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세상 기득권층을 대적해 저항하지 않았다.
◎질문.
4복음서를 보면예, 예수의 정신 자체가 저항하는 자(protestant)의 정신임을 알수 있어예, 그렇지 않나여...? 그는 하나님께만 순종(obey)하고 그 외의 것들에겐 저항(protestant)한 거 맞지예...? 그 첫 타켓이 당시 보이지 않는 권력집단인 종교 지도자들이지예?... 다만 그들을 무조건 깎아 내린게 아니라, 그들의 심령범죄인 위선을 공격한겨져! 그지예? 그 저항정신을 따라 뭉친 교회가 오늘날 교회 맞지예? 무슨 문제는 없을까예?
◈답변, 잘못 정의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정신 자체가 저항하는 자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그릇된 잣대로 예수님의 정신을 비하하고 있으며, 아울러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천지만물의 모든 존재들 중 가장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는 충효의 모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과 원칙인 말씀을 중심 삼아 자기 육신을 비롯해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언행을 판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한분 이외의 그 어떤 천사나 사람들이나 피조물도 다 그의 지배하에 놓인 신민(臣民)이나 재산에 불과할 뿐, 상전(上典) 취급해 저항할만한 피조물이 천지 중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날 당시만 하여도 유대에는 수많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해 백성들의 선생 노릇을 하였고, 또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분본왕 헤롯이 임금 노릇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비록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을지라도 그의 영적 지위는 가히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신분인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종교적 지위로도 그를 가르칠만한 선생은 없었고 또 정치적 권세로도 그를 좌우할만한 상관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적 상황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자를 색출해 죽이려고 혈안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처럼 자신이 지닌 정당한 지위와 신분과 능력을 만천하에 들어내 펼쳐 보이고 저들을 대적해 굴종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모세처럼 자신의 정당한 지위와 신분과 능력을 만천하에 들어내 펼쳐 보이고 저들을 대적해 굴종시키지 않은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한복음 14:22~24)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된 신분으로 율법을 전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아들의 신분으로 험악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자신의 언행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곧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수천여 년 동안 사람들을 세뇌시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도록 악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으로도 사람들은 깨끗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악화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언행을 믿고 따르는 친구 같은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친구들이라 증거하여 그들을 참혹한 지옥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죄악화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존중해 그의 언행을 믿음으로 따라 지킨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이 체포령이 내려진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전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키 위해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감수하듯, 지금 이 시대에 그의 언행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을 예수님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 구교를 중심삼아 형성된 살벌한 교황 체재 속에서 신교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기득권층들을 대적하는 저항 정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변호해 주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일입니다. 이런 신실한 사람들을 저항아 취급하는 것 자체부터가 하나님께 심히 징계 받아야 할 범죄행위이며, 또 이런 일컬음을 스스럼 없이 수용해 용납한 개신교도들 자체도 심히 하나님께 사죄하여야 할 범죄행위입니다. 개신교의 행동이 로마 가톨릭교의 뜻을 대적하는 저항아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예수님 자체를 혁명가로 취급하는 짓이며, 또 예수님을 혁명가로 취급하는 것은, 그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마저 인간들의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상을 주입시키려는 혁명가로 취급하는 짓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자’로써 존재의 근본이심과 동시에 모든 사고력의 기준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처음 계신자로서 피조물 어느 누구에게도 반항하고 도전하고 저항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은, 자신이 뜻하여 만든 사람의 본분 상태로 회귀하라는 것일 뿐, 사람들에게 무엇을 얻어내려고 독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의라는 말은 아래 쪽 신분의 사람들이 윗쪽 신분의 사람들의 언행을 개선하도록 요구하는 것인 데, 원초적인 입법자이시고 최종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어찌 인간들을 상전시 하여 그들의 언행을 개선해 달라고 요구하겠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먼저 계셔서 하나님을 판결할 상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그가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부족하여 얻어 내려고 저항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어찌 유약한 아랫 사람들이 사용하는 항의성 문구입니까? 오직 원초적인 기득권 실세가 되신 하나님이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백성들이나 범법자들에게 법집행을 시행하기전에 먼저 공표하는 포고문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이야말로 기존의 기존이 되시고 보수 중에도 으뜸 보수이십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기존의 기존이 되시고 보수 중에도 으뜸 보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비롯한 천하만민의 원초적인 고향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그 분(고향)에게서 태어나 범죄하여 쫓겨났을 뿐, 하나님이 인간들에게서 태어나 인기가 없어서 왕따 당하여 쫓겨난 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들 중 어느 쪽이 본 고향으로 돌아가 고쳐져야 할 존재입니까? 인간들이 낙원에서 사단의 선전선동에 속아 넘어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해 저항하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 이 세상 오지로 쫓겨난 것이지, 예수님이 인간들의 기존 사회질서에 이의를 제기해 저항하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사람들이 사단과 함께 하나님의 계명에 이의를 제기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항의한 반하나님 정신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생명을 건져라고 가르치려 왔는 데, 그러한 예수님을 도리어 자기들의 반하나님 정신에 가담하는 운동권 출신자로 취급하다니, 참으로 주객이 전도된 시각으로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정신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충효하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부모님 말씀 잘 안듣는 불효자 동호회 회원들이, 부모님 말씀 잘 듣는 한 아이를 붙잡아 두고 "쟤는 부모 말만 귀담아 들을 줄 아는 마마보이이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라고 흉보는 짓과 같습니다. 즉 얼굴에 흉 투성이들로 가득찬 아이들이, 한점 흉도 점도 없는 아이를 보고 도리어 "흉도 점도 없는 아이"라고 놀리는 짓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불효자 동호회 회원들, 곧 흉과 점 투성이 세상 아이(불신자)들에게 "흉도 점도 없는 아이"들로 지목 당하여 흉보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이토록 교회 바깥 생활, 곧 실생활 속에서 "흉도 점도 없는 아이"들로 놀림받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사회 전반적인 곳에서 얼굴에 흉 자욱과 점 자욱을 그려 남기고 있습니다. 그들 불신자들과 이단자들과 안티들에게 "흉도 점도 없는 아이"들로 지목받아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하여 이토록 하나님께 흉허물만 끼치는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흉 많은 인간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 흉 허물이 되는 온갖 범죄를 마구 저지르고 다닙니다.
아무튼 중세 이후의 신교도들을 프로테스탄트라고 명명한 사단의 교묘한 작전과 함께 그 악성 존칭어를 그대로 수용한 어리석은 신앙인들에 의해 수많은 반사회적 악성 사회운동과 이단들이 천태만상으로 불거져 나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산주의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이런 악성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이단들이 걸핏하면 예수님의 언행과 신교도들의 행위를 걸고 넘어지며,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사회적으로 이단 취급 당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자신들의 범죄를 예수님과 같은 의로운 행위로 가장합니다.
예수님이 죄악화된 세상 사람들을 책망하다 받게 되는 핍박과, 공산주의자들이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지르다 받게 되는 멸시천대가 동일한 것이니 동격으로 취급해 달라? 마치 예수님과 동일한 장소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한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누가복음 23:39) 하며 비아냥거리듯, 이들도 똑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과거에 예수님이 반사회적인 저항 운동으로 그와 너희들이 고난 당하듯, 오늘날 김일성 일가들을 지지하는 우리들도 동일한 저항운동으로 고난받고 있으니 우리들의 범죄 행각에 대해 탓하지 말라!" 하며 십자가 동기생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날강도 같은 범죄행위에 의해 발생되는 국민들의 고통과 원성이 하늘에 사무쳤거늘, 저들은 그것을 기독인들이 예수님을 전할 때 받는 박해와 동일한 가치의 고통과 핍박으로 자처합니다. 아무튼 이 모든 원인이 바로 중세 이후 신교도들의 참된 신앙생활을 구교가 세상을 반항하는 무리들로 곡해한 죄 때문이며, 그 당시 생명의 위협 속에 뒤쫓긴 신앙인들이 이 말을 교정하려 할 정도로 신앙적인 여유가 없었든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인들의 부패타락한 신앙생활은 이런 저항아란 명칭을 교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급한 명칭을 교정해 바로 잡아야만 참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할 수 있고 또 확고부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실세자 예수'는 죄악화된 세상을 단죄하는 책망이지 결코 정상적인 세상을 반역하는 저항서가 아닙니다.
http://cafe.daum.net/kblw 기독 애국 신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