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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14] [연재] 삼류무사-56 첨부파일 :
고집스러운 태양광무존을 바라보던 백무량이 나직하게 탄식을 토했다.
“좋네, 몇 가지 의문을 청해야겠군. 우선 첫째로 자네는 파천무서상의 무
공을 익혔나?”
“후, 그렇소.”
“으음... 그것이 실제로 있었단 말이지. 그걸 어디서 구했나?”
“......”
“말할 수 없다는겐가... 알았네. 질문을 바꾸기로 하지. 금서에 발화인장
이 찍혀 있었나?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서 결코 허투루 넘길 문제가 아
닐세!”
발화인장이 찍힌 금서라면 회수하지 못한 마지막 진본 배화전서라는 얘기가
된다.
회수되지 못한 마지막의 진본 배화전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저주라는 마물.
십이년 전의 끔찍스러웠던 일주일의 살육, 이른바 흉몽지겁의 주범.
“선배는 발화인장을 한번이라도 보셨소?”
“보지는 못했지만 형태는 들어서 알고 있네.”
“그게 말이 되오?”
태양광무존이 어이 없다는듯 크게 웃었다.
“인장위서가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지 아시오? 삼백년 전의 사람들은 간
곳이 없고 가짜는 판을 치는 판국에 진본을 어떻게 밝혀낸다는 거요? 제 논
에 물대기 식의 해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고 모함
을 당했는지 벌써 잊어버린 거라면 정파의 태두라는 구파일방의 무신경증에
본인은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라오. 발화인장이 찍혀 있느냐고 물었소
? 솔직히 말해 본인의 아둔한 안목으로 그건 잘 모르겠소. 발화인장이 찍혀
있긴 있었는데 그것이 삼백년 전의 것인지 얼마전에 누군가에 의해서 급조
된 건지 알 도리가 없단 말이오. 그보다는 이런 의문이 드오. 구파일방에서
발화인장이 찍힌 배화전서를 찾는 이유가 단순히 명교의 교리전파를 막기
위해서 그러는게 맞기는 하는가,라는 의구심!”
비꼬는 듯한 어조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준엄한 것으로 변했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워서 아득한 과거사가 되어버린 명교의 고서에 아둥바
둥 집착을 보이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이오. 도대체 발화인장의 진본
에 무엇이 수록되어 있길래 그러는지요? 선배께선 혹시 알고 있소? 알고 있
다면 일모의 답답한 마음을 풀어 주시구려.”
졸지에 대답해야 할 입장으로 몰린 백무량이 어둡게 바뀌었다.
그것만은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질문을 바꾸겠네. 그럼 자네가 보았다는 금서를 아직도 소유하고 있나?
진본이든 아니든.”
“없소. 그리고 배화전서에 관해서 선배도 숨기고 있는 듯하니 그 얘긴 이
쯤에서 관둡시다.”
“정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지? 믿어도 되겠지?”
태양광무존은 침묵을 고수했다.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비무시간은 찰나적이었으니 나눈 대화량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단적으로 보
여주는 광경이었다.
“구파를 돌며 비무행을 벌인 목적이 뭐였나? 단순히 입신양명을 위한 행보
라고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구파에 대한 철천지의 원한도 없는 것 같고..
.”
처음으로 태양광무존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땅을 짚고 있던 양손이 확 쥐어져 아귀 틈으로 풀들이 바스라졌다.
많은 수는 아니었으나 몇 백배의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무거운 비중의 인물
들과 마주했던 그의 강호행.
날짜로 환산한다면 흘려보낼 정도로 짧지만 결코 짧다고 얘기하기 어려운
태양광무존의 무림 궤적 중에 아직까지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성이 ‘일’씨라는 것 외에는.
“무림인으로 살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소이까? 환
검존 노선배같은 노명숙들도 짊어지고 있는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나같은 애숭이야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 말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알고 싶은게 이런건 아니었지 않소!”
완곡한 거절의 대답.
그러나 백무량은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다면 이해가 되지. 음...”
태양광무존은 궁금했다.
뭘 안다는 건가?
설마 화산에선 벌써 그들을 알고 있다는 건가.
질문을 하려고 할 때 백무량이 먼저 말을 해주었다.
“자네의 무공은 분명 뛰어난 것이었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내안까지 떠 있
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뭔가 작위적이야. 자네의 샘솟는 열정적 자
아를 억압하는 무언가에 스스로가 눌려 무학 자체가 도식적으로 변해 있다
는 거지.”
꽝!
이 무슨 말인가.
작위적이고 도식적이라니!
비록 무학의 기초와 피구파일방지학은 가르침과 서적을 통해 얻었지만 그
이후의 길은 스스로 걸어왔다고 자부해온 태양광무존이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위무위종의 깨달음 같은 건 누가 알려주거나 책을 본
다고 해서 알게되는 지식같은게 아니다.
위무위종은 심득이니까!
무어라 변명을 하려는 태양광무존에게 백무량이 고개를 저었다.
“분한가? 분할 거 없네. 자네의 마지막 심득, 위무위종에 대해 무어라 말
하고 싶겠지. 그런데 노부는 오히려 위무위종을 접하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
이네. 자네의 도식적 무학관에 대해 말이야. 위무위종? 그건 어디까지나 유
도된 심득이라네. 고도의 심리유도... 유도자의 능력을 무서울 정도로 뛰어
날 것이야. 무학 면에서나 심기 면에서도. 그렇지만 자네는 무섭지 않네.“
충격으로 멍해 있는 태양광무존에게 결정타와도 같은 백무량의 마지막 말이
날아왔다.
“위무위종을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부뢰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
지? 착각하지 말게. 자네는 절대로 부뢰를 깨지 못해! 도인된 깨달음 가지
고 창공을 노니는 영혼을 잡는다는건 어불성설이야!”
꽈꽝!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흔 살의 인생 자체를 부정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건간에 기분
이 엉망일 것이다.
태양광무존처럼 자긍심이 높았던 사람이라면 정도는 더 심하리라.
그는 느닷없이 벌떡 일어서서 미친 사람마냥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백무량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
무량의 시선도 착잡하게 굳어있었다.
그 사건으로 백무량의 위치는 확고한 것이 되었으나 태양광무존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이할 사실은 백무량이 태양광무존과 나눈 대화를 아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즉선검인과 계양을 제외하고 말이다.
[10832] [연재] 삼류무사-57 첨부파일 :
첫 출장
타다다닥.
여명도 움트지않은 이른 새벽 이었건만 청해복룡표국의 공기는 심상치 않았다.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놓은 화섭자들로 인해 광장에 운집해 있는 사람들의
침통한 표정이 입가에 뭉쳐있는 근육까지 생생히 보일 정도였다. 장내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음영진 의태성.
모인 사람들의 수는 대략 삼백여명.
복룡표국의 이름으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집결했다는건데 닭도
울지않은 이른 새벽에 무슨 일이 있어 영외 거주자까지 전부 소집해 있는걸까.
그것도 슬프디 슬픈 표정으로 말이다.
표물운송은 아닐 것이다.
광장을 굽어보는 복룡전의 계단에 오연히 뒷짐을 지고 서있는 표국주 이효의
돌처럼 굳은 얼굴은 비통함을 애써 자제하고 있었으니까.
삼백에 가까운 사람이 모여 있어도 저마다의 위치를 바꾸는 발소리가 급박하게
들릴뿐 단 한마디의 잡담을 흘리는 이가 없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광장의
공기에 움츠러들 법 한데도 표사들의 눈에서 발산되는 신광은 그런걸 초월할
정도로 강렬했다.
정문 밖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들어오는게 보였다.
"아이고, 이게 대체 무슨일이야! 이번 표행은 일도 아니라면서 산수구경 갔다
오신다고 하시더니!"
군자소의 부인이 딸의 부축을 받으며 복룡표국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이번
표행에 나섰던 삼조의 가족들이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그들은 망연히 표국주 이효를 바라보았다. 표행중 일이 생겼다 함은 백에백
도적을 만난 경우겠고 표사들이 귀환하기 전에 가족들을 부른 것은 인명의
손실이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일까? 어제까지는 그렇게 친했던 사람들이건만 지금의
심정은 모두 매한가지다. 우리 영감, 내 남편만은 무사하기를, 차라리 옆에
서있는 아이 엄마의 식구가 변을 당했기를...
두 손 모아 가슴에 얹고 중얼중얼 기도를 올리고 있는 표사 오윤태의 양친들,
아이가 우는 줄도 모르고 아무나 붙잡아서 이것저것을 묻고 있는 표사
정윤모의 아낙. 제 칠조의 말석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격동을 억누르는
표사 남효현은 부자가 복룡표국에서 함께 손발을 맞추게 되었다고 몇 달 전에
돼지 한마리를 잡았던 남정호의 아들이었다. 그의 눈에 늙은 어미가 보였다.
금슬 좋기로 양양을 오시했던 부모님. 어머니의 주름진 입술은 쉴새없이
경련을 보이고 있었다.
최악만 아니라면, 그저 생환만 가능하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
삼조의 가족들은 놀라운 자제력으로 이효의 말을 기다렸다. 군자소의 부인이
한차례 소란스러운 몸짓을 보였을뿐, 장내의 질릴만큼 엄숙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파생되는 악상념을 억누르려는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을 기다리는 자들과 말을 하기 어려운 자의 답답한 대치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공유 불가능한 안타까움과 기대로 꽉 차서 금방이라도 산산히
터져버릴 것 같았다.
표국 사람들의 움직임이 어느정도 질서를 회복하자 장내의 분위기도 기다림
이란 색채를 명확히 띄었다.
물론 이효의 아교로 붙여놓은 듯한 입의 개방이었다.
이효가 내려선 복룡전의 계단 위로 미동도 없이 서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무릇 조직의 수장 뒤로 서있다 함은 호위 차원에서 보이는 경우인데 이들
아홉명과 표국주와의 거리는 일장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호위의 최대거리를
아무리 넓게 잡아도 일장이라면 지나치게 먼 거리.
그렇다면 감히 표국주의 배후, 그것도 계단 위이기 때문에 좌중을 한눈에
담아낼 수 있는 높은 곳에 위치한 이들 아홉은 누구일까?
그 중 가장 오른편에 서있는 인물. 수련시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싱글거리거나
삐져서 쫑알대기 일수인 단사민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그 옆의 장추삼, 하운...
이들은 실회조원이었다.
실회조원들이 일반표사와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원단 명절을 세고 표국 내의 모든 표사들이 - 물론 표물 운송중인
사람들은 제외하고 - 시무상견례를 하는 정월 초엿새날 아니라면 없을 것이다.
아! 한가지의 경우가 더 있다. 그건...
"모두에게 소식 하나를 전하려 이른 시간이지만 황급히 여러분을 소집했소."
공력을 실은 이효의 목소리가 드넓은 표물광장에 울려 퍼졌다. 본래
우렁우렁한 데다가 내공의 힘까지 덤으로 받아 산정에서 울려퍼지는 메아리
와도 같은 반향을 불러오는 그의 음성은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었다.
색채로 표현하자면 청자색이라고나 할까.
"유월 보름에 사천성 유현서원으로 표물운송을 떠났던 우리 복룡표국의
제삼표두 군자소 휘하 열여섯명이 사천의 오대산에서 표물을... 탈취당했소."
여기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좀체로 발동시키지 않는
복룡표국의 비령집결 이니까.
문제는 그 뒷말이다.
'몇 명이나 다쳤다고 합니까', '흉수는 밝혀졌습니까'... 눈빛으로 대신한
삼백여명의 물음들.
"흉수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청의를 입은 열세명의 남자들이고 녹림도는
아니라고 했소. 또한 표물에 뿌려져 있는 나리기미를 쫓는다면 어렵지 않게
그들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표국주는 말을 돌리고 있다. 청의를 입은 열세명? 그건 어차피 경사가서
장서방 찾기와 진배없는 무의미한 얘기다. 나리기미, 이것 또한 복룡표국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군자소의 아낙을 비롯한
가족들도, 복룡표국 사람들도 한마디의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표국주 이효가
본래 자신이 말을 할 때 끼어드는 걸 싫어해서도 아니요, 이들의 인내력이
남달라서도 아니었다.
이들은...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후우!"
말을 이으려던 이효가 큰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질만큼 깊은 한숨만큼이나
가족들의 가슴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상자는 물론이고 사망자도 있을 수
있다는 암시처럼 그가 토해낸 한숨은 무거운 것이었다.
꿀꺽.
누군가 침을 목젖으로 넘겼다. 워낙 조용해서 평소라면 묻혀버렸을 성 싶은
소리가 반경 두 장 이상까지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군자소 표두와 여덟명의 표사들, 그리고 같은 수의 쟁자수들은
마지막 한순간... 까지도 최선을 다해 표물을... 지키려... 했다, 고 하오."
마지막의 '하오'는 잘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한순간!
"열 일곱의 생명은 우리의 가슴에...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오!"
절규였다. 차분했으나 심장 밑바닥에서 끌어올려진 이효의 목소리는 목이
쉬도록 소리내어 지르는 외침보다 처절하게 광장을 가득 메웠다.
"크흐흑... 크흑"
"우우욱..."
졸지에 유가족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소리죽여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표사들은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손바닥을 파고 들도록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하늘을 바라만 보았다. 그들의 눈에 주루가 점점 커져
한줄기 눈물로 화해 떨어져 내릴때 군자소의 아낙은 혼절했다.
"아악! 어머니!"
"으허헝!"
그녀의 혼절을 기회로 유가족들은 일제히 감정이 폭발하여 가슴 저린 통곡을
쏟아내었다. 혼절한 군자소의 아낙에게 다가간 이효가 그녀의 등에 장심을
붙이고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역시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장추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까짓 표물이 얼마나 탐이 나기에
열 일곱의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버지를 이들에게서 빼앗아간단 말인가. 남을
두들겨 패보기도 했고, 남에게 두들겨 맞아본 적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젊은 날의 치기였고 생명과 연관될만큼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기에 눈앞의
생경한 광경은 비현실적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잠시 후 유가족들을 별채로 인도한 이효가 다시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표사들은 모두 무릎을 꿇었다. 엉겹결에 따라 무릎을 굽히는 장추삼을
단사민과 하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우리는 울지 않는다!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럴 겨를이 없다!"
이효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구호처럼 세 구절을 외치자 삼백여명의 인원이
우렁차게 화답했다.
"우리는 울지 않는다! 우리는 슬퍼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럴 겨를이 없다!"
무릎 꿇고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지르며 외치는 그들의 모습은 비장함을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한 장의 양피지를 빼어들은 이효가 그것을 높이 쳐들었다.
"보이는가! 이 선혈을! 금방이라도 양피지 밖으로 타고 흐를 듯 붉디붉은
마지막 외침을!"
그가 빙글 돌아 아홉명의 실회조원을 바라보았다. 표국주가 표사를 올려다보는
기형적인 구도였으나 그런 것에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을 약어로 남긴 군표두가 마지막으로 남긴건 뚜렷한 문자였다.믿는다!
(信)이 하나였다! 그가 남기고 간 한마디의 의미를 잘 알거라 믿는다.!"
삼백의 우렁찬 화답이 또 이어졌다.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참으로 가슴 뭉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표사들과 쟁자수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당소소의 꽃봉오리같은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은 평소처럼 나직하지도, 나른하지도 않았다.
"핏값은 핏값으로!"
"와아아!"
서릿발같은 음성에 모두가 환호했다.
* * *
"연출이지."
고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굳이 탓할 필요도 없고 간여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건 연출이야."
장추삼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한시진 가량의 광장행사(?)를 마치고 십삼조
대기전에 모인 실회조원들은 고담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있었다.
"생각해봐.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며 퇴근길에 술한잔 걸치던
사람들이 죽었단 말이야. 그것도 한두명도 아니고 열일곱명이 한꺼번에. 병
걸렸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단지 표물을 운송했다는 거라 이거지. 한마디로 말해서 직업때문에 죽게
된건데 이들 중에 내일이면 또 표물을 운송해야 할 사람들이 다수 있고 또
그게 직업이니 어쩌겠나. 좋건 싫건간에, 누가 죽었던 살았던 일을 해야 먹고
살것 아니겠어?"
북궁단야는 검을 꺼내 한지로 조심스레 닦고 있었고 당소소는 유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암기주머니를 점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적괴는 침상 머리맡에
앉아 머리를 벽에 부치고 손마디를 딱딱 소리나게 꺾는걸 보면 이런 일에 별반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불안감에 벌벌 떠는 표사들을 표물운송 시켰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겠나. 표사라는 직업 자체가 대리전을 치르는 무사랑 크게 다를 바
없는 판국인데 말이야."
정말 바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표국에 물건을 부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의뢰인의 대부분은 혹시라도 벌어질 산적 따위의 습격이 겁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비싼 돈을 주고 운송을 의치하는 것이니 표사가 용병무인과
다를 바 없다는 고담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해서 이런 장치가 필요한거지. 니들도 죽더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마음을 보낼 것이고 슬퍼해 준다. 복수도 확실히 해준다. 그러니까 걱정말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해라... 뭐 이런거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단도직입적인 감정 호소에 약한 법이거든. 신원 확실하고 무공실력 좀
있는 사람들을 붙잡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이 또 어디 있겠나."
"의리?"
"그렇지. 강호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니까."
장추삼은 잘 모른다. 무인들이 명예나 신의, 의리 따위의 단어에 목숨까지
건다는 사실을.
사이비 종교행사 같았던 아까의 일에 그 역시도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는건
그 역시도 무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지청완은 눈을 감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대마몰사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심각했다.
"이상해, 이건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야."
"뭐가요?"
단사민이 냉큼 물었다.
"삼표두가 보낸 양피지 내용 말일세.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야."
어느샌가 지청완의 한마디는 이들에게 큰 의미로 자리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실회조원들과 섞였으며 금새 그들을 압도했다. 나이만으론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리라. 지금만해도 고담이 뭐라고 하든 각자의 일에 여념이 없었던
북궁단야와 당소소의 손이 일제히 멈추었고 적괴의 두 눈도 번쩍 떠졌다.
"우선 표물탈취에 관한 건데 표사 일행이 당한건 순식간이라고 했다네.
강호상에 그들 열일곱을 반항 한 번 없이 제압할 조직이 몇이나 될까?
살수조직? 그건 더더욱 말이 안되지. 그런 조직이 표물 내용도 모르고 일을
도모했을 리가 없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이번 표물의 가액은 이백냥이 채
못된다고 하네. 적지 않은 액수라고 한다면 할말이야 없지만 열일곱의
목숨값으로 친다면 수고비도 안나오는 액수야. 두번째로 군자소 말인데. 그가
아무리 불굴의 의지와 책임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해도 숨통이 끊어진
이후에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그가 사마검군과 하운이 앉아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동의를 구했다.
'예의'란 것이 무언지를 온몸으로 실현하고 있는 둘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지청완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물론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청완이 말을
이었다.
"촌각의 시간에 일, 이류 무인 아홉을 고혼으로 만든 집단... 그들이 군자소의
목숨을 완전히 끊지 않은 이유가 뭘까? 실수? 한두명이라면 몰라도 개개인이
일류를 상회하는 열세명이 똑같이 심장박동을 인지하지 못했다는걸 기대하기
어렵지."
"노선배의 말씀은..."
사마검군의 말을 자르며 지청완이 얘기를 이어갔다. 내색은 안했지만 여덟명의
실회조원들은 마음 한구석이 스산한 한기가 몰아치는 것 같아서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의문점은 또 있다네. 왜 모두들 죽였을까?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열일곱을 상대하면서 상해조차 입지 않을만큼 가공할 무위를 지녔다는 걸
알걸세. 그런 자들이 표물이 목적이라면 일행을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탈취하면 그만인데 굳이 열일곱의 목숨줄을 끊음으로서 복룡표국과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극악의 사태로 사건을 몰아간 이유가 뭘까? 원한? 원한이
개입되었다면 좀더 직접적인 공격, 예를들면 표국에 막대한 물질적 또는
신용적 피해를 주는 표운을 택해야만 했을거네. 증거인멸? 그것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건 군자소의 경우처럼 이들이 살수확인을 감행하지 않았고, 말과 마차도
그대로 놔두었다는 걸 보면 알게 되지."
쿠쿵.
이건 확실히 충격적이면서도 면도날처럼 냉철한 분석이 아닐 수 없었다.
일류급을 상회하는 열셋의 무인이 너무도 절실히 돈이 필요해서 눈에 보이는
표물을 털었다. 오대산의 이름모를 산비탈이고 야밤이라 목격자도 없고 해서
그랬는데 별것 아닌 표사무리들이 반항 비슷한걸 한니까 욱해서 모두 죽였다.
근데 알고보니 표물은 돈으로 환산하니 이백냥도 못받는 수준이었다?
돈에 굶주렸으면 말은 왜 그냥 두었는가? 마차야 번거롭고 복룡표국만의
표식이 여기저기 박혀 있으니까 포기한다고 생각해도 준마 한 필과 일반마 네
필이면 즉석에서 팔아치울 수 있는데도 말이다.
[10845] [연재] 삼류무사-58 첨부파일 :
"으음..."
심드렁하던 고담도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노선배 말씀은 이번 일에 어떤 음모가 있다는거 아닙니까? 크크... 그딴거
백날 생각해봤자 도움 안되요. 나리기미는 지우기 힘든 냄새니까 찾아가서
일단 족치고 보는거에요. 매에 장사 없다는데 제깟 것들이..."
적괴가 툴툴 웃었다. 그는 체질적으로 음모니 배후조종 따위의 말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이들의 반응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장추삼의 마음은 착잡했다.
어쨌든 한솥밥을 먹던 열일곱의 목숨이 사라진 마당에 고담을 비롯한 실회조원
들의 반응은 냉담한 것이었다.
한술 더 떠 지청완은 사건을 분석까지 하고 있었다.
'이건 좀 심한게 아닌가!'
현명한 사람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대비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삶은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에 비추어볼때
매정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사회는 그러나 인간적인 사람들이
거주할 공간을 축소하고 제한하여 다수의 정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냉엄한
이성파들에게 양보와 포기라는 이름 하에 정당한 권리를 차압당한채 이어져
오는게 현실이다.
장추삼은 이상론자가 아니었다.
몽상가도 아니었고 박애주의자는 정말 아니었다.
하지만 이순간 고담을 비롯한 실회조원들에게 느끼는 서운함과 지청완의 낯선
모습에서 자신과 그들과의 좁히기 어려운 거리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가 배제된 상태에서 여덟의 실회조원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표물 탈취에
관한 의문'을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여러가지 대응책을 내놓고 있었다.
실회조원이라면 마땅히 끼어들어 의견을 개진하진 못하더라도 같이 숙고해야
하련만 장추삼으로선 그럴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 공기를 마시자.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거야.'
대기전 문을 열자 이슬기를 머금은 바람이 훅하고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짙푸른색의 하늘은 얼마후에 여명이 밝아오리라 예언하는 점술가마냥 오만한
얼굴로 세상을 굽어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구름으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는 것은 비겁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소산일까.
'난 뭘까?'
아무 바위에나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장추삼이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자신이 원한대로 화끈한 보직을 얻었고 드디어 화끈함을 넘어서는 일에 투입될
절호의 기회를 목전에 둔 상황이다. 빼앗긴 표물을 되찾기 위해서는 빼앗긴
표물이 있어야 함은 기본이겠고 표물의 탈취과정에서 사상자가 없는건 말도
안되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꼬박꼬박 돈만 챙기는 불로소득자를 기대한게
아니라면 의당 부여받은 첫임무에 전의를 불태워도 시원치 않은데.
'난 도대체 뭘 바라고 이곳에 지원했던건가!'
돼지처럼 실룩거리는 부인네들에게 이쁘네, 잘어울리네 갖은 아양을 떨며 비
단을 팔아먹는 하대보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고서를 정리하느라 식은땀을
빼는 조명산보다 잘 풀린 신세라고 자부해 오던 터였다. 배금성의 골치아픈
삶도 부럽지 않았다. 그가 대장장이같은 위조신분 말고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서 세상을 속이면서 무얼 도모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피곤한 삶임에
틀림없었다.
'이건 아니잖아. 대보녀석과 명산이보다 못하고 금성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사람이 다쳐야만 빛을 보는 직업이라면 차라리 속 편하게 직업용병을
선택하는게 나은거야, 젠장!'
실회조원들을 복룡표국의 자랑이자 영웅이라고 항간에서는 말한다. 장추삼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폼나고 돈많이 준다기에 주저없이 택했을뿐 영웅이니
따위엔 관심조차 없었다. 영웅을 위해선 난세라는 필요불가결한 토양이
요구되고 난세쯤 되려면 한두명의 목숨가지곤 어림도 없다. 영웅은 분명
사람들을 위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희망을 주어야만 한다.
그럼 절망 뒤에만 오는 희망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연 사람들을
위해 영웅이 있는 것인가, 영웅을 위해 사람들이 있는 것인가?
"처음 본 비극이라 무척 놀란 것 같소."
찌푸린 얼굴을 돌려보니 어느샌가 하운이 나와 있었다. 찬찬히 움터오는
여명을 등 뒤로 받고 있는 그의 모습은 광휘에 둘러쌓인 선계의 인물과도
같았다.
"그런 광경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휴우."
하운은 선한 눈으로 장추삼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폈다. 기분나쁜 순간이련만
그의 큰 눈을 보노라면 화같은건 제풀에 죽어 없어질 것이다.
빤히 장추삼을 들여다보던 하운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얼마나
기운찼는지 없는 먼지라도 만들어서 날릴듯한 기세였다.
"내 생애 첫 살인은 사십이일 전에 기록했다오. 실회조원으로서 첫 출장에
생애 첫 살인을 한 것이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만 그때의
기분이란...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평생동안 살인같은건 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었다오. 또 서른의 나이까지는 그것을 지켜왔었고.
신념이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 가치기준일지 모른다는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이자는.
"아쉬워서 들어온 곳이고 그래서 고마워해야 하거늘 처음본 십삼조의 인상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소. 인상착의 때문에 느낀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장형도 알다시피 실회조원 가운데 특별히 혐오감을 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지 않소.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나누라면 전자의 경우로 기우는
편이지."
강시는 솔직히 후자로 놔야겠지.
"분위기도 무인집단의 일반론에 비추어 본다면 화기애애한 편이었고... 그러니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그들과 나를 가르는 이질감의 정체가 무언지 파악되지
않았고 한때는 내가 사회부적응자는 아닌지 남모르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오.
장형에게만 하는 말인데 내 청춘은 큰 부분이 도려내어 졌다오. 후후..."
장추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나? 이거야말로
동병상련의 공유감 아닌가. 빌어먹을 동굴이 새벽햇살과 겹쳐졌으나 뒤따르는
하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신기루같은 연상을 털어내었다.
"가입하고 이주일이 채 못되어 표국에서 의뢰가 들어왔다오. 알다시피
호북에서 발생되는 표물탈취건 중 어렵다 싶은 것은 복룡표국에 제의돼 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있지 않소. 그리고 첫 살인... 북궁형도 보기에 얼음장
같은 견고함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을 뿐이지 알고보면 꽤나 서투른 면이
있었소. 당소저의 잔인한 손속은 무림이라는 거친 세계에서 여인의 몸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구책이라 생각되었소. 출장을 돌아와서도, 조원들과 얘기하고
술자리에 어울려봐도 이질감이란 단어는 배 띄우기 조차 어려운 강처럼 내
마음속에서 격랑을 일으키고 있었다오. 그런데 오늘!"
'오늘'을 힘주어 말한 하운이 옅게 웃었다.
"오늘에서야 해답을 알게 되었다오. 그들과 난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게 뭔지 알았을 때야 천지를 덮었던 먹구름이 일순간에
걷히는듯 했소."
하운은 어서 물어봐라, 하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다면 아수라라도 뜻에 따르리라.
"뭔데요? 그 차이라는게."
"간단한 거였소. 무인으로서의 관록이라고나 할까?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에도 그들의 언어는 나와 다른 색깔을 가진 것이었지."
그의 미소는 자책하는 듯이 얄궂게 변해갔다.
"죽음과 정면으로 대치해 보았던 사람들과 산속에서 자연만 벗삼아 살던 나를
비교했다는게 얼마나 우스운지... 무공의 고하를 떠나서 그들의 마음자세야
말로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의 기본이라는걸 몰랐었던 거지요."
그래서 열일곱의 목숨보다 현실을 중시한다는건가? 하운의 말은 일견 장추삼의
기분을 풀어주는 듯 했지만 깊게 생각하면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무인이란게 그렇게 삭막한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는 거라면 난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싶소. 그게 뭐야? 관록? 관록이란거 조금더 붙었다간 마음까지
얼어붙겠군!"
"내 말뜻을 곡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됐소! 난 들어가 봐야겠소이다.!"
툴툴거리며 장추삼이 대기전으로 들어가자 하운이 어이없어 뒷머리를 슥
긁었다.
"세상사 자신의 뜻데로 전개된다면 얼마나 좋겠소..."
뜻모를 그의 독백이 여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파견할 조원은 실회조 내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하는걸
원칙으로 한다. 예외라면 삼인 일조의 원칙으로 했던 사람 수가 표국주 이효의
부탁으로 이번만큼은 네 명을 보내기로 했다는 거다.
"... 그래서 지 노선배님과 상의 끝에 네 명의 파견인원을 선출했다.
이번만큼은 복잡미묘한 성질이 배후에 짙게 깔려있는 것 같아서 선발인원이나
표국에 남는 인원이나 모두 긴장해야 하는걸 명심하고 결정에 이의있는 사람은
즉시에서 말하기 바란다."
약장수처럼 고담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당소소는 날렵한 홍의경장을
차려입은 폼이 '나 아니면 누가 가랴?'라는듯 했고 북궁단야도 자신은 갈 거라
믿은듯 세심하게 손본 칼을 검집에 밀어넣었다.
"우선, 조장에 당소소 소저가 수고해 주기 바라고..."
당소소는 벌떡 일어나 고담 옆에 섰다.
"북궁공자!"
북궁단야가 일어섰다.
"하운공자!"
특유의 선한 웃음과 함께 하운도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장공자!"
"엑! 말도 안돼!"
단사민이 화살같이 반격했다.
"고 아저씨, 정신이 있는거에요 없는거에요? 상대는 그냥 일류도 아니고
일류를 상회하는 고수급이 무려 열세명이나 있는 정예 중에 정예라구요.
쌈박질 잘하는 사람이랑 차원이 다른걸 알면서 그런 망언을 뱉다니!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라구요!"
'아니 근데 이것이!'
부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덟살이나 어린 녀석이 하는 말에 일일히 대꾸하는
것도 바보같은 짓이라고 자제할 때 지청완이 놀랍게도 장추삼을 대신해 말을
해주었다.
"그건 단공자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억지로 떠밀려서 들어온 곳도 아닌데
특별히 빼주고 어쩌고 한다면 월급 도둑과 진배없는게 아닌가? 표국주가
들었다간 경을 칠 소릴세."
'차라리 욕을 해라!'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구요. 회수행이 옆동네 비방들과 몽둥이 들고 한판
자리싸움 벌이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요. 같이 사신다면서 노선배께서는 걱정도
안되세요?"
"죽건 말건 지 할 나름이지."
당소소도 어이없는 눈빛으로 고담을 바라보았으나 가타부타 말은 하지 않았다.
고담이 결정한 일이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장공자 때문에 이의있는 사람 또 있는가?"
지청완이 좌중을 둘러보자 하운과 사마검군이 쭈뼛쭈뼛 나섰다.
"실회조 초행길로 다소 벅찬감이 있는 듯 합니다만..."
"그렇습니다. 지노선배. 장공자는 다음 기회에..."
삥-.
사마검군이 운을 떼자 하운이 합류했는데 제 딴엔 걱정해 주는 말일테지만
듣는 이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말이다. 결정적인건 단사민 녀석이 거
보라는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아닌가!
'상당히 열받네, 이거.'
"자네들은 내 말을 흘려들었나보군. 예외는 없어! 밥값을 해야 사람이지."
'아' 다르고 '어' 다른게 말이다. 저 놈의 노인네는 같은 의미의 말을 해도
꼭 요런 식으로 사람을 긁어대는 어휘를 골라서 사용하는 걸까?
"저... 노선배. 출장 안나간지 오개월도 넘은 사람이 여기 있는데..."
적괴가 오른손을 살짝 들며 이의를 제기했다.
"결정 됐다니까. 자네는 다음 기회에 우선권을 주기로 하지."
("표국의 안전도 병행하여 결정된 일이니 그냥 참게.")
성전합음! 목소리가 성대를 타고 흐르면서 동시에 전음을 보내는 초절정 수법!
적괴의 경악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지처완이 고개를 돌려 좌중을 바라보며
박수를 두 번 쳤다.
"자아, 그럼 이의 없는 걸로 알고 회수로 참가자는 서둘러 준비를 하도록.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네."
이게 무슨 회의인가? 통보지.
주둥이가 쭉 나온 단사민이 뭐라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회수요원이 아닌
사람들이 뒤따라 자리를 피해주었다. 회수요원들끼리 짧은 구수회의를
가지라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리라. 지청완을 마지막으로 다섯 명의
사내들이 줄줄이 자리를 비우자 당소소가 어색한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어흠! 고참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도 변변찮은 여자가 세분 공자를 통솔하는
입장이 되었네요. 북궁공자랑 하공자와는 손을 한번 맞춰 보았으니 전반적으로
지시할만한 건 없고 장공자는 이번이 첫 회수로이니만큼 몇 마디 당부할
사항이 있어요. 고깝다 생각지 말고 잘 들어주길 바래요."
차분하지만 약하지 않고 할말은 다 하면서도 상대에게 건방지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녀의 말을 듣노라면 사람이 이렇게도 언어를
맛깔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는걸 알게 된다.
"실회로에 나선 이상은 개별 행동은 불가에요. 칼로 밥을 먹는이 치고
간섭이나 통제를 싫어하는거 잘 알지만 이건 비무행이 아니라 빼앗긴 물건을
찾으러 가는 거에요. 목숨을 건 사투가 불가피하다는 걸 명심해야만 되요.
그리고 직함 밖에 없는 조장이지만 일단 표국문을 나선 이후부터는 본녀의
지시를 따라줘요. 언인인주부지이하자위준(言人人主不知以何者爲准 ;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니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해야할 지 모르겠다)이란 말처럼 입이
많으면 그만큼 말도 많은 법, 빠르고 신속한 행동을 위해 쓸데없는 잡음을
되도록 줄이자는 의도에서 조장이 있는 것이니 이해해 줄거라 믿어요.
마지막으로 적을 만나거든 알량한 인정일랑 거둬야 해요."
차분하던 그녀의 말에 스산한 냉기가 깔렸다.
"어줍잖은 동정심 때문에 동료의 가슴에서 피가 솟는걸 보고싶지 않다면!"
[10866] [연재] 삼류무사-59 첨부파일 :
"정말 송장 하나 치우려고 이러시는 거예요?"
단사민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하니 말뽄새가 조금 사납고 눈초리가 조금
올라가서 인상이 조금 나쁘다고 해서, 단지 그것때문에 한 사람이 죽으러
간다면, 그걸 알면서도 오히려 조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어리고 힘없는
입장이나 기필코 막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정의감은 있는 그였다.
"고아저씨!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예?"
고담도 별달리 할말없는 처지였다. 그가 머리 속에 짜넣었던 인원구성도
장추삼은 아니었는지라 자신을 채근하는 단사민의 행동거지가 귀찮기만 했다.
"왜 나한테 이래? 할말 있으면 지노선배께 하라구. 난 노선배의 의견을 쫓은
죄밖에 없으니까."
왼손으로 귓구멍을 후비적 거리면서 고담이 한발 빠졌다. 실회조원들의
쉼터이자 식당으로 이용되는 곳에 모인 인원은 모두 셋. 지청완과 적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단사민의 눈길이 사마검군을 찾았으나 의혹어린 그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설마 장형하고 처음 만난 날 했던 내기땜에 그러시는건 아니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 바보냐?"
여전히 고담에게 의혹의 시선을 던지던 단사민은 급기야 은자 두 냥짜리
내기까지 꺼냈다가 퉁박을 받았다.
"이해 안되니까 그딴 바보같은 소리라도 꺼내본거죠, 뭐!"
지지않고 단사민이 맞받아치자 고담으로선 '허참!'밖에 할말이 없었다.
"허 참!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장공자를 챙겼다고 그러느냐? 둘 사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웃겠다."
"챙기긴 뭘 챙겼다고 그래요. 사람 목숨이 달린 문제니까 이러는거죠. 일초
반식의 제대로 된 무공도 구경해 본적 없으면서 무슨 담력으로 실회조에
들어온건지... 표국주도 그래, 아무리 생명의 은인의 아들이라지만 화끈한데가
좋다고 해서 여길 들여보내주면 어쩌란거야? 이제 봐요,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말 나오게 생겼지."
"아주 니가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라, 다해."
둘의 실갱이를 망연히 바라보면서 사마검군도 떠오르는 의혹을 풀 길이
없었다. 형식적인 절차이지만 선발인원이 확정되면 표국주 이효에게 제가를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왜 형식적인 절차라는 얘기인고 하니 실회조 창건
이래 재가를 올리고 표국주가 그걸 문제 삼은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주 흔쾌히 재가가 났다!
표국주 이효가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반드시 말렸어야 했는데 재가가
났다는거다!
이효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가 꽤나 강팍한 사람이라고 생각들 정도로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그의 얼굴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무엇이 있다. 그를
어느정도 알게되면 강한 인상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럽고 친근감있는 성격에
한번 놀라게 된다. 일년정도 꾸준히 그를 만난다면 병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공과사를 구분하는 그의 내면적 성품에 또한번 놀라게 된다.
그런 이효가 재가를 냈다...
사마검군은 장추삼의 전신상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오척 단구는 아니지만
육척엔 분명이 못미치는 보토의 키, 전반적으로 봐줄만은 하나 결코 두 번
돌아볼 정도는 아닌 얼굴, 양 옆으로 찢어져서 날카롭기는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눈, 적당한 체격, 다소 건방지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사내다움이
베어있는 성격, 적당한 체력...
어떻게 대입시켜 보아도 결론은 '평범'이다. 펑범하다는게 나쁜건 아니다.
평범한 것이야말로 만상을 이루는 기본이 돼 주므로.
'이곳에서 평범을 미덕으로 생각한다면 살아남기 힘들지.'
이곳은 무림이다. 무림에서도 꽤나 위험한 실주회수조의 요원으로
실주회수로를 나간다는건 어지간한 실력 가지고도 생사를 장담하기 어렵다.
하물며 평범은 말할 나위없다. 일반적으로 요원을 뽑을 때 조금이라도 듬직해
보이는 사람이 동료가 됐으면 하고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당소소같이
노련한 여걸도 장추삼이란 이름이 불렸을 때 순간적으로 흔들렸었다. 기묘한건
하운과 북궁단야의 반응이다. 사마검군이 보기에도 대단함을 물씬 풍기는 두
고수는 자신들의 무공실력을 맹신하는 것인지 장추삼의 선발에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하운이 한번 이의를 제기했으나 예리한 사마검군의 눈은
피해가지 못했다. 별뜻없이 남들처럼 그저 한마디 던졌다는걸 그는 하운의
눈빛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자고로 우군측에 애물단지가 하나 있는 것은 적군 열명보다 부담스러운
법이거늘, 그 정도의 나이라면 알만도 하거늘 이들 둘의 여유는 어디서
기인하는가? 혹시 장추삼이 내력을 숨긴 고인이 아닐까? 반박귀진쯤 되는
절정고수...
말도 안되는 가능성을 일차적으로 제거하고 사마검군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지 노선배를 비롯해서 네명과 당소저가 그런대로 친하니까... 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가 생각해낸 두번째 경우는 이런 것이었다.
장추삼으로서는 한번의 실회로도
나가보지 못했으니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날 - 오늘 - 드디어 일이 터졌는데 시시한 산비적이 아니라 일류고수다.
이때 대음모가 벌어진다. 당소소, 하운, 북궁단야, 지청완, 이효가 담합하여
장추삼을 뽑는 척하고 일단 양양을 벗어난 후에 그를 어디든 쳐박혀 있게한다.
임무를 완수한 삼인은 돌아올때 장추삼과 말만 맞추면 상황 끝! 땀 한번 흘
리지 않고 장추삼은 훌륭한 실회조원으로 우뚝 서게 된다.
'아아... 내가 왜이러지? 심마구나, 심마!'
점점 유치해지는 자신이 싫어서 사마검군이 벌떡 일어섰다. 쓸데없는 말로
고담에게 추근거리던 단사민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 가시려구요?"
"잡생각 때문에 정신이 어지럽다. 목욕이라도 해야겠어."
"제가 등을 밀어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나도 묵은 때를 벗겨볼까?"
사마검군의 한마디에 모두는 장추삼을 잊고 세조를 하기 위해 나섰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사마검군이 앉아있던 자리에 어떤 물음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는데, 대체 뭐지?'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한게 아니야. 지금부터 벌어질 일들이 더 중요하다네."
지청완의 낮은 목소리가 아침바람에 실려 날아다녔지만 그 정도의 미약한
대답으로 적괴는 만족하기 어려웠다. 본래 깡마른 얼굴인데 인상까지 굳자 말
그대로 강시가 따로 없었다.
"노선배에게는 벌어질 일들이 중요한지 모르지만 나에게 지금 중요한건
노선배의 정체요. 공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절정을 바라보는 서넛의
인물에게 위압감을 안겨주는 인물 정도면 덜 궁금했을지도 모르오. 노선배의
덩치가 워낙 커서 그런가보다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오늘 성전합음을
직접 들었소. 불문의 혜광심어와 동격이라는 지고지순한 수법이자 일반
전음술중 육합전성보다도 위라는 성전합음을 말이오. 대체 노선배의 정체가
뭐요? 그리고 내게만 능력을 보여준 이유는 또 뭐고요?"
적괴 일생에 한번에 말 많이 하기론 기록일 것이다. 말보다 주먹쪽이고 살살
달래는 것보다 입을 열게끔 두들겨 주는게 습관처럼 몸에 익은 적괴지만
눈앞에 서있는 커다란 노인에게 그런 짓을 했다간 초주검이 될 거라는 정도는
안다. 그래서 이렇게 묻는 수밖에 없다.
"표국의 안전이란건 또 무슨 얘기고요. 누가 복룡표국에 침범이라도
한답디까?"
"가능성의 이야기였네."
적괴는 난생 처음으로 위압감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평소에 자만에 가까울
정도로 다른 이를 내려다 보던 그에게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안건 며칠
되지 않았다.
지청완, 그냥 고수같은 거랑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인물이다. 실회조에서 강호
경험이 가장 많은 인물을 꼽으라면 물론 나이가 많고 이곳저곳 기웃거렸다는
고담일테지만 생사의 기로를 가장 많이 접하고 헤쳐나온 사람은 고담도 아니고
당소소도 아니고 사마검군도 아니다.
낭인 무사의 전설로 각인된 남자, 적괴였다.
생과사의 기로는 겪다보면 두쌍의 눈을 제외한 또하나의 눈이 열린다. 일컬어
'제 육감'이라 불리우는 본능의 눈. 무림에서 자신보다 수가 높은 고수와
결투를 한다는건 나 죽고 싶소와 진배없는 짓이다. 요행한 수? 그런건
이류무사쯤 되는 인물이 어쩌다 재수가 좋아 일류 정도의 무인을 이기는
경우에나 발생되는 현상이고 절정급의 고수들에게는 그런게 통용되지 않는다.
절정이라 함은 무공 외에도 마음가짐과 주변상황을 고려하는 안목까지
갖추어진 완성된 형태의 무인을 일컫기 때문에 '어쩌다'나 '순간 방심해서'
따위의 객적은 소리가 통할 리 없는 사람들이다.
적괴는 분명 패한 적이 없다. 그럼 상대한 고수들을 모조리 먹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도저히 상대가 안되는 무사나 머릿수와 맏닥뜨렸을 때 그는 병법상
삼십육번째의 방법도 서슴치 않았다. 낭인무사의 비애라고 할 밖에...
그나마 분수도 모르고 설치던 젊은 낭인들은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검을 들이밀다가 아까운 청춘을 마감하는 결과를 빚는다.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안목. 단 한수도 교환해보지 않고서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뒷배경없고 성격 또한 괴팍하다는 낭인무사 적괴가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지청완이라는
노인은 '절대로 상대해선 안되는 인물'이다. 아직껏 적괴의 전신에서 이렇게
강렬한 위험신호를 끌어낸 인물은 없었다.
"노선배의 말씀은 모두가 추상적이오. 애매하단 말입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라느니, 가능성의 얘기라느니...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주시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며 노선배께서 알고있는 사실은 뭡니까? 아하,
그러고보니 십삼조에 가입하신 것도 뭔가가 있기 때문이겠군요? 거기다..."
"됐네. 의문이란건 한번 달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파생되는 메아리와도 같다네.
조용히 지나간다면 다행이니 잊으면 그만이고 일이 터진다면 싫어도 알게 될
터이니 지금 노부가 말을 하든 안하든 결과는 대동소이한거야."
압박감에서 벗어나려는 듯 억지로 바락바락 대드는 적괴를 지청완이 가볍게
제지했다.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나마 고담과 자네가 가장
침착하게 국면을 이끌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서 그런 것이니 노인네의
쓸데없는 잔소리라 여기지 말고 명심해주게. 첫째, 자네는 회수조가 돌아오기
전까지 한발자국도 표국을 벗어나지 말게. 둘째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대가
자네보다 강하다 싶으면 몸을 피해야 하네. '유령장 적괴 정도라면' 하는
생각은 지금부터 머릿속에서 지우는게 나을거야. 자존심 상하더라도
이해해주게.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십삼조에서 노부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말길 바라네. 그 어디에서도 말이야. 알겠나?"
이해할 수 없었다. 강호십장 중 일인이라는 자부심 따위에 연연하지 말라는 건
알아듣겠으나 지청완에 대해 언급을 피하라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단순히
신비로우려고 하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정색할 필요는 없잖은가. 지청완의
어조는 절박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마치 알려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누가 있어 성전합음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초고수를 저어하게 하는가. 적괴가
알기로는 검정오존 가운데 최고수라 불리우는 남궁세가의 전대가주 파랑검객
남궁선유도 성전합음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섯해 전 남궁선유에게서
도망쳐 봤기에 그의 기도와 내공력을 대충 가늠해 볼 기회가 있었기에 내린
결론이다. 검정오존 중 최고수보다 강한 이가 눈앞에 있는 것도 놀랄 판인데
그런 초고수가 꺼림직해 하는 존재 또는 세력이라...
'가만! 검정오존보다 강한 고수라면 당금 강호에서….'
적괴는 스스로 내린 결론에 너무 놀라 멍하니 지청완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는 지금 전설로 불리우는 신화 속의 다섯 강자 가운데 한명과 마주 서
있는지도 모른다.
우내오존!
다른 말로 절대오존이라 불리우는 이시대 최강고수 중 하나와 말이다.
"호, 혹시 노선배의 별호가..."
지청완이 빙그레 웃었다.
"별호란 것들도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붙여진 뜬구름과 같은것.
강호상에서 얻었던 작은 허명과 남에 관해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소인배들이
멋대로 재단해 놓은 서열같은건 관심에 두지 말기로 하세. 그런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건..."
"당신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겁니다. 세속의 명리와 권세를
초월한듯 보이는 당신께서도 언젠가의 옛날에는 그것만이 인생의 전부라도
되는양 수 많은 고수들과 목숨을 담보로 한 생사결을 벌이기도 했었고 원하지
않았던 사건에 연루되어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을 베어넘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낸 숱한 세월이 당신을 고수로 키웠고 단련과 단련을 거듭한 끝에 정점에
서게 되었겠지요. 정상에서 바라보는 하계의 모습이 얼마나 작아보일지
모르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산의 초입이었다는걸 기억해야 하오. 지금
이순간에도 노선배의 눈엔 우습고 가치없어 보이는 허명과 서열에 목숨을 걸고
강호를 두드리는 수많은 이들이 있단 말입니다!"
적괴의 말인즉슨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못한다'일 것이다. 그러나 적괴는
모른다. 지청완의 과거를, 그가 강호출두를 하게 된 이유를.
"일반론이 세상의 보편적인 가치기준임에는 틀림없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렇게 일반적이지만은 않네. 보편적인건 분명 많은 수를 의미하지만
결코 전부를 대변하는 건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무슨 말인들..."
반박을 하려던 적괴가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사 모든 일이 일반론적인 순리대로 흘러간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지청완의 독백이 실체화한 감정처럼 적괴의 몸과 마음을 두드렸다.
'회한'이란 이름을 달고.
* * * [10872] [연재] 삼류무사-60 첨부파일 :
네 사람이 양양을 벗어나 사천으로 향했고, 한 사람이 양양으로 들어왔다.
* * *
다시한번 말하지만 청빈로를 처음 봤을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최고의 유흥로이면서도 알게 모르게 정감이 이는 곳, 그래서 홀로
산천을 떠도는 나그네라 할지라도 지나가는 아무라도 붙잡고 술한잔을 하고
싶어지는 거리. 온갖 향료내음과 창기들의 싸구려 지분냄새가 결코 역겹지만은
않은 곳이 바로 청빈로였다.
사내는 처음 본 청빈로의 친숙함에 적잖게 당황했다. 낯선 곳은 그 자리만의
특색이나 느낌이라는게 존재해야 옳은데 이곳은 그런 차별적인 특성이 없었다.
아니 너무도 많은 특성이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특성을 가려내기 어렵다고
얘기해야 옳을까.
태양은 매우 뜨거웠다. 밤에만 꽃잎을 피워내는 청·홍루들은 굳게 문을 걸어
잠궜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객잔과 잡화상들이 있기에 청빈로의 점심시간은
그런대로 활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바삐 돌아가는 곳이
뭐니뭐니해도 음식점이다.
"재미있군. 이처럼 번화하면서도 느낌이 좋은 도시가 있다는걸 미처 몰랐어.
그래서 이곳이 풍운의 핵으로 떠오른걸까?"
유백색의 장삼과 비취색의 옥선이 멋드러지게 어울리는 사십대의 사내가 홀로
중얼거렸다.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손으로는 연신 부채를 가지고 접었다 폈다 하는 장난을
하는 사내의 가슴엔 구름문양의 자수가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양쪽 소매에도 같은 문양을 발견하게 된다.
잠시 청빈로를 두리번 거리던 사내가 갈 곳을 정했는지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배가 고픈건 아닌듯 몇 개의 음식점을 지나쳤고
포목점도 지나 한 곳에 이르렀다.
까앙-까앙-
청빈로의 끝자락, 쇠두드리는 소리와 밖으로까지 후끈한 열기가 전해지는
이곳은 양양에서 솜씨좋고 견고한 철물을 만든다는 배가대장간이었다. 윗통을
벗어제낀 열 명의 인부가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었는데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이따금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인부들은 사내가 문가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을 붙이지 않았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입을 열라는 식이라 소비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일견 건방진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꿔 생각한다면
맡은 일에 충실한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어흠!"
사내가 부채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점잖게 헛기침을 했다. 이대로 서있다간
날을 새도 같은 장면의 연속일 것 같았다. 그제서야 일에 열중하던 사내들이
문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안쪽에서 풀무질에 여념이 없던 단단한
체구의 청년이 그들 사이에서 걸어나왔다.
"처마 밑에 종이 달려있는걸 모르셨나 보군요.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배금성은 수려한 용모의 중년인을 맞이했다. 기품있는 태도와 깨끗한 옷차림
으로 보아 돈푼깨나 있어보이는 외지인 같았다.
'종?'
사내가 고개를 들어보니 자그마한 종이 하나 처마 밑에 매달려 있었다.
근육질의 사내들과 어울리지 않게 작고 귀여운 종이었지만 표면에 양각된
문양의 섬세함은 경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했다.
"허허헛, 종이 매달려 있었는걸 미처 보지 못했구려. 그나저니 이건
예삿솜씨가 아닌 것 같은데... 자체 제작한거요?"
"철을 다루는 사람들인데 그 정도는 직접 만드는게 당연하지요. 손님께선 무슨
일로 저희 대장간을 찾으셨습니까?"
대장간 안을 휘휘 둘러보며 사내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이 곳 솜씨가 대단하다고 들었소. 인부들의 자세를 보니 소문대로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훌륭해!"
"고맙습니다. 그런데 용건이..."
"내 많은 곳을 돌아다녔고 수많은 대장간을 다녀보았지만 이곳처럼 진지
하면서도 특이한 분위기를 가진 대장간은 처음이오. 특히나 모든 것을
녹일듯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어느곳에서도 본 적이 없으리만치 강렬하구려.
저런 불꽃은 난생 처음으로 보는것 같군. 염왕계의 귀화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저만큼이나 압도적일까. 전설상에서나 등장할 법한 녀석이로고!"
대장간의 맨 구석에서 전체를 굽어보듯 오연히 불꽃을 날리고 있는 화로는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강한 화력으로 철을 성큼성큼 씹어대고 쇳무로 뱉어내고
있었다. 왠만큼 단단하다는 금속도 이놈에게 걸리면 몇 초를 버티지 못하고
흐물흐물 지조를 팔아치울 것 같았다. 그러나 구름문양의 사내 운조가
주시하고 있는건 단순히 강한 화력만은 아니었다.
"예. 저놈은 우리 대장간의 자랑이지요. 그렇지만 큰 덩치만으로 저토록 강한
불길을 피워내긴 어렵습니다. 화로를 자세히 보시면 불길 밑바닥에 깔려있는
모래들을 발견하실 겁니다. 평범한 모래같지만 모래더미 위에서 불이 타오르는
모습에 처음에는 모두들 놀라시더군요. 저것들은 조화은사라는 건데 우연히
이곳의 호수변에서 발견했답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조화은사. 모든 불꽃과 가장 가까운 대지의 덩어리. 스스로는 몸을 태우지
않지만 인접한 불길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기존의 화력에 몇 배의 위력을
더한다하여 예로부터 귀물로 여겨진 신비의 모래다.
"조화은사라... 어쩐지..."
풍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응대는 특별하지 않았는데도 불길의
정체를 알았다는 것인지, 조화은사가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다는 것인지
애매한 색깔을 띄었다.
'어지간히도 할 일 없는 한량인가 보군.'
용건에 대해 일언반구의 말도없이 한 식경이 다 돼가도록 이얘기 저얘기를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는 구름문양의 사내가 배금성에게는 무척이나 한가로와
보였다.
여유로운 말투까지도 말이다.
일반인들은 배씨철구포에 들렀을때 되도록이면 용건을 간단히 처리하고 떠난다.
장안에 말 많기로 소문난 그 누구라도 이곳을 들르게 된다면 찾아온 목적을
짧고 간단하게 용약하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배씨철구포 사람들에게 무슨
마력이라도 있어서 그렇게 되는건 아니다. 철 다루는 장인들에게 그딴 마력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근데 이 중년은 덥지도 않나? 땀한방울 안흘리네. 설마하니 몇천만냥을
호가하는 피서주라도 몸에 지니고 다니는건 아닐테고, 그렇다고 무공을 익힌
흔적같은건 보이지도 않으니...
배씨철구포 안은 덥다. 덥지 않은 철구포가 어디 있겠냐마는 온도의 차이를
비교한다면 초여름과 한여름 정도로 말해도 될 것이다. 배씨철구포를 방문한
사람들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는 이유 - 용건이 복잡한 경우엔 배금성이
철구포의 밖으로 한걸음 나가서 상대하지만 사람들은 그 거리조차 힘들어한다
- 가 바로 이것, 참을 수 없는 화로의 열기였다. 그런데 배금성과 한가로이
노닥거리는 구름자수의 중년인은 초가을 선들바람에 몸을 내맡긴 유생처럼
지극히 평온한 신색이 아닌가.
기실 운조도 배금성도 모르는 부분이 있었으니 그건 조화은사가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다. 그들은 조화은사의 가공할 화력에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힘들어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조화은사에게는 또다른 특징이
숨어있었다. 평상시의 조화은사는 무인이 만지건, 갓 돌이 지난 어린아이가
조물락거리건 간에 그저 고운 모래에 불과하지만 일단 그것이 불길에 닿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가공할 열기에 가려진 또하나의 비밀, 그것은 일반인들
이라면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파장이 발생한다는 사실이었다.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는건 아니었지만 견디기 힘든 불쾌감이 전신을 옥죄기 때문에
무공이 없거나 삼류의 수준이라면 조화은사를 감당하기란 역불급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기에 사람들은 막연히 더워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배금성이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운조에 대해 조금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련만 그역시도 위의 비밀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에
운조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더 둘러 보시겠습니까?"
그는 운조에게 친근감마저 일었다.
"그래도 괜찮겠소? 이거 영 미안해서..."
운조도 배금성이 마음에 들었다. 성실한 그의 자세와 꾸밈없는 성격이 다소
투박한 말투에 숨김없이 베어나왔고 무엇보다 느낌상 좋았다.
느낌상... 말로 형용이 안된다는 뜻이니 무조건적인 의미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깝구려."
운조가 문득 말했다. 화롯가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배금성에게 그의 말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니... 하하하, 주인장의 풍모가 하도 좋아 나온 말이니 괘념치 마오.
그냥 내 생각을 말하자면 만병을 일갈로 다스릴 대장군감이 하루종일
화롯가에서 철물들과 몸씨름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었소. 신경쓸거 없어요.
신경쓸거 없어."
손을 홰홰 내저으며 과장된 동작으로 호들갑을 떨자 배금성은 운조를 한번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화롯가로 갔다. 그가 몇번 문가를 힐끗 거릴때까지
호기심으로 가장되어 있던 운조의 눈빛은 점차 냉엄하게 변했다.
'정황적 증거는 맞아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비각주의 정보가 옳다고 봐야
할텐데. 조화은사에 기초부터 맞추어져 있는 화공을 위한 근골, 언뜻언뜻
내비치는 패기 역시 강호상의 여타 패마공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고...
그렇지만 이것들만 가지고 철화정련을 단정짓는건 어렵지 않은가. 무공에 관한
상식이 좀 있다는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웃을 일 아닌가!'
운조의 머리 속에서 작은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지금 그는 '철화정련'
이라는 말을 뱉었다.
기억력이 좋은 분이라면 배금성과 얘기를 나누었던 중노인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온 것을 생각해낼 수 있으리라.
철화정련! 그것은 위대한 여덟 개의 이름 중에 하나이고 세 개의 불가사의한
무공 가운데 하나이다.
팔위, 오존삼공이라 불리는 위대한 이름.
오존. 물론 절대오존을 일컫는 말이다.
삼공. 마교삼대지공, 또는 배화삼보라 칭해진 전설상의 세가지 무공. 삼백년
전에 천하를 거의 일통할 뻔 했던 명교의 삼대무공이 바로 마교삼대지공이다.
당시 명교의 파죽지세적인 기세를 관망할 수 밖에 없었던 구파일방이 마음을
끓이면서도 못내 나서지 못했던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힘의 열세였고 그것의
근간을 이루었던 토대가 바로 마교삼대지공이었음은 알만한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교주 서문탁과 좌우호법이었던 음양사들이 보였던 천애의
기학. 태평세조라고까지 불리었던 명교주 서문탁의 대정일검식이 그 첫째였고
좌호법 음면사의 손에 펼쳐졌던 일천마라형이 둘째요, 우호법 양면사가
선보였던 초극강의 열양지공이 바로 세번째 배화삼보라 불린 철화정련이었다.
삼백년이 지난 지금, 그 시대를 풍미했던 무공의 위력을 가늠하기란 쉽지않다.
어차피 사람의 입이란 족제비보다도 간사하고 호빵보다도 잘 부푸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 세사람의 경인할 무공은 하늘을 덮고 대해를 집어삼킬 정도로
과장된 측면도 있고 무공의 형태 역시 글자로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아서
당시의 무인들이 구전으로 전한 - 이것 또한 터무니 없는 것이 마교지겁
당시에 참전했던 수많은 무인들 가운데서 마교 삼대지공을 직접 목도한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 중구난방식의 술회를 토대로 '짐작' 정도만 할 뿐이니 말
그대로 신화 속의 무공이라 하겠다.
<예상은 했었지만 이정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나도 내 옆에서 장곤을
꼬나쥐고 전방을 주시하던 사대금강들도 눈앞에 펼쳐진 거짓같은 현실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터무니 없게도 아미파의 대장로이신 명법사태
노선배와 청성 장문인 무양자는 패퇴하였다. 두분이 체면 불구하고 합공을
전개했음에도 말이다. 통탄할 일은 그분들의 앞에서 오연히 뒷짐을 지고
서있는 이의 정체였으니 그는 마교주 서문탁이 아니었다. 우호법 양면사였던
것이다. 명법사태의 장곤은 아미의 비전절기인 풍구낭첨의 초식으로 양면사의
전방을 압박해 들어갔고 무양자의 검도 청성 심득의 완성이라는 성화요원의
수법으로 양면사의 배후를 다그쳤었다. 전방과 배후를 점유당한 상태에서 구파
중 두개문파의 절기를 받아낼 사람이 몇이나 있으랴. 그러나 승리의 확신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피할 길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양면사의 손이 번뜩였고 차분하다고밖에 말할 길이 없는 불길이 두
분을 에워쌌다. 그리고... 믿기 어렵지만 명법사태와 무양자의 공세는 양광에
눈녹듯 스러져갔다.>
당시 마교지사에 관여했었고 그 일에 관해 누구보다도 많은 증언을 남겼던
신신파의 문주 귀문자가 직접 보았던 철화정련의 제 일초식 문정화에 관한
묘사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그리고 소문대로 철화정련과 일천미라형이
동급이고 대정일검식이 상위의 무공이 맞다면 마교삼대지공 중 아무거나
한가지만을 얻어 제대로 참수했을 때 그자는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 아닌가.
'철화정련을 익히기 위해서는 조화은사를 취해야 한다는걸 아는 이가
현존하기란 어려울텐데. 아니지, 저자의 몸에 은사지기가 배어있는 것만으로
철화정련을 속단하기란 어려운 일 아닌가. 허, 이 운조를 이렇게 혼란으로
몰아넣을 사안이 생기다니!'
운조의 얼굴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얼굴. 그러나 한가지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 배씨철장포가 예사 대장간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운조를
주시하고 있는 이상한 기운들만에서 느끼는건 아니다. 조화은사의 열기에
그같은 초고수도 처음엔 적잖게 당황했거늘 힘차게 망치질을 하고 있는 열명의
장한들은 별반 영향을 받지 않는듯 제각기의 작업에 열중한 상태가 아닌가.
'서당개가 삼년만에 풍월을 읊게 된다면 저들도 그저 인부라고 칭해도
상관없겠지. 그것을 '기적'이 아닌 '적응'이라고 부른다면 말이야.'
개인을 평가할 때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분류하기란 매우 어렵지만 상대평가로
돌린다면 사실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비교할 상대가 평가받을
사람과 크게 떨어지지 않는 조건 하에서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배씨철장포의 인부 열명을 어디에 비교해야 옳은가. 운조는
세우삼십육도를 떠올렸으나 얼른 지웠다. 기도 면에서부터 승부가 되질 않았다.
이십사전검이라면...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꼼꼼히 비교해 볼수록
싸움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기가 막혔지만 십이뢰성인이라야 박빙의 구도가
연출되었다. 운조의 머리 속에서는 열 명의 인부와 십이뢰성인의 가상대결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음... 앗! 안돼! 오, 그래! 그렇지!...이런!... 아, 답답하군!"
옆에서 본다면 무척이나 웃기는 희극의 한토막 같은 순간이었지만 운조에게는
더없이 심각한 순간이었다.
어떻게 이런 허구적 싸움이 머릿속에서 가능할까? 운조를 모른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운조만한 고수의 눈은 피관찰자의 입에서
토해지는 숨결, 본능적으로 발산되는 기도만으로 내공이나 무공수위를
가늠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또한 근육발달상황이나 사소한 버릇 하나만 보아도
상대방의 무공 형태를 미루어 짐작하는게 그리 어려운게 아니었다. 직접 보는
것 보다야 못하겠지만 말이다.
"억!"
그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이럴수가! 청뢰의 가세 없이는 십이뢰성인으로도 이들 열명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그림이 나오다니.'
운조의 놀란 눈과 풍상에 열심이던 배금성의 치켜 뜬 눈이 딱 마주쳤다.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통에 배금성도 놀랐으리라.
"손님,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니. 아니오!"
부채를 쥔 오른손을 휘휘 저으며 운조가 멋적게 웃었다.
"잡생각에 몰입하다보면 혼자서 잘 이런다오. 신경쓰지 말고 일하시오."
"예에..."
별사람 다봤다는듯 떨떠름하게 운조의 위아래를 쓸어보고 배금성이 다시
풍상에 열중했다.
'배후가 있다!'
대충 가늠은 하고 있었지만 이로써 모든게 분명해졌다. 배금성의 나이는
올해로 스물 여덟살, 제아무리 고수라 해도, 백번 양보해서 철화정련의 대성을
눈앞에 둔 초고수라 하더라도 이들 열명을 가르칠만한 연륜과 경험이 없다.
무공 전수라는건 반드시 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 실력이 형편없는 자가
고수를 키워내지는 못하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고수를
키우는건 아니다. 실력과 경험, 연륜, 다양한 지식…. 그래서 고수 되는것보다
고수 하나를 만드는 것이 십배 더 어렵다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십이뢰성인을
능가하는 열 명의 고수를 배금성이 키웠다는건 설불과거다. 또 배후를
가정한다면 철화정련의 출처나 연무법에 관해서도 의문이 풀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토록 가공할 능력의 배후는 대체 누구인가? 운조는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나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야. 수백사형과 상의라도 해봐야겠다.'
대충 너스레를 떨다가 손바닥에 들어갈만큼 작은 단도를 사들고 운조가
철장포를 나섰을 때는 이미 초저녁이었다. 비염극이 아니었다면 배씨철장포란
존재에 관해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뻔했기에 돌아가면 칭찬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아직은 돌아갈 때가 아니다.
들를 곳이 남아있었다.
첫댓글 잘밨어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