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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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체동물인 달팽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집을 소유한
거의 유일한 種이며, 그 나선형의 집은 마치 팽이를 엎어놓은
것 같다. 그러나 난생이며, 암수 한 몸인데다가 두 더듬이와
눈을 가진 이 끈끈한 놈의 본디 고향은 바다이다.
5억 7천만년 전 캄브리아 기에 바다에서 살다가 해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어쩔 도리없이 육지로 그 서식지를 이동하였다.
달팽이에게 있어서 집은 수분 유지와 신체 보호를 위한
수단이지만, 서정춘 시인은 이 짤막한 한 문장의 시에서
몸 속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라 하였다. 그것 들쳐업고 절집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며 기어가는 모습에서
시인은 얼핏 몸 속의 언어를 다 녹여 한 편의 시를 응고해
내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
찬란한 빛의 광장을 꿈꾸거나 저 넓고 아득한 고향 바다를
몽상하는 것도, 언어의 혓바닥을 통한 참혹한 유희의 사투를
벌이는 것도 '온몸이 혓바닥뿐인' 저 '생生'과 닮았다.
그래서 왠지 쉼표 하나 없이 길게 이어간 한 줄의 문장에서도
달팽이의 여정처럼 숨이 가쁘게 느껴진다.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도 잠시 여기에 머문다. 그러나
집이 아니라 짐일 수도 있는 천형같은 시를 등에 이고 시인은
28년 동안 달팽이처럼 천천히 생을 핥아가며 살았었다.
서정춘 시인은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지
28년만에 첫 시집 <죽편竹篇>을 내놓았고, 이 시가 담긴
<귀>는 <봄> <파르티잔>에 이은 네번 째 시집이다.
물론 지금도 등짐은 그대로 있고, 더듬이같은 안테나를
바싹 세운 채 걸음은 계속되지만...
/ 권순진 시인
서정춘 시인과 함께 한 시노래마을 콘서트 (2018.12)
[출처] 서정춘 시인 1|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