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 연휴에 우리 대학의 국제 교류위원 여섯 명은 중국에 있는 자매 결연대학 방문길에 올랐다. 일정의 마지막 날, 상하이 ‘제 2 군의병원’을 방문해 병원 투어를 마치고 그 병원과 MOU 체결을 위해 저녁만찬 자리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안내하던 젊은 조선족 의사가 뜬금없이 자기 병원에 파견 나온 북한 의사 두 사람이 만찬에 동석하기로 되어 있으니 정치적인 발언은 제발 삼가 해 달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아니 북한의사를 만난다니, 민간인이 이런 접촉을 해도 괜찮은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귀국하면 곤욕을 치르는 것 아니야.’ 나는 좀 촌스러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동료 교수들의 표정도 호기심과 막연한 불안감으로 복잡하다.
하지만 설레는 긴장감으로 북쪽 의사 두 명과 인사를 터면서 생전 처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체제의 의사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점차 기분이 고양되기 시작하였다. 아무렴, 지금이 어느 땐데 무슨 별일이 있을라고. 바로 내 옆자리엔 왜소한 체구의 50대 비뇨기과 의사 A씨가 앉았다. 차분한 학자풍이라 호감이 갔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란다. 우리 기준으론 몇 십 년 전 촌로 차림새라 공식 모임엔 좀 생뚱한 느낌이다.
그와 대화를 엮으면서 “아, 이렇게 말이 통하니 우린 한 민족이 틀림없어.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데” 하는 순진한 생각이 들었다. 중국 의사들이 특별히 우리를 환대해 주고 있었지만 대화는 통역을 통하거나 어설픈 영어로 진행되니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북쪽의사들은 모국어로 소통이 가능하니 체제와 이념을 뛰어 넘는 동질감이 단박에 전달된다.
그런데 북한 의사 들은 형제의 나라로 믿고 있는 중국 의사들이 지극히 우호적인 태도로 우리를 접대하는 것을 보면서 자격지심이 생겼는지 아주 경쟁적으로 체제 선전에 열심이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전 인민이 병들면 무상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둥, 대학까지 공부를 공짜로 시켜 준다는 둥, 묻지도 않은 말들을 해대는 것이다. 측은지심이 들어 맞장구를 쳐주며 술잔을 나누었다.
“그래요, 우리도 북쪽에서 공짜 진료를 받는다는 소식에 의료보험 제도를 서둘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북한 의사들은 아주 한술 더 뜨는 것이다.
“사실 여기 중국 사람들, 몇 십 년 전엔 참 형편없었지요. 우리가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 때쯤, 분위기에 휩쓸려 호기롭게 몇 잔 걸쳤던 중국 백주에 혈중 알코올 농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나는 긴장의 끈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중국의사들은 한국 TV 드라마를 끝도 없이 찬양하고 있다. 같은 유교 문화권의 잘 사는 나라의 일상을 접할 수 있어 신선할 뿐 아니라 문화혁명 이후 자기들의 삶 속에서 사라져 버린 가족애의 끈끈함을 볼 수 있어 매력적이란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전개가 맛깔스러워 쉽게 빠져 들 수 있다며 감탄이다. “그래, 우리가 이야기 만드는 재주는 남다르지” 생각하며 무심코 옆자리의 A선생에게 물었다.
“참, 선생, 요즘은 북쪽에서도 한국 TV 드라마를 많이 본다면서요.”
우쭐해진 마음에 그만 예민한 질문을 던져 버린 것이다.
갑작스런 질문에 그는 움찔하였다. 안경 너머 눈빛에 당황하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맞은편에서 이쪽 대화에 귀를 열어두고 있던 북한 안과 의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이 감지된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거나. 주책없이 내뱉은 말은 천금을 주어도 주워 담을 수가 없으니. 남과 북에서 온 의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하였다. 잠시 짓누르는 침묵이 흐르고 그는 곤혹스럽게 입을 열었다.
“글쎄, 제가 공화국을 떠난 지가 한참 되어 지금 그쪽 사정을 잘 알기 힘듭네다, 그래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네다만…” 마른 침을 삼키며 동료의사를 흘낏 쳐다본다. 등줄기에 식은땀을 감지하고 있을까.
“이 곳 상해에서는 남조선 드라마가 많이 상영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다행이다. 만약 그가 우리 공화국에서는 그런 불경스런 드라마는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새파랗게 우겼다면 나는 얼마나 무안했을까. 분위기를 반전 시키려 얼른 화제를 돌렸다.
“참, 선생, 이곳엔 가족 분들과 함께 머물고 계십니까.”
“아니요, 우리 공화국은 그저, 일 년 안쪽 외국 파견은 혼자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네다. 그래서 애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가족들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묻어나는 톤이다. 허공을 잠깐 응시하며 스치는 애틋한 눈빛, 비로소 그의 인간 본성의 모습이 감지되면서 내 마음속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안도감이 깃들고 있었다.
헤어질 때 그의 두 손을 꽉 잡아 쥐었다. 거칠고 마른 손이다.
“선생, 언제 어디서든 다시 한 번 꼭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잠깐 눈만 맞추고는 말없이 돌아서버렸다. 왜소한 뒷모습이 참, 어린애 같다고 느끼면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 안내인 조선족 의사는 놀라운 사실을 귀 뜸 해준다. 자기들 병원에서 북한 의사 일인당 우리 돈 칠십만 원 정도를 매달 체제비로 지급하는데 그 중 오십만 원을 북한 당국에 납부하고 있단다. 그런데 남은 돈도 대부분 가족들을 위해 저축을 하고 있다하니 저 사람들이 도대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 참으로 신기하다 하였다.
아뿔싸, 그렇다면 헤어질 때 수중에 있던 몇 백 위안이라도 억지로 손에 쥐어줄 것을.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자존심과 강단이 있어 보이던 A선생이 선뜻 그 돈을 받았을까. 어설픈 오지랖으로 마지막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큰 결례를 범했을지 모른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휘황찬란한 푸동 밤거리를 막 벗어나고 있다. 버스 창밖으로 아무런 인사말도 없이 쓸쓸하게 돌아서던 A선생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며 멀어지고 있었다. 내 생애 언제 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