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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머물러 있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헤매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 아닌지 가슴 안인지 아니면 몸 밖 어딘가인지 딱 짚어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경전은 능엄경 칠처 증심입니다. 부처님께서 안 한 존자에게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고 아나는 일곱 번 답하였지만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불교 이밤에서 지금까지 다룬 경전 가운데 이 문단만큼 마음의 본질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 문답을 끝까지 들으시면 마음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 왜 빗나갈 수밖에 없는지 보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리키신 방향도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능엄경은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다문제일이라 불리던 안 한 존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다문제일이란 가장 많이들은 제자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들었고 누구보다 정확히 기억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많이 들었다는 것이 곧 깨달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나는 부처님 곁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모든 법문을 들었으나 정작 마음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식이 쌓였을 뿐 지혜의 눈은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느 날 아난이 탁발을 나갔다가 마든가녀의 주술에 빠져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문수보살을 보내시어 능험주로 아난을 구해 오셨고 돌아온 아나는 부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말합니다. 저는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지만 수행에 힘이 없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참된 수행의 길을 알려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아난의 청을 들으시고 곧바로 핵심을 찌르십니다. 아나나. 내가 처음 출가할 때 무엇을 보고 출가하였느냐? 아난이 답합니다. 부처님의 30 이상을 보고 마음이 움직여 출가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모르십니다. 내가 보았다 하고 마음이 움직였다 하는데 그 보는 것은 무엇이고 움직인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이 칠처진심의 시작입니다. 진심이란 마음을 따져 묻는다는 뜻이니 부처님께서 아난의 마음이 어디 있는지를 일곱 차례에 걸쳐 추궁하신 것입니다. 그런 아난도 마음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막혔습니다. 답을 내놓을 때마다 부처님께 부정당하였고 일곱 번째 답까지 모두 꺾이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말을 매일 쓰면서도 그 마음이 어디 있는지 물으면 선뜻 답하기 어렵습니다. 머리라고 하기엔 가슴이 먼저 반응하고 가슴이라고 하기엔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500년 전 아난이 겪은 막막함이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아난이 내놓은 일곱 가지 답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그것을 부정하셨는지 그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에 대한 우리의 착각이 하나씩 벗겨지게 됩니다. 아난이 첫 번째로 내놓은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마음은 몸 안에 있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답이었습니다.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가슴을 가리키거나 머리를 가리킵니다. 몸 안 어딘가에 마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의 가장 가까운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아난도 그렇게 답하였습니다. 부처님 마음은 몸 안에 있고 눈은 몸 밖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마음이 안에서 생각하고 눈이 밖을 보는 것이니 마음이 몸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가 들어도 무리 없는 답이었으나 부처님께서는 이 답을 단번에 꺾으십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십니다. 아나나 지금 우리가 이 강당 안에 앉아 있다. 강당 안에 있는 사람은 먼저 강당 안에 것들을 보고 그 뒤에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게 된다. 이것이 맞느냐? 아난이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안에 있는 사람은 안을 먼저 보고 창을 통해 밖을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몸 안에 있다는 내 말대로라면 마음은 먼저 몸 안의 것들을 보아야 할 것이다. 심장이 뛰는 것을 보고 간과 위와 창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 심장의 모양을 직접 본 적이 있느냐? 아나는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처님 곁에서 수십 년간 법문을 들었으되 마음이 어디 있느냐는 한마디 앞에서 멈춘 것입니다. 아난이 침묵한 것은 단순히 말문이 막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확실하다고 여겼던 전제가 한 번의 물음으로 무너지는 것을 직접 경험한 까닭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잘 보아 두십시오. 아난처럼 오랜 세월 법문을 들은 사람도 마음의 자리를 물으면 당장 답하지 못합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첫 번째 질문부터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난이 말한 것은 마음은 안에 있고 눈은 밖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본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말을 그대로 받아 강당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추상적인 논의를 눈앞에 현실로 끌어오신 것이며 그래서 아난이 거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방만 보고 안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조금 더 풀어 보겠습니다. 집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집안의 벽과 천장은 전혀 보지 못하고 오직 창밖 풍경만 본다면 그 사람을 집 안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안에 있다는 것은 안을 알고 있다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몸 안에 오장육부를 단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몸 안에 있으면서 몸 안을 모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전제였던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상자 안에 등불을 넣어 두면 등불의 빛은 먼저 상자 안에 비춥니다. 뚜껑을 열었을 때 비로소 빛이 밖으로 나갈 뿐이지 안에 등불이 안은 비추지 못하고 방만 비추는 일은 없습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다면 그 마음의 빛이 먼저 몸 안에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밖은 환히 비추면서 아는 전혀 비추지 못합니다. 등불이 상자밖에 있으면서 상자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비유로 아난의 가장 단단한 확신을 허무셨습니다. 부처님의 이 물음은 단순히 장기가 안 보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을 특정한 공간에 넣어 두려는 그 생각 자체를 겨냥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믿기 때문에 마음에도 경계를 만듭니다. 내 마음 내 마음을 나누고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을 가릅니다. 몸이라는 울트 다리가 곧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의 답을 꺾으신 것은 바로 이 울타리를 허무시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생각해. 오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머리로 생각하니 머리 안에 있다고 여기고 가슴이 뛰니 가슴 안에 있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 느낌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그 느낌에 매이면 마음의 찬 모습을 놓치게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도 이 질문은 유효합니다. 과학에서는 마음을 뇌의 작용이라고 설명하며 신경 세포의 전기 신호가 곧 생각이고. 감정이라 하니 마음은 뇌 안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질문을 그대로 적용해 보십시오. 마음이 뇌 안에 있다면 우리는 뇌 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경세포가 발화하는 것을 의식이 직접 관찰한 적은 없습니다. 뇌 안에 있으면서 뇌 안을 모른다면 부처님 말씀대로 처음부터 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2500년 전 능원경의 질문이 현대 과학의 전제까지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뇌에서 만들어진다는 것과 마음이 뇌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소리가 종에서 나오지만 소리가 종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의 첫 번째 답을 부정하신 것은 틀렸다고 꾸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어떤 공간 안에 가두려는 시도 자체가 마음의 본래 모습과 맞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전제하는 순간 마음은 몸이라는 그릇만큼 좁아지게 됩니다. 좁아진 마음은 경계 너머를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수행에서도 이 점이 중요합니다. 자선할 때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여기면 몸의 감각에 메이게 됩니다. 다리가 저리면 그곳에 끌려가고 어깨가 아프면 거기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마음이 반드시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몸의 감각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절임도 아픔도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화를 내면 우리는 곧바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이때 마음이 몸 안에 있다고 여기면 몸의 반응이 곧 나의 반응이 됩니다. 분노가 곧 나 자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 분노를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은 과연 가슴 안에 있는 것인지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가슴이 뜨거운 것과 그 뜨거움을 알아차리는 것은 같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그 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 한번쯤 살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입술은 움직이되 그 염부를 듣고 있는 마음은 입 안에 있지 않습니다. 염불 소리가 귀로 돌아와 마음에 닿는 그 순간 마음이 과연 몸 안 어디에 있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하신 질문이 바로 그 자리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 아난의 첫 번째 답을 꺾으신 것은 단순한 논리 대결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 마음에 대한 가장 깊은 착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마음의 몸이라는 상자 안에 가둬놓으면 그 상자만큼만 보이고 그 상자만큼만 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그 상자의 뚜껑을 여시는 것입니다. 아나는 첫 번째 답이 꺾이자 즉시 방향을 바꾸어 안이 아니라면 바뀌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쪽이 부정되자 반대편으로 달려간 것이며 이것 역시 우리가 흔히 빠지는 이분법의 함정입니다. 아난이 두 번째로 내놓은 답은 안에 반대편이었습니다. 마음이 몸 안에 있지 않다면 몸 밖에 있는 것이겠습니다. 만이 아니면 방 이것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논리입니다. 문 안에 없으면 문 밖에 있고 상자 안에 없으면 상자밖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난도 같은 길을 따라간 것이며 첫 번째 답이 꺾이자. 곧바로 반대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난이 말합니다. 등불이 방 안에 있으면 방 안을 비추듯 마음이 몸 안에 있다면 몸 안을 비춰야 하는데 몸 안을 비추지 못하니 마음은 몸 밖에 있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있어서 마음은 밖에서 몸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논리를 그대로 되돌려 쓴 답이었습니다. 안에 있으면 안을 봐야 한다. 안을 못 보니 안에 없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마음이 몸밖에 있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이 논리를 풀어보겠습니다.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것은 마음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분리되어 있다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밥을 먹는다고 옆사람의 배가 부르지 않듯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 몸 밖의 마음에 전해질 수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손가락을 바늘에 찔리면 아픔이 즉시 알아차려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쁨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음이 빠짐없이 알고 있으며 마음이 원하는 것을 몸이 곧바로 따릅니다. 이긴밀한 연결이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주장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밖에 있다면 몸의 고통도 느끼지 못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발을 닫쳐도 아플 이유가 없고 병이 나도 괴로울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아프면 마음도 함께 아파하며 몸이 편안하면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답은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핵심을 찌르십니다. 밖에 있으면서 안을 아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밖에 있다면 안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몸도 마음의 명령에 따르고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밖에 있다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대목을 가만히 되짚어 보십시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시간 차이가 없습니다. 꽃을 보는 순간 아 꽃이구나 하고 아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며 눈이 먼저 보고 마음이 나중에 아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즉시 알고 아는 즉시 반응합니다. 바로 이 즉시성이 마음과 몸이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떨어져 있는 둘이 이렇게 동시에 작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나는 다시 한번 침묵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안에 있다고 하면 안을 못 보니 안이 아니라 하시고 밖에 있다고 하면 안을 다 아니 밖에 아니라 하십니다. 안에 있으면 안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고 밖에 있으면 안을 몰라야 하는데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도 막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신 까닭입니다. 마음을 안이나 밖이라는 공간에 놓으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빛나간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냐 바뀌냐는 물음 자체가 마음을 물건처럼 다루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건은 어딘가에 놓입니다. 책상 위에 놓이거나 서랍 안에 놓이며 반드시 어떤 장소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물건이 아닙니다. 잡을 수 없고 재어 볼 수 없으며 어딘가에 놓아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물건 다루듯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따져보았자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물건처럼 다루는 습관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담는다.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잡는다. 이런 표현을 아무렇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담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딘가에 있어야 하고 비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전제를 뒤흔드시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그릇이 없고 그릇이 없기에 안과 박도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데 몸은 법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집에 두고 온 걱정을 떠올리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마음이 법당 안에 있다고 하기도 어렵고 집에 있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몸은 분명 여기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