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하루종일 흐린 날에 비가 오는 것도 아니고 안오는 것도 아닌 분무기로 물방울을 뿌리듯 이슬비가 내리며 공기를 내 몸을 내 마음을 젖은 스펀지마냥 축축 늘어지게 하였다.
풍경은 회색빛 무채색에 가까웠고, 나는 숙제를 하듯 묵묵히 도로만 보고 달렸다.
극과 극은 통한다. 부정의 끝은 긍정과 맞닿아있다. 곧 날이 개겠지, 이 코너를 돌면 멋진 장관이 펼쳐지겠지라는 희망과 안위의 혼잣말은 날이 저물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남정맥은 부끄러운 듯, 도도한 듯 내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쉽게 보여주려 하지 않았고, 나는 내장산 단풍고개를 지나서도 더 기대할 풍경이 없다면 호남정맥은 다음 기회에 봄, 여름 즈음 신록이 푸르를 때 다시 찾아와야겠다 생각하며 이 또한 다음 기회에 제대로 된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인가보다 생각하며 서운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었었다.
6시 알람이 울린다. 벌떡 일어났다. 궁금했다. 바깥 날씨가.
낯선 모텔 벽을 더듬어 방 안 전등을 밝혔다. 꼭 닫힌 암막 창을 힘을 주어 열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여명이 찾아오지 않은 하늘이지만 어제와는 다른 모습인 것이 확실하다. 호남정맥을 포기하고 통영, 거제 바닷길을 간다 하더라도 길이 멀기에 몸을 움직여 하루를 시작하며 눈은 자꾸만 열린 창으로 향한다.
며칠 손에 닿을듯 낮게 드리운 먹구름의 심술에 가려 푸른 얼굴 한조각 보여주지 않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랗게 웃고 있고 나 또한 기분좋게 애마의 심장에 불꽃을 당긴다.
숙소를 나서서 얼마 되지 않아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산이 보이고, 하늘이 보이고 만물이 색을 찾았고, 무채색으로 서로 뒤엉켜 분간이 되지 않았던 모두의 원래 형체가 선명해졌다.
기분 좋은 스타트 포즈 발사!!
어제의 배고픔을 잊으려는 듯 얼마 가지 않아 내 눈은 또다른 멋진 능선을 발견하고 오른손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에 힘을 싣는다. 동터오는 내장산은 심전도 파형을 보는 듯 높은 구릉을 이루다 한 봉오리씩 불쑥 솟아 그 기상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래, 동터오는 아침, 마을은 이런 모습이었지. 물안개 자욱하게 피어오르며 조용조용 기지개를 펴고, 산새들도 서로 일어나 아침 인사를 나누고 분주히 날개짓을 하는 모습. 몇 일 보지 못해 그새 낯설어진 상쾌한 아침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제와는 다르다. 빛나게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따스한 햇볕을 향해 하늘로 얼굴을 치켜 들고 그 맑고 아름다운 모습을 반짝이고 있는 산의 아침 얼굴은 본능적으로 흘깃거리 듯 시선이 가게 되는 어여쁜 여성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출발해서 첫번째 포인트인 내장산 단풍고개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몇 번이나 그런 모습에 홀린듯 바이크를 세우게 된다.
내장산 단풍고개는 단풍이 많이 졌지만 얼마나 아름다웠을지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굽이굽이 돌아오는 길 자체가 이미 감동이었기에 마음이 뿌듯하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읽었을때 마음에 쏙 들어 기억하고 있는 글귀인데, 어제의 내 모습을 반추하여 보면 조금 부끄러워진다.
실은 포기하려 했다.
10일 넘게 매일 할리를 타다보니 무거운 클러치와 브레이크 조작으로 양쪽 손가락 마디에 통증이 찾아왔다. 25년을 바이크를 타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그러고보니 할리로 1주일 이상 매일 이렇게 장거리를 타는 것도 처음이니...
새벽이 되면 알람 소리에 잠을 깨는 것도 있지만 절반 정도 굽혀진 채 뻐근하게 마비되며 아파오는 손가락 관절의 통증에 반쯤 잠이 깨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 잔뜩 흐려진 날씨와 풍경에 내 마음은 절반 이상 포기하려는 마음이었다.
이번 호남정맥 종주는 실패다. 마음이 기대를 잃어 어제는 실패라는 단어를, 숙제하는거야라는 말을 여러번 되뇌었다.
하지만 오늘 호남정맥은 많은 분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바로 그 자태를 찬란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란듯 뽐내고 있다.
'포기하지마. 아직 실패한거 아니야. 옷을 갈아입느라 그랬어. 부끄럽지만 이제 내 모습을 봐'
호남의 참한 자태가 다소곳이 나를 유혹한다.
전봉준 공원은 내장산의 오묘한 모양새의 산봉오리들이 아름다운 호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공원의 역사적인 의미보다 이 풍경이 나로선 더 감동이다.
장성호로 들어서는 길은 멀리서도 어여쁜 호수가 보여 기대를 더하게 한다. 사람의 눈은 비슷한 면이 많은가보다. 바이크를 천천히 움직이며 제일 좋은 풍경이 담길 듯 한 자리에 세우고보니 전망 좋은 포인트라 적혀있다. 임권택 공원 앞의 조망 포인트는 장성호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백양사 입구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는데 신입 공익요원인 것이 분명한, 그래서 상급자의 손짓을 오해한 청년이 바이크는 통행이 안된다며 막아선다. 바이크 시동을 끄며 그럴리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향해 관리자로 보이는 분은 오천원이라며 손바닥을 펼쳐 보이는데 그 행동을 청년은 통행금지라는 표현으로 보았나보다.
백양사 경내까지 들어가기엔 오늘의 이 청명한 하늘아래 나를 기다릴 풍경들을 놓치게 될까 조급하여 백암산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기고 돌아나온다.
빛재는 그 이름 그대로가 맞다. 동쪽에서 동터온 해가 고개 아래 마을을 빛나게 비추이고 있다. 빛이 춤을 추는 고개야라며 말하는 듯 티끌하나 없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햇볕이 환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내리 쬔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춥지가 않다.
내가 태양계의 지구라는 별에서 이렇게 따스한 태양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행복하다.
담양호는 큰 저수지이고 담양호가 끝나는 즈음 출렁다리 부근에 관광객과 등산객이 섞이며 모처럼 부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은 토요일이구나. 매일 휴일처럼 하는 일 없이 바이크를 타다보니 주중 주말 개념이 사라져버려 뒤늦게야 오늘이 휴일이란 것을 알아챈다. 이런 한량같은 여유로움이란...
천지재를 지나 밤재, 오정자재, 가마골은 호남정맥 소개에도 나와있듯 평범한 낮은 언덕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런 얕은 구릉을 가볍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 그리 심심한 것 같지는 않다. 오늘은 총천연색 풍경이니까.
강천산 입구 이정표가 있는 주차장은 토요일이라 만차다. 조금 벗어나와 시냇가와 산이 이루는 모습에 반하여 갓길에 바이크를 세운다.
둥둥재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 언덕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이목마을 입구를 지나 수영재의 바리케이트 포인트를 지난다.
수영재를 지나는 길 햇빛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는 냇가가 나 좀 보고 가라며 햇빛을 반짝거린다. 귀엽긴...
방아재, 입석리, 노가리재도 팻말 하나 없는 고갯마루다. 백두대간은 고개 이름과 그 유래에 대한 설명이 있는 비석이나 표지판이 있어 읽고 지나가는 재미도 꽤 있었는데 아쉽다.
특히 노가리재는 왜 노가리재일까 상당히 궁금했는데 말이다. 언덕을 넘다 힘들어 쉬며 노가리를 까서 그런가, 노가리를 팔던 곳이라 그런가, 노가리라는 생선 말린 음식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인가 혼자 궁금해 하며 고개 아래 마을의 풍경을 감상하다 길을 나선다.
식영정은 가사문학관과 붙어 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왕래하는 차들이 많아 바이크를 세우기 어려워 가사문학관 앞으로 이동한다. 두군데 모두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2시가 되어가고 있어 주말, 김해 집으로 복귀하는 차편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 자리를 뜬다.
무등산 또한 주말을 맞아 산을 찾은 많은 사람들과 차량으로 바삐 돌아나와야 했다. 하지만 무등산은 아쉬운 듯 한적한 도로에 마주한 맵시난 산자락과 물소리 고요한 시냇가를 내게 보여주었고, 정감나는 호남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유둔재를 넘는 한산한 도로에서 마침 햇볕을 받아 붉은 단풍과 푸른 숲이 어우러지는 실로 알록달록한 풍경을 만나 추억을 남겼다.
물염정은 김삿갓 시비가 있는 곳이며 물염적벽이 있다. 실은 물염정으로 오르는 길에 누군가 세워둔 적벽 조망포인트라 적힌 팻말을 보고 여기가 창랑적벽인가보다 하며 보고 내려왔는데, 나중에서야 더 좋은 조망 포인트가 있고, 여기는 물염적벽이지 창랑적벽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재터널을 넘어서는 길에 강원도에서처럼 모처럼만에 싱그러움 가득한 푸른 들판을 만나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푸른 잔디밭마냥, 카펫 마냥 깔려진 새싹들을 사진에 담는다.
묘치재를 넘어 적벽관광지로 들어서는 곳의 호수 또한 산과 어우러져 객손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사진을 찍으며 타이어 상태를 확인했는데, 코너를 얼마나 탔는지 앞 타이어는 좌우의 트래드는 다 갈아 먹었는데 오히려 중앙의 트래드가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런 경우는 또 난생 처음이라 이제 직진만 달려야겠네하며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바이크에 오른다.
적벽관광지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폐쇄되어 있어 아쉬웠다. 여기 화순이 물염적벽, 창랑적벽, 화순적벽 등 여러 적벽들이 아름답다고 하던데, 맛만 보고 가는 것 같아 아쉽다.
지난번 강원도에서도 경유지로 설정되어 있었던 미로면을 지나며 멋진 풍경을 볼수 있어 감사했는데, 이번에도 이서면사무소를 경유하며 하늘에 솜털처럼 피어난 멋진 새털구름을 만났다. 기분 좋다.
어림재 주변을 지나 돗재로 향한다. 오후 5시가 되어간다. 저 멀리 보이는 멋진 산을 배경으로 오늘의 1차 마무리 점프를 남긴다.
보람차고 기뻤던 호남정맥 2일차의 종착지 돗재에 도착했다. 계획한 바는 아니지만 해는 지고 있고, 광주고속버스 터미널에 바이크를 주차하고 부산을 다녀와야했기에 동선상 시간상 여기 돗재가 오늘의 마지막 포인트가 되었다.
기쁘게 활기차게 마무리 점프를 남기고 광주로 향한다.
오늘의 여정 : 호남정맥 30. 내장산 단풍고개~56. 돗재
첫댓글 호남정맥중 약간은 지루할수있는 2일차를 보내셨네요
호남정맥 첫날 코스가 좋은데 날씨가 안따라 주어서 아쉬운감이 있습니다
그래도 호남정맥 남은 부분 아마도 괜찮으실 겁니다
끝까지 안운하시고 화이팅 하십시요
카이저님. 감사합니다. 둘째날도 지루한 길이 이정도로 아름다웠는데 첫째날이 더 좋다니 어느정도일지 다시 궁금해집니다. 다음에 신록이 푸르를때 꼭 다시한번 돌아보고 싶네요. 좋은 코스 소개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하트 뿅뿅 감사드려요~ 비온 후 예쁜 얼굴 보여준 호남의 매력에 저도 하트뿅뿅 되더라구요. 강원도와는 다른 호남의 매력. 좋네요.
멋진 후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습니다.
2일차 중간이 살짝 지루한 느낌이고 나머지는 실망스럽지 않을 겁니다.
표식이 없는 곳에 펜스나 주변 나무에 보면 빨간색 더할리 호남정맥 시그널 리본이 있습니다.
안전하게 완주하십시오.^^
펀치님. 감사드립니다. 2일차도 제게느지루하지 않았고 아름다웠습니다. 남은 구간도 호남의 늦가을 풍경을 만끽할수 있을것 같아 설렙니다. 좋은 코스 소개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투어중이시네요 ,,,
궁금해서 여쭈어봅니다 점프시 사진은 어찌 찍는지요 ?
점프력도 대단하시고요 ㅎㅎ
계획한 투어 마무리 잘하시고요 ~~~
네. 이제 슬슬 끝나가네요. 내일이면 호남정맥 끝내지 싶습니다. 점프 사진 찍는 건 전국일주 9일차 글 마지막에 영상 남겼습니다. 아이폰 연속촬영으로 찍고 제일 잘 나온 사진만 남깁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