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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8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탈출 20,1-17
복 음 : 마태 13,18-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비행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형제님이 있습니다.
다른 교통수단은 괜찮은데 유독 비행기 탈 때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비행 기간 내내 극심한 불안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갈 일이 있을 때, 배로 갈까도 심각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비행 공포로 인해 해외 나가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주변에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이 공포증을 없앨 수 있는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어느 날,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을 확률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죽을 확률보다 낮아.”
친구의 이 말을 들은 이 형제는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제 비행공포증이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아쉽게도 아니었습니다. 비행공포증은 그대로 있고, 여기에 화장실 공포증까지 생겼습니다.
화장실 가는 일이 하늘을 나는 일만큼 무시무시해진 것입니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만드는 법입니다. 따라서 불안을 멈추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실제로 비행공포증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심호흡과 복식호흡,
그리고 사람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불안하다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본인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고 당신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대화하는 것은 모든 불안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잘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수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나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제자들에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어떤 마음에 떨어져야 할 것인지를 보라는 것이지요.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깨닫지 못하는 길에 뿌려진 씨,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않는 돌밭에 뿌려진 씨,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으로 숨을 막아 버리는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이런 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씨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 부족한 자신을 노력으로 계속 변화시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십니다.
걱정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뜻에 맞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기 마음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안에서도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크루즈에는 승무원이 1,500명, 승객이 5,600명 정도 탑승합니다.
승무원도, 승객도 비록 탑승의 목적은 다르지만 도착지는 같습니다.
승무원은 직업으로 탑승하면서 승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 탑승합니다.
승객들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인과 모처럼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 탑승합니다.
비행기에는 여러 등급의 좌석이 있듯이 크루즈에도 여러 등급의 좌석이 있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등급을 정해 탑승하게 됩니다.
등급에 따라서 제공되는 음식과 편의시설이 차이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크루즈를 통해서 삶을 즐기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고급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시장에서 국밥을 먹는 것도 좋습니다.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최상의 등급을 이용해도 그리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몸이 편하고 모처럼의 휴가에 마음까지 들떠있다면
어떤 등급이라고 해도 즐거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저도 기분 좋게 출발했지만 왼쪽 손목이 아프면서
눈은 경치를 보았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육체의 허기를 채울 수 있지만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는 광야라는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그것이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주어진 현실에 불평과 불만을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은 주어진 현실에 감사드리라고 합니다.
십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변하지 않는 북극성과 같습니다.
십계명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섬기고, 헛된 것을 섬기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는 많은 축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그 근본정신은 “남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남에게 해주는 것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씨 뿌리는 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길가의 밭과 같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자갈밭과 같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가시덤불과 같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크게 자라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의 밭이 좋은 땅과 같다면
하느님 말씀의 씨는 크게 열매 맺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마음이 좋은 땅과 같을까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마음입니다.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넘어서 참된 진리를 찾아 예수님을 찾았던 니코데모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곧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하혈이 멈출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도 십계명을 잘 지킨 분들이 있습니다.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과 그 가족들입니다.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며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한 마더 데레사 성녀와 그 가족들입니다.
이름 없는 들꽃이 하느님을 찬양하듯이 알려지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지키면서 마음의 밭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다. 십계명을 하느님께서 주신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밭’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사 된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말씀)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밭이 씨앗을 일구는 줄로 알지만, 사실은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앗을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가시덤불 밭이 됩니다.
쓰레기가 가득하며 쓰레기 밭이요, 똥이 뿌려지면 똥밭입니다.
그러니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밭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다.”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성모님은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말씀이 자라고 있는 ‘말씀의 도서관’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자라는 잡초밭인가요?
하오니,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랄 수 있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 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게 하소서!
기꺼이 죽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쾌락과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걱정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반영억 라파엘 신부
몇 개의 화분을 작은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놓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릅니다.
곧 죽을 것 같던 거실의 화초가 거짓말처럼 생기를 찾았습니다.
저는 물 한 모금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한 모금의 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13,8). 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시기바랍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지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 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비유 말씀을 설명해 주시는 이유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관한 현실감을
좀처럼 체감하기 어려웠던 마태오 복음 공동체나 현대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비유설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마지막 道具(instrument)요, 象徵(symbol)라고 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곧 하느님 존재의 신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을 직접 보는 눈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는 참으로 행복한 것이다.(16절)
이는 갈수록 어떤 신비스러운 것으로부터 이탈해 가고, 심오한 것을 마치 迷信으로 여기듯 하는
현대의 우리들이 참으로 부러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의 비유 중에서
그 첫 번째인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이미 말씀해 주셨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까지 밝혀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그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사실은 비유 설교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겠으나,
설명해 주시는 이유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우선 씨앗은 하늘나라의 福音이다.
그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복음선포자이다.
그 씨앗이 뿌려지는 곳은 네 곳으로 언급된 바 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은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으로서
선포되는 복음 말씀을 듣는 청중과 그 청중의 내적 조건을 의미한다.
①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새의 밥이 된다고 했다.
길바닥이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경우를 말하며,
이때 그 씨앗을 먹어 치우는 새는 악한 자, 즉 사탄을 의미한다.
결국 길바닥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청자의 마음 밭이 세속적인 지식이나 교훈, 과학이나 철학이념으로 다져져 있어
복음을 받아들여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떤 마음의 바탕도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들이 씨를 쪼아 먹는 새에 비유된 사탄인 셈이다.
사탄은 곧 인간 스스로의 마음에 살고 있는 교만이나 자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② 씨앗이 싹을 피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돌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조건이다.
강한 햇볕 속에서 피운 싹을 부지하기란 불가능한 조건인 것이다.
이런 돌밭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그 뿌리가 마음속에 내리지 않아 그 말씀 때문에
닥쳐오는 환난이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는 경우이다.
복음 말씀과 신앙 때문에,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것도 같은 경우일 것이다.
③ 가시덤불에 씨가 떨어졌다는 것도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들의 유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복음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다고 하여 걱정과 유혹 거리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크고 심각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런 장애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것을 향유 하면서도 집착과 과욕을 제어하고
천상의 것에 대한 감각을 늘 유지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④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좋은 토양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좋은 토양은 복음 말씀을 잘 듣고 깨닫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진 경우를 제외하고,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이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경우는 모두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경우를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말은 씨앗이 發芽하여 싹이 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그 뿌리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견디어 내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돌밭과 가시덤불 속의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해서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햇볕과 알맞은 수분이 토양과 더불어 훌륭한 佳實을 이루어낸다.
그렇다고 좋은 땅이 아닌 곳에 떨어진 씨앗이 결코 열매를 맺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이 비유 속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비유의 설명 속에서는 얼마든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들과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암층의 절벽에서뿐만 아니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이 있지않는가.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는 이유이다.
사람은 자신을 변화시켜 고정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고,
환난과 핍박과 박해의 온갖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으며,
세속의 온갖 걱정과 유혹거리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음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묵상하며, 사랑하고 선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 신앙에 항구하고 持久하는 것이다.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하느님 성령의 능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열매를 맺는 일에는 깨달음을 행동으로 수행하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오틸리아 수녀
‘깨닫다’
오늘의 말씀에서 이 단어가 계속 되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십니다.
뿌려진 씨(말씀)가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지 않는 것.
Under stand
하느님 앞에 서는 것, 그분 아래 서는 것
주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깨닫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말씀을 기쁘게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
교회와 관련된 것들을 좋게 보는 것만으로는 아쉽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알고도, 세상 것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제대로 열매 맺을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박해, 불편함과 자존심이 구겨지는 상황 앞에서
얼마든지 하느님을 뒷전으로 내팽개쳐버릴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새싹의 어린잎에 햇볕을 쬐이듯,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말씀과 성체를 모시고
잘 자랄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름이 주듯,
기회가 될 때에는 강의와 교육을 듣고 교회의 가르침(교황님의 회칙, 권고, 교서 등)을 공부하며
기운이 다한 땅을 갈아주어 땅의 원기를 북돋우듯이,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수도원(수녀원)에서 피정하면서
하느님 안에 완전히 잠겨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고 마침에 주님께 감사드리고,
일상의 작은 일에도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면
언젠가 내 마음 밭에 심겨진 하느님의 말씀이 나무가 되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가 맺어질 거라 생각해 봅니다.
열매의 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니만큼
내 마음 밭의 새싹이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 것에 더욱 마음 쓰면서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마태 13,18-23 연중 제16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