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15선거로 한국은 탈냉전 의회주의자들이 국회의 다수세력이 되었다. 국내 일부 언론과 뉴욕타임즈 등 외국 언론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주의자 또는 진보주의자들이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는데, 이러한 보도는 중요한 지적임에 틀림없지만 감안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1948년 5.10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민족혁명적 열망과 이승만지지세력과 한민당의 갈등으로 1949년 6월 반민특위습격사건(경찰의 반민법반대쿠데타) 국회프락치사건 김구암살사건 등이 있기 전까지는 소장파 전성시대가 열려 친일파 처단을 위한 활동이 활발했고, 농민적인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통일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무소속 의원이 대다수를 차지한 제2대 국회에서는 전쟁기에 이승만정권의 과도한 부역자 처리에 제동을 걸었고, 거창민간인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에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국회의원들이 거수기로 전락되고 극우냉전체제를 수호하는 보루가 된 것은 1953년 7월 휴전협정체결 이후 또는 1954년 제3대 국회 이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4.15선거는 의회정치에서의 혁명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60년 4월혁명이나 1979년 10.26사건, 1987년 6월민주항쟁 등과 달리 평화적으로 이루어졌고, 다른 부문에서의 혁명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느끼는 강도가 다를 뿐이다. 선거를 통해 의회정치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이 그 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앞으로도 중대한 변화가 과거와는 달리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선거를 통해 의회정치사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여당이 특별히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야당이 워낙 큰 "실수"를 했기 때문이었다. 또 항간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단수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보다 높아서가 아니라, 탄핵결의 직후 보여준 국민의 정치의식이 야당은 물론 노 대통령의 예상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야당은 정말 큰 실수를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평소 극우냉전세력의 수구적 퇴행적 행태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을 뿐이다. 극우냉전세력은 걸핏하면 부정선거, 쿠데타, 불법적인 날치기통과 등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는데, 이번에는 무모성만 부각된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극우냉전세력이 극단적인 행태를 벌이다가 전혀 예기치 않게도 자신들의 몰락을 불러온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이승만정권의 몰락을 불렀고,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신청, 김영삼 의원 제명,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 등의 초강경조치는 박정희의 비참한 죽음과 유신체제의 파멸을 초래했으며, 1987년 전두환신군부체제는 4.13호헌조치로 자신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런데 극우냉전세력의 국민으로부터의 탈권(奪權)행위는 친일파의 발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친일파 청산이 근대 민족국가의 건설과 민주주의국가의 수립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신군부통치나 이번의 탄핵 야당에서 친일파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친일파가 자연적으로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수구적 퇴행적 행태는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을 이어받은 것으로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들의 역대 극우정권 옹호나 정치행태,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입법활동 등 과거청산에 대해 보인 태도에서 그러한 현상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친일파 청산의 역사적 의미를 명료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극우반공독재체제, 부정부패비리문제, 가치관의 전도현상 등에서 친일파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여기서는 탄핵결의와 정신적․체질적으로 맥락을 같이하는 3.15부정선거, 유신체제에서 친일파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친일파 청산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친일파는 매국,배족(背族)적 행위나 반민족행위 때문만으로 징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전쟁, 그에 따라 일어난 만행에 협력했기 때문에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프랑스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시효에 관계없이 지금까지도 징치하는 것은 나치가 일본군국주의자들과 똑같이 반문명적 비인간적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이러한 병리현상이 한국에서 극우반공정권을 50여 년간 지속하게 하였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단적으로 말해서 친일파가 저지른 것이다. 자유당의 경우 중앙위원회 의장 이기붕은 일제말에 중추원 참의 최남의 국일관에서 지배인을 했으며, 그 부인 박마리아는 일제말에 징병제를 찬양하는 등 친일행위를 했다.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으로 자유당 정부통령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한희석, 국회 부의장이었던 이재학 임철호, 자유당 정책위원장 장경근 등은 일제때 군수나 판검사였다. 행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초 국회공론사에서 펴낸 ≪행정간부전모≫에는 관료들의 이력이 비교적 소상한데, 국무위원 11명(외무장관 공석) 중 9명이 친일파고 2명이 의료계에 있었고, 차관인 정부위원 12명 중 10명이 친일파였다. 부정선거를 직접 자행한 치안국 간부와 서울특별시와 각도 경찰국장을 보면 1명이 불명인 것을 제외하고 모두 친일파였다. 장경근은 1949년 6.6반민특위사건이 일어나자 내무차관으로서 자신이 경찰한테 직접 지시하였다고 밝힌 자이고, 이재학 한희석은 사사오입개헌을 적극 옹호했다. 한희석은 1958년 12월 24일 국회 부의장으로 무술경관을 동원해 농성중인 야당의원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개정안을 통과시켜 24파동을 야기한 장본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자들을 자신의 측근에 앉혔던 바, 이들은 천황제 파시즘에서 맹종했던 바대로 이승만의 기대에 어긋난 행위를 하지 않았다.
김창숙이 명명했던 이승만 백색독재보다 훨씬 강도 높은 독재로 한국판 총통제였던 유신체제는 어떠한가. 박정희는 5.16쿠데타 결행 전 동지들과 통음하면서 일제의 육군내 파쇼집단이 일으킨 1936년 2.26쿠데타를 높이 평가하고, 그때 젊은 "우국군인"들의 궐기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황도파 군인들의 2.26쿠데타를 본받아 결행한 것이 1972년 유신쿠데타였다. 유신독재권력에는 정일권 민복기 백두진 최규하 신현확 등 친일파들이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무총리와 부총리, 유신정우회장 등을 맡아 유신체제를 떠받혔다. 이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더러운 충성은 목불인견이었다. 백두진은 유신체제 직전 국회의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수행을 위한 초인간적 정신발휘는 정말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하더니만, 유신체제에서 유정회장, 국회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 실정에 알맞은 제도적 정착을 시도한 결과로서 선택한 것이 바로 유신체제"라고 강변했다. 백두진 등 유신체제 거두들은 이승만정권에서 국무총리 등 모두 다 "좋은 자리"에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다. 앞에서 유신말기의 극단적인 행태를 지적한 바 있지만, 김영삼 총재를 대신해서 신민당 총재대행이 된 정운갑은 1938년 충남 군속(郡屬)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리를 한 친일파로, 이승만정권에서 총무처장 내무차관 농림장관 등을 역임했고, 이승만정권말기에는 자유당 선전위원장이었다.
2. 친일파 청산에 대한 두 가지 태도 - 김창숙과 김구
지금까지 친일파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살펴보았는데, 친일파 청산은 해방직후의 민족혁명적인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친일파가 사회 각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오랜 동지였던 김창숙과 김구는 대비된다.
김창숙은 1945년 11월 23일 중경임시정부 요인 제1진이 귀국한 직후 한 신문사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민족통일전선 형성과 관련해서는 중경임시정부 지지를 밝혔지만, 민족통일전선과 관련해 현안 문제였던 친일파문제에 대해서 "현재 임시정부에서 과도기정부를 수립하기를 예비적으로 토의하고 있는 듯하나, 만일 친일파와 반역자가 혼입된다면 우리 건국 전도는 극히 위험하니 이 점을 깊이 유의함을 절실히 권고하고 싶다"라고 피력해 친일파를 배제해야 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그렇지만 김창숙이 이러한 주장을 펴기 직전인 24일 김구는 귀국 후 처음 있은 기자단회견에서 상당히 다른 주장을 했다. 통일전선 결성에 대해 포부를 말해달라는 질문에 "국내 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정세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라고 피해나갔다. 이어서 "통일전선에 있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문제는?"라고 묻자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므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놓고 통일하는 것은 결과에 있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김구가 친일파 청산에 이처럼 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 전날 죽첨장(경교장)에서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한테서 들은 것도 한 요인이었을 테지만, 한민당 이승만과 손을 잡고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시국 판단이 주요하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이 점이 지사적 입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었던 김창숙과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회견한 그날 김구 일행은 김창숙을 방문했다.
김구는 한민당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 1948년에 들어와 친일파처단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안도산선생 애도문>에서 "(미군정의) 가장 큰 결함은 과거에 왜적에게 가장 충량하던 주구배 부호배 등 특수계급의 등용입니다. 그들은 최근 수년간에 가장 견고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므로 이제는 군정당국이 그들을 좌우하기보다는 그들이 군정당국을 좌우하게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주 친일파 청산을 강조했고, 정부수립 이후에는 소장파 의원들의 반민특위 활동을 지지했다.
김구가 분단을 코앞에 두고 친일파처단을 주장한 것은 <안도산선생 애도문>에서 말한 그대로 "여하한 명목이라도 가차하여 통일된 독립정부나 더구나 애국자로서 조직된 정부의 수립을 방해할 것은 자연한 논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김구의 주장은 너무나 늦은 것이었다. 탁월한 생존능력을 가진 친일파들이 반공주의 같은 자신의 생존 이데올로기를 개발, 확산시키면서 정부나 정계의 요직뿐만 아니라 경제계 언론계 문화계 학술계 종교계 등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친일파 청산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애국자들이 친일파들한테 쫓기게 되었다. 김구의 죽음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안두희 소위한테 암살당했는데, 김구 암살의 배후에는 친일파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안두희한테 암살을 지시한 직속상관 장은산 포병사령관은 만주군관학교 후보생이었고,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은 일제말 경시였으며, 김창룡은 관동군 소속 헌병 보조원이었다가 헌병 오장으로 진급했다. 이들의 상관인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은 영관급 일본군인이었다. 암살의 막후에서 활약한 김지웅은 정체불명의 친일브로커였다.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약하던 시절이어서 관동군 중좌였던 원용덕을 재판장으로 한 군사법정에서 안두희는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법정 밖에는 안두희를 "의사"로 치켜세운 벽보가 붙어 있었다.
김구 암살 후 친일파 처단을 주장하는 것은 최석채의 표현을 빈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3.1운동 기념식 8.15광복 기념식에도 친일파들이 주인행세를 했다. 독립운동자들은 감시의 대상이었고, 독립운동자 가족들은 끼니를 때우기 어려워 권문세가의 수위노릇 같은 것을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회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될 리 만무했다. 정의와 성실은 외면당했고, 남을 짓밟으며 줄을 잘 서는 자들이 큰소리쳤다. 1957년 겨울 울분에 찬 김창숙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미국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아아, 겨레의 슬픈 운명이여!
전부가 돌아갔네 반민족자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나
1960년 4월혁명은 노구로 자주 병상에 누워야 했던 김창숙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대에 대한 배반은 빨리 왔다. 이승만을 이어 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5월 3일 과도정부의 기본정책을 5개항으로 묶어 발표했는데, 그중 2항에서 부정선거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만 국한하겠다고 하여 이승만 정권 청산의지가 대단히 미약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친일파들의 복마전이라고 할만한 경찰 인사가 이날 단행되었던바, 발포명령자 및 사찰책임자들을 기용함으로써 4월혁명정신과 크게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5월 6일 김창숙과 김병로 이강 신숙 등 4인의 원로는 1)허정과도정부는 개편되어야 하고, 2)현 경찰간부와 모든 공무원의 승진을 중지하고, 일정 잔재의 경찰관은 재등용되어서는 안 되며, 3)친일파 및 이승만정권에 추종 아부한 각계 간부는 과도정부의 전기구에서 제거 숙청되어야 하고, 4) 공명선거를 방해한 현행 법령을 즉시 철폐하고, 5) 자유당 및 동당 산하의 사이비 애국단체를 불법화하여 즉시 해체하라는 등 5개항의 시국수습책을 제시했다.
김창숙의 애국활동과 친일파 청산요구는 국희의원들의 공감을 사 1960년 8월 12일 민,참의원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때 한민당원이었던 윤보선 다음으로 차점자가 되었다. 그러나 김창숙은 끝내 친일파 청산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3. 과거청산에 대한 현재적 관점
4.15선거에 의해 구성될 새 국회에 대한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민주주의사회에 상응하는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요구한다. 어느 때보다도 사회 전체의 구조와 정신을 수술하는 일대 개혁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라도 한국사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김영삼정부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의 개혁정치는 이승만 극우독재정권 12년, 박정희 극우독재정권 18년의 악폐로 이그러질대로 이그러진 사회가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그래서 상식과 양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새 국회의 당면한 과제중 하나는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이번 당선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정신에 상응하는 작업이다. 과거청산 없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다는 것은 거짓이고 기만이 될 따름이다.
새 당선자들은 너나없이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상생의 정치는 말로만 주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기본적인 원칙이 있어야 한다. 상생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은 극우적 극좌적 논리를 배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절한 개혁과 과거청산으로 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경쟁을 벌이겠다는 새로운 형태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정쟁이 아니라 페어플레이를 전제로 한 경쟁을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거의 정치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야당의 경우 극우편향을 배격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냉전과 극우논리에 편승한 퇴행적이고 수구적인 사고가 합리적이고 전진적인 사고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생의 정치를 해방정국에서는 합작의 정치로 불렀다. 미소 양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태에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좌와 우, 남과 북의 합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합작은 반드시 토지 등의 개혁과 친일파 청산을 요구했다. 합작파로 우익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인 안재홍이 해방 직후에는 개혁과 청산에 소극적이었는데,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면서 신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한번은 있어야 할 일이라고 피력하고, 친일파를 민족의 불신과 증오를 받고 있는 민족패류(悖類)라고까지 비난했던 것을 오늘날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46년 7월 방송에서 ꡒ좌우합작은 결코 극좌편향만 방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극우세력의 뻗어가는 넝쿨도 진작부터 끊어버리는 것ꡓ이라고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최근 야당의 소장파 당선자들은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하고 있다. 5.18민중항쟁 24주년을 맞아 열린 5.18기념재단에서의 "민간인희생자 대토론회"에서 한나라당 대표로 나온 한 당선자는 한국전쟁 전후 집단학살 통합입법에 찬의를 표하고 그러한 과거청산 입법에 한나라당 소장파 개혁세력은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이들은 상당히 전향적이다. 두고 봐야지만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청산과 개혁은 남한 사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과업이고 새 의회의 활동에 걸맞은 일이지만, 북이 개혁 개방으로 가게 하는 데도 지렛대역할을 할 것이 틀림없다. 과거청산은 동아시아의 협력관계 곧 공생관계를 끌어내기 위해서도, 나아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이뤄내기 위해서도 요구되는 기본전제이자 그 자체가 대단히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과거청산문제는 동아시아의 마지막 냉전지대인 북.일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중요한 핵심요소이지만, 중국과 일본이 원활한 관계를 갖는 데도 중요하다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의 사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대규모 프로젝트인 북경 상해간 고속전철이나 국제핵융합실험로 건설 수주에 일본이 가장 유력한데도 결정이 안 되는 것은 과거청산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중국인민이 곱게 보지 않고 있는 것이 주된 요인이다.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2003년 8월에 고이즈미 일본수상의 신사참배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일본의 원자바오 중국총리 초청이 오래되었는데도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는 것 역시 과거청산문제에 기인한다.
20세기를 넘긴 오늘날에 구태여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과 같은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 있다. 나도 연구자들이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간간히 해봤다. 그렇지만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러한 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는 자료와 증언이 중요한데, 개인으로서는 자료를 얻어내기도 증언을 받기도 쉽지 않다. 과거청산과 관련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비교적 일을 많이 했는데, 전체위원회에서 국방장.차관, 법무장관(김대중 정부 시절) 등의 발언을 들으면서, 저 사람들은 딴 나라 정부의 장관이 아닌가 하는 의아감이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의문사진상위원회나 4․3위원회에 국방부 등 정부 관련부처가 상당히 비협조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여야공동발의로 이루어진 법조차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인이 정부기관으로부터 자료를 받아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국민보도연맹원으로 부친이 집단학살되었는데 그 사실을 자식이 잘 몰랐던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다 진실을 밝히기를 꺼려한다. 더욱이 잘못된 행위와 연결된 증언을 받아내는 것은 아주 힘든 고역이다. 한국현대사의 특수성 때문에 친일파 연구나 학술회의가 1990년대에 와서야 이루어졌다는 점도 중시해야 한다. 그것도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수 연구자들의 관심에 머물고 있다.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오랫동안 금서였던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에 올수록 사회과학 부문에서 현대사연구자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더라도, 그나마 법이 있어야 친일파 같은 중대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마지막으로 지식인 문화인의 친일행위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들은 자신을 위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구체적 직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황국신민화운동,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했기 때문에 해방 직후부터 곧잘 여러 단체, 반민법 등의 청산해야 할 친일행위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해방전, 해방후 행위는 어떤 친일파보다도 죄상이 무겁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특히 이들은 관료나 군․경찰보다도 정신적․문화적으로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1960년 자유당의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에는 김활란 모윤숙 백낙준 등 적지 않은 저명한 지식인 문화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데, 친일행위를 한 많은 지식인 문화인이 또한 박정희정권의 극우반공통치에 협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