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29] [연재] 삼류무사-41 첨부파일 :
그 음성에 정작 마음이 아픈 사람을 따로 있었다.
'사마검군, 그렇게 밖에 못하나! 네가 그렇게도 잘난 인간인가...'
주먹을 곽 쥔 손이 아플 법도 한데 그의 고통은 다른 곳에서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라 육체의 아픔따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뚝- 뚝-.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방울방울 핏물이 나뭇가지에 떨어졌다.
점점이 떨어지는 빨간색의 피는 갈래갈래 찢어지는 그의 마음을 담은 듯 초록
일색의 수풀사이에서 너무도 선명한 빛깔로 주위와의 차별을 선언하고 있었다.
'사마검군...'
으드득 이빨을 갈던 그가 문득 한탄섞인 독백을 입에서 뱉었다.
"이럴 땐 정말 출신이라는 게 한스럽기만 하구나."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그가 태어난 동네의 남자들을 전부 찾아다니며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쩌면 외지인 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라는
단어를 머리에서 깨끗이 지우기로 결심했다.
창기였던 어머니는 밥보다 술을 좋아했고 깨어있는 시간보다 취해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유년기의 그는 되도록 말을 하지 않는 게 덜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차츰 말을 잊어버리게 됐다.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나마
어머니가 각혈 끝에 세상을 뜨자 열 두 살의 어린 나이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걸과 소매치기가 전부였다.
우연히 만난 사부는 새칭 '은거' 무인이긴 했지만 '고인' 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평범한 무공 몇 개로 강호에 뛰어들었지만 곧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초야에 묻혀버린 낙오자가 그의 사부였다.
그릇은 큰데 담을 물건이 없었다.
그의 오성은 이년 만에 사부의 모든 것을 흡수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고
늙으막에 찾아온 제자의 자질에 감동한 사부는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의 실패한 인생을 물려주고 싶진 않았지만 해줄 것이 없는 비애와
살만큼 살았다는 허탈감은 두려움을 잊게 해 주었고 그의 사부는 신비로운
어떤 방파의 담을 넘었다.
이른 새벽 피투성이의 사부가 히겹게 건내 준 여섯 장짜리 비급 하나.
"내 몫을 더 살아다오."
사부의 유언이었다.
한 인간의 목숨 값으로 단 여섯 장의 양피지가 전부였다.
오년 후, 말수가 없고 조소어린 눈빛으로 세상을 멸시하는 고수 하나가
출연했다.
그의 장법 오초식은 경천의 위력으로 무림을 질타했고 사람들은 지옥을
관장한다는 염마대왕의 손속만큼 패도적인 그의 양 손을 두려워하여 '염라수'
라 칭하고 그는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양손을 지닌 열 명 중 하나가 되었다.
어느 정도의 명예를 얻게 되었으나 그 역시도 천하제일을 다투기엔
역부족이었다.
실의 속에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되는 여인을 보게됐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여인이 몸담고 있는 곳에 가입했다.
끊임없이 그녀의 주위를 배회하던 그는 충격적인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녀는... 마음 속의 정인을 따로 두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검군, 비록 파문당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사문의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 이면에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일테니 언젠가는 그의 사문에서
부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피붙이 하나 없는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배경을
등에 지고 있다는 얘기다.
"천기의 자식... 큭큭큭."
점창의 위세가 두려운건 아니다. 그저 평범하기만 했어도,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소작농의 자식이었더라도 한 번쯤 그녀 앞에 나서서 당당히 마음
속에 묻어둔 고백을 하련만.
"천기의 자식... 천기의..."
굵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적괴는 노을이 짙어지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같은 소리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은 피보다 진한 아픔으로 그에게 되돌아갔다.
* * *
"아, 아버지. 요즘은 시비가 꽤나 인기직종으로 부상했나봐요."
"글쎄다. 이건 도무지..."
부자의 당황은 황당으로 바뀌었다.
잠추삼의 집으로 정혜란이란 처녀가 방문한 건 반시진 전, 인사도 채
끝나기전에 숨이 턱까지 찬 또 한명의 처녀가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이어진 자기소개... 이건 소개를 빙자한 논검비무 수준 이었는데
키크고 시원시원한 정혜란이 한가지를 자랑하면 자그마하고 새침한 묘교교의
날카로운 반격이 이어졌다.
중국 사대지방 요리가 모조리 열거됐음은 물론이고, 미식가라 자처하던
장추삼도 단지 이름만 들어본 최고의 요리들이 옆집 똥개 이름처럼 예사로
튀어나왔다.
저간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굉장히 좋은 자리 - 매월 은자 닷냥
이상은 받는 최고급 요리점의 숙수정도 -를 놓고 무수히 많은 후보를 제치고
최종적으로 선발된 정예들이 막판 정견발표를 하는 것 쯤으로 보일 법한 이
대립광경은 다시한번 말하지만 일개 시비를 뽑는 자리에서 발생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 정혜란을 노려 본 모교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었다.
"호호, 이런 건 정말 자랑 같아서 입에 담기도 싫었는데 그저 참고나 하시라고
말씀드려야 겠네요."
그녀는 '참고' 라는 단어에 유달리 힘을 주었다.
"제 취미가 수를 놓는 것이었지요. 이 나이 여인으로 수를 놓는 게 뭐
자랑이겠어요. 그저 남들이 잘 놓는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였는데
그러다보니 옷감을 이용한 여러 종류의 일에 눈을 뜨게 되었고 지금은 옷 한
벌 정도는 한 시진만에 만들게 되었답니다. 보세요!"
그녀는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돌았다. 날씬한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려는 것은
아닐테니 걸치고 있는 옷에 주시하라는 것일테고 그거라면 평생 옷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장씨 부자라도 납득이 갔다.
은은한 초록색의 장삼은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었고 소매 끝과
치마 한쪽에 수놓아 있는 거북이 문양은 금새라도 옷에서 기어나와 바다로의
귀향을 단행할 것 같았다.
"그 옷을 소저가 직접 만들었단 말인가?"
"예, 이번 것은 자리가 자리이니 만치 두 시진이 넘게 걸려 만들었답니다.
보시기 흉하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흉하다니, 대단히 훌륭하구먼!"
장유열이 진심어린 찬사를 본왔다.
저 정도의 옷이라면 고관대작집 마나님들이라도 한 두 벌 밖에 구하기 힘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옷이리라.
'끄응!'
한 점 벌어 놓은 점수가 날아갈 판이라 정혜란은 머리가 아팠다.
별 볼일 없는 집의 시시한 시비자리라 가기만 하면 버선발로 뛰쳐나와 환영할
줄 알았는데 어디서 저런 강적이 나타났단 말인가.
'옷을 만든다구?'
이건 완벽한 패배다.
그녀는 옷은커녕 수조차 한 번 놓아본 적 없으니까.
'그 나이 여인' 이라고 해서 다 수를 놓는 건 아니다. 나이 열 두 살에 검을
잡고 그 길에 일로매진 하길 어언 십사년, 검로를 쫓으며 여성적인 도락은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요리는?
그건 필요성의 문제다. 무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만큼 두꺼운 벽에
부딛치게 되고 그럴 때야말로 고수의 일수일언이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처럼
금과옥조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녀보다 고수라고 해봤자 전대 장로급이라는 건데 자고로 어린애와
노인네의 비위를 맞춘다는건 대단히 어렵다. 한두 번의 지도로 검로를 열어
주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돌연 '몇 번씩이나 말해줘야 해?' 하며 생트집을
잡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졸기 일쑤였다.
무공광인 그녀에게 이런 순간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고 괄괄한 성격답게
애꿎은 나무 숲에 화풀이를 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장로 중 한 명인 반선수 계양에게 사사를 받는 중에 며칠 전
사대제자들에게 빼앗은 후아주 한 병을 별 생각없이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다.
계양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최종 요결을 지루해 하지도 않고 여섯 번이나 직접
시연해 보였고, 배운지는 어언 팔년이요 지닌바 오의 때문에 무려 한달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이십사수매화검법은 단 두 시진만에 그녀의 것이 되었다.
다음 날부터 그녀는 화산 전체를 헤집고 다니며 진귀한 과일을 모으는 것으로
아침 운동을 대신했다.
물론 술을 담그기 위해서.
사·오대 제자들 중 숙수 출신이거나 음식에 자신이 있다는 자들을 불러
요리를 배우는 일방 야심한 시각에 홀로 일어나 직접 만들어 보는 것도
잊지않았다.
그녀의 요리실력이 검술실력과 비례관계로 상승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옷이라니!
지금 입고 있는 것도 조소령이 손을 찔려가며 하루에 걸쳐 만들어준 것인데.
장씨 부자의 시선은 은연 중에 정혜란에게 모아졌다. 모교교도 자신만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임무고 나발이고 관계 없어.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어금니를 지그시 문 정혜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키작은 아가씨같은 잔재주는 없어요. 제가 뭐라고 입을 열면 저
아가씨는 또 뭐라고 쫑알대겠지요. 시비라고 하면 음식 좀 만들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참 어렵네요. 그렇지만 감히
한마디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났다.
"물고기는 물과 친하고 붓은 벼루가 없으면 안됩니다.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도 산이 있기에 포효를 하는 것처럼 이 집은 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있음으로 해서 이 집은 평온할 것이고 그것은 이 동네, 나아가 전 중원의
평화에도 일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기본은 한 가정의 평온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말할 것은 이제 다 했으니 결과만을
기다린다는 담백한 태도.
'거참!'
'허!'
서로는 몰랐지만 두 부자는 일견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정혜란의 말에 감동한 자신들을 느꼈다.
"저도?"
당황한 모교교도 큰소리로 뭐라고 떠들었으나 장씨 부자의 귀엔 공염불이었다.
'한 가정의 평온이라...'
진심으로 뱉은 한마디는 교언영색 천 마디보다 가슴에 와닿는 법이다.
비록 정혜란의 목적이 백색 투명한 순수는 아니었어도 자신의 의지와 양심에
비추어서 한 점 거리낄 것이 없었기에 그녀의 말엔 힘과 당당함이 베어 있었던
것이다.
모교교는... 의지면에서 그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잘 들었네. 두 분 소저의 생각도 지닌 바 능력도 사실 우리집에서 시비의
일을 보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어. 그렇지만 난 두 명의
시비를 거느릴만큼 여유롭지가 않아서 한 명만 뽑을 수 밖에 없다네. 이 점
헤아려주길 바라네."
장유열이 그의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심전심, 장추삼도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의자에 앉아있던 장유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여인의 앞에 섰다.
"정소저, 잘 지내보세."
모교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10641] [연재] 삼류무사-42 첨부파일 :
첫 출장.
정혜란을 처음 본 지청완이 이런 말로 환영인사를 대신했다.
"오오옷, 이 아가씨만 있으면 도둑걱정은 없겠군!"
* * *
마환장 모추와의 대결 이후 스스로의 무공에 대단한 자부심이 생긴건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밤마다 장추삼이 집 근처의
공터에 나가 권각술 수련을 한 지도 열흘이 넘었다.
시비로 들어온 정혜란은 그녀 스스로의 장담대로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고
맛있는 식사를 만들 줄 아는 아가씨였고, 다소 괄괄하여 큰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었으나 행동거지가 민첩하고 유쾌한 미소를 지을 줄 알았기에
장추삼은 잔심부름의 마수에서 벗어나 비교적 편안한 가정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무공 수련하러 갈 시간이네요?"
"무공 수련까지야 부르긴 그렇고... 운동하러 가는거지, 뭐."
정혜란이 저녁상을 치우며 묻자 장추삼이 겸연쩍게 웃었다.
여인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았기에 두 명의 남정네가 이십년이 넘게
방치했었던 집은 깨끗하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쓸슬한 감이 있었는데
정혜란이 온지 삼일만에 그런대로 일반적인 가정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하운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이 보았다면 '앗!' 하는 경악성과 함께
놀랄만한 일이나 사실 그렇게 의외의 사건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혜란의
한 부분만을 일방적인 편견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니까.
정혜란의 무공은 고강했다.
칠년 전까지만 해도 화산 내에서 그녀의 검을 받아낼 화산내의 후기지수는
일양자 하운과 염화겸수 조소령 정도였다. 나이도, 서열 면에서도 위인
청운자 화지악도 그녀에게는 못미친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일양자의 원인 모를 실종 이후 조소령은 검을 놓고 괭이질을 시작했고
청운자 화지악은 장문인인 구양승과 더불어 화산의 내외적 대소사를
처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연무장에 모습을 비칠 시간이 없었다.
가뜩이나 여장한 남자라는둥, 수 틀리면 왠만한 문파하나는 반나절이면
날리네 하는 소문의 정혜란이 전체 제자들의 연무에 관여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녀가 가지고 있던 남성적인 소문을 구체화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람을 가르쳐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역인지... 좋은 소리보다 욕부터 나오게 된다는 걸
말이다.
그러다 보니 정혜란 자신도 사람을 대할 때면 본의아니게 대사저적
입장에서 '~해라' 식의 말이 입에 베게 되었고 지닌 바 뛰어난 미모는
그 외의 여러 조건 속에 묻혀 버렸지만 화산 제자들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아무리 괄괄하고, 수련시간에 마녀같이 독하고, 말술을 마셔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여자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장씨 집안에서는 가르칠 사람도, 일대제자일 필요도 없었다.
정혜란은 꽤나 오랜만에 본래의 성(性)을 되찾고 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부터는 함께 가도 되겠어요?"
"엉? 정소저도 무공을 배웠었어?"
"무공이라고까지 하긴 그렇고... 삼재검법 정도지요. 뭐."
소저... 높임말이다.
결코 시비에게 쓰는 호칭이 아니다. 보통은 이름을 불러야 할 것이
다. 그러나 장씨 부자는 정혜란에게 첫날부터 말했다.
"시비라는 생각은 버리게. 친척 집에 잠시 머물러 왔는데 홀아비 삼촌과
사촌 오빠가 궁상부리는 게 싫어서 팔을 걷어부친 조카딸 정도라고 생각해
주게. 나도 자네를 그렇게 생각 하겠으니 어려워말고 즐겁게 지내세."
"나도 정소저를 동생으로 생각하겠어. 전부터 여동생 하나를 원했는데
그게 안됐거든."
정혜란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남자처럼 웃었었다.
"아하하하,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들의 사이는 처음부터가 괜찮게 출발했다.
잠시 삼일전 생각을 하던 정혜란이 상을 치우고 마당에 서 있던 장추삼에게
달려갔다.
"어서 가요!"
"응."
그때 두 남녀의 발목을 부여잡는 장난끼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야밤에 과년한 처녀가 어딜 가는게야?"
"어머, 노야!"
"쳇!"
쪼르르 달려가는 정혜란과는 달리 장추삼은 투덜거렸다.
달빛을 등에 지고 서있는 장대한 체구의 노인.
말할 것도 없이 지청완이었다.
머물겠다는 말과는 달리 지청완은 일주일에 이틀 이상을 장추삼의 집에서
지낸 적이 없었다. 가끔 생각난 듯이 들르곤 하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정혜란과 친해졌으니 과연 가공할 이빨이라 하겠다.
"식사는 하셨어요?"
"그러엄. 노부가 이 시간에 와서 가뜩이나 일많은 너를 귀찮게 하겠느냐.
그건 그렇고 어딜 가는게야?"
"장가가와 함께 운동하러 가요."
"운동?"
지청완의 눈이 스산하게 번쩍였다.
"운도옹?"
"예!"
"심심하던 차에 잘됐구만. 나도 따라가기로 하지. 괜찮겠지?"
정혜란이 밝게 웃어서 아무말 못했지만 장추삼은 입이 쭉 나왔다.
공터로 가면서도 사이좋게 얘기하는 그들 사이에 낄 생각이 없었는지
이따금 허공을 보며 뭐라고 궁시렁 거릴 뿐 일체 대화를 거부했다.
"호오,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다니! 여름에 잘 생긴 황구 한 마리 잡기에
더없이 훌륭한 장소로다!"
말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지청완을 무시하고 장추삼은 공터 한켠에 우뚝
섰다.
초여름의 공터는 한산했지만 민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관계로
훈훈한 느낌을 주었다. 잡초와 크지 않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으나 몸을 푸는데 큰 영향을 미칠정도까지는 아니었고 이따금 사람들이
찾는 곳인 듯 넓다란 나무판자 따위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그럼 정소저도 몸을 풀라구. 노인은 자든 말든 알아서 하쇼!"
퉁명스럽게 한마디하고 전방을 응시한 채 장추삼이 양손을 불끈 쥐었다.
'싫건좋건 이제는 평생을 같이해야 할 삼류무공아, 차라리 내 몸을 활활
태워주렴!'
우두둑.
전신의 변화는 모추와의 대전때와 많이 달라져 이제는 본 장추삼 본인이
아니고는 뼈마디 부딛치는 소리가 일절 들리지 않을 정도로 유연하면서도
고요하게 진행되었다.
툭.
'좋아!'
마지막 뼈마디의 울림과 함께 서서히 고개를 들어 반쪽이 되어버린 달을
한 번 쳐다보고 하염없이 울고있는 풀벌레에게도 귀를 한 번 기울이던
장추삼이 발을 한 번 내디뎠다.
슥.
발끝에서 파생된 근육의 울림이 머리속까지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뻗은 발을 축으로 하여 몸을 빙글 돌리며
선풍각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쉭! 쉭!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발차기에 조용히 숨쉬던
대기가 무참히 찢어졌고 신이 난 그가 오탕 - 발끝으로 차올리는 기법 -,
등각 - 발바닥 전체로 차는 기법 -, 반도퇴- 다리를 곧게 펴서 뒤를 치는
기법 - 등을 연이어 시전했다.
'좋은 발차기, 꽤나 잘 배웠지만...'
정혜란이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다.
'좋게 봐야 삼류 중에서 상에 속하겠군.'
가지를 오른 손에 움켜쥔 그녀는 왼손은 반을 꺾어 위로 올리고 가지의
끝을 전방에서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내린 기수식을 취했다.
'하앗!'
기합성은 마음으로 대신하고 그녀는 자신의 머리 속에 그려진 검로에 따라
나뭇가지를 내뻗었다.
축! 축!
명사가 보았다면 크게 칭찬할만한 검로.
내공을 싣지 않아서 강맹한 맛은 덜하지만 부드럽게 이어지는 검결의
흐름은 세찬 물살을 역으로 짚는 연어의 몸짓처럼 때론 유연하게, 때론
도도하게 연계되었다.
'창궁우전검... 역시 저 여아는 화산에서 온게로구만.'
적당한 널빤지 하나를 깔고앉은 지청완이 그녀의 검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이는 두 청춘남녀와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는 노인 하나... 이백이 보았더라면 저절로 시흥이 일만한
광경이다.
그녀의 검로가 후방을 쓸어가는 동작으로 이어질 무렵 장추삼의 눈이
기광을 뿜었다. [10656] [연재] 삼류무사-43 첨부파일 :
"핫!"
"오오오!"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연속복제가 이루어지며 그 수가 여덟을 헤아릴 때
이미 제각기의 장추삼들은 팔방의 위치를 완벽히 점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
발길질을 시작했다.
편퇴, 전설로만 남아있는 각법.
그리고 분신과 동시에 위치를 점했다함은 모추의 십단금을 받아낼 때
임기응변적으로 생각해 낸 산무영과 추뢰보의 결합형일텐데 이번에 분신의
숫자가 달랐다.
정확히 두 배, 그리고 분산된 신형들이 내뻗은 발길질에서 희뿌연 기운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함은...
"퇴강?!"
사라락.
지청완의 경악성에 정혜란이 검로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발차기를
멈춘 장추삼과 바보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지청완이 있었다.
"예? 무슨 일이죠?"
"별 일 아냐. 노인네가 헛것을 보신게지. 원래 저 정도 연세가 들면 밤눈이
어두워져서 간혹가다 착각을 하기도 하거든. 뭐예요? 방해하려거든 들어가
쉬든가 아니면 가만히 좀 있어요. 괜히 따라와 가지고는..."
"미, 미안하네."
지청완은 괜시리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이제보니 눈앞에 있는 놈은 보통의
능구렁이는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극강의 뻔뻔함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저 나이에, 저 정도라면... 무서운 놈이다!'
그의 인생이 올해로 어언 팔십. 수많은 인간들과 접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저정도로 능글맞은 인간은 일생을 통틀어 딱 두 명 만나보았다.
우선은 눈 앞에 째진 눈을 희번득거리는 저녀석이고, 또 한사람은...
'그 나물에 그 밥이라더니. 저놈만 보면 자꾸 생각나는게 어쩔도리가 없구료.'
지청완이 무언가 골똘히 생각을 하자 장추삼은 정혜란에게 계속하자는
수신호를 보냈다.
정혜란도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그들의 세게로 몰입해 들어갔다.
젊은이들은 미래를 먹고 살고 노인들은 과거를 먹고 산다고 했던가...
지청완의 노안은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초점을 맞추려 해도 존재
자체가 오래전에 사라져 기억 속에서나 끄집어내어 상상이란 동공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그림자를 가만히 밟아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청년 하나와
두 명의 장년인이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산에
오르는걸 보게 된다 가파른 산길이지만 그들의 다리는 강건했고 힘이 넘쳐
흘렀기에 땀 한방울 소진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평지를 걷듯 산길
여기저기에 핀 이름모를 야생화와 놀라 달아나는 다람쥐 따위를 유쾌한 듯
바라보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아차하는 사이에 정상에 오르면 어디선가
미풍이 불어오며 시동 여럿을 거느린 신선풍의 노인이 천상에서 하강하듯
허공을 밟고 나타났다. 노인의 입이 열리고 장년인 하나가 반문하고 또 한명의
장년인이 반박하고 지켜보던 노인이 문득 던진 한마디에 두 장년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조아린다.
껄껄 웃는 노인... 공자와 자공과 안회런가?
한 구석에서 시립해 있는 청년도 정확한 개념을 헤아리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이 광경에 파안대소를 터트리는 두 장년인.
계속되는 담론 속에 해가 저물고 달이 떠도 누구하나 지루한 기색이 없다.
월광 속에서 그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차아앗!"
정혜란의 맑은 기합성에 지청완이 현실세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화산의 비전인
창궁우전검을 거리낌없이 펼치고 있었는데 이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장씨
집에 들어오기 전 백무량의 말에 따른 것이다.
-그 집에서 잡일을 하더라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마라. 장씨 집안 사람들이나
네가 살펴보아야 할 노인의 눈따위는 신경쓸 것 없다. 그 노인이 노부들이
생각한 만큼의 고수라면 며칠 지나지않아 너의 출신문파와 무공수위를 알아낼
것이고 평범한 인물이라면 창궁우전검식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야. 장씨 집
부자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이러나 저러나 똑같다는 것이니 명대로 따를밖에.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았어도
검로 자체가 까다롭고 강 · 약을 뒤섞어 펼쳐야 하기에 서너번을 연달아
펼치자 그녀의 온몸은 금새 담에 젖었다.
"후-욱. 후-욱."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는 일방 정혜란의 시선은
장추삼의 손발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각법 수련을 끝냈는지
권법연습을 시작했는데 팔과 어깨가 그리는 각도의 깔금함과 그럭저럭
봐줄만한 보법이 어우러져 삼류치고는 괜찮은 위력을 보였다.
'아깝구나, 명사의 도움없이 막싸움 만으로 저렇게 실전적인 기법의 권각술을
가지고 있다니! 내가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서너달 만에 이류급으로 올려줄
수도 있으련만. 정말 아까운 재질이구나.'
누구도 듣지 못하게 혀를 한 번 차고 정혜란도 지청완이 있는 널빤지에
주저앉았다.
"수고했다. 훌륭한 검식이었어. 듣기론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다고 했는데
어디서 그렇게 고절한 검식을 배웠느냐?"
"저두 몰라요. 이 검식이 뭔지."
"몰라?"
"예. 어느날 산길을 걷다가 허기에 쓰러져 있던 노인장 한 분을 구해 드렸더니
그 분이 고맙다면서 검공 하나를 가르쳐 주셨어요. 이것만 제대로 익히면
왠만한 산적따위는 겁나지 않아도 된다나 뭐라나."
'왠만한 산적이 아니라 왠만한 고수급이겠지.'
"그리고 제가 다시 없는 무골이라고 하던데요?"
'인석아, 그것 하나만큼은 사실을 말하는구나.'
"그게 전부에요. 뭐, 어쨌든 일끝내고 멍하니 넋놓고 있는 것보다 이거라도
매달리고 있으면 괜시리 기분도 가뿐해지고 무언가 해나간다는 성취감도 들곤
해요. 여자애가 이런 얘기를 한다면 모두들 웃을테지만..."
마지막의 말만큼은 정혜란의 진심이었다.
비록 무림에서는 여인들의 위치가 일반 가정보다야 보장받는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와 같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해 동등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기엔 여태까지의 터울이 너무 높게 보이니까.
그저 여성 무인도 하나의 당당한 개체로 인정해 줬으면, 칼차고 대로를 걷고
있어도 몰래 수군거리지 않았으면.
"그건 정소저가 잘못 생각하는거야."
어느새 장추삼이 그들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여자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뭐가 나빠?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무공을
수련하면서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진정한 성취를 얻고 무언가 보람된 일을
하게 될거야. 무공에 취미가 있고 자질도 있다면 여자라고 망설일 필요가 뭐
있겠어. 무림은 어차피 실력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세게라고. 성별로 규정지어
진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해보기도 전에 패배의식에 먼저 지는 게 아닐까?"
"과연 그럴까요?"
정혜란이 냉정하게 반문했다. 딴에는 위로한답시고 던진 말 같은데 그녀의
입장에선 불난집에 부채질한 격이었다.
"확실한 목표의식? 그거 좋죠. 그럼 제가 한마디 여쭙겠어요. 무인이라면
가져야 할 확실한 목표의식이 과연 뭘까요?"
장추삼이 대답을 못하자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어차피 무림과 크게 상관없는 삼류무인이 알아듣지 못할 소리란 걸 생각
하면서도 한 번 터져버린 그녀의 성격은 미친 말이 질주하듯 멈출줄을 몰랐다.
"삼류무사가 뭘 알겠어요! 그래도 무의 궁극을 바라본다는 고수급의 무인
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다구요. 그게 뭔지 아세요? 천하제일인!
생각이나 해봤어요? 천하제일인이라는 의미를. 그런데 여지껏 여자 중에서
천하제일인이 나온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나요? 없어요. 무림사 일천년간
여류고수가 천하제일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에요. 왤까요? 그건
간단한 이유에요. 어떤 문파든, 그곳이 정파든 사파든 간에 여자는 입문하는
순간부터 남자들에게 치이기 마련이고 세월이 흐를수록 자그마한 차이는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멀어지고 말죠.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현 무림 십오개대파
중에서 대사저라는 호칭을 듣는 여류고수가 한 명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우습잖아요. 여자는 일대제자 중 수석(首席)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다는 게.
기회 자체가 동등하지 않은데 가뜩이나 수도 적은 여류무인들 가운데서
천하제일인이 나올 리 없지요. 확실한 목표의식? 그런걸 아무리 가지면
뭐해요!"
폭풍과도 같은 정혜란의 긴 얘기가 끝났다.
그것은 절규였고 통곡이었다.
지청완은 놀란 눈을 감추지 않고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정혜란의 시선은 장추삼
에게 향해 있었다. 침착한 눈으로 타는듯한 정혜란의 시선을 받던 장추삼이
입고리를 한번 실룩이더니 그녀의 정면에 쪼그려 앉았다.
"그래, 난 정소저의 말대로 무의 궁극따윈 바라본 적도 없는 삼류무사야.
솔직히 현 무림에 십오개대파가 어디어딘지 가끔가다 까먹을 정도로 무림도 잘
모르는 사람이고, 당연히 천하제일인이 어쩌니 하는 얘기는 생각해 본 적도
없지. 대사저가 어쩌니 하는건 그쪽들 사정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건 목표의식
이었어."
그가 훗하고 한 번 웃었다.
"목표의식이 꼭 자리여야 하는거야? 그렇다면 나는 정소저에게 할 말이 없어.
나는 삼류라서 그런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게 목표야. 그리고 내가
알고있는게 있다면 그걸 완전히 소화해내고 싶어. 자리? 자리 좋지.
천하제일인이라고 한다면 폼도 나고. 그렇지만 무공만 센 천하제일의 자리라면
난 사양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못하면서 천하제일은 무슨. 절대이강 중
하나라는 적미천존이 천하제일을 다툰다는데 난 안믿어. 그 자가 강호에 몇 번
이나 모습을 보였으며 몇 차례나 비무를 했나?"
정혜란의 눈도 어느정도 식어있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녀가 장추삼에게
따지고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난 천하제일인이니 제이인이니 하고 떠드는 걸 믿지 않아. 더 정확히 말해
그런 서열을 지껄이는 호사가들의 입을 신용할 수 없다."
정혜란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성질 괴팍한 동네 삼류건달이라더니 이제보니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는
청춘이잖아? 무공이 삼류라는 것 빼고는 맞는 정보가 없네. 어쨌거나 아까운
사람이다...'
소문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왜 하운이 말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끄응!"
그때까지 유기(遺棄)되어 있던 지청완이 용을 쓰며 무릎을 폈다. 장대한
체구가 달빛을 걸치고 우뚝 서자 앉아있는 청춘남녀에게 비스듬히 음영이
드리워졌다.
그가 몸을 일으킨건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달을 보고싶기 때문이었다.
달 속엔 잊혀진 청춘이 있고 땀과 노력이 있으며 그리운 얼굴이 있었기에...
"노야께서 지루하신가 봐요."
"쳇! 그러길래 뭐 볼 것이 있다고 따라왔담. 가자!"
둘은 일어서서 망연히 서있는 지청완을 불렀다.
"노야, 그만 가요!"
"갑시다, 노인."
"왜 또 그렇게 느끼한 미소를 짓는거요?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은 술 없소."
"인석아, 노부가 비록 주충이긴 하지만 언제 너더러 술달라고 했더냐?"
"흐음."
툭툭!
"놔요, 좀. 왜 남의 어깨는 건드리고 그래요?"
"기특해서 그랬다. 기특해서."
"노인한테 기특한 행동을 한 적 없으니 손 치워요!"
"넌 충분히 기특해!"
지청완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단호해서 장추삼은 대들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처다보았다.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노인을 이순간만큼은 덩치만 큰 삼류사파
대가리급이거나 도둑질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불쌍한 사기꾼 늙은이라 부를
사람이 감히 어디 있을까?
줄기줄기 뻗어가는 패도적 기운과 남을 찍어 누를듯한 위엄.
정혜란이 보았다면 좋아했을 광경이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이미 침소에 든
상태였다.
정혜란이 침소에 들었기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걸까? 장추삼이 그녀의 눈을
피해 절기를 펼치는 것처럼 말이다.
"추삼아!"
"예, 옛."
항거하기 어려운 지청완의 기도에 장추삼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넌 장차 뭐가 되고 싶으냐? 이를테면 꿈이라고 해도 되겠지."
거창한 기세치고 질문 내용이 우스울 수도 있겠으나 방안의 두사람중 누구도
그런 기색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잠시 고개를 모로 꼬고 생각하던 장추삼이
절래절래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근사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지요. 우선은 내가 속한 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얼마후엔 참하고
예쁜 색시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싶어요. 그래서 고생만 하시다 허리가
구부정해진 부친을 모시는거죠. 아, 내가 봐도 이건 너무 시시해."
탄식조로 장추삼이 말을 맺을 때 그 모양이 웃겨서 하마터면 대소를 터뜨릴 뻔
했으나 지청완은 안색을 굳히고 다시 물었다.
"너의 말대로 천하제일인 같은 건 아니더라도 무인으로서 이런건 꿈궈볼 수
있지 않겠느냐. 강호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 나타나 액겁을
종식시키고 만인의 추앙을 받는 일세의 영웅같은 것 말이다. 생각만해도
가슴벅찬 일 아니냐?"
"영웅이라..."
장추삼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흥미없어요. 분명히 멋있긴 하지만 영웅이란게 되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하고 싶은 생각도없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역시 무림의 영웅보단
복룡표국의 영웅이 낫겠어요."
"만약 무림에 커다란 위기가 닥친다면 넌 그저 손놓고 관망하겠단 말이냐?"
"저 말고도 무인은 많잖아요. 이름 날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하늘에 별보다도
많을텐데 그들에게 기회를 양보하죠, 뭐."
"만약 너밖에 분란을 종식시킬 사람이 없다면? 그때도 한목숨 아까워 무위도식
하겠다는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만약..."
"이제 만약 타령은 그만해요."
장추삼이 조용히 지청완의 말을 끊었다.
그의 말은 나직했고 내공이 실려있지도 않았으나 강직한 기세가 담겨 있어서
방안을 압도했던 지청완의 기운을 일시지간에 해소시키는 듯 했다.
"백번 천번 만약 타령을 하면 뭘해요.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노인처럼
조바심을 느끼다간 제명대로 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미래는 미래에 맡겨
두고 우선은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편이 정신건강상으로도 좋은 거예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지청완은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말을 마친
장추삼이 자리에 일어날 때까지 그는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노인장 기분상하라고 그런건 아니에요. 기분 풀고 이만 주무세요. 나도
건너가서 자야겠네요."
탁.
* * *
[10669] [연재] 삼류무사-44 첨부파일 :
* * *
그는 보고서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으나 세 번, 네 번을 읽는다고 해서
양피지의 내용이 변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들여다 보는 걸
포기했다.
그의 앞에 놓인 종이엔 단 한마디가 덩그라니 씌여있었다.
-실패.
멸천정에서 만끽하던 초여름의 신록은 매년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것이었으
나 올해는 그럴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녀가 누군데 실패한다는 건가?
중원십팔만리를 통 틀어봐도 그녀만한 여인은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운
노릇이거늘... 그녀가 실패를?
땀도 나지 않는데 부채를 편 그가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어 미풍에 얼굴을
맡기었다.
이건 흥분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보고서를 작성한 놈들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풀릴 성질의 사안이 아니었다.
"그녀는 뭐하고 있느냐?"
"침소에서 두문불출, 식사조차 거부하시는 형편입니다."
그럴 것이다.
자부심 높고 콧대 센 그녀로서 이번같이 치욕스런 일이 어디 또 있으랴.
하지만 당장은 그걸 걱정할 개제가 아니다. 사내는 다시 허공에 대고 잛게
명령했다.
"비각주를 들라고 해!"
"옛!"
비염극은 가까운 곳에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일각도 채 안되어 단정한 의복 차림으로 사내 앞에 부복한 그가 오체
투지로 예를 올렸다.
"대인을 뵈오이다."
"앉지."
그들은 서탁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앉았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염극이었다.
"그 계집의 정체는 화산파에서 보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오, 그래?"
정말 그러냐? 하는 식의 대꾸. 사내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혹은 하나도
모르는 백치같은 대꾸를 하였다.
"이름은 정혜란. 화산 내 후기지수 중 삼위권 안에 드는 고수로 절예라는
창궁우전검을 대략 칠, 팔성가량 터득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음."
"이로서 주류측에서도 호북에 관심을 표명했음이 명명백백히 드러났고 대응
책이 시급한 형편입니다."
사내의 눈이 기묘한 광채를 발하며 비염극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자네는 이미 대응책을 생각해 두었고?"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이자는 모든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염극은 겨드랑이에 맺힌 땀을 어깨를 움츠려 닦아내었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사내에게 공손이
바쳤다.
"그저 제 생각입니다."
사내는 양피지를 힐끗보더니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방법 밖에... 없겠나? 아! 괜찮긴 하군. 음! 그래..."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젓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하던 사내가 종이를 내려놓
았다.
"비각주의 방법치곤 과격한 감이 있는데?"
"그저 제 사견일 뿐입니다."
사내가 양피지를 손에 쥐고 허공에 펄럭였다.
"가져가."
팟!
마술처럼 사내의 손가락에 쥐어져 있던 양피지가 사라졌다.
사내의 손은 처음부터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것처럼 순식간에 그 일은
벌어졌다.
"나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군. 그건 그렇고 알아보겠다는 것들은
어떻게 되었나?"
"장추삼의 주위를 살펴본 결과 대국적 견지에서 크게 중요한 인물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 문제는 그를 둘러싼 주위의 인물들인데 이들을 크게
나누면 네 가지 형태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네가지 형태라?"
사내는 턱을 긁으며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비염극은 지금 자신이 하는 말도 훨씬 전부터 사내는 알고 분석해
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예, 첫 번째로는 복룡표국의 인물들인데 압축해서 말하자면 실회조원들이
라고 불리우는 표국 내의 십삼조원 일곱 명입니다. 그 중에서 정체가
드러난 당문의 여걸 당소소나 정창의 단사민과 사마검군, 그리고
낭인무사인 적괴는 파악이 되어있지만 얼마 전에 새로 가입한 하운이라는
자와 북궁단야란 인물이 골칫거리입니다. 이들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복룡표국에 가입했는지, 과거는 무엇인지, 무공수위와 내력... 어느 하나도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들이라고 할까요?"
"신기루와도 같다? 좋아. 그럼 두 번째 부류는?"
사내는 왼손 검지와 중지를 오그려 그 끝으로 서탁을 음감있게 툭툭 쳤다.
이건 보기 드문 일로 그가 상당히 흥미있는 사건을 접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습관이었다.
비염극은 그 손모양을 보고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두번째로는 그 자의 친구, 즉 배금성이란 인물인데 이 자는 전부터 저희들
도 주시하고 있었던 인물로서 무시못할 세력을 배경으로 사령전을 감시했던
자입니다. 역시 출신 내력이나 무공수위는 알 길이 없지만 한 가지,
주류는 아닌 듯 싶습니다."
"주류가 아니다? 자네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주류측에서도 비밀세력 한 둘은 움직일 힘이 있다는걸 염두해보진
않았나?"
비염극의 입가에 자신에 찬 미소가 걸렸다.
"대인께서 말씀하신대로 주류측을 무시한 것은 아닙니다. 그 점을 염두해
두고 사 년 여에 걸쳐 그 자를 꾸준히 관찰한 결과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그건 바로..."
비염극이 전음성으로 한마디 하자 고요하기만 하던 사내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 말... 책임질 수 있겠는가?"
그건 놀람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비염극을 바라보던 사내가 나직히 탄식을 터뜨렸다.
"이것 만은 정말 의외야. 의외... 그래, 그렇다치고 세번째는?"
"세번째는 물론 주류측의 인물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은 화산삼로인 치무
환검존과 반선수를 보낸 것도 부족했는지 일대제자인 폭풍검 정혜란이라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이쯤되면 양양성 청빈로에 화산전력의 삼할 이상이
집결된 형세라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
입니다. 화산 역사상 아무런 분쟁없는 특정지역에 이 정도의 힘과 신경을
집중시킨 례는 전무하다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왜 화산만이냐 이거지? 그게 마음에 걸리는 것 아닌가?"
그렇다.
주류측에서 비록 화산의 성세가 역대 두 번째의 중흥기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나 나머지 팔파일방을 압도하는 형국이라고 해도 청빈로를
둘러싼 심상찮은 공기를 팔파일방이라고 해서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화산이 다른 파엣 은밀히 사람을 보낸다고 해서 배척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화산만인가?
[10689] [연재] 삼류무사-45 첨부파일 :
"무언가 생각해 두신 것이라도 있으신지..."
"또, 또 그런 소리. 자네가 내 정보각주라니까."
껄걸 웃던 사내가 말을 넘겼다.
"일단 네 번째부터 듣지. 지청완이라는 노인이 그 인물이겠고, 알아낸 건?"
"그게, 저..."
첫 번째부터 명쾌한 답변을 했던건 아니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할 말이
거의 없었기에 비염극은 가설을 얘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자야말로 비중비라고 하겠습니다. 정보만을 다뤄왔던 저의 직감에서 볼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인물임엔 틀림없는에 무림에 몸 담고 있는
자들 중에서 이 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의심만을
가중시키는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모르겠다는 거 아닌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비염극이 말했다.
"예."
"그래?"
고개를 숙이고 서탁을 검지와 중지 끝으로 번갈아 내리치던 사내가 눈동자
만 움직여 비염극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다 좋은데 중간에 말을 멈추는 버릇이 있어. 자신없는 얘기를 하지
않는 건 좋은 습관이지만 말을 너무 아껴도 애써 찾은 실마리를 놓치게
된다는 걸아는가?"
"그게 무슨 말씀인지..."
사내가 혀를 끌끌 찼다.
머리까지 좌우로 절레절레 흔드는 데 비염극은 자신이 무지하게 답답하고
못난 사람으로 전락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사내의 표정은 사실적이었다.
좌우로 흔들리던 고개가 제자리를 찾고 사내의 입꼬리가 기묘한 호선을
그리며 밀려 올라갔다.
"자네 생각을 내가 말할까? 지청완이라는 노인이 우내오존 중 일인인 것 같
은데 확증은 없으니 답답하다, 뭐 이런 것 아니야? 치무환검존은 화산에
있으니까 제외하면 네 명중 하나로 압축되겠군 그래."
"어, 어떻게 그걸"
"한가지 단서를 더 줄까? 태양광무존도 제외시키게. 그럼 세 명이 남겠지?
넷중에서 찾기보다야 셋중에서 찾는게 아무래도 더 쉬울게야."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사내의 독심술에 가까운 판단력에 넋이 나간 비염극은 태양광무존을 빼야하
는 이유도 물을 경황이 없었다.
비염극의 멍청한 얼굴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건 혼자 있을 때 숙고해도 충분하니까 말을 다시 돌리지. 장추삼이 건은
그렇다 치고 찾으라는 놈은 어찌되었나? 아직도 소식이 없는게야?"
올 것이 왔다.
요즘 비염극은 되는 일이 없다고 한탄했다.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인물인데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것이다.
"모추 따위를 잡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그 자가 절정의 고수도 아니고 거
대세력의 비호를 받는것도 아닌데 어떻게 단 하룻밤 사이에 놓쳤다는 거야!
이런 답답한..."
이것도 화를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용하는 단어는 질책이 분명한데 사내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같은 음정을
유지했다.
"한번 더 시간을 주지. 열흘 이내에 모추란 놈을 데려와. 죽었으면 시체라
도 메고 오고 살이 썩었으면 해골이라도 가져와. 알겠나?"
"예엣!"
"일 봐!"
비염극이 자리에서 물러가자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안되겠어. 게 있느냐!"
스슥-.
언제나처럼 흑의인물이 사내 앞에 부복했다.
"세우삼십육도를 데리고 모추를 찾아라. 기한은 되도록 짧게..."
스슥-.
흑의 인물이 사라지고도 사내는 얼굴을 펴지 않았다.
"자전!"
스슥-.
보라색으로 온 몸을 감싼 인물, 비염극은 한 번도 본적 없는 존재이리라.
"이십사전검을 데리고 우내삼존의 모든 걸 파악해라. 기한은 일주일이다."
스슥-.
"청뢰!"
스슥-.
"너는 특별히 할 일이 있다."
사내는 나타난 청의인물에게 전음성으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알겠나? 십이뢰성인 모두를 데려가라!"
스슥-.
모든 지시를 마치고서야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는 유유자적 하다가도 한 번 일을 도모할 결심을 하자 일사천리로
사안을 휘몰아치는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풍운같았다.
'이제 대충 얘기가 시작되는건가? 그럼 나 혼자서 이렇게만 있기엔 지루한
일이지."
뜻모를 독백을 남기고 멸천정에서 나온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보보는 가슴에 새겨진 구름처럼 행운유수의 여유로움으로 더없이
산뜻한 멋을 풍겼다.
휘이잉-.
아무도 없는 멸천정에 한줄기 바람이 흘러 사내가 이따금씩 들여다 보던 책
자의 종이를 두서없이 넘겼다.
넘어가는 장마다 구파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는 것이 보였고 밑으로는 어
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의 그림이 실물처럼 묘사되어 있었는데 중심부
의 한 장은 우악스럽게 찢겨져 나갔는지 종이가 묶여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