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부신 아침빛이 두텁고 낡은 커튼 사이로 뚫고 들어와 감긴 눈을 스다듬고
살금살금 기어가더니, 방문 옆에 올빼미처럼 동그랗게 눈 뜨고 있는 거울 속으로
들어가 방 구석구석 잠들어 있던 사물들을 깨웠다.
모든 걸 버리면 이렇게 편해지고, 잠도 잘 자는 걸......
체조 선수처럼 발딱 일어나 날듯이 침대 아래로 내려서 욕실로 들어 갔다.
샤워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어놓고 폭포아래에서 수도하는 사람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 온 몸과 마음을 다 맡기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마음속에 행여 찌꺼기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미련을 완벽하게 씻어내고 싶었다.
‘나 남자 생겼어. 너보다 훨 젊고, 훨씬 더 날 사랑해주는 남자야.
다시 내게 전화도 하지 마. 그리고 파리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와서 괴롭혀?’
캐나다로부터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형! 엄마 치매로 온 식구들이 잠을 못 자. 새벽에 일어나셔서 방문을 모두 열고
우릴 다 깨우며 아버지를 찾아. 애들이 죽으려고 해. 대학 입시 공부하는 딸은
짐 싸서 나가야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고. 어떻게 좀 해봐.’
지난 12월 향수를 쓰신 정지용님의 손자가 만든 재불한인예술인연합회 창립 전시에
사진을 걸고, 손님들에게 사진 설명을 하고 있을 때도 전화가 왔었다. 벌써 한 달 째다.
옆에 있던 안느가 전화기를 받아서 1층 로비로 올라갔다. 사진 설명을 마치고 인사를
나눈 뒤 재불한국문화원 1층으로 올라가보니 안느가 지하 전시장이 내려다보이는
의자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실 창립 전시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고 고민을 많이 했었다.
캐나다로 가서 어머니를 한국 요양원으로 모시고 가야하지 않을까?
파리로 모셔올 수는 없고, 캐나다 요양원은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하고......
전시는 왜 해? 사진작가 되려는 생각 이미 접었는데.
안느가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바보! 그런 전시는 꼭 해야지. 자긴 자격 없다고
하지만 그건 자기 마음에 감춰두고 당당하게 사진 걸어서 사람들과 만나 봐.
어머닌 동생이 알아서 할거야. 그러라고 매달 적지 않은 돈도 보내줬잖아.
결국 안느의 적극적인 권유로 한국에 있을 때 찍은 ‘서울 제기동 사진’으로
전시에 참가했다. 제기동 사진은 중학교 3학년 때 내게 헷세의 빨간 표지의 데미안을
선물했던 첫사랑 후배와 함께 숨듯이 다녔던 골목을 찾아다니며 찍어둔 사진이다.
내 사진은 프랑스 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다.
그들이 너무 많은 호기심으로 질문을 해서 통역을 불러와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관람 온 어떤 한국 분이 프랑스 인들이 내 사진에 너무 많은 관심을 보이자
조용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프랑스 인들이 한국이 이렇게 낙후되고 초라한 나라로 알겠어요.’
아!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제기동 골목은 개발이 안 된 오래전 모습 그대로라서.
그러나 예전 모습 그대로인게 얼마나 좋은지요.
이런 흔적이 하루 아침에 뚝딱되나요?
겉만 번지르 하다고 일등 국민인가요?
이런 모습을 그래도 내 조국 내 삶의 흔적임을 사랑하고 당당해졌음 좋겠어요.
서울 제기동
통화가 길어졌다. 안느 표정을 보니 조금 흥분해있다.
‘매달 그만큼 돈 보내주면 캐나다 요양원뿐만 아니라 병원에 입원시켜도 되잖아.
왜 자꾸 전활해서 시끄럽게 하는지 몰라. 의도가 뭐야?’ 화를 내며, 뜨겁게 달궈진
전화기를 내게 던지다시피 건네준다. 배터리 표시가 하얗게 변한 전화기가
삐익 삐익 울어댔다.
‘갈려면 가!’ 매일 밤 잠을 못 이루고 침대 스프링 소리를 내는 내게 안느가
돌아누우면서 짧고 날카롭게 말했다.
‘다신 오지 마. 파리에. 이걸로 당신과 난 끝이야. 우리 운명은 여기까지다.’
케나다행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던 게이트 앞에서 안느가 내게 한 마지막 말이다.
‘짐은 한국 가서 주소 알려주면 보내 줄게. 전화도 하지 말고, 메일로 보내’
나는 늘 매고 다니던 카메라 가방만 가지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캐나다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 도착해서 캐나다에서 알아봤던 요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2시간쯤 지나 요양원 봉고차가 왔다. 어머닌 요양원에 가시는 줄은
꿈에도 모르셨다.
서울 제기동
요양원 들어가기 전 점심을 먹던 식당에서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지셨다. 식당 안과,
주변을 다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함께 온 동생과 나 그리고 요양원 운전기사
셋이서 온 동네를 뒤졌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그러자 한 아주머니께서
어머니를 본 것같다고 하셨다.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와 하도 비슷해서 깜짝 놀라
산을 내려오다가 뒤따라갔었다고 하셨다. 그 아주머니 말을 듣고 급히 식당 뒤쪽
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내달렸다.
어머닌 뒷산 중턱 나무 아래 넋을 잃고 앉아계시다가,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산으로 달아나셨다. ‘이누마! 날 어디로 데려가는지 내 다 안다! 니가 날 죽일라 카제?
날 고려장시킬라 카제? 놔라 이누마!!’ 난 어머니를 안고 울었다. ‘엄마 절대 아냐.
내가 왜 엄마를 죽여. 왜 엄마를 아무데나 버려! 내가 자리 잡을 때까지만 양로원에
계세요. 프랑스 일 다 정리하고 한국 와서 엄마 좋은 집에서 모시고 살게요.’
요양원에서 기다리시면 꼭 금방 온다고 수십번 약속하고 약속을 했다. 그래도
어머닌 요양원 입구까지 내 손을 놓지 않으시고 따라 나오시면서 신신당부를 하셨다.
빨리 날 데려가 달라고. 니 아부지한테......
샤워를 마치고 나와 커튼을 열고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온몸을 노출시켰다.
지나간 7년 반 세월이 간밤 꿈처럼 생각되었다. 프랑스 영화를 한편 본 것 같았다.
벌거벗은 몸으로 볕을 쬐고 있는 이곳은 한국이고, 난 깊은 잠 황당한 꿈에서
방금 깨어난 것 같았다. 곧 문을 열고 아내가 들어와
‘옷도 안 입고 지금 뭐 하냐!’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마자 돌아와서 공항에서 안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서너번 울리다가 끊어지고 또 끊어지고, 그러다가 통화신호 마져 끊겼다.
일단 파리로 들어가자. 후와시 버스를 타고 파리로 들어와서,
삐에르 가르뗑의 장례식이 치러진 생또노레 성당 옆 골목에 있는 호텔을 잡았다.
그런 후 안느가 갈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호텔 주소와 전화번호 메모를 남겼다.
연락을 기다린지 이틀만에, 아침 늦게 센느 강으로 가서 바람을 쏘이다가 들어오니
호텔 카운터에 누런 봉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남자와 다정하게
포옹하고 찍은 사진을 담아서.
벌벌 떨면서 봉투를 구겨 쥐고 센느로 다시 나갔다.
센느 강가 돌벤치에서도 떨림이 멈춰지질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고,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린 것 같았다. 이 떨림은 목이 잘려서도 꿈틀거리는
죽은 뱀의 육체가 기억하고 있는 관성적인 몸부림 같은 것이다. 생명 현상이 아니다.
이내 바람에 날려 사라져버릴 낙엽처럼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캐나다로 떠날 때 공항에서 한 말이 화가나 막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절교 선언이었다.
센느 2010
이대로 이 꼴로 한국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처절한 실패자로, 실연자로,
버림받은 늙고 추한 모습으로 한국에 갈 수는 없다. 마지막 남은 초라한 자존심이
그렇게 울부짖으며 센느강 모든 갈매기 소리를 잠재웠다.
캐나다와 미국을 떠돌다가, 한국을 떠난지 10년만에 귀국을 했다.
귀국하자마자 뜨거운 여름 햇살을 등에 매달고, 엄마를 오래 도록 기억하기 위한
전시를 기획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웠던 조국의 빛, 조국의 생명. 어머니.
마지막 내 삶을 정리한다는 생각으로 치열하게 촬영했다.
엄마의 꽃밭은,
중학교 1학년 때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사기를 당해 부산 수정동 산 30만평을 판 돈
몽땅 빼앗겨버리고, 이불 보따리와 애들 옷 몇가지, 그리고 살림살이 몇 가지만 어깨에 매고
청량리 전농동 속칭 석탄골 판잣집 뒷 단칸방에서 살 때,
집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 하루에 5분 밖에 빛이 들지 않는 골목
엄마가 깡통에 심어놓은 꽃들을 기억해서 만든 사진이다.
그 당시 늦잠 버릇이 있던 나는 학교에 지각할까봐 늘 뛰어서 골목을 달려나갔는데,
그러다가 깡통에 심겨진 꽃을 발로 차서, 엄마가 늘 야단을 치셨다.
'아이고 이누마, 좀 천천히 댕기라. 꽃이 다 망가졌다 아이가!'
'이 좁은 골목에 꽃은 뭐하로 심었노?'
난 그 꽃들이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었던 것을
캐나다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엄마도 꽃을 좋아했던 어린 소녀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캐나다 동생 집에서 루마티즘으로 굽어진 손가락을 보시며,
'이젠 꽃을 못 심어. 꽃들을 참 이쁘게 키웠는데...' 혼잦말 하시는 걸 듣게 되었다.
난 일을 하도 해서 루마티즘에 걸려 휘어진 엄마 손을 잡았다. 그리고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심하게 떨렸다. 내가 자란 후, 내 의지로 엄마 손을 잡아 본 기억이 나질 않았다.
늙은 아들이 처음으로 늙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꽃밭은 엄마가 피우지 못하는 꽃을 사진으로 피게 한 것이다.
2012년 12월 18일부터 24일까지 사진전문 갤러리 류가헌에 ‘엄마의 꽃밭’ 전시를
계약했다. 한 겨울이고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는 기간이라 관람자가 많지 않을 거라고
주변에선 말렸다. 액자도 없이, 사진을 한지에 붙여놓고 여백에 연필로 엄마에 대한
기억과 생의 마지막까지 행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었다. 전시 기간 내내
생면부지의 젊은 사람들이 전시장 안에서 울었다.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음 해, 살갗이 익어 물집이 올라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바위를 찍어서 한지에 프린트를 하고, 그 위에 옻칠 작업을 했다.
온 몸에 옻이 올라 사흘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았다. 잠을 자다가 몸을 긁을 것 같아서
양 손을 의자 다리에 묶어놓고 자기도 하면서 10장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것도 역시 마지막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다 만들어 벽에 세워놓고 24시간 보고 또 보며 이 사진이 내가 만든 사진인가?
스스로 감동했다. 그해 삼청동 한벽원 갤러리 기획전 4인4색 전시에 초대를 받아
이 사진 10장을 걸었다. 어느 분이 너무 좋아서 사고 싶어 했지만 팔지 않았다.
행여 다칠 새라, 다을 듯 말 듯 어린 손주의 뺨을 스다듬는
농사꾼 할배, 할매의 거친 손바닥과 삼배의 거친 느낌, 그리고 우리의 흙색.
깊은 블랙과 눈부신 빛의 강한 콘트라스트.
거칠지만 한없이 부드럽고 질긴 조선종이.
그리고 내 깊은 고뇌와 슬픔과 뜨거운 삶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어울려 만들어진 이미지다. 그래서 가격이 없다.
결국 나는 10여년의 방랑으로
엄마의 꽃밭과 이 10장의 사진을 남기게 되었다.
지나고 보니 그댄 참으로
귀한 존재였네.
오랫동안 힘들고 건조한 삶
다 메말라버렸던 눈물을
다 커서 너무 커버려서 울 곳이 없어서
참았던 눈물을
가장이 되어서 애비가 되어서 차마 흘릴 수 없어 숨겼다가
잊혀져버린 눈물을
그토록 많이도 선물해줬으니
그댄 참으로 귀한 여인이었네.
이젠 안심하시게나.
그대만 생각하면 눈물 터져 나오니
마르지 않을 거니. 이젠 안심하시게나.
내 소중한 여인
어머니여
내 아내여
안느여
-50대 방랑기 끝-
*전시 기간 중에 함께 마음을 나누었던 모두에게 뜨거운 감사를!
그리고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동행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약속대로 향 좋은 커피를 사고 싶은데, 그리고 독자들과 대화도 하고 싶은데
번개치면 나오실래나? 내가 번개 칠 자격은 있나? 고민을 합니다. 방법 알려주세요^^
*아래, 마지막으로 만든 사진 몇 장 올렸습니다.(운영자님 사진 많이 올려서 죄송합니다.)
(엄마의 꽃밭)
(나의 땅 나의 조국)
|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오늘까지 골드믄트선배님의 지나온 외국생활의 추억담. 신중히 보았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뵐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만나길 기대합니다.^^
골드문트님. 잘 지내오셨습니다.
우리 삶의 한 모퉁이.. 소중한 기억들...
그 것으로 되었습니다.
안느도, 파리도, 내 여정의 한 부분...
귀한 만남이었음을 갈피에 잘 여미시고
오늘은 오늘대로 행복하시길요~
고마워요 향기님.
늘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따뜻한 격려를 해주시고.
늘 행복하세요`~~
흐르는 이 눈물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파리의 사랑은 이미 예견된 종말.
실패자, 돌아와서는 안되는것을...
그럼에도 돌아올곳이 있었음에,
치열하게 매달릴것이 있었으니 오늘이 있으시겠지요.
평범한 저에겐
소설같은 얘기지만 가까이 계신 님의 글이기에 깊이 공감할수 있어 기쁨이였습니다.
더운날 수고 많으셨구요~^^
긴 글 읽으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지은님 감사해요.
내 타고난 성질이 항상 뭔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사는 맛을 못 느껴서 몸살이 납니다.
아마 숨 넘어갈 때까지 열심히 움직이지 십습니다.
더 이상 방황은 안할거지만, 투쟁과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아요.
지료 모음도 그렇고 참 대단하십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것쉬운일은 아닌데 참 꼼꼼하신 성격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걸 그냥 꺼냈습니다.
사진은 내 컴 안에 수천장 들어있고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애환이 담긴 마지막편까지 긴 여정 고통도 기쁨도 괴로움도 사랑까지 겪었기에
훌륭한 예술가로 탄생히지 않으셨나 생각 됩니다.
정모에서의 처음만남 물씬 풍긴 예술가 그대로였습니다.
모쪼록 모든 애환은 가슴 한켠에 묻어두시고 행복한 날만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 글 부터 마지막까지 잘 보았습니다.
다음 어떤글이 올라 올지 기대됩니다~
아 그 분이시네!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오셨던 분.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글도 잘 읽어주시고, 외롭게 앉아있는 날 챙겨도 주시고.
우와ᆞᆞ넘넘 감명ᆢ또 감명ᆢ글도 사진도
모두 훌륭하십니다 그녕보기도 아까운 작품
감상 잘하고 갑니다ᆞᆞ늘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ᆞᆞ
우와` 감사 감사~
민정님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읍입니다.
제 글을 읽어주심을 감사드리고요^^
추억이 있어 지금의 삶이 아름다워 보이는것 같아요 나머지 삶 온전히 행복하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미국사람들 흔히 하는 인사중에 돈 겟 올드라는 말이 있읍니다,
직역하면 늙지 말라는 뜻일테지만,, 현제 위치한 나이를 마음껏 즐기라는 뜻으로도 해석합니다.
골트문트님, 돈 겟 올드 ~!!
아래서 위로 다섯번째 (녹는 눈에 묻혀있는 바위사진)은 마치 사람의 얼굴을 턱밑에서 찍은듯한 형상이네요.
황고집님도 돈 겟 올드!
사진은 촬영자의 의도보다 보시는 분의 느낌이 항상 옳습니다.
잘 보십니다.ㅎ
골드민트님의 애뜻한 사랑 알고 남음이 있습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이런데 재주가 없어 표현하지 못함이 한글을 모르는거나 다름 없더군요
여러번 읽다보니 골드님이 못나서도 잘나서도 아닌 순수한 사랑이었길레 애뜻함이 보여지더군요
인간인이상 떨림이 없으면
감정이 없는거겠죠
누구나가 그런 마음일것같고 저역시 못견딜것 같습니다
여러번 보다보니 한참전의 시작글부터 끝날때까지 눈독드려 보다 그냥 주저리 하고 갑니다~
이 글 못 보실줄 알지만
부디 건강하게 손주들과의 행복 맘껏 누리시고 건강하게 귀국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