겠는가, 친구인 것을.
"홍예갑은 기대를 저버린 일이 없지."
"그래, 정말 너였단 말이지... 너였어."
천장을 바라보며 몇 마디 웅얼거리고 배금성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장추삼은 모른다. 지금 이순간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 지를.
도망치고 싶은 순간 가출이라는 방법을 택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올 수 있는 친구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다.
"전부터 뜸들이는 습관은 알지만 오늘은 너무 긴 것 같다. 무슨 얘기를 하
려는거야?"
대꾸없이 술잔을 비우던 배금성이 술병에 남은 술이 없자 큰소리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이럴 때는 잠자코 앉아있는 것이 상책이다. 적어도 친구라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려고 불렀을테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할테니까.
벌컥벌컥.
안주 한 점 집어먹지 않고 죽엽청 세 병을 혼자 비운 배금성의 눈가는 불그
스레 취기가 올랐다.
"지루했지? 미안하다."
그 양을 들이켰거늘 발음 하나 삐지지 않는 건 용한 일이었다.
"됐네. 이제라도 보따리를 풀게나."
"후, 그래. 그럼 말하지. 나흘전이 맞냐? 네가 사령전을 뒤엎은 날이 말이
다."
비밀스러운 화제라 밀실같은 곳에서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주위의 취객들은
자기들 담론에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그래."
"어느정도 무공을 익혔다고는 생각했지만 네가 마환장 모추를 격파한건 솔
직히 의외였다."
"......"
"그때 말이야..."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배금성이 고개를 바로세워 장추삼을 똑바로 직시했
다. 그건 더 이상 친구의 눈빛이 아니였다.
"책 한권 보지 못했니? 이건 중요한 얘기다."
순간 기분이 언잖아졌으나 꾹 참고 장추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책같은건 본 적이 없어."
"잘 생각해 봐! 모추와 겨루었을 때 품에 뭔가 느껴지거나 하는 것 없었느
냐 말이야. 아니면..."
"생각이고 뭐고, 책은커녕 종이 한 장 구경 못했다. 내가 뭐하러 그딴걸 거
짓말 하겠어."
"그렇게 쉽게 얘기하지 말고 찬찬히 좀 생각해 보라구!"
장추삼은 모른다.
지금 이순간 그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한 지를.
정말 해서 안될 생각이지만 생각같아서는 눈앞의 친구를 거꾸로 매달아 매
질이라도 해서 그 날의 상황 일체를 듣고 싶다는 걸 말이다.
"친구 살리는 셈치고 다시한번 잘 생각해봐. 아! 형태가 양피지일 지도 몰
라."
'후우.'
판관의 눈빛에서 구걸을 기다리는 새끼거지의 처량함으로 바뀐 친구의 하소
연이 장추삼의 말문을 막았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나흘전 그가 본거라곤 서른 명의 바보와 마환장이라는
고수, 그리고... 도둑 노인!
꽝!
그걸 왜 생각 못했을까! 머리 속에 벼락같은 울림이 왔다.
"혹시 그 책 말이야 돈 되는거냐?"
" ? "
"니가 찾는 것 말이다. 팔면 한 몫 쥘 수 있는 희귀고서 같은거냐구?"
배금성의 눈이 반짝 빛났다.
"뭐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난감한 일이다. 비록 거추장스럽긴 해도, 악연도 인연이라고 했는데 그날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도둑 노인은 청빈로에서의 삶이 끝장남은
물론 잘못하다간 큰 봉변마저 치루게 생겼으니.
"에에휴-. 그게, 음..."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장추삼을 바라보는 배금성의 표정은 온통 기대와 설
렘으로 가득차 있었다. 혀를 놀리지 않고도 얼굴근육의 움직임만으로 어서
말해 하고 재촉하는것 같아서 그로서는 여간 입을 열기 어려운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날... 나흘전 말이야... 에, 또..."
"그래, 나흘전!"
배에 힘을 꽉 주고 장추삼이 말을 막 꺼내려 할 때였다.
"오오옷! 추삼이! 예서 뭘하고 있는가? 술마시는건가?"
'읔, 이 목소리는!'
장추삼과 배금성이 고개를 돌려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지청완이 있었다.
어떻게 꼬셨는지 모르지만 온화한 미소의 하운과 싸늘한 댕기를 풍기며 허
공을 쏘아보는 북궁단야까지 끌고왔는데 점소이들마저 접근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면 북궁단야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서
있어도 그 자체고 공포인 것 같았다.
"아는 분들이냐?"
맥풀린 음성으로 배금성이 물었다.
"직장 동료."
장추삼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들이라고 폼잡고 싶어서 서 있는건 아니었다.
저녁시간이라 봉황루의 탁자는 빈 곳이 한군데도 없는 상태였기에 우
두커니 서 있는 거였다.
"나갈까요?"
"무슨 말이야? 여기 음식맛이 그렇게 괜찮다면서... 난 싫으이."
하운과 지청완의 대화를 그냥 듣고 있기엔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하고 많은 음식점 중에 어떻게 여길 들어와서 저래."
낮게 투덜거리는 장추삼과 배금성이 한숨섞인 웃음을 보내주었다.
"오늘 여러보로 내가 실례가 많았다. 어째 얘길 이어갈 분위기가 아닌 듯
싶어."
실회조원들은 계속 시끄러웠다.
"언제까지 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누가 언제까지 서 있는다고 했나. 보아하니 구석탱이에 빈자리도 많구만."
그들을 바라보며 넌지시 한마디 던지는 도둑 노인이 얄미웠지만 친구 앞이
라 발작은 자제했다.
아닌게아니라 그들이 앉은 탁자는 육인석이었고 봉황루에선 넓은 자리에 속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탁자마다 빈자리가 한두개 밖에 남지 않은 걸 보면
대부분의 자리들은 합석을 강요 당했음이 분명하다.
"이만 가볼게. 넌 교자밖에 별로 먹은 것이 없으니까 동료분들 하고 한 잔
더 해라."
"야, 금성. 그런게 어딨어?"
의자에서 일어서는 배금성을 장추삼이 잡았다. 직장동료들도 물론 중요하지
만 오늘은 어디까지나 친구를 만나는 날이다."
"난 괜찮아. 이미 많이 마셨고..."
"우리 땜에 그러시나?"
이형환위? 분명히 계산대 앞에서 주절거리던 지청완이었는데 어느새 그들의
탁자로 와서 참견을 했다.
'굉장히 뻔뻔스런 노인네로군.'
그래서 친구는 유유상종일까? 배금성이 느낀 첫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뭘 일어나고 그러나. 그럼 우리가 괜히 미안해지지."
'아까부터 미안했다구. 이 노인네야!'
배금성만 없었다면, 사람많은 음식점만 아니었다면 한마디 쏘아붙였을 것이
다.
"아, 예! 저는 많이 먹어서..."
"그래도 그런 법이 아니지. 예로부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면 욕 먹는
다고 그랬다오. 자, 어서 앉게."
이 노인만 보면 왜 그리 사자성어가 툭툭 튀어나올까?
'주객전도도 유분수지...'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노인에 대한 분노로 고개를 푹 숙이는 장추삼의 귀로
기운찬 지청완의 음성이 들렸다.
"자리 났다!"
[10509] [연재] 삼류무사-33 첨부파일 :
"죽마고우인 대장장이라고 해요."
어떤 모양새로든 합석이 이루어졌고 장추삼은 친구를 소개 안할 수 없었다.
"배금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포권으로 그가 인사하자 화답이 왔다.
"오! 본래 배소협이었구료. 노부는 지청완이라 하오. 그냥 떠돌이지."
"흥!"
장추삼이 고개를 모로 꼬며 무시했다.
하운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고 북궁단야는... 그냥 북궁단야요,
했다.
잘 알고 있겠지만 다섯명 이상이 술자리를 가지면 반드시 패가 갈라진다.
아무리 대화를 공유하려고 해도 최종 수용인원은 넷이 없지 않는 건 술좌석
에서의 불문율과 도 같은 법칙이다.
장추삼들은 세 패로 나뉘어 있었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는 배금성과 북궁단야,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는 지
청완의 옆에서 부지런히 잔을 채워주는 하운, 그리고 장추삼.
'아아... 심심해.'
다시 말하지만 장추삼은 이런 식의 자리를 매우 싫어한다.
억지로 만들어 낸 듯한 자리, 전혀 융화되지 않고 뱅뱅 걷도는 군상들.
빠지려 해도 자신이 유일한 공통 분모격이다.
이런 떨떠름한 좌석을 야기한 인물, 그는 후안무치하게도 다섯 중 가장 신
나서 떠들고 마셔 대는 것 아닌가.
'이대로는 못 참지.'
"아!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배금성이 깜짝 놀랐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눈치 빠른 장추삼이 이런 자리에
서 조금 전 나누었던 얘기를 할 리 없을텐데.
"그 왜 있잖아, 신비고수가 나타나서 청류장에 꿈틀거리던 버러지들을 날려
버린 것 말이야."
'신비고수?'
도무지 배금성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장추삼이 오른 눈을 찡긋거리기에 뭔가 수작이 있구나 하고 참고는 있지만
갸우뚱 숙여지는 고개를 진정시키기 어려웠다.
"여기 놀라운 분이 계시다네. 자! 직·접 목격한 지노선배님께 직·접 듣는
다면 더욱 재미 있을거야."
'켁!'
먹던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지 않았을 때 우리는 사레 걸렸다고 한다.
기분좋게 술 한잔을 들이키던 지청완은 충격적인 역공에 그만 살에 걸렸다.
'켈룩 켈룩! 요놈이... 이런 식으로 반격을?'
삼일 전에 떠들어 놓은 게 있기 때문에 부인하기는 어려운 말이다.
"그게 사실이야? 이 노선배께서 나흘전 그곳에서 모든 걸 지켜 보셨다는거
야?"
"글세 그렇다니까. 백설이 불여일문이라고. 직·접 목격하신 분께 직·접
듣게. 이분은 그 신비고수의 출현 전부터 장원에 계셨다고 하니까..."
네 번에 걸친 직접의 위력은 실로 놀라웠다.
"초면에 실례합니다만 제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 감히 지노선배님
께 여쭙겠습니다."
"그, 그러시게."
어디에도 피할 구석은 없다.
"무슨 용무로 사령전에 가셨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비고수가 난입하기
전부터 계셨던게 맞는지요?"
"맞네만..."
"그럼 말씀입니다, 혹시, 책 한 권 못보셨나요?"
"책?"
하운의 얼굴에서 어이없어 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거창한 사과말과 함께
시작된 질문의 결론으로 겨우 책 한권의 행방이 전부라면 어딘가 싱거운
것이니까.
"책이라... 한 권이 아니라 많이 봤네. 어, 많았지."
'노인네가 금고라도 털려고 들어갔던 곳이 별채에 딸린 서재로 들어갔었구
나.'
배금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가 말하는 책은 귀한 거라서 그렇게 함부로 다룰 책이 아닙니다. 책이
많았다 함은 서재나 그런 곳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거기에 특별히 분류해
놓은 책들이 없었습니까?"
"글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중요한 일입니다."
지청완은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거렸다.
"생각해 내실거야!"
장추삼이 끼어들었다.
"도둑 고양이처럼 몰래 침입한 곳도 아닌데 그런 걸 기억 못하시겠어?"
지청완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 장추삼은 너무 통쾌해서 축배라도 한 잔 하고
싶어졌다.
"자, 자, 노선배의 청정한 기억의 반추를 방해하지 말고 우리끼리 한 잔 하
자고!"
건배를 청하며 기분좋게 한잔 꺾는 장추삼이 지청완과 눈길이 마주치자 다
시한번 웃었다.
씨익.
'도둑 고양이? 청정한 기억의 반추? 이노옴...'
생각 못해내면 있는대로 다 까발리겠다는 협박 아닌가?
정면으론 기대에 찬 배금성, 옆에 보니 오른손을 의자에 척 하니 올리고 빙
글빙글 웃고 있는 장추삼.
"이보게, 그건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최소한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제목
은 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배금성이 앞에 놓인 술을 쭉 들이켰다.
"하, 저도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습니다. 제목은..."
가느다란 전음성이 배금성이 귀로 파고들었다.
( 그렇게 무리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확증은 없었던 일이었으니까요. )
"제목은... 사정상 말씀드리기 어렵겠군요. 죄송합니다."
"어렵군."
입을 쭉 내민 지청완이 주위를 쭉 돌아봤다.
"제목은 말 못해. 생긴건 몰라... 이런걸 보고 경사가서 장서방 찾기라고
하는 거 아닌가?"
지청완은 완전 부활했다.
"도움이 못 돼서 어떡하지? 에, 그런 의미에서 내가 책에 관한 재미있는 얘
기 한토막 해줌세. 자네들 혹여 파천이서라고 들어보았나?"
실망한 배금성이 장추삼에게 한 잔 따라주고 북궁단야는 천천히 홍소육 한
점을 씹어먹는 중이었다. 하운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지청완의 옛날 얘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달리 비천이서라고도 부른다고 하더군."
툭-.
북궁단야가 들고있던 젓가락을 놓쳤다.
콸콸.
배금성은 계속 따랐다. 술이 장추삼의 손등을 타고 탁자를 적실 때까지.
하운의 눈도 순간적으로 반짝 빛났다.
"야, 야, 정신차려!"
장추삼이 친구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태평한 건 오로지 그였다.
아는지 모르는지 지청완은 술술 이야기를 풀어갔다.
파천이서.
세간에 비천무서와 비천혈서라는 다른이름으로 알려진 두 권의 책.
전에 고담이 한 번 얘기해서 장추삼은 잘 알고 있는 비천무서가 그나마 실
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편인데반해, 피로 쓰여있다는 것 밖에 정확한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비천혈서는 말 그대로 신비였다.
비천무서, 파 구대문파 지공이 수록되어 있다는 마흔 쪽의 무서. 애써 외면
하는 구파의 인물들로도 그런 책의 존재가 인구에 회자되는 것만으로 여간
부담되는 게 아니다.
자연히 비구파의 인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드는 책이고 말은 아니
라고 하지만 구파 역시 암암리에 소재를 캐고 있다는 풍문이 돈다고 했다.
비천무서와는 달리 얼마 전부터 갑자기 대두된 이 시대 최고의 비밀. 어떤
가문이나 문파의 갑작스런 흉사 뒤에는 꼭 한번은 언급되는 저주의 책이기
도 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 책의 수록내용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서 왜 그런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일까?
"거기엔 이런 일화가 따르지."
술병이 빈 것을 확인하고서 외눈으로 병 속을 들여다 보며 지청완이 말을
끊자 북궁단야가 신속히 두 병을 추가시켰다.
"오늘 내 뱃속의 주충들이 아주 날을 만났구나!"
점소이의 손에서 낚아 채듯 술병을 뺏아 들고 자작을 하고 지청완은 장추삼
에게 한마디 건넸다.
"이봐, 추삼이. 자네 유하초자라는 인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물론 들어본 적 없다.
'내가 무림사정에 문외한인걸 잘 알면서...'
"유한초자라면 천하에서 가장 한가해서 여기저기 안 끼어드는 데가 없고,
소문이란 소문은 전부 퍼드리고 다닌다는 목양생이란 인물 아닙니까? 그
사람, 삼십년 전부터 은거했다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어떤 노완고(老頑固)랑은 다르게 자네는 역시 예의도 바르고 강호에 대한
식견도 풍부하구먼. 맞아 그 유한초자를 말한거야."
하운의 말에 대꾸하면서도 눈으로는 연신 장추삼을 쫓고 있었다. 마치 아
무리 그래도 그것도 모르냐 라는 표정으로.
노완고…고집불통이라는 뜻이다.
'근데 이 노인네가...'
"그 유한초자가 말이야!"
기막힌 순간 포착으로 말머리를 돌린 지청완이 장추삼을 완전히 무시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삼십년 전에 은거했다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정말로 그를 잘 아는 인물들
은 하나같이 의문을 제시한다네. 왜? 라고. 유한초자가 달래 유한초자
이겠는가? 남의 일에 참견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듣고 옮기는 걸 세상사는
낙으로 삼던 인물이 어느 순간에 개과천선이라도 한듯 강호를 등진다는건
어쩐지 부자연스런 일이라는 거지."
"그럼..."
배금성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자네가 생각하는게 맞을거야. 자의에 의한 금분세수라기보다 타의에 의해
더이상 활동을 금제당했다는 거지. 왜 그런 추측이 나왔는고 하니..."
좌중은 잠시 침묵했다. 무언가 잡힐듯도 싶은데...
"나두 한마디 해도 되겠소?"
장추삼이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어쨌든 따돌림 당한건 분명한데 성질낸다
고 먹힐 인물들이 아니니 유화적으로 나갈 수 밖에.
"그, 뭐냐... 목양생이란 아저씨가 그렇게 남의 얘기, 소문을 좋아한다니까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여기서 실수하면 그대로 나락이다.
"빨리 말해, 뭘 그리 뜸들여?"
배금성이 재촉했다. 아까 장추삼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면
서.
"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비천혈서에 대해서 뭐라고 나불거리다 없어진거
아냐?"
"반만 맞췄다."
뭐가 좋은지 지청완은 킬킬거렸다.
"하기야 그 정도가 어디야…반씩이나 맞추고!"
울컥.
이젠 정말 못참는다.
"나머지 반을 말해 줌세. 삼십년전, 즉 반갑자 전이란 시기는 유한초자의
실종시기이기도 하지만 비천혈서의 등장시기이기도 하네."
' ! '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그리고 이건 검증되지 않은 소문에 불
과한데... 유한초자가 마지막으로 낸 소문이 있다네."
"유한초자의 마지막소문."
북궁단야가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꼴깍.
누가 삼켰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끄러운 객잔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 정도로 장추삼들의 탁자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보았다면 잊거라, 들었다면 지우거라.
비천은 파천이고, 혈서는 유혈이니
안으로도 쫓기고, 밖으로도 쫓기어
중원천하 십팔만리, 몸둘 곳이 없어라.
[10529] [연재] 삼류무사-34 첨부파일 :
* * *
쿵!
비염극은 재빨리 떨어지는 찻잔을 잡았다.
제아무리 뜨거운 찻물이 손바닥에 흐른다 해도 철포삼으로 단련된 그의 신
체에 여하한 충격을 주지도 못하거니와 만약 그것이 떨어져 깨지기라도
한다면 뒤따를 불호령이 끔찍했다.
사내는 서탁에 내리친 주먹을 고정시킨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왠만한 사안이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으로 넘기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끓
어오르는 노기를 참기 어렵다는 듯 평정심을 잃고 있었고 비염극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후우-.'
무엇이 좋은지 재잘대는 산새의 울음소리완 대조적으로 비염극의 입에서 낮
은 한숨이 흘렀다. 사실 이곳의 정취는 퍽이나 아름다운 것이라 선계의
신선이라도 볼라치면 세를 달라고 덤빌 정도로 수려한 곳이다.
그렇지만 경관이 아무리 좋으면 무엇하겠는가.
즐길 사람이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연 그 이상도 아닌 것이 된다.
사내나 비염극이나 아름다움에의 예찬을 모를 정도로 무식하거나 메마른
사람들은 아니다.
보통의 그들이었다면 산록을 벗삼아 채소에 백주라도 한 잔 하며 당시를
읊조릴 지도 모른다.
어쩌면 열아홉, 열아홉 삼백육십일의 잡정에서 암석군(暗石群)과
명석군(明石群)을 들고 제갈량과 중달의 신산귀계라도 뽐내고 있을지도
모르고...
"모른다?"
사내가 반문했다.
그러나 대상없는 혼잣말처럼 고저없이 목구멍 속 깊숙이에서 끄집어 내온
듯한 울림이기에 묘한 압박감이 담긴 말이었다.
비염극은 고개를 조아릴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서탁 위에 놓인 이번 일의 모든 내용이 쓰여 있었으니 더이상 불필요한 말
은 늘어놀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수림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때이른 매미 한마리가 잡혔다.
녀석은 제가 나올 시기를 잊은 듯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흙속을 뚫고 나와
홀로 울어대고 있었다.
사내의 손가락이 까닥거리자 무엇에 끌린 듯 소나무에 붙어있던 매미가 그
의 엄지와 검지 사이로 잡혀왔다.
"모른다?"
다시한번 사내가 반문했다.
이번에 말은 독백의 성격이 더욱 강해져 자조의 끼마저 담겨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사내의 무서운 점이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보고를 받는다 할지라도 순간적으로 충격은 받겠지만
금새 냉정함을 회복하고 그 다음 일의 생각에 골몰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발산되는 사내의 기운은 범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비염극인이상 어떻게든 버텨낼 것이고 사내는 다음 말을
할 것이다.
맴맴맴...
사내에게 잡힌 매미가 꽁지부분을 실룩이며 미약한 발버둥을 쳤다.
그런 매미를 아무런 감정없이 응시하는 사내가 어쩐지 불안해 보인건
당연했다.
조금의 힘만 더해져도 산산히 터져나갈 매미의 몸.
비염극은 알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 힘이 가해지면 몇 명의 문책은 감수해야만 한다.
물론 목숨으로 말이다.
매미를 놓아준다면...?
부우웅.
타의에 의해 자유를 속박당했던 매미는 그 힘이 소멸됨과 동시에 기운차게
허공을 향해 날았다.
'후우.'
비염극의 입에서 또 한숨이 나왔다.
이번 것은 안도라는 이름으로.
잠시 동안 엄지와 검지의 공허감을 맛보던 사내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차가 없구나."
어디선가 유령과도 같이 한 인물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무복 차림새인 인물은 새 찻잔에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작설차를 따르고 조용히 꺼져갔다.
비염극으로는 그의 신법을 도저히 잡아낼 수 없었다.
얼굴마저 검은 차양으로 가려 진면목을 본 적 없는 흑의 인물.
그래서 매번 나타날 때 먼젓번과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그런
자가 몇이나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사내는 다도를 아주 잘 아는 듯 했다.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고 한모금을 입에 머금은 후 꽤나 오랫동안 정성들
여 입안 전체에 맛을 퍼뜨리는 것이 예사 사람은 하지 않는 다도법 같았다.
포로롱,포롱...
어느 야산의 중턱쯤 되는 것 같은데 이런 곳에 정자를 지은 걸 보면 사내의
성정이 본시 풍류를 알고 즐기는 인물임에 틀림없었으나 팔각으로 이루어진
정자의 편액은 섬뜩한 글이 쓰여있었다.
보통 일다경이라고 하면 일각 정도의 시간을 말함이니 뜨거운 차 한잔을 마
실 때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겠으나 사내는 무려 한
식경에 걸쳐 차를 마셨다.
스르륵.
검은 사내는 소리없이 나타나 빈 찻잔에 행굼물을 따르고 사라졌다.
그때까지도 비염극은 우두커니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앉지."
처음으로 사내가 비염극에게 말을 걸었다.
조심스레 앉는 비염극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아까의 분노같은건 찾아보기
어려웠다.
"입이 마를텐데, 차 한잔 할텐가?"
"아니, 괜..."
흑의사내는 벌써 비염극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차를 따르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싫든 좋든 앞에 놓인 차를 마셔야 얘기가 될 것이다.
아마도 사내로서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 것이리라, 호의가 아니더라도
달라질건 없지만.
다행히 비염극은 작설차를 좋아했다. 사내의 기분이 좋은 날이면 둘이서
서너 잔은 기본으로 마셨으니까.
비염극이 차를 마시는 동안 사내는 팔짱을 낀 상태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일견 조는 듯 보이지만 이럴 때야말로 사내의 머리가 가장 민활하게 돌아가
고 있다는 걸 그를 아는 이들은 다 안다.
차를 다 마시자 흑의사내는 행굼물을 부어주었다.
[10536] [연재] 삼류무사-35 첨부파일 :
번쩍.
사내가 눈을 뜨자 두 개의 불덩어리가 허공에 떠 있는 듯 했다.
감히 안광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모로 틀며 비염극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소인의 혀가 또 호사를 누렸습니다."
"호사는, 차 한잔 가지고..."
사내가 맑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흐르는 것처럼 여유로와 사람으로 하여금
청량감을 가지게 해 주었다.
"자네가 내 옆에서 보필한 지 얼마나 됐지?"
"구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근 십년이라 봐도 되겠군. 십년이라..."
비염극은 정확히 구년하고 십일일을 사내와 지냈다. 삼천삼백일이란 긴 시간
속에 크고 작은 일이 많았지만 오늘만큼 긴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네와 나 사이에 꽤나 많은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네. 생각나지 않는가?
비발쌍부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던 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비발쌍부 원재혁. 쌍도끼만 손에 들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 하여
'이규재래'란 별칭까지 얻었던 절정고수.
이 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숙(宿)에 대한 비밀을 가지고 한밤에 야반도주를
감행했었다. 사내는 비염극에게 발견 즉시 주살령을 내렸지만 비발쌍부는
운정대의 고수 열 다섯을 도륙하며 추적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다행히 비염극은 그 일대 지리에 익숙했기에 배를 띄우려던 원재혁의 의도를
파악했고 강 어귀를 선점하여 그와 만나게 됐다.
그리고 싸움. 비염극 역시 고수라고 자처하고 있었지만 원재혁의 도끼는 그가
감당해 낼 수준의 것이 아니어서 오십초가 흐르자 비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백초가 지나면서 패색이 완연했었다. 그때 사내가 나타났다.
"대인께서 보존해 주신 한 목숨 질기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아니지, 그때 그 자를 잡아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될뻔
했었다네. 자넨 잘했었어."
오년 전 일이었다.
"그뿐인가? 칠년 전에 화산장문이 매화사수를 모조를 끌고와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때도 자네의 기지가 없었다면 큰 곤욕을 치를뻔 했었지. 그외
열거하기조차 어려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자네가 날 실망시킨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네."
비염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내는 이제 본론을 말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해. 이번에 자네에게 맡긴 일은 이전의 여러
것들보다 쉬우면 쉬웠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사내가 서탁에 펼쳐져 있던 죽간을 집어 들었다.
"이걸 자네가 썼다고? 실패하고, 모르고... 이런 걸?"
탁.
"아닐거야? 그렇지?"
사내가 빤히 비염극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눈빛이었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무엇이 담겨 있는 눈빛으로 비염극의 뇌리 속을 파고들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기회를..."
"아니지?"
그렇다! 사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비염극이 저지른 실패를.
나아가 자신이 실패라는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또르륵.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비염극의 이마에서 한 줄기 식은 땀이 흘러내려
볼을 가로질렀다.
쏴아아.
제법 강한 봄바람에 나뭇가지들이 상면하며 수많은 이파리들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이번엔 열심히..."
"아니지?"
번쩍.
사내의 눈에서 다시 화광이 솟구쳤다. 손에 쥐어진 죽간은 강한 힘에 못이겨
삐걱거리는 마찰음을 내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비염극은 사내가 원하는 답변을
찾아내었다.
"대인, 손에 든 죽간은 무엇입니까?"
빠지직.
사내의 안광은 일순간 타오르는 용암처럼 분출 되었다.
'잘못이었던가?'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비염극은 체념을 하고 목을 쑤욱 뺐다.
한동안 고양이 쥐잡을 듯 비염극을 노려보던 사내가 큭큭거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웃음의 범위는 점점 커져 목울대를 지나 사내는 전신으로
양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미친듯이 고개를 젖히고 웃던 사내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이것말인가? 쓰레기 같은거야."
치이익.
삼매진화로 죽간을 재로 만든 사내가 투덜거렸다.
"삼년동안이나 공을 들였던 과실주를 철모르는 원숭이 새끼가 망쳐
놓았다더구만. 단지를 깼는지 가져갔는지는 모른다고 써놨길래 기가 막혀서
재로 만들어 버렸지. 어이없지 않은가?"
"그렇군요."
비염극이 조심스레 맞장구쳤다.
"원숭이 따위가 대인의 삼년노공을 앗아간다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입죠. 문제는..."
그의 마음 속에 꼭 해야할 말이 꿈틀거렸다. 이것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전개시켜야 할 일의 진행방향과 인원 그리고 조사의 각도를 어떤 식으로
잡아나가야 할 지 설정하기 어렵다. 더불어 이 말을 한다면 사내의 기분이
안 좋아질 것도 알고는 있다.
"문제는?"
사내가 말을 받았다.
아랫입술을 윗 이빨로 지그시 한 번 누르고 긴 콧숨을 내쉰 비염극이 조아린
두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문제는...그 곳에 술 단지가...있기는 있었느냐는..."
"허!"
사내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바삐 수놓는 산새들을 쳐다보았다.
"이것보다 비각주, 그런 말을 하니까 자네가 나의 정보각주인지 내가 자네의
정보대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구먼."
절절이 맞는 소리요 통렬한 지적이라고 하겠다. 그로서 사내에게 요구할 건
필요한 자금이나 인원보충에 관한 문제나 일의 결제 따위이지 어떤 사건의
확인같은 건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비각주인 그의 소관이다.
"자네도 왠간히 무뎌진 게 아니야. 에잉, 쯧쯧..."
이상하다. 사내는 의외로 차분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두 가지 중 하나라는 얘기가 된다.
우선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일테고 두 번째의 경우라면...
단지는 그 곳에 없었다는 거다.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비염극을 내려보며 사내가 허공에 대고 한마디
했다.
"가져와."
스륵.
흑의 인물이 죽간 하나를 공손히 바치고 사라졌다.
사내는 돌돌 말린 죽간을 펴서 일별하고는 비염극에게 던져줬다.
"뭡니까?"
"그자의 최근 행적과 전서구로 보낸 서신을 정리한거야. 그걸 보고 알아서
판단해봐."
품속에 죽간을 집어넣고 비염극이 일어서자 사내는 서탁에 놓은 책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럼 이만..."
"원숭이는 어찌 할 건가?"
고개를 숙인채 지나가는 투로 사내가 물었다.
' ! '
"술단지가 있었건 없었건 남의 좋은 일을 망쳐놨으니 응분의 보상을 치뤄야
하는 게 당연하잖나."
"필요하다면 불러서 조사를 해야겠으나 그의 주위에 절대오존 중 일인인
치무환검존이 목격된 바, 일단 주의를..."
"절대? 자네 내 앞에서 절대라는 표현을 썼나?"
'실수다!'
사내가 고개를 들어 비염극을 올려봤다.
퍽!
그의 코와 입에서 실핏줄이 터지며 비염극은 무너지듯 제자리에 앉았다.
어기상인.
사내는 기로써 상대에게 타격을 줄만큼의 초고수였던 것이다.
집공맥에 어떤 변화도 없이 이러한 위력이 가능하다면 사내의 경지는 한단계
높은 의형수형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의형수형.
뜻이 곧 행동이라는 전설상의 경지이니 일천년 무림사에 이러한 고수가 몇이나
배출되었을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처분을 기다립니다."
오체투지 하고 머리를 정자에 찧는 비염극을 물끄러미 보던 사내가 귀찮다는
듯 손을 한 번 내젓자 비염극은 타의에 의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시한번 내 앞에서 그딴 말을 쓰지 말게. 절대오존? 허허..."
"명심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누구라도 잡아서 족치겠습니다."
"은밀하게, 은밀하게."
"존명!"
"일봐."
정자를 내려서며 비염극은 쿵덕쿵덕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변화무쌍한 사내의 성격에 견주어 비염극은 오늘
최소한 두 세번은 죽다 살아난거나 다름없었다.
비염극의 모습이 정자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사내가 다시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자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도대체 뭘 하는거야, 자네들은!"
"......"
"에이잇, 그런 인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서야..."
허공과의 기이한 문답을 하다 자증이 났는지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뜻밖에도 그의 키는 육척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비염극과 얘기할 때 거대하게
보였던 것은 사내가 발산하는 기 때문이었으리라.
특이한건 사내의 의복에 수놓은 무늬인데 양 어깨와 가슴 부위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구름이 새겨져 있었다.
"파천혈서...하기사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당금 무림의 최대
신비가 아니겠지."
그래도 사내는 그것을 입수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필코 입수하고 말 것이다.
그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말이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진행되던 일을 망쳐놓은 원숭이놈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
'장추삼이라고 했던가?'
촌티가 줄줄 흐르는 이름.
강호상에 꼭 이런 존재들이 있다. 제딴엔 별 일이 아니라고 한건데 그게
사실은 쳐다봐서도 안 될 엄청난 힘이였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찍소리도 못하고 눌려죽는 파리보다 못한 존재들.
이런 놈들의 특징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공통점이 있다.
사내는 시류에 휩싸여 불쌍하게 죽어갈 원숭이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장추삼이라...'
멸천정(滅天庭)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정자에서 사내는 붉은 저녁노을이 비껴올
때까지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달빛이 고왔다.
저녁을 먹고 한바탕 몸을 푼 하운이 문득 고개를 드니 어느새 총총히 박힌
별을 이끌고 꽉찬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다.
'너에게는 근심같은 건 하나도 없나 보구나.'
디룩디룩 살찐 달은 볼에 심퉁을 잔뜩 머금은 어린아이처럼 아무 생각도 없고
고민도 없어 보였다.
<"일체의 사물이 가지는 형상은 너의 마음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니,
더욱더 수양에 매진하여 사물과 나를 동화하도록 하여라.">
'어렵습니다. 사부님.'
평평한 돌에 걸터앉아 무심한 달을 바라보며 사부의 잠언에 쓴 고소를 짓는
하운은 아직도 머나먼 도의 길을 느꼈다.
도(道). 하운에겐 세 가지 도가 있었다. 검의 도, 도(道)의 도, 그리고...
'사매...'
달 속에서 조소령이 방긋 웃는 듯 했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머금던 그의
얼굴에 경련과도 같은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모를 동굴에서 나온 지 어언 이개월. 이제는 잊어야 한다.
비록 칠년동안의 세월이 아깝고 한탄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볼 만큼 든 나이도 아니고 그래서 안된다는 걸 심정적으로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머리에 댄 하운은 지그시 눈을 감고 달빛을 벗삼아
칠년 전의 어느 날로 되돌아갔다.
당가주 당완은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끝끝내 소매를 붙잡았지만 동정호를 볼
욕심에 하운은 겨우겨우 당문을 나서게 되었다.
일을 끝낸 홀가분함에 기세좋게 말을 몰아 한달음에 달려간 동정호는... 아아,
듣던대로 장관이었다. 망루에 올라 그 압도적인 넓이와 푸르름에 감탄만을
하고 있는데...그 노인이 다가왔다.
몇 마디 담론 끝에 섞은 논검일초(論劍一招).
아무도 믿지 못하리라. 사문에 계신 사부, 세 분의 장로, 전대 화산의
영령들은 물론 방금 손을 섞은 그 자신도 믿지 못했으니까.
'한번 더'라는 말에 노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서야 하운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흔 여덟 번을 덤볐고 마흔 여덟 번 모두 일초에 제압을 당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냔 거다.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그에게 괴노인은 결정타와도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화산의 무공으론 나를 어쩌지 못한다. 뭐... 암향부동화라도 핀다면 모를까."
'크윽!'
그렇단 말인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괴노인을 꺾기 위해선 부동화검을
피워야만 하는가?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피워낸단 말인가?
삼백년 이상 감추어져 있는 전설상의 무공을....
암향부동화(暗香不凍花),
정식명칭으로 설중암향부동매화검법(雪中暗香不凍梅花劍法).
소림에 불법무한의 최후 초식인 만불조종이 있고 무당에 태극혜검의 끝이라는
무극시생태극면이 있다면 화산에도 있다.
변속에 중이 숨어있는가 하면 쾌속에 환이 담겨있으니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움직인다 싶으면 어느새 제자리에서 오연히 하늘을
굽어본다는 천고제일의 검공!
그것이 암향부동화 검이다.
지금부터 삼백년경 당시 화산 제일장로였던 무진자의 손에서 딱 세 번 펼쳐진
것으로 역사에 사라졌건만 그 때의 화산은 검에 관한한 무당도 누르는 성세를
구가했다고 한다.
넋을 놓고 망연히 앉아있는 그를 일별하고 괴노인은 사라졌다.
괴노인은 꼬박 하루만에 다시 나타났다. 그때까지 정신나간 사람처럼 망루에
주저앉아있던 하운에게 따끈한 교자 한 봉지를 던져주고는 말없이 흐르는
동정호를 바라보다 불쑥 한마디 던졌다.
"부동화를 피워 볼테냐?"
이 때가 문제였다. 심신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올바른 정신상태가 아니었던
까닭에 하운은 멋대로 상대를 판단해 버렸다.
'아! 이 분은 우리 화산의 전전대 은거고인 쯤 되나보구나!'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은 매화검법과 우전검법을 제압하는 수준이 아니라 일초에
파훼를 했다.
하운은 스스로 절대고수라고 자부하지 않았기에 강자에게 꺾이는 건 어쩔도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파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괴노인이 절대오존 중
가장 강한 둘 중 하나라는 만승검존이라고 하더라도 단 일초에 매화검은
몰라도 우전검을 파훼하는 건 불가능하다.
왜? 우전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없다면 순간적으로 펼쳐지는 검로의 간극을
발견하는 건 무리였고 하운의 우전검은 무려 육성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상상은 나래를 펴고 뭐든 그 쪽 방향으로
대입시키게 된다.
'사부의 심부름도 그래. 늘 삼사제를 시켜왔는데 이번따라 나를 보내신 것도
이상하거니와 이대 제자 두 어 명 동행은 관례이거늘 굳이 혼자 가라고
하신 것도...'
딱 들어 맞는다!
벌떡 일어선 하운이 큰 절을 하며 기운차게 말했다.
"부족하나마 이끌어 주시면 성심으로 배우겠습니다.!"
그렇게 칠년 동굴생활이 시작되었었다.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