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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07] [연재] 삼류무사-61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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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을 얘기할 때 흔히들 지치지 않는 근력과 속도에 주안점을 둔다.
말이란 것 자체가 가장 완벽한 운송수단이기에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굉음을 울리며 힘차게 땅을 박차고 있는 네 필의 말은
최소한 준마 소리는 들을 것이다. 잡티 하나없이 새까만 갈기는 바람에
나부끼며 맹렬히 질주하는 흑마들은 꽤나 먼 거리를 달음질 쳤음에도 열심히
마봉을 놀리고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다소 무리한 주문을 말에게
하는듯 했다.
"이랴, 이랴, 오늘 내로 사천에 닿지 않으면 안돼요! 그곳에는 우리 표국과
안면이 있는 보천마방이 있으니 말 걱정은 하지 말고 달려요!"
선두마에서 당소소가 소리쳤다. 일행이 양양을 벗어난 지는 이틀도 되지
않았으나 그들이 지나온 거리는 스물 네 시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것이었다. 하기야 훌륭한 수단에 먹고 자는 시간마저 줄이고 줄여 재촉한
길이니.
의외로 - 본인으로선 전혀 의외롭지 않았다 - 장추삼의 기마술이 그럭저럭
쓸만해서 일행의 행보에 큰 지장을 주지 않고 있음에 당소소는 마음 속으로
적이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많은 장점 가운데 하나는 쓸데없는
말을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에없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마디 말도없이 마반자를 꽉 움켜쥐고 전방만을 바라보는 장추삼의
기세를 본다면 그런 말을 하고 싶다가도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갈테지만.
하운이 북궁단야에게 전음을 날렸다. 둘은 당소소의 뒤편에서 나란히 말을
몰고 있어서 장추삼의 앞쪽에 위치하기에 얼굴 표정을 들킬 일은 없었다.
("장형의 얼굴을 보니 말한마디 잘못 붙였다간 경치게 생겼소이다. 강호행보
에서 초행의 긴장감이 대단한건 알고 있지만 이거 원 숨이 막혀서...")
어제와 오늘을 합쳐 세차례 객잔에서 식사를 했고 두시진 가량 객방에서 잠을
잤지만 장추삼은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무언가 질문을 했을때
'예', '아니오' 정도의 응대가 고작이었고 그나마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겪고 있는 정신적 갈등을 눈치채고는 있으나 도움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도움을 줄 문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혼자 고뇌하고 혼자 풀어야할 문제이기 때문에.
북궁단야가 힐끗 하운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오른쪽을 덮고있던 긴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려 정말 오랜만에 그의 얼굴 전면이 드러나 있지만 아쉽게도 그를
추종하는 복룡표국의 여성들은 한명도 없으니 볼 기회도 역시 없었다.
당소소는 제쳐두고.
("긴장감 따위가 아니란건 알고 있지 않소?")
언제나 군더더기 없는 대답. 정나미가 떨어지긴 해도 모름지기 사내는 이래야
한다고 하운은 생각했었다.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책망도 많이 했었다.
("저 정도의 심마도 헤쳐내지 못한다면 일찌감치 직업을 바꾸는게 낫지.")
'그를 위해서도'라고 말을 맺는 북궁단야의 어조에서 하운은 냉정함이 아닌
걱정을 느꼈다.
날씨는 더없이 좋았다. 특별한 임무가 없었다면 반합이라도 사서 계곡을
시원스레 떨어지는 심산에서 약간의 술과 식사를 즐기며 초여름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그들이 달리고 있는 관도에서 여기저기
나들이가는 인파들로 꽤나 시끌거리고 있었다.
제법 덥기 시작한 초여름, 상승의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신이 아닌 이상 그들
역시 땀이 났고 짜증스러웠다.
"목마르고 힘들거에요. 조금만 참으면 사천에 도착하니 그때까지 힘내요.
거기에는 량고와 량반채를 맛있게 하는 객잔이 있어요. 오늘은 조장으로서
한턱 쓸게요!"
과연 조장은 조장이었다. 트릿한 장추삼이야 어쩔도리 없다고 하더라도 전력의
주축이 될 하운과 북궁단야가 기분이 저하될 즈음 시기적절하게 던진 그녀의
한마디는 그들에게 커다란 영향은 아니지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량고라 함은 찹쌀가루로 만든 막대모양의 여름철 식품이다. 속에 대추, 콩, 팥
등을 넣어 얼음 위에 얹었다가 차가와진 뒤에 먹는다. 남방에서는 갈문으로도
만든다고 한다. 량반채는 날 야채와 삶은 고기를 잘게 저며 기름, 간장, 식초,
설탕 따위에 무쳐 차게 해서 먹는 여름요리다. 둘 다 여림철의 별미로 입맛이
체력과 함께 떨어질 무렵 한사발을 비우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효과가 있다.
"량면이 먹고싶군."
하운이 문득 한마디 했다.
"그것 괜찮은 생각이네요. 이럇!"
맑은 기합성과 함께 당소소의 손에 들린 채찍이 힘차게 허공을 갈랐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의 넉넉한 웃음은 맏누이처럼 든든하게 일행을 인도하고
있었다.
한평생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얼마나 될까. '좋다'라는 기준 자체가
철저히 관념적이라고 한다면 자의에 둔다고 치더라도 말이다.
힘들게 만난 좋은 사람과 원만하게 인간관계를 맺는걸 가정한다면 확률은 점점
더 내려간다. 어쩌면 산장에서 평생을 가솔들만 보며 살았을 북궁단야였기에
실회조에서 만난 이들은 더없이 소중한 의미로 그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단사민 만큼만 주절거리는 성격이었다면 벌써 이들과 도원결의라도 맺자고
제안했을텐데. 할일없이 돌아다니는 낭인무사들이 부러웠던 적은 요즘이
처음이다.
꼬장꼬장한 그의 성격에 비추어볼때 낭인무사라니! 산장사람들이 알았다간
난리날 일이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세상사 많은 일들은 불합리의 재합체일 것이다. 낭인무사는 배경과
안주를 꿈꾸고 메어있는 사람은 자유를 바라보나보다. 또한 바람은 현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겐 강호로 나온 이유와 사명이 있으며 결코
그것을 져버려서는 안된다. 감상은 일단 덮어 두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편린가운데 일부를 무시해야 한다. 어느 것이 대의고 어느 것이
소의인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건 그에게 아직 이를지도 모른다.
자정이 훨씬 지난 늦은 시각이 돼서야 일행은 사천에 도착했다.
따각따각.
천천히 말을 몰며 당소소들이 향한 곳은 량고와 량반채를 맛있게 한다는
객잔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마방을 둘러서 말을 바꾸어 탔기에 정신적인 부담은
어느정도 덜은 상태였지만 그것이 육체적인 피로까지 해소해 주는건 아니라서
그들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역력했다.
"이게 뭐야?"
당소소가 뾰족한 놀람을 음성으로 표현했다. 그 곳은 나무판자로 굳게 못질된
건물 앞이었다.
"이곳이라면 폐업한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어요. 주인장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 폐업을 한다는거야! 시간이
늦었다고 벌써 문을 닫았나? 이봐요, 이봐요!"
억지였다.
말에서 폴짝 뛰어내린 그녀는 십자를 기울인 형태로 못질된 대문을 손바닥으로
꽝꽝 두드렸는데 폐업을 하지 않은 이상 못질로 문을 봉할 객잔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하운은 망연히 북궁단야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북궁단야에게 뭐 특별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데나 들어가서 뭣이라도 먹고, 쉬고
싶었다.
"무슨 일이슈?"
옆에 허름한 객잔에서 중노인이 잠에 쩔은 눈꺼풀을 억지로 치뜨며 주렴을
걷고 걸어나왔다. 그는 오십대의 깡마른 사내였는데 당소소들의 차림새에서
무인의 냄새를 맡았는지 정신이 번쩍든 것 같았다.
"말 좀 묻겠소."
북궁단야가 질문을 할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반응으로 표정이
나뉜다. 여인네들은 동공이 풀리고 뭐가 좋은지 헤죽헤죽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사내들은 여하한의 물리적 힘이 가해지지도 않았건만 명치께가 꽉
막히는 중압감에 식은땀이 절로 나온다. 공통점은 두 경우 모두 대답이 술술
나온다는 데 있다.
"무, 무엇입니까. 소인이 아는 한도라면 성, 성심 성의껏..."
"영화객잔이 폐업한건가요? 언제 그랬나요? 무슨 이유 때문에? 객점주인
방노인은 어디로 갔나요?"
청명객잔 주인 모송인은 정신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눈빛만으로 전신을
난자할 듯한 사내의 질문에 반쯤 나갔던 혼이 그의 일행인 것 같은 여인을
보는 순간 거의 나가버렸다.
'세상에, 중원천지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저런 미인이!'
모송인의 귀에는 그녀의 질문따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삼십년가량 객잔을
운영하여 남보다는 많이 사람들을 상대했다고 자부했건만 그의 오십평생에
이런 미녀는 처음 보았다.
당소소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그의 황홀경은 당분간 지속되었으리라.
"갈!"
깜짝.
공력을 싣지는 않았으나 심후한 깊이의 사자후 한방에 모송인은 제자리를
찾았다.
"예? 뭐라굽쇼? 다시한번 질문을..."
"영화객잔이 언제 문 닫았냐구요. 무슨 이유로 문을 닫게 되었는지 묻고
있잖아요!"
"아... 영화객잔!"
그제서야 알았다는듯 모송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마음의 여유를
찾은듯 당소소들을 찬찬히 훑어 보았다. 말에서 내린 두 남녀 외에도 아직
마상에 앉아있는 청년들 역시 무인인 것 같았는데 온화한 기품의 미공자
보다는 성깔깨나 있어보이는 건달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놈은 무슨 고민거리
라도 있는듯 제 생각에 온 정신을 쏟아붓는 기색이었는데 삼십년 객잔운영
경력상 얻은 직감으로 판단할 때 분명 위험한 인간임에 틀림없다.
"삼개월 전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문을 닫던댑쇼? 그러잖아도
방노인이 한마디 말도 없이 도망치듯 사라져서 내심 섭섭했었읍죠."
그는 자신이 영화객잔주 방노인과 얼마나 친했으며 객잔운영의 선배로서
아낌없는 충고를 했다는 것에 대해 두서없이 나열하였다.
"별 수 없군요. 찾는 곳이 문을 닫았으니 이곳에서라도 묵어야지. 주인장, 방
두개 있나요?"
"그러문입쇼."
내심 건달녀석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선녀같은 당소소의 한마디에 모송인은
뼛골이 다 녹는듯 해서 고개를 끄덕이기에 바빴다.
"말은 험한 길을 달려야 하니 가장 좋은 여물과 휴식을 취하게 해줘요. 그리고
우리도 시장한데 뭐 요깃거리가 있으면 내오도록 해요."
당소소가 주렴을 걷고 들어가자 나머지 일행들도 어기적거리며 뒤따랐다.
청명객잔은 현판에 걸린 이름처럼 깨끗하긴 했다. 너무 깨끗해서 사람이 없는
것인지 사람이 드나들지 않기에 깨끗한 지는 모르지만.
"손이 우리 밖에 없나?"
"늦은 시각이라 모두들 자러간걸 거에요. 이시간에 누가 식탁에서 음식을
들겠어요? 술 한잔을 하더라도 방에서 하지."
적막한 실내 분위기에 꺼림직했는지 하운이 주위를 둘러보며 한마디 하자
당소소가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의 감정기복을
남에게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운과 북궁단야로서는 그녀가 지금
얼만큼이나 낙담해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집 주인장이 음식을 꽤나 맛깔스럽게 했었나봐요? 객잔 하나 문닫은 것에
꽤나 섭섭해 하시는걸 보니 말입니다."
"그랬었지요."
하운은 태평스레 당소소에게 말을 건넸다. 힘없이 웃는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객잔 하나 문닫은 것이라...'
잠시 후에 소동 하나가 그들이 앉은 식탁으로 가서 꾸벅 절을 했다. 부시시한
얼굴이 자다가 일어난 듯 입술에 침까지 묻어있었지만 불결해 보이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에 저희 청명객잔을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흐아... 읍!
저희 객잔에 자랑하는 요리로는 사천요리의 정수라고 불리우는 하아... 읍!
천하일미 마파두부는 기본이고요, 최고의 사료와 정성으로 키운 돼지고기의
안심살에 고추를 넣어 볶은 회과육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렇게 짜증스런
여름날을 일거에 날려보내줄 별미지요. 그리고..."
소동아이는 거의 졸면서도 기계적이라 할만큼 주둥아리 만큼은 제 기능을
다하여 쉴새없이 나불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입에서
군침이 줄줄 흐를만큼 소동아이의 혓바닥은 환상적으로 움직였는데 알고보면
사천지방 음식점이라면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요리에다 과장과 강조를 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향신료를 듬뿍 친 고기류가 피곤에 지친 일행의
구미를 자극할 리 있겠는가.
"먼 길 오느라 피곤해서 그런건 못먹겠고... 자소탕이나 계란탕 되나요?"
소동아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당소소를 돌아보았다.
"물론... 헉!"
잠이 다 달아나는 모양이었다.
"자소탕하고 계란탕 말씀이지요? 최고로 맛있게 대령하지요!"
녀석은 쏜살같이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후 주방에서 작은 소란이 났다. 간간히
'절세가인' 이나 '천상선녀' 따위의 말이 들려오기도 했다.
음식은 주방장인듯 싶은 사십대의 사내가 가져왔다. 절세가인을 직접 보고
싶었으리라.
"최, 최고의 계란과 솜씨로 만들었습니다. 노독을 푸시는데 더할나위 없이
좋도록 기본적인 재료만 사용하여 그 맛의 깔끔함과 시원함에 전력을
기울였으니 맛있게 드십시오. 뭐든 필요한게 있으면 주저없이 말씀하십쇼."
중년의 주방장은 아예 녹았다.
자채탕은 말 그대로 자색의 나물, 즉 김으로 끓인 국이라 개운하고, 계란탕은
시원하고 깔끔하며 두 음식 모두 허기와 피곤에 지친 일행의 위에 부담없는
음식이었으니 그녀의 노련함은 역시 돋보였다.
회수행에 있어서 술은 금물이다. 한 두잔의 술이 몸에 좋다지만 싸움이
예상되는 노점을 걸으며 긴장을 푼다는건 자살행위에 다름없었다. 후룩후룩
마시는 탕이기에 짧은 식사시간이였고 공복이 해결되자 대뇌의 피로가 신체를
점령했다. [10917] [연재] 삼류무사-62 첨부파일 :
"모르겠어. 도무지 이해가 안간단 말이야."
"뭐가 말이오."
한지로 칼을 조심스레 닦던 북궁단야가 하운을 돌아보았다. 건너방은 벌써
불이 꺼진 걸로 보아 항상 여유롭던 당소소도 꽤나 피곤했음을 알 수 있었다.
"북궁형은 느끼지 못했소? 당소저의 반응에서 말이오. 단골로 들렀던 객잔
하나 없어진 것 때문에 보였다면 그건 분명 뭔가가 있는거요.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당소저께서 객잔 하나의 폐업에 흔들린다? 말이 안돼."
그는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으며 중얼거렸다. 북궁단야도 눈치가 까막은 아니라
그 정도는 느꼈다. 그의 관점에서도 당소소가 느낀 당혹감은 의외였으니까.
북궁단야의 시선이 슬그머니 장추삼에게로 옮겨졌다. 뚱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있던 장추삼은 그의 눈길을 받자 손부터 내저었다.
"왜 날 보시오? 난 몰라요. 몰라."
차라리 안다고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대답.
북궁단야는 계속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어떤 표정을 짓지도 않았지만
장추삼의 얼굴은 점점 똥색이 되었다.
"에잇, 알았다구. 말하면 되잖아. 말하면."
그제서야 장추삼에게 시선을 뗀 북궁단야가 하운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형이 말할게 있다는데..."
"그래요? 어서 말해보시오. 세이경청 하겠소이다."
하운도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난 왜 저 얼음덩어리의 눈빛만 보면 꼼짝을 못할까?'
"나두 잘 모르는 얘기니까 그냥 들어두라구. 전에 고아저씨가 그랬는데
당소저가 사천일검을 처음 본 곳이 영화객잔이었다고 말을 했었소. 뭐, 무슨
싸움이 있었나본데 그것까진 알 바 없고, 어쨌든 그래서 당소저에겐 영화객잔
인지 뭔지가 추억의 장소로 머리에 남은 것 같다는 거요."
"당소저가 사마대협을 처음 만난 곳이라... 이것 참,알쏭달쏭 한 얘기로군."
하운이 한마디 하자 북궁단야도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당소저만큼 특이하게 무로를 걷게 된 사람도 없지. 그녀에게 무인의
길이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념과 의지로 닦인 건 아닐지도 모르니까."
하운은 조용히 당소소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당소소. 무림 십오개 대파중 한자리를 차지하는 사천당문의 금지옥엽. 전임
당문주 일선만분 당완은 세상 부러울게 없는 무인이었으나 나이 사십이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영험하다는 절은 어디든 찾아가고 몸에
좋다는 약초는 무엇이든 구해 먹었으니 가히 그 정성은 눈물날 지경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의 부인이 태기를 보였다. 당완이 덩실덩실
춤을 춘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옥동자를 순산한 부인에게 두손을 꼭 쥐며
할 일 다했다고, 수고 많았다고, 고맙다고 별의별 고마음을 다 표현했지만
앉으면 눕고싶은건 인지상정일까.
고대하던 아들을 하나 얻은 그의 마음은 또다른 꿍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게 어떤 건지는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으나 업무가 끝나기 무섭게 본가로
귀가하는 당완을 보며 당문 식솔들은 자식이 좋긴 좋은가보다 하고 생각들
했다. 당문의 안주인에게 두번째 태기소식이 알려지자 당완의 이른 귀가가
옥동자 당민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게 밝혀졌다.
"그게 당소저였군?"
상념의 늪보다 재미있는 이야기였는지 장추삼이 끼어들었다.
"왜 아니겠소. 두살 터울로 태어난 그녀는 당완 선배의 또다른 행복이
되었다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예뻤다더군."
"뻥이야. 갓 태어난 어린애 치고 이쁜애 못봤지. 쭈글쭈글 하기만 한걸."
장추삼의 얌통머리 없는 말을 무시하고 하운은 얘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소문이었다고 했잖소. 당소저가 그렇게 예쁨을 받았다 이거지.
대대로 아들에게만 해주던 벌모세수를 네살짜리 여아에게 베푼 건 분명
파격적인 일이었거든."
당문은 철저히 혈연중심의 가문무벌이다.
그러기에 소수의 인원으로 험난한 무림에서 생존해야 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공과 용독술로 여지껏 살아 남았다.
잘 알려진대로 당문을 대표하는 무공은 암기술이다.
"장형에게 한가지 묻겠소. 암기술을 뒷받침하는 두 요인이 뭔지 대답할 수
있겠소?"
"암기술?"
깜짝 놀란 장추삼이 손톱을 괜히 쑤셔댔다.
"그, 글쎄 나야 뭐... 치고받는건 자신있지만 다구(?)는 영..."
"다구라면 무기를 말하는건가?"
북궁단야가 물었다. 눈동자만 돌려 그를 쳐다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이자
북궁단야가 제차 물었다.
"그럼 검도 다구에 속하는가?"
장추삼도 영 바보는 아니다. 그렇다고 덥썩 대답했다간 맞아죽게 생겼는데
그럴수야 없지 않은가?
"검? 오, 그건 생각해본적 없군. 생각해 보질 않았어."
트집거리를 잃어버린 북궁단야가 말문을 닫았다.
'칼이든 나발이든 맨손이 아니면 전부 다구지, 임마 넌 그런 것도 모르냐?'
장추삼이 속으로 북궁단야를 씹고있을 때 차를 한모금 홀짝거린 하운이 문제의
풀이를 해주었다.
"암기술은 던지는 방법이 가장 중요하지만 검이나 창 등 착신무기와 다르게
사용자의 몸에서 떠나 상대방에게 타격을 준다는걸 알거요. 이 말의 의미를
곱씹어 봅시다. 알겠소? 한번 손에서 떠난 암기를 회수하려면 상대방이
항거불능의 중상을 입기 전엔 불가능하거든. 살벌한 전투상황 중에 떨어진
암기를 줍는다는건 자살행위와 다름없으니까 휴대가능한 암기라고 해봐야
스무개 남짓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겠소? 단한번의 적중시에 최대의
타격을 가하려면 말이오."
"암기의 다양화, 암기에 묻힐 독성분의 개발."
북궁단야가 잘라 말했다.
"바로 맞았소. 역사란 도전과 응전의 반복인 것처럼 당문의 암기와 독도
타문파의 분석과 해독에 따라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었소. 어쩌면 당문에
있어서 암기 제조술과 용독술은 암기술보다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오."
당문에선 여아에게 절대로 가전무공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암기
제조창인 비기창과 독술연구소격인 만초련에의 출입을 엄금한다. 이유는 물론
가전비기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이다.
당소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무리 문주의 금지옥엽이라지만 가문의 율법은
엄정한 것이었고 어린 그녀에게 무공은 그리 매력적인 오락거리도 아니었다.
여염집 계집아이처럼 당소소 역시 책을 읽거나 수를 놓고 그림을 그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녀의 두살 위 오빠인 당민도 가문의 기대대로 무럭무럭
자라 여덟살이 되던 해에 당문 암기술의 기초라고 불리우는 투경요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신동이라고까지 할 순 없으나 그럭저럭 재질이 훌륭한
편이란 반증이리라. 여기서 작은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유달리 사이가 좋았던
오누이간인지라 투경요해를 익힌 기쁨에 겨워 당민은 가장 먼저 당소소에게
달려가 자랑을 했다고 한다. 볼까지 홍시처럼 상기돼서 이것저것 자랑을
늘어놓다가 어린 누이가 별반 흥미를 보이지 않자 어설픈 동작이나마 시범까지
보인 당민은 그날 저녁 당소소의 그림 한장을 아버지에게 가져갔다.
"소소가 이걸 그렸습니다. 그 아인 제가 투경요해를 익힌 것에 관해 기분이
나쁜가봐요. 직접 몸으로 보여줬는데 고작 반응이 이거였어요. 아버님, 소소는
투경요해가 얼마나 고절한 무공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계집아이라서
그런가?"
당완은 똘망똘망한 아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투덜거리자 귀여워 죽겠다는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허허허, 소소가 설마 그랬을라구. 아마도 네 말대로 계집아이라 무공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지. 어디보자, 소소의 그림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그는 딸의 그림을 미소띤 얼굴로 찬찬히 음미했다.
"오! 우리 민이를 그렸구나. 이 동작은 투경요해중 절초인 망향관석의 자세가
아니더냐. 그런데 아소가 발모양을 잘못 그렸어. 이런 상태라면..."
당완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다.
'이런 상태라면...'
- 망향관석은 더 없이 무서운 위력을 발하게 된다!
'이, 이럴수가!'
당완의 안색이 싹 변했다.
"에이 설마?"
얌통머리 없는 놈은 어디에 박아놔도 티가 나는법. 장추삼이 희한한 표정을
지었다.
"몇백년 역사가 담긴 구결을 여섯살난 아이가 단 한번, 그것도 여덟살짜리의
시무를 보고 총체적인 보완을 했다는거야? 말도 안돼. 그게 사실이라면
당소저는 하늘이 내린 절세기재란 소리네? 하여간 옛말 중에 믿을 것
없다더니..."
애써 부글거리는 속을 눌러 참고 하운이 대꾸해 주었다. 그의 인내심은 거의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있고 장추삼이란 인간의 본래 성격을 아는지라 개가 짖는
정도로 생각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 사건의 진위여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망향관석이 당문십절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건 삼십년이 채 되지 않으니 신빙성이 있다고도 보오. 어쨌든
그 사건은 유야무야 덮어졌고 당문의 평화로운 나날은 지속됐다고 하는데..."
한편의 희극과도 같았던 일은 자연스레 잊혀졌다. 그 일 이후로 당소소가
특별히 무공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고 변화도 안보였기에 그랬으리라. 준기재
정도인 당민도 부친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지 않게 무공과 심신을 닦았고
당소소도 잘 자랐다. 아니, 너무 잘자라서 문제였다. 그녀의 미색은 열두살
때부터 사천성 일대에 소문이 돌아 방년이라는 열여섯 무렵엔 아들 자식둔
무가치고 그녀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당완이 얼마나
배짱을 튕겼을 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 사천제일화!
이것이 열여섯에 얻은 당소소의 첫 강호명이었고,
- 중원무쌍가!
열 아홉의 그녀에게 붙여진 두번째 강호명이었다.
"중원무쌍가에서 십년만에 여중제일고수 만화선녀로의 변신이라니. 세상 일은
참으로 알기 어렵군."
북궁단야의 입치곤 다소 긴 말이었다. 산골에 쳐박혀 있었으나 중원무쌍가의
염명은 깎아지른 봉우리와 내를 넘어 적설산장에까지 전파되었기에 혈기방장한
북궁단야도 내심 궁금했던 얼굴.
"당시에 청춘이었던 젊은이 가운데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었겠소?
사내들은 사내대로 형용키 어려운 염심에, 여자들 역시 동경과 질시의
마음으로..."
"나!"
장추삼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하운과 북궁단야는 어리둥절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나' 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난 몰랐어."
둘은 장추삼의 다음말을 듣고도 어떤 의미에서 그런 소리를 했는지 바로 알지
못했다. 수초 후 둘은 동시에 표정이 변했다. 하운의 두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어찌 인두겁을 쓰고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당당한 장추삼의 표정을
보노라니 실수를 저지른 훈장의 잘못을 지적하고 의기양양 해대는 학동처럼
득의의 빛까지 감지되었다.
"아... 그, 그랬소?"
화를 눌러 참을 때 사람들은 종종 목소리가 떨리고 말을 더듬는다.
"하형은 다 좋은데 말을 할 때 자신의 생각을 단정짓는 버릇이 있다구.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그건 약점으로 작용되는 걸 몰랐나봐?"
"추, 충고 고맙... 소."
그는 동굴에서 보낸 칠년을 제외하고 서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긴 인내의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동굴!'
동굴이 생각나니 자연히 못된 늙은이 하나가 떠오르고 정말 빌어먹을 공심법이
겹쳐졌다. 공심법, 하운의 이십삼년을 모조리 삼켜버린 엉터리 공부. 하운이
입을 다물자 객실엔 기묘한 정적이 찾아왔다. 북궁단야는 장추삼에게 한마디
하려했으나 하운의 얼굴에 깃든 수심의 빛깔이 너무도 선명한지라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장추삼은 그냥 있었다.
"허험, 말이 끊어졌소이다.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소?"
화산에서의 수양은 어디 가지 않았다. 비록 장법과 검결이 머리 속에서
새하얗게 지워지기는 했지만 도를 추구하며 마음을 닦았기에 기우뚱했던
평정심을 바로 잡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하운이었다.
"중원무쌍가."
북궁단야가 받아 말했다. 장추삼의 입이 벌어지면 또다른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몰라서 급히 대꾸한 것이다.
"아, 중원무쌍가. 거기까지였지..."
다소 맥빠진 음성으로 하운이 말을 이었다.
"중원무쌍가라는 염명이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좋았다고는 보기 어려운거요.
왜냐하면..."
얘기는 바야흐로 본론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칼끝같던 북궁단야의 눈빛도,
다소 멍청하고 많이 반항적인 장추삼의 얼굴도 이순간 만큼은 호기심이란
접점에서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뒷얘기를 마저 들을 운명이 아니었다...
[10946] [연재] 삼류무사-63 첨부파일 :
스르륵-.
유령의 짓 인양 장지문이 열렸다.
"쉿!"
당소소는 들어서며 입을 오른손 검지를 세워 막는 시늉을 했다.
' ! '
세 남자의 의아로운 시선을 받으며 당소소는 나직한 전음을 보냈다.
「문제가 생겼어요.」
그녀는 눈으로 창문을 쫓았다.
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온 네명이 서있는 곳은 방노인이 운영했다는
영화객잔의 후원이었다. 야심한 밤에 객잔 후원에서 네사람이 서성이는게 꼭
도둑고양이들의 집회같다고 생각되어 웃겼지만 장추삼은 당소소의 굳은 얼굴
때문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이것!"
당소소가 섬섬옥수를 들어 가리킨 곳은 후원의 나무 모서리였다.
"뭐야, 이게? 그냥 애들 낙서잖아."
"흑화?"
궁시렁거리는 장추삼을 무시하고 하운이 물었다. 그의 눈길을 받은 당소소의
얼굴에 미미한 진동이 일었다.
"그것도 긴급이지요. 촌각을 다툴때, 가문이나 무림의 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사용하는 기호. 당문 역사상 이 기호가
사용된 적은 열번이 채 되지 않을 거에요."
방노인이란 인물이 예삿 사람이 아니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객잔하나 폐업한
것 치고는 그녀의 반응이 과민한 정도를 넘었으니까. 그러나 문중 최고 흑화를
남길 정도라면, 그 정도의 판단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인물이라면.
'당가팔로?'
하운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당소소가 쓰게 웃었다.
"방노인, 아니 방교명 장로님은 당가에서 유일하게 방계혈족으로 당가팔로의
위치에 오른 분이에요. 내가 당문을 나서면서 장로님께서도 정보수집도 할
겸..."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같이 강호로 나왔다고 하려 했으리라.
그런데 방금 당소소가 방교명을 당가팔로중 한명이라 했고 하운도 그러리라
짐작했다. 무감정한 북궁단야도 순간적으로 흠칫하는 명호, 당가팔로.
천년 무림사.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이 소용돌이 치고 그것의 부산물
처럼 명멸을 거듭했던 기인괴효들과 그들이 모여 만든 이런저런 단체들.
한달간의 성세를 유지한 곳도 있겠고 백년이 넘도록 영화를 누린 단체도
있었다. 개파를 하자마자 쇄락의 길로 접어든 곳도 있겠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처음 문을 열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성세를 가지는 문파도 있다.
하나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무림을 말할 때 이만큼이나 정확하게 표현하는
어구가 또 어디있을까? 한때 육일승천의 기세로 문호를 넓혔던 어떠한 문파도
잔뿌리 잘린 고목마냥 시들시들해져 종내 이름만 남기곤 했다. 아홉개의 큰
문파를 제외하고는 기간의 장단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법칙은 예외가
없었다.
예외가 없었다..? 아니, 모든 법칙엔 예외가 있는법. 강호라는 거친 들판을
가로지르며 철저히 가문중심의 체제를 유지한다는건 한팔을 묶고 싸움에
임하는 무사와 다름없는 터이다. 물론 하북의 팽가나 강남의 남궁세가를
위시한 오대세가를 예로 들 수 있겠지만 그들은 은근히 문호를 개방하여
외인들 에게도 어느정도 가문을 개방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철저히 가문 중심의 구조로 문파를 이끌어 어찌보면 패쇄적 이라고,
또 어찌보면 순수하다는 말을 듣는 강호상의 한 문파. 비록 삼백도 안돼는
소수의 인원이나 그 어떤 거마괴효도 두려워 마지않는 일당백의 문파.
당문을 일컫는 말이리라.
그 당문을 암중에서 지탱하는 여덟 개의 큰 힘, 당문의 최고 원로이자 최고의
힘과 지도력을 지녔다는 여덟명의 노인.
그들이 바로 당가팔로라 불리우는 당문의 자존심이다.
"어서 서둘러야 해요. 방장로님은 지닌바 무공보다 기초독학으로 일가를
이루신분, 만약..."
"맞아!"
갑자기 장추삼이 나섰다. 그가 나서자 모두들 어안이 벙벙해졌으나 장추삼의
표정은 어울리지 않게도 심각했다.
"그 양반 누군가를 미행하고 있어!"
"?"
하도 당혹스러운 말이라 당소소는 장추삼이 '그양반' 따위의 싸가지없는
칭호를 사용한 것 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나도 흑화를 조금 아는데 그 양반이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자세히 보라구,
깊이가 일정하잖아."
그가 손을 들어 흑화가 패인 나무를 가리켰다.
"깊이가 일정하다는 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는 건데 화급을 다투는 내용을
이정도의 여유로움으로 남겼다는 건 뭐겠어?"
하운이 의외로운 눈빛으로 장추삼을 일별했다.
"당소저, 실례가 안된다면 내용을 알수 있겠소?"
그제서야 당소소도 흑화에 놀라 내용조차 해독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쓰게
웃었다. 남들이 알았다면 바보라고 했겠으나 흑화의 해독은 일반글자처럼
한번보고 알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 정신이 아니군요... 신비잡단, 무공측량불가, 표물... 표물?"
넷의 눈이 하나로 엉켰다.
"오대산!"
* * *
없는 사람 욕하는 것처럼 치사한건 없다. 뭐, 없는데서야 나랏님도 욕한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 범인들의 얘기고 스스로 괜찮은 남자임을 자부하는
장추삼이 경멸하는게 사람없는데 욕하기다. 거기다 이제 죽어 없어진 사람
욕하는건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였다.
'욕을 안할 수가 없어, 젠장맞을 노인네!"
헥헥거리며 장추삼이 열심히 한사람을 씹어대고 있을 때 앞쪽에서 한가닥
전음성이 들렸다.
「하단전의 기운을 중단전에 삼분지 일 정도 주라고, 멍청이!」
'그래, 너 잘났다.'
이번엔 있는 사람을 씹어댔다. 그렇게 장추삼이 죽은 제 사부와 북궁단야를
번갈아 욕하고 있을 때 전음을 멈춘 북궁단야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저자는 정녕 신법의 기초조차 없단 말인가? 강호 삽대장 중 서열 오위권
이라는 모추를 장난처럼 제압한건 우연이었나? 그렇다면 그때 그 보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건가?'
객잔에서 출발할 때 말을 끌고가지 않는다고 입을 쭉 내민건 천성이 게을러서
그런가보다 했다. 모두들 경신술을 쓸 때 허둥거린건 강호 경험이 부족하고
지닌 무공을 아직 다 소화하지 못해서 그런가 했는데 이제보니 신법의
기본조차 아는게 없다는걸 알자 그의 의아함은 당홍감의 성질로 변했다.
세상에 어떤 미친사부가 제 제자에게 보법만 가르치고 신법을 전수해 주지
않겠는가? 보법과 신법은 지극히 유기적인 몸놀림이기에 연계해서 가르치기도
쉽고, 꼭 가르쳐야만 하는 무공이다. 그리고 이 둘은 무공의 기초이기도 하다.
「시키는대로나 해, 자넨 시키는 것도 못하나, 혈도 몰라?」
냉엄하게 장추삼을 질책하면서도 북궁단야는 먼저간 당소소와 하운을 집어삼킨
오대산을 쏘아보았다. 이런 야심한 밤에 말을 몬다는건 적들에게 '나 가오'
하고 소리지르는 격이라 일행은 부득불 신법을 사용해 오대산까지 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장추삼이었다. 흑화를 분석하던 냉정함과 자신만만함은 다
어디로 갔는지 처음부터 주둥아리를 빼물더니 객잔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헥헥거리며 뒤쳐지는게 오뉴월 got살에 찌든 똥개같았다. 마음 급한
당소소가 천천히들 오라며 나는 듯 달려 나가자 장형을 부탁한다며 하운 역시
뒤쫓았고 결국 북궁단야가 비실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떠맡게된 것이다.
'정말 잘 안되는군, 아, 이거 열받네!'
제딴엔 어떻게 좀 달려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북궁단야의 눈에비친 장추삼은
사냥개에게 쫓겨 달아나는 오리였다.
「시키는것도 못하나, 자네 그렇게 머리나빠?」
거기다 북궁단야의 지시를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듣고 싶은데 몸이 안따르는
건지 그가 신법이랍시고 행하는건 북궁단야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안되겠군!'
상대의 숫자는 열둘이라고 했다. 여지껏 그리 큰 비중이 아니였던 숫자는
방교명 장로의 흑화 하나로 갑갑하게 다가왔고 이쪽 선발은 둘, 결코 여유로운
함수관계는 아니다.
장추삼의 행보로 볼 때 목적지까지 같이 간다면...
「먼저 가겠네.」
'그래, 어서 가라'
북궁단야가 신형을 밟으며 전음을 날리자 장추삼은 앓던 이가 빠지는 것
같았다.
「뒤를... 부탁한다.」
' ? '
다소 쑥스러운듯한 북궁단야의 마지막 전음성, 뒤를 부탁한다니?
그러나 장추삼은 장추삼. 이렇게 화답했다.
"앞이나 잘하슈."
* * *
콰콰콰콰-
미칠듯한 장풍의 소용돌이 사이로 방교명은 용케 신형을 뽑아 들었다. 네명의
청의인에게서 쏟아져 나온 장력은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방교명을
위협하였고, 각도 또한 예측불가능한 방향에서 치고 나오는걸 보면 그들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다는걸 말하는 거다.
'내 비록 절정까지는 바라지 못한다고는 하나 그래도 무림동도들이 알아주는
신법과 손재간을 가졌다고 생각했거늘...'
여태껏 정타는 맞지않고 있으나 그들의 장력은 실로 무거운 것이라서 단지
몇번 스쳤을 뿐인 왼쪽 어께가 말을 듣지 않는다.
방교명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 하나가 미끄럼타듯 목을 스치고 지나가서 목
언저리에 도달했다. 십성 전공력을 가동한 상태에서 땀이 흐른다는 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건 불문가지!
더욱더 무서운건 이들 중 어느하나도 여지껏 호흡한번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거다.
방교명의 영화객잔으로 수상한 열세명의 인물들이 날아온 건 열흘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맞춰입은 청의 무복에서 단지 어떤집단의 무림인들
이라고 짐작했다면 그가 지금의 곤궁에 처해 있을리 만무했지만 운명의
이끌림인지 마침 점소이 아이가 몸이 안좋다고 하여 일찍 집으로 돌려보낸
탓에 방교명 혼자 열세명의 수발을 들게 되었다.
하루전 복룡표국 소속의 열아홉 식구들이 묵어 갔었기에 가뜩이나 피곤한
상태에서 또다시 밀려온 단체손님이 내심 반갑지는 않았으나 객잔을
운영한다고 문을 열어놓은 마당에 손님을 거절한다는 건 말이 되지않는
일인지라 어쨌든 반갑게 열세명을 맞이 하였다.
하나같이 무겁게 죽어버린 얼굴들, 손님들 중에 가장 껄끄러운 부류를 대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사람들 이리라. 그러나 지금 고기나 지지고 손님의
이부자리나 살피는 객잔주인 행세를 하고는 있지만 방교명은 무인이었고
그래서 이들이 무척이나 위험한 군집이란 걸 알수 있었다. 일행을 객실로
안내할 때 까지도 막연하게 '위험하다'란 생각을 했지만 객실로 들어가는 그들
중 마지막 이가 메고 있는 봇짐은 그이 머리를 쭈뼛 세우기에 충분했다.
그건 하루전 떠났던 복룡표국의 표행물과 꼭 같았으니까...
본시 당문의 가훈은 '남이 건드리지 않는다면 관여하지 안는다'는 것이었으니
여타 표국의 짐이 털리든 팔아 먹었든간에 방교명 으로서는 상관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 표국이 복룡표국이라면 다르다.
그곳엔... 당소소가 있으니까.
[10971] [연재] 삼류무사-64 첨부파일 :
당가의 장로들 중 당소소를 어여삐 이기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마는 그와
당소소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게 말할 사이가 아니다.
데릴사위로 당문에 발을 들였을 때 방교병이 받은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막연히 보고 들었던 당문의 텃세... 당문 사람들중 당씨 성을 쓰지
않는이가 강호에서 알려진 바가 없는 이유를 절실하게 느꼈다. 제대로 된
암기술 한초식을 얻어 배우기도 어려웠고 암기창 근처에는 발도 딛지 못한건
그나마 나았다. 왜 여럿이 토론을 하다가도 그만 보이면 말을 딱 멈추는 것인가?
자괴감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손들 댄게 약초에 관한것이었는데 기재
소리를 듣는 당문인치고 무공와 암기 제조술쪽으로 눈을 돌리는 현실에서
방교명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대안이었으나 이것이 그를 살릴줄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에는 약초와 독초를 제대로 구별못해서 괸히 맛을 보았다가 실려가기도
하고, 별의별 우스운 일도 많았지만 기본적인 지식을 손에 넣고 부터 그의
진가가 발휘되어 나이 오십이 되었을 때 당문에서 그보다 약초를 많이 아는
이는 세손가락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쏟아지는 찬사와 높아져가는 명성, 그러나 한핏줄이 아니라는 이질감은
족쇠처럼 그의 발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한 소녀... 가주가 될 오라비보다 뛰어난 자질과 높은 무공이 있으나,
백년내 당문 최고의 기재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될...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
이들이 친해진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다.
당소소가 방교명을 친할아버지보다 더따르고 그 역시도 그네에게 친손녀보다
더 애정을 쏟은건 둘만이 느꼈던 '이질감'의 동류의식이었고, 끝내 그녀가
가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아내마저 먼저 보내고 텅빈 당문을 '당가팔로'란
허명으로 안주하기 싫었던 방교명 역시 정보수집을 이유로 사천어귀에서
객잔을 열었던 것이다.
몸은 비록 사천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각지에서 전해오는 그녀의 활약상에 그
얼마나 가슴졸이고 통쾌하게 웃었던가?
영화객잔에서 주인영감이 불특정한 날짜에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횟수가 여태까지 꼭 마흔한번 이었다는건 숫자관념이
남달리 이상한 이들은 알지 모른나 그 날이 당소소의 실회조 종료일인 것
까지는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영화객잔 주인말고는 말이다.
'만약 실회물이라면...'
백이면 백 당소소가 실회로를 자청할 터이고 표국내에서 그걸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게 뻔했다. 실주회수자가 생긴이래 그들의 일거리, 즉 실물이
생긴건 서른 여덟 번, 다른 표국의 의뢰까지 합쳐 마흔 일곱 번의 실회로 중에
당소소는 무려 마흔 한번 참가했었고 실물회수에 실패한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마흔 한 번의 실회로... 무공에 자신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횟수...
방교명만은 알고 있었다.
자학에 가까운 그녀의 몸부림속에 어떤 아픔이 숨겨져 있는지.
그래서 별말없이 지켜보며 졸였었다.
'이자들은... 위험해!'
차를 가져다주며, 괜히 야참이랍시고 급히 음식을 만들어 그들앞에 내려
놓으면서 방교명은 열세명의 청의인들 면밀히 관찰했고 얻은 결론은 하나였다.
대체 이와같은 자들이 어디서 숨어있었기에 강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식은땀이 촉촉히 베어나는 손바닥을 부비며 전전긍긍하던 방교명에게 숙식비
이상의 은자를 던져주고 십삼인은 떠났다.
급히 당문만의 암호를 남기고 이들을 추적하며 그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오대산으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마음이 바쁘고 당혹스러웠지만 방교명이 객잔을 열고 정보수집을 한지
햇수로 십이년째. 십삼인의 등짐에서 떨어지는 잔가지와 신발에 묻은 황토색의
흙은 이들이 표물을 오대산에서 탈취했음을 의미한다. 이 근체에 산이라곤
그곳밖에 없으나까.
바보가 아닌 이상 범죄현장을 돌아갈리 없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건...
'유인!'
창백해진 그가 커다란 바위에 흑화를 남기려고 잠시 멈추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 네명의 청의인이 나타났다...
'혹시 이놈들은 내가 미행하는 걸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청의인들의 능력과 자부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리라.
방교명이 이들을 추종하며 사용한 경신술은 비류보라는 것으로 비록 절정의
신법은 아니지만 능히 일류소리를 듣고도 남음이있는 것이라 그리쉽게 발각될
성질의 무공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문파의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필수무공이라 생각하여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매진해 왔거늘.
방교명의 속내따윈 상관없다는 듯 청의인들의 공세는 반시진 전과 별 차이없는
속도와 위력으로 그의 주위를 압박해 들어왔다.
...반 시진 동안 똑같은 속도와 위력!
그렇다, 이들은 방교명의 암기주머니와 독랑, 그리고 내공의 고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여지껏 밀려들어온 거리만해도 어림잡아 무려 칠십여 장. 한명이 전면에서
위맹한 일장을 날리면 앞서의 인물은 뒤로 빠져 진기를 가다듬고 양 옆에서
따라붙는 둘 은 돌발적인 파상공세로 그의 좌우를 차단하니 방교명 으로서는
뒤로뒤로 밀릴 수 밖에.
그나마 암기와 독으로 버텨왔지만...
다시 한 사내가 죽 나서며 무지막지한 일장을 내갈겼다. 마냥 뒷걸음질을 칠
수 만은 없는노릇 이기에 두 개의 철질려를 시기적절하게 날려 그의
공격권역을 최소화 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제 남은 암기는 고작해야 네 개,
다음을 기약하기 어렵다.
도주를 생각해보지 않은건 아니다. 당소소를 위해서라면 무인의 자긍심따윈
포기할 수도 있다고 다짐했지만 이들이 그의 줄행랑을 팔짱끼고 배웅할 리도
없고 지닌바 능력으로 견주어볼 때 이들의 추격을 뿌리칠 자신이없다.
'좋다! 이대로 당하지만은 않는다!'
마냥 뒤로 밀리기만 하던 그의 신형이 우뚝 섰다.방교명의 비장한 기세가
전달되었음인가, 쉴세없이 다그치기만 하던 청의인들도 일제히 손을 거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 지닌바 모든걸 쏟아붓는다면 너희들에게 뜨거운 맛 한번 보여주지
못하겠느냐! 당가팔로는 거저얻은 허명만은 아니란 말이다!'
문득 지난날이 생각남은 노인네의 수구초심 같은 건 아니리라. 그 역시 무인의
삶을 택했기에 강호로 나섰고 무와 직접적 상관관계를 짓기는 어려운 약초로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한시라도 무를 잊은적은 없었다.이름모를 약초를 빻을때도,
그것의 효능을 실험하면서도 그는 분명히 무인이였다. 무인이 삶을 접을 곳이
침상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기에 지금이 두려운건 아니다.후회스런 기억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보람된 인생이었다고 추억하기에 죽음을 겁낼 이유도 없다.
두려운 건 당소소의 안전이었다.
뿌연 달빛 사이로 먼저간 아내의 손짓이 보였다.
'부인, 잠시만 기다리시구려. 내 이놈들을 데리고 찾아가리다.'
천천히 그의 손이 아래로 움직이자 네명의 청의인들 역시 긴장된 신색으로 반
보 뒤로 물러섰다.
암기주머니로 들어갔던 그의 오른손이 번뜩 움직이자 여태까지의 속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리만치 빠르고 날카롭게 네 개의 철질려가 쏘아져나왔다.
' ! '
청의인들이 쾌속하게 신형을 뒤로 뺐다. 반시진 동안 그들이 물러난 건 이번이
처음, 그만큼 다가오는 암기의 위력이 범상치 않다는 반증이리라.
"타앗!"
비세를 포착한 매 처럼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를 무색케하는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방교명이 몸을 날렸다.
"흥!"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청의인들은 암기의 위력을 곧 가늠하고 제각기 위치를
잡았기에 방교명의 비상은 그리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그리고... 방교명의 형용키 어려운 몸부림을 보며 이싸움을 마무리 지을 때가
왔다는 걸 알았다.
슉-.
네 명이 날린 장력 이건만 소리는 하나, 위력은 넷 이상이란건 불문가지.
네 개의 장력을 온몸으로 받아내기 싫다면 방교명 으로서는 몸을 뒤집어
지면에 착지해야만 할 것이다.
'이걸 노렸다!'
그가 움직였다. 장력을 피하는 것 대신 진행방향 그대로 뛰어들며 장력의 권역
직전에 품속의 왼손을 힘차게 떨쳐냈다.
푸시시시-.
꽝!
가슴을 격타당한 그가 훌훌날아 지면에 쳐박혔다. 그리고 사위는 매케한 녹색
독연으로 가득찼다. 그의 동귀어진은 노인의 연륜이 가미된 심리전의 성격마저
띄고 있었기에 일견 매우 위협적인 것 이었다.
[11020] [연재] 삼류무사-65 첨부파일 :
우우웅-
위맹한 바람의 초록의 연기를 날리며 장대가 드러났다.
“이제 끝이군."
십이 뇌성인중 삼호라고 불리우는 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마지막엔 꽤 놀랐어. 그런 무지막지한 방법을 택하다니.”
사호가 화답하자 오호와 육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킬것이 있는 사람은 늘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
옅어지다 이내 사라져가는 독연을 바라보며 삼호가 흘러가듯 한 마디 던졌다.
일상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관계와 관계속에 이루어진다.
갓난아기일 때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은
사회라는 공동체에 어쩔수 없이 발을 딛게 되고 사회에서 맺게되는 수많은
교류속에 그의 익명성은 사라져간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것도 있는법.
자신의 순수, 즉 주체적인 자아가 동화라는 이름으로 옅어져 갈 때 쯤이면
사회에서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맺게된 관계속에서 인생 자체를 걸어도 좋을
만큼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명예나 지위 따위의 무형적인 관념일 수도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미묘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 몰입하게 되면
좀체로 헤어나기 어렵고, 몰두에 몰두를 거듭하게 되면 처음에 접촉했을 때의
느낌과 객관적 시각은 완전히 배재되어 오로지 '추종' 이란 것 밖에 남지
않게된다.
물론 또 다른 길도 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에 나름대로 명확하면서도
치우침 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
“그러게 남의 일에 간섭하면 제명에 못산다고들 하지 않았소.”
십이뢰성인 이라고 살인이 좋을리 없다.
그러나 방교명이 지켜야 할 것이 있듯, 이들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기절해있는 방교명은 못보았지만 네명의 청의인에게서 얼마전 열일곱의
목숨줄을 끊는 살귀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쓸쓸함이 배인 축축하디 축축한
음성이 흘러 나온건 어떤식으로든 모순이라고 해야할 텐데.
앞으로 나선건 육호였다.
잠시동안 방교명의 얼굴을 바라본 그가 기계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잘 가시오.”
그때 어떤 빛살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저게 뭐...’
꽝!
피하고 어쩌고 할 틈 없었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튀어나온 무언가가 육호를
휩쓸었다고 싶었는데 그는 훌훌날아 지면에 처박혔다.
방교명이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그를 날려버린 것에 대한 정체였다.
그건 장력도 검풍도 아닌 순수한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다.
‘도데체 이런일이 어찌 있을수...’
얼마나 빨랐으면 그들이 제지할 틈조차 없었다는 건가!
얼마나 위력적이었으면 육호가 반항한번 못하고 지면에 팽개쳐져 있겠는가!
육호는 날려버린 '그것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방교명을 돌보고 있었다.
“에구, 에구. 이 노인이 방장론가 하는 영감이 맞는거 같은데, 큰일났네.
완전히 뻗어 있잖아.”
한사람을 기절시킨 주제에 도 다른 기절한 사람을 걱정하는건 뭔가?
너무 어이없고 당혹스러워 세명의 청의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데 ‘그것’ 이 벌덕 일어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평범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 고수의 기도같은건 한점도 흘리지 않는 평범 그
자체의 태도, 그나마 눈에 띄는 건 찢어진 눈 정도?
“장. 추. 삼?”
“얼레, 나를 알아?”
그렇다.
그는 일행에서 외떨어져 홀로 산에 오르던 장추삼이었다.
밤에 깊은산을 등반하는 것처럼 위험한 건 없다.
그건 갈데없는 바보짓이다...
산이란건, 특히 오대산쯤 되는 넓은 산은 낮에 올라도 지리를 잘 아는 약초꾼
정도가 아니라면 길을 잃고 헤메기에 딱 좋다.
똑같은 수림과 고만고만한 비틸과 산등성이, 이름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이
공명되어 이 봉우리와 저 봉우리가 서로 화답하는 인가없는 고지대가 멀쩡한
사람의 판단력하나 꿀꺽 집어 삼키는 건 여반장이다.
하물며 불빛한점 없는 밤에는 오죽하랴.
찬연한 달빛이 온누리를 적시는 대보름이라 하더라도 울창한 나무방벽으로 한
치의 틈새를 허용치 않고 기괴로운 들짐승들이 제세상을 만나는 야밤에 산에
오른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근데, 고생도 약이 된다고...
쉬웠다!
‘이건 뭐... 낮이나 진배없잖아?’
그도 그럴것이 단 한점의 불빛도 없는 암굴에서 오년씩이나 밤눈을 키운 이
에게 간간히 스며드는 달빛은 어떤 야명주보다 눈부신 축복이었고 들짐승의
울부짖음에 새가슴이 되기엔 그의 심장이 터무니없이 단단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오대산이란 미로를 관찰할 수 있었다.
‘도둑 노인네 말대로 표물 을 탈취한 열세놈이 제아무리 난다긴다 하는 놈들
이래두 먼저간 셋 한테 걸리면 뼈도 못추리지, 암.’
호사가들의 입을 절대로 믿지 않는 장추삼 -모추와의 결투 이후로 이 생각은
아주 굳어졌다- 이지만 그가 본 당소소와 북궁단야는 세도 엄청나게 셌다.
하운은... 눈치빠른 그가 보기에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노처녀 열받았으니까 니넨 죽었다고 복창하면 돼.’
나같은 삼류야 있어봐야 민폐지, 어쩌구하며 어슬렁어슬렁 산에 오르던 그의
눈에 어떤 흔적이 발견된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당소소가 보통때의 평상심만 있었어도, 급한 당소소의 마음이 전해져
덩달아 급해진 하운 역시 평소였다면, 먼저 간 둘의 안전에 온 정신이 집중된
북궁단야가 조금만 주위를 더 볼 여유가 있었다면, 노련한 이들 셋이 결코
놓지지 않았을흔적일진데.
‘이건 그냥 긁힌게 아니잖아?’
전면에 솟아있는 커다란 바위에 어떤 자국이 있는데, 그건... 분명 인공적인
것이었다.
‘어라?’
갑자기 매처럼 날카로워진 그의 눈은 곧 어지러히 패인 흙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발자국과 발자국의 겹침을 보며 스스로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신발끝과 신발끝의 방향은 서로간에 관계를 의미하고 가운데의 하나를
사방에서 지키는 형국... 일대 사의 싸... 뭐야?’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만약 싸움이라면 서로간의 공방이 있었어야 하는데
한 명이 네명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더 정확히 말해 네명이 한명을 그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밀어부쳐서 원하는 지역으로 몰아넣은 형태이니 어찌
싸움이라 하겠는가.
고양이가 눈앞의 쥐를 얼르는 걸 싸움이라 부르진 않으니까.
개의 발에서 땀이 날 리는 없다. 개의 신체구조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어디까지나
웃자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스개 일 뿐이다.
그리고...
장추삼은 뛰었다.
개발에 땀나게...
첫댓글 잘밨어요
즐감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