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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52.4%,한국 16.2%,일본 13.7%… 30년 만에 2위로 우뚝
반도체 30년 만에 2위로 우뚝
입력 : 2014.05.21 06:00
지난해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2위로 올라섰다. 반도체 부문에서 일본을 앞지른 것은 1980년대 삼성전자를 필두로 반도체를 본격 생산하기 시작한 이래 30년 만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어떻게 제쳤는지, 그리고 반도체 세계 1위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망했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인 미국 IHS테크놀로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2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한국 업체의 반도체 판매액은 515억1600만달러로 시장점유율 16.2%를 기록, 일본(434억3200만달러. 13.7%)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최근 두 나라 시장점유율을 보면 한국은 2011년 13.9%, 2012년 14.7%, 2013년 16.2% 등으로 상승세를 타는 반면에 일본은 18.5%→17.5%→13.7%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미국이 판매액 1666억5100만달러에 점유율 52.4%로 압도적 1위였고 유럽(8.7%)과 대만(6.5%)이 4~5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가 세계 반도체 시장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의 역할을 부정할 수 없다. IHS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는 10.6%의 점유율로 2위를 유지하면서 1위 인텔과의 격차도 좁혔다. SK하이닉스는 전년 대비 매출이 50%가량 증가하면서 세계 5위로 도약했다.
한국반도체가 최초로 반도체 칩 제조
1970년 미국 인텔이 1K D램을 개발한 이후 PC시장과 함께 반도체 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초기 10년은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 마이크론테크놀러지 등 미국 기업들이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점차 일본의 NEC, 히타치, 도시바 등이 선두주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나라는 반도체의 불모지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라디오와 일부 초보적인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반도체 관련 학문을 가르친 곳도 1972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문을 열면서부터다. 당시 김충기 KAIST 교수는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소규모 설비를 갖춰놓고 국내 최초로 ‘반도체공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등이 그 강의를 들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페어차일드, IBM, 모토로라 등이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우리나라에서 조립생산을 하면서 반도체가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형 트렁크 하나에 들어 있는 반도체가 200만~300만달러일 정도”라는 소문에 대기업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술 자체가 너무 어려워 어떤 대기업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국내 기업 최초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곳은 아남산업이었다. 아남산업은 1970년부터 미국 앰코일렉트로닉스의 반도체를 조립해 2년 만에 수출액이 1000만달러가 넘을 정도로 급성장했다.
아남의 급성장을 바라보던 금성사는 1970년 말 금성전자를 설립하고 트랜지스터를 생산했다. 금성전자는 1971년 1500여명의 종업원이 월 400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생산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웨이퍼부터 패키징까지 반도체의 모든 공정을 갖춘 기업이 설립된 때는 1974년이다. 모토로라에서 반도체 핵심기술을 연구하던 강기동 박사가 세운 한국반도체가 그것이다. 그전엔 외국계 기업이 들어와 단순 조립만 했는데, 한국반도체가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반도체칩 제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1973년 말부터 시작된 제1차 오일쇼크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금성전자는 금성사에 흡수 합병됐으며, 한국반도체는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내외부의 비아냥에도 반도체 사업 결단
1970년대 초반, 삼성전자에서는 이건희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을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을 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부정적 견해와 미국·일본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냐는 자조 섞인 푸념이 팽배했다.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인 페어차일드가 인원을 감축하고, 인텔·내쇼날 등이 생산 시설을 축소할 정도로 반도체 사업 전망은 지극히 어두웠다.
하지만 경영 위기에 빠진 한국반도체가 인수자를 찾고 있었던 것은 이 회장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 회장은 인수를 추진했지만 내부에선 여전히 반도체 사업 진출에 대한 시기를 저울질하고만 있었고 자금 부족을 이유로 인수 반대를 표명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출발이 늦어지면 일본, 미국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이 회장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 결국 이 회장의 사재 출연과 함께 삼성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에 나선다. 그러나 자본, 기술, 시장 어느 것 하나 변변치 못한 상황에서 시작한 삼성 반도체에 대한 외부의 시각은 냉랭했다. 미국과 일본의 전자업계는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놓고 “걸음마도 못하는 아이가 날려고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하기도 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등을 돌릴 때, 이건희 회장은 거의 매주 일본으로 건너가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났다. 기술자들을 호텔로 불러 밤새도록 토론했다. 반도체 엔지니어를 찾아 미국 실리콘밸리도 드나들었다. 그들을 통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직접 배우면서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81년 초 컬러TV용 색신호IC 개발에 성공했고, 이를 통해 VLSI(초고밀도 집적회로) 기술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삼성전자는 1982년 당시로서는 거금인 27억원을 들여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우리나라 전체 예산이 9조원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투자였다. 이건희 회장은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며 반도체 석학들을 만나 입수한 자료를 분석하고 사업을 구상하며 반도체 사업 확대를 이병철 회장에게 건의했다.
이듬해인 1983년 2월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이병철 회장은 날이 밝자마자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도체 사업 공식 진출을 발표하도록 했다. 10년 만에 핵심사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현대그룹의 반도체사업 진출은 정주영 회장의 결단으로 시작됐다. 정 회장은 1982년부터 매주 전자사업회를 주관하며 반도체사업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현대그룹은 1983년 초 현대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 집적회로 생산에 참여했다.
대한전선도 1976년 대한반도체를 설립하고 경북 구미에 웨이퍼 가공공장을 건설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 공장은 반도체 사업을 재검토하며 다시 뛰어들 기회를 노리던 금성이 인수해 이후 금성반도체가 사용하게 됐다. 럭키금성그룹은 1989년 여러 계열사의 반도체 사업부문을 통합해 금성일렉트론을 설립했다. 1995년 럭키금성그룹이 LG그룹으로 바뀌면서 금성일렉트론은 LG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했다.
한국 반도체산업에 가장 중요한 시기는 1978년부터 1984년까지라는 평가다. 반도체 대한 연구·개발이 본격화됐으며, 기업들이 반도체사업에 뛰어들었던 때다. 또 자체 기술력으로 다양한 집적회로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도 이 시기다.
밤 11시에 만나 신기술 개발 회의
한국 반도체신화의 서막을 알린 것은 1983년 11월 개발에 성공한 64K D램이었다. 영국, 독일 등 유럽 선진국도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첨단 반도체를 미국, 일본에 이어 삼성전자가 세계 3번째로 개발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삼성전자가 64K D램 개발에 나선 것은 1983년 5월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를 찾아온 IBM의 구매담당이사는 “6개월만 기다려 달라”는 삼성 측의 요청에 코웃음을 치며 돌아갔다. 당시 전자시계나 TV 등에 들어가는 단순한 기능의 칩만 생산하고 있던 삼성에게는 어림도 없는 도전이었다. 마치 자전거를 만드는 철공소에서 초음속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것과 같을 정도로 무모한 일이었다.
당시 삼성의 개발팀원들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러지의 기술이전 과정에서도 기술 후발국으로서의 갖은 설움과 핍박을 받았다. 기술이전을 위해 마이크론으로 떠난 8명의 기술진 중 설계 담당 엔지니어는 설계실 근처에도 못 가보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연수팀이 아무런 소득 없이 귀국하자 삼성은 자력개발로 방향을 선회했다. 개발은 마이크론으로부터 받은 칩을 하나하나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모두 309가지에 달하는 공정개발도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는 등 제품개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삼성은 제품 개발 착수 후 6개월 만인 1983년 11월 64K D램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6년 만에 개발한 일본과 비교해 볼 때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64K D램은 손톱만한 칩 속에 6만4000개의 트랜지스터 등 15만개의 소자를 800만개의 선으로 연결해 8000자의 글자를 저장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첨단 반도체였다. 삼성은 선진국과 10년 이상 격차를 보이던 국내 반도체 기술을 3~4년으로 크게 단축시켰고, 선진국이 20년의 시간을 소비했던 개발과정을 3단계나 뛰어넘는 대도약을 이뤄낸 것이다.
삼성은 64K D램 연구개발에 매진하는 동시에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도 동시에 진행했다. 여러 후보지 중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경기도 기흥 지역을 최종 부지로 확정했다. 이병철 회장은 6개월 안에 공장을 완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선진국에서 반도체 생산라인을 완공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18개월이었다. 선진국조차 1년 이상 걸리던 것을 아무런 기술이나 지식이 없던 한국이 6개월 만에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공사는 한겨울에 진행해야 했다. 삼성은 폭설이 내리면 눈을 치워가며 공사를 진행해 6개월 만인 1984년 3월 공장을 완공했다.
새로운 반도체를 양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 현장에서의 실습이다. 이를 위해 삼성에서 실시한 회의가 매일 밤 11시에 열린 이른바 ‘일레븐 미팅’이었다. 신제품을 개발하는 인력과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인력이 매일 밤 11시에 만나는 이 회의에서는 하루의 성과와 진척도를 점검하고, 다음날 진행해야 할 부분을 토의하고 결정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일레븐 미팅은 삼성이 D램 반도체에 진출한 초기 몇 년간 계속됐고, 관련 기술이 축적되면서 모임은 11시에서 9시, 그리고 7시로 당겨졌다. 삼성의 또 다른 반도체 개발회의는 1989년 4월부터 시작된 ‘수요 공정회의’였다.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반도체연구소의 관련 임원과 간부들이 참석하는 이 회의는 최첨단 기술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1998년 12월까지 무려 400회가 열렸다.
삼성이 64K D램 개발에 성공하고 양산체제를 구축하는 사이 현대전자는 후발주자로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된다. 현대전자가 16K S램의 시험생산에 성공한 것은 1984년이었다. 당시 D램 부문에는 이미 유수의 반도체 업체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현대전자는 S램으로 특화하겠다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D램보다 기술적으로 복잡한 S램에서 자체 기술만으로 성과를 올리기는 어려웠다.
현대전자가 후발업체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해는 1985년이었다. 그해 7월 첫 번째 반도체공장이 준공됐고, 9월에는 반도체 2공장이 완공됐다. 1989년에는 세계 20위권에 진입했고, 1990년 초에는 당시 메모리반도체의 맹주였던 일본 업체와 공동 개발을 위해 협력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현대전자의 성장세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1995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 SD램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2등 의미 없다…과감한 투자로 역전 발판 마련
후발주자가 선두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몇 배 더 빠른 속도를 내야 한다. 반도체 산업 특성상 2등은 의미가 없다. 다음 단계의 반도체를 먼저 개발한 선두주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투자시기가 6개월만 늦어도 몇 천억원의 이익을 날려 버리는 것이 반도체 사업이다. 선두기업만이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업종의 특성상 2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기술을 선도하는 1등 제품만이 채택되는 상황에서 누구보다 한 발 앞서 최고 성능의 제품을 내놓지 못하면 기업의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지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두주자 역시 추월의 틈을 내주지 않기 마련이다.
삼성이 그 틈을 비집고 추월을 시도한 결정적인 첫 번째 순간이 1987년에 있었다. 1980년대 반도체 제조는 2가지 방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회로를 위로 쌓아 올리는 ‘스택’이란 방식과 회로를 아래로 파 내려가면서 구축하는 ‘트랜치’라는 방식이다. 직접 양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방식이 우세한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두 가지 기술 모두 각각의 장점을 지닌 상황이었다. 그러던 1987년 선진기업들을 추격하던 삼성은 기로에 서게 된다. 4M D램의 칩을 ‘스택으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트렌치로 할 것이냐’였다. 어느 누구도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순간, 이건희 회장이 명확한 결단을 내린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트렌치 방식을 선택했던 경쟁업체는 선두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이를 통해 삼성은 경쟁사를 앞서게 되고, 반도체 기술을 주도할 수 있었다.
삼성의 반도체 신화 창조 과정에서 분수령이 된 두 번째 결정적인 순간은 8인치 웨이퍼를 적용한 16M D램 생산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6인치 웨이퍼가 반도체 생산의 대세였다. 8인치 웨이퍼는 6인치보다 생산성은 1.8배 높았지만 공정이 복잡하고 수율 확보가 어려웠다. 어느 누구도 선뜻 8인치 웨이퍼로 전환하지 못한 건 그만큼 기술적인 한계와 위험요소가 컸기 때문이다. 1위 기업들도 머뭇거리고 있는 순간, 추월의 기회를 엿보던 삼성은 과감하게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했다.
이 회장은 에세이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고심 끝에 8인치로 결정했다.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되는 만큼 주변의 반대가 극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1위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적기라고 생각했고, 월반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기술은 1989년 일본을 거의 따라잡은 후 1992년 삼성이 64M D램을 개발하며 일본을 추월했다. 2년 뒤인 1994년에는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해 확실한 기술 우위를 입증했다. 삼성이 치고 나간 6개월에서 1년 후 일본 업체들이 쫓아왔다. 하지만 그땐 이미 삼성이 시장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간 이후였다.
삼성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반도체 시장에 깊은 불황이 닥쳤을 때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삼성은 불황일 때 다가올 호황국면을 내다보고 과감하게 투자를 늘렸고, 일본·대만 업체들은 호황일 때 투자에 나서 제품을 양산할 때쯤 불황을 맞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뼈 깎는 노력으로 기사회생한 SK하이닉스
현대전자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1999년 LG반도체를 흡수합병하면서 규모는 커졌지만 업황 악화로 인해 그 규모를 감당할 만큼 경영 환경이 양호하지 못했고, 결국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이외의 사업부들을 모두 매각,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해 2001년 3월 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그해 10월 과도한 부채로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갔다.
정부와 채권단은 “하이닉스를 무조건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하이닉스는 기적처럼 회생하기 시작했다. 2003년 3분기부터 14분기 연속 흑자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2005년 하이닉스의 매출은 5조7534억원, 순이익은 1조8174억원에 달했다. 부활의 주인공은 바로 내부 임직원들이었다.
2001년부터 하이닉스 임직원들은 임금을 동결하고 순환 휴직을 실시하는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해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전개했다. 부족한 투자 여력을 보충하기 위해 구형 장비를 개조해 신형 장비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는 ‘블루칩 프로젝트’도 위기를 이겨낸 원동력이었다.
반도체 장비 중 가장 고가의 장비는 웨이퍼에 미세회로를 찍어내는 노광장비로 대당 가격이 300억원에 달한다. 한 공장에 수십 대의 노광장비가 필요한데, 2~3년에 한 번씩 교체가 필요하다. 이 장비를 개조해 활용하자는 것이 블루칩 프로젝트인데 경쟁업체는 물론이고 내부에서조차 불가능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하이닉스의 엔지니어들은 한 달 이상 퇴근하지 않고 연구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구형장비를 개조해 신제품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하이닉스는 2003년 4월 ST마이크로와 플래시메모리 분야에 대한 전략적 제휴를 맺고, 이듬해 2월에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D램에 한정돼 있던 사업 구조를 낸드플래시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하이닉스는 예정보다 1년 반을 앞당겨 워크아웃을 조기졸업할 수 있었다.
Tip | 중국 반도체, 우리나라 턱 밑까지 추격
중국 IT업체의 거센 추격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상당한 위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기업들의 막대한 투자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등이 더해져 기술발전에 가속도가 붙고, 가격경쟁력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세계 반도체 시장이 불황에 허덕이던 지난 5년간 SMIC 등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매년 10% 이상 성장했다. 여기에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2015년까지 250억달러를 투자해 이 분야 생산량을 2배, 시장 규모를 1.5배 늘리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아직까지 최첨단 반도체를 제조하는 공정기술은 우리나라에 못 미치지만 회로를 설계하는 기술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실리콘밸리에서 기술을 습득한 엔지니어들이 중국으로 돌아와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 시스템반도체 시장은 전년 대비 6.7% 성장한 873억8500만달러로 추정된다. 중국 시스템반도체 시장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다. 중국 대표 가전회사 화웨이는 자체 개발한 쿼드코어 AP를 스마트폰에 적용했으며, 또 다른 스마트폰 업체 ZTE도 반도체 설계팀을 신설해 독자 AP 개발에 착수했다.
최근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양적인 성장을 넘어 질적인 성장에도 나서고 있다. 또 그동안 내수시장을 겨냥해 저가 공급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의 주력 시스템반도체인 멀티미디어, 카메라 센서 시장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공세가 거세지고 있다. 차세대 품목으로 육성 중인 전력반도체 시장에도 중국 기업들이 하나둘 등장하면서 우리 기업이 위기를 느끼고 있다.
신현준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조사홍보팀장은 “중국의 반도체 역사는 10~15년 정도로 짧지만 정부와 기업의 집중적인 육성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이미 우리나라 턱 밑까지 따라붙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D램 분야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품목을 다각화했다. 메모리 분야에서 D램 의존도를 줄이면서 낸드플래시 등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시스템LSI에 투자하는 투 트랙 전략을 펼쳤다.
삼성 낸드플래시 사업의 분수령은 2000년 초에 찾아왔다. 일본 도시바가 자사의 D램 부문 인수와 낸드플래시 분야에서의 합작을 제안한 것. 그러나 삼성은 두 가지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안정적인 2위보다는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1년도 지나지 않아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2001년 삼성은 세계 최고 집적도를 가진 1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하면서 낸드플래시 세계 1위에 올랐다. 낸드플래시 시장 장악은 몇 년 뒤에 만개한 모바일 시장에서 삼성의 대약진을 이끌었다.
2008년 반도체 업계에 또 한 차례의 위기가 닥쳤다. 세계 금융위기로 인한 사상 최악의 불황이었다. 불황 속에서 메모리반도체 업체 간 치킨게임이 계속됐고, 키몬다와 엘피다 같은 일본 업체들이 줄도산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경쟁력과 대규모 R&D 투자 등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하이닉스는 지난 2010년 중국 우시에 후공정 합작공장을 설립해 ‘중국 내 전·후 일괄공정체제’를 구축했다.
삼성은 2011년 경기도 화성공장 메모리반도체 생산라인 등에 11조원을 쏟아붓는 승부수를 던졌다.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입지를 더욱 굳히고, 경쟁사들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었다. 이 역시 경쟁업체보다 한 발 빠른 대규모 투자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박영준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반도체산업은 적기에 대규모 투자를 해야 한다”며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세계 2위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생산기술력을 통한 고집적화 대응과 과감한 설비투자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메모리반도체에 집중한 것도 성공요인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고객에 맞게 하나하나 챙겨야 하는 구조인 데 반해 메모리반도체는 통 크게 투자하고 많은 인력이 달라붙어 대량으로 생산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주력 제품인 D램은 1990년대 후반부터 생산설비를 제때 구축한 것이 성공의 원동력이 됐다. 한국의 D램 사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1990년대 초반 4M D램이 출시되면서부터다. 당시 일본 업체들은 1M D램 제품의 후속제품으로 4M D램보다 오히려 차차세대 제품인 16M D램의 상용화에 주력하면서 설비 투자를 억제했다.
1996년 이후 시작된 D램의 가격 하락으로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들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고, 일본 역시 선뜻 대규모 투자를 감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오히려 대규모 설비투자를 단행했다. 그 결과 시장이 원하는 시기에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LG반도체 등이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를 감행한 것이 대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차세대 제품 개발 통해 시장 우위 유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적기 투자와 차세대 제품 개발을 통해 미래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연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에서 V낸드플래시 메모리 시범생산에 돌입했다. 기술유출을 이유로 국내 생산을 고수해온 삼성이 중국 시안에 해외 첫 메모리반도체 공장을 건설했고, 이제 시범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중국의 수요가 증대하면서 중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차원에서 현지 생산을 결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건희 회장의 거대한 밑그림 속에 들어가 있던 계획이었다.
1983년 반도체 산업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던 이 회장은 임원들과 함께 도시바의 최신 반도체 공장인 요카이치 공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헬리콥터 안에서 임원들에게 반도체 산업에 대한 글로벌 전략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국내 공장을 제2의 기흥단지(현 화성 단지)로 확장하고 미국과 유럽, 그리고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차례차례 지어나가자.”
당시 삼성은 한국 내에서 고작 5개의 반도체 생산 라인을 운영하는 수준이었다. 그야말로 헬리콥터를 타고 가면서 언젠가는 우주선을 따라잡겠다는 원대한 포부였다. ‘신화’로 불릴 만한 이러한 삼성 반도체 산업이 보여준 스피드는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빨리빨리’ 근성에 철저한 미래 예측과 도전 정신이 결합돼 나온 결과물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부터 국내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3차원(3D) 낸드플래시는 아직까지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에 3D 낸드가 적용되고 중국 시안공장에서 본격 양산되면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의 새로운 원동력이 될 전망이다.
2012년 SK그룹에 편입되며 새로운 날개를 달게 된 SK하이닉스는 2012년 3조8500억원을 투자하면서 비상에 나섰다. SK그룹 편입 전에는 추진하기 힘들었던 공격적인 투자였다. 이를 기반으로 같은 해 6월 이탈리아의 아이디어플래시(현 SK하이닉스 유럽기술센터)와 미국의 컨트롤러 업체인 LAMD(현 SK하이닉스 메모리솔루션즈)를 인수해 낸드플래시 개발역량을 대폭 강화했다. SK하이닉스는 올 연말 3D 낸드 개발을 완료한 뒤 2015년부터 본격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는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수익성 중심의 경영을 더욱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개별 고객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모바일 솔루션 위주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 환경에 발맞춰 낸드플래시 제품의 본격적인 양산에 집중하기로 했다. 전체 제품군 중 모바일 비중을 40% 수준까지 늘릴 계획이다.
최근에는 노후화된 이천공장을 대체할 최첨단 신규 생산시설 투자로 확정지었다. 또 차세대 메모리뿐만 아니라 시스템반도체 등 중장기 성장을 위한 미래 먹거리 준비에도 나선다.
반도체 시장 상황도 당분간 한국 업체에 유리하게 돌아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반도체 시장의 경우 2~3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됐지만, 현재 흐름상 시장 전체에 걸친 공급 부족이 호황을 이끌고 있다는 측면에서 장기적인 호황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세철 우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D램 반도체업계 플레이어가 3곳뿐인 상황이기 때문에 D램 시장 호황은 길게 이어질 것”이라며 “성숙기에 진입한 스마트폰 시장이 반도체 업계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모리 위주의 불균형 성장은 구조적 약점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시장 2위에 올랐지만 메모리 위주의 불균형 성장과 장비·소재 분야의 취약성은 한국 반도체산업의 구조적인 약점이다. 향후 성장 정체가 우려되는 이유다.
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반도체와 정보기기를 제어하고 운용하는 시스템반도체로 나뉜다. 시스템반도체는 비메모리 또는 시스템LSI라고도 부른다. 애플의 아이폰5S의 경우 제품 하나당 반도체가 21개 들어가 있는데 18개가 시스템반도체, 3개가 메모리반도체다. 정보 처리 및 연산을 담당해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가 대표적인 시스템반도체다.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를 만드는 미국의 인텔이 전통적인 시스템반도체의 강자로 꼽힌다. 또 최근 스마트기기에 들어가는 시스템반도체 칩을 만드는 미국의 퀄컴, 모바일용 AP의 설계도를 만드는 영국의 ARM 등도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생산 공장이 없는 이들 두 회사는 오로지 반도체 설계만 한다. 이렇게 생산 공장이 없는 반도체 기업을 ‘팹리스’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로 설계는 하지 않고 의뢰받은 제품을 위탁 생산만 하는 반도체 공장을 ‘파운드리’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이후 매년 20개 정도의 팹리스가 등장했다. 창업자들은 대기업에서 연구개발을 담당하던 엔지니어들이었다. 국내 휴대폰 산업이 성장하면서 메모리, 카메라 컨트롤러, 디스플레이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다. 코아로직, 엠텍비젼, 텔레칩스 등이 이 시기 팹리스의 대표주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메모리반도체에서 축적된 기술이 다양한 분야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시스템반도체는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고,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생산라인이 없어도 기술력만 갖추면 알짜배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1등 반도체’ 국가가 되려면 시스템반도체를 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2013년 메모리 분야 수출액은 255억달러로 2012년 193억달러에 비해 32.1%나 급증했다. 반도체 수출액에서 메모리가 차지하는 비중도 38.3%에서 50.6%로 늘었다. 세계 시장점유율도 52.4%로 2위 미국(27.1%)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반면 메모리(607억달러)에 비해 3배가량 큰 시장인 시스템반도체 분야(1950억달러)에서는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시스템반도체는 한국의 시장점유율이 5.8%(판매액 113억8100만달러)로 미국, 유럽, 일본, 대만에 이어 5위에 그쳤다.
D램 반도체 세계 1위의 삼성전자도 시스템 분야에선 여전히 추격자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모바일 AP 사업 부진으로 세계 시스템 분야 3위에서 4위로 밀려나자 한국의 순위도 4위에서 5위로 떨어진 것이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은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 메모리반도체 사업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부분에서도 최근 5년간 시장점유율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어 메모리와 같은 반전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시스템반도체 부문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 부문에 대규모 인력·자본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영준 교수는 “그동안 메모리반도체를 열심히 했던 것은 절대 무모한 것이 아니다”며 “이는 시스템반도체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산업의 변화 등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그러한 시장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반도체산업이 한국에 역전을 당한 것은 달라진 시장 환경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D램 반도체의 자존심으로 불렸던 엘피다는 D램 가격 하락을 예측하지 못하고 과잉기술과 과잉품질의 비싼 D램만 고집하다 수익률 개선에 실패,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엘피다 외에도 도시바와 소니 2개사를 제외한 다른 일본 업체 역시 스마트폰 중심으로 이동하는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심각한 부진을 겪었다.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최근 시장과 산업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수많은 데이터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창출하는 빅데이터,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사물인터넷, 달리는 안방으로 변하는 자동차, 에너지 효율성을 선도하는 스마트 그리드 등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선도하는 것이 바로 반도체다.
방대하고도 급증하는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선 이전과는 다른 메모리와 프로세서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메모리·시스템반도체로는 한계가 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인텔 등이 이와 관련된 기술 개발에 주력하는 이유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사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면 핵심부품인 센서에 대한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사물인터넷이 가능하려면 통신 기능을 갖춘 반도체 칩이 필요하고, 센서와 유무선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받은 엄청난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반도체 업체들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다.
특히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동차가 고급화되면서 전자장치가 많아지고 이를 제어하기 위한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0년 전 세계 자동차용 반도체 시장은 229억달러에 달했다.
전력반도체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전력반도체란 전력 변환 또는 분배, 제어와 관련된 모든 응용 반도체 소자를 말한다. 글로벌 전력반도체 시장은 오는 2017년 350억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하지만 세계 시장은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 미쓰비시 등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영준 교수는 “고령화에 따른 원격진료, 스마트홈, 웨어러블기기, 스마트 그리드 등이 향후 반도체 시장을 이끌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라며 “이러한 흐름에 맞춰 반도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칩에 담아야 한다. 아직은 시장에 없는 다양한 기술을 연구해 그것을 반도체에 구현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대기업, 중소·중견기업이 협업할 수 있는 선순환적인 반도체산업 생태계가 조성돼야 한다. 시스템반도체의 경쟁력은 몇 개 기업의 노력에 의해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반도체의 동반성장도 필수적이다.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대표는 “시스템반도체는 종류가 다양해서 대기업 한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분야별로 특화된 팹리스의 육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Tip | 삼성전자 반도체 신화의 주역
반도체사업이 없었다면 삼성전자가 초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을까. 삼성전자가 초일류 IT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반도체가 있었다. 반도체산업은 한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대표산업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삼성의 반도체 사업을 일군 주역으로는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 등 최고경영진을 비롯해 김광호 전 부회장, 이윤우 상임고문, 진대제·황창규 전 사장, 권오현 부회장 등이 꼽힌다.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은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먹고 살 길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뿐이라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단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사업의 중요한 고비마다 과감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통해 삼성이 세계 반도체시장을 석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광호 전 부회장과 이윤우 고문은 전자산업의 불모지인 국내에서 반도체 신화의 서막을 열었던 반도체 신화 창조의 1세대다. 1979년부터 반도체 사업에 참여했던 김 전 부회장은 삼성 반도체의 산증인이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이후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던 반도체 사업을 진두지휘하며,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에게 다양한 충고와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윤우 고문은 1975년 삼성SDI의 전신인 삼성NEC에서 진공관 생산기술을 담당하면서 반도체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 고문은 진공관은 조만간 사라질 기술이며 앞으로는 반도체칩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 목표는 삼성이 첨단 VLSI 사업에 참여하게 된 기폭제가 됐다. 1983년 초 이병철 회장이 “이제부터는 본인이 반도체사업 본부장이다”고 선언할 정도로 그룹의 모든 역량을 집결해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때 VLSI 사업추진팀의 팀장으로 발령받았다. 이 고문은 64K D램 개발을 목표로 이른바 ‘반도체 신사유람단’으로 불리는 미국 마이크론 기술연수팀을 이끌기도 했다.
진대제·황창규 전 사장은 극일의 신념과 애국심으로 부와 명예를 포기하고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 세계 시장을 제패한 2세대 주역이다. 이들은 1980년대 이병철 회장이 애국심에 호소하며 외국에 있는 연구인력을 끌어들일 당시 합류했다.
미국 IBM 왓슨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진대제 전 사장은 IBM의 회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내 평생 소원이 일본을 앞지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귀국했다. 이후 16M D램 샘플을 일본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삼성전자의 반도체 연구개발 및 생산, 마케팅 등 전 분야를 이끌었다.
1988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황창규 전 사장도 삼성의 제안에 보장된 직위와 명예를 버리고 귀국행을 택했다. 당시 황 전 사장은 일본의 한 반도체기업 연구소 부소장과 세미나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한국의 기술수준을 폄하하는 얘기를 듣고 일본을 이기겠다는 의지를 안고 삼성에 합류했다. 이후 황 전 사장은 “반도체 집적도는 1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미스터 반도체’로 불리는 권오현 부회장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2M D램을 개발해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처음으로 일본을 누르고 세계 최정상에 올랐던 쾌거를 이룬 주인공이다. 권 부회장은 1997년부터 시스템LSI에 몸 담아 디스플레이 구동칩,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스마트카드IC 등 메모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비메모리 제품군을 세계 1위로 끌어 올리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 이코노미조선
장시형 기자
http://danmee.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5/15/2014051502151_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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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한국 화잇팅..!!!
삼성의 조직 문화를 바꾼 반도체의 거인 kt에 가서도 잘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