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지금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살고 있다.
사는 거 걱정하며, 걱정하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맨날 다니는 길만 다니다, 그러다 1년이 가고, 또 1년이 가고, 대개 이렇게 살아 왔다.
이번에는 반대편 용인 방향으로 집엘 왔다.
산길이 많다. 꼬불꼬불한 길도 나오고, 시골 풍경이 정겹기도 하다. 도척에서는 요즘 매우 귀한 보리밭도 보이고, 98번 지방도 2차선 도로가 꽤 한산하다. 유정리 저수지 지나고, 태화산 등산로 지나고, 추곡리 백련암 부도 안내판을 보았다.
차를 오른편으로 틀어 올라갔다. 내 차만 부릉부릉 올라간다. 좁은 길, 교행이 불가능한 길, 비알진 길을 한참 올라가서 넓은 주차장이 보인다. 앞이 트인 높은 곳, 전망이 좋기는 하다. 그런데 웬 나비가 이렇게 많으냐. 땅바닥에 깔렸다. 내 자동차 소리에 놀라 난무다, 난무. 정말 나비 지천이다. 깜짝 놀란 박쥐가 좁은 동굴에서 날듯 나비가 잔뜩 난다. 이렇게 많은 나비 난생 처음이다. 검은 빛과 알록달록한 노란 점이 있기도 하고, 이 나비는 땅바닥에 몰려 앉기를 좋아한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눈발이 휘날리듯 난리도 아니다. 따뜻한 땅바닥을 좋아해 찾아 앉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이 나비들은 땅바닥을 좋아한다, 땅바닥을.
무더운 여름철 날씨, 나비만 볼 수 없어서 나무 그늘로 간다. 거긴 비탈진 산길, 경사가 심하다. 얼마나 더 올라 가는지 끝이 안 보인다. 어디가 백련암인가, 막막하게 올라간다. 더러 더러 뻐꾸기 소리가 난다. 정겨운 소리다. 이렇게 산업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들리던 소리가 그립다.
물이 흐른다. 많지는 않지만 흙이 젖었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도 많이 깔렸다. 뾰족뾰족한 잔 자갈이 많다. 슬리퍼 신고 올라 가기가 쉽지 않다. 어렵긴 하지만 찬찬히 가자. 덮기도 하고, 땀이 나기도 하고, 굵은 나무, 새 소리, 아무도 사람 없는 곳에서 나 혼자 무심히 간다. 조용히 가는 마음, 깊이 높이 올라가는데 전신주가 보인다. 물길도 제법 크다. 거기서 얼굴을 씻는다. 참 시원해. 거기엔 큰 글씨로 대화수석(大華水石)이라 새긴 암석도 보이고, 아기자기 쌓아 논 돌탑도 있다. 깨진 기왓장, 사기 그릇 조각들이 뒹굴고, 사람 발자국이 잘 안 난 곳에 올라섰다. 장독대 항아리가 조금 보이더니 정자가 보이고, 크게 가건물이 보인다.
거기 백련암 부도가 앉아 있다. 경기도 문화제 안내판이 서 있고, 바로 옆에 최근에 세운 다른 부도도 있고, 동종도 있다. 아까 보인 정자가 동종 정자각이었다. 아래로 전망이 트였다. 능선과 능선 제법 전망이 난다. 누구 부도인지는 모르는 모양이고, 이리 저리 둘러 보고 손으로 만지고, 디카 들이대 찍고, 임시 가건물 같은 데를 지나 장독대 있는데 가니 계단이 나 있다. 물이 졸졸 흐르고 위로 가니 거기가 대웅전, 조그만 암자 하나가 들어 앉아 있다. 아주 조용하다. 풍경 소리도 없고 아무도 없는가 했는데 법당 안을 들여다 보니 여인 신도가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있다. 나를 보고 놀랄까봐 안심하라는 뜻으로 목례를 하고, 곧 뒤편 계단으로 가 보니 거긴 커다란 암벽 아래 산신이 모셔져 있다. 감로수가 똑똑 떨어지는 암벽, 물방울에 맞춰 입에 한 방울 한 방울 받아 마시니 입맛이 달다. 앞쪽으로 전망 구경하고 다시 내려 가는데, 법당 사진을 찍고 싶어서 다시 들려다 보니 이번에는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할머니들이 빌었던 그 모양으로 두 손을 비비고 있다. 정통 기도 비나이다, 비나이다이다. 절하는 것은 못 보았고, 소원을 말하며 앉아서 두 손을 모아 정신 없이 빌고 또 빌었다. 우리 할머니들 기도가 저러했었다. 칠성님께 비는 기도도 그랬었다. 나는 참 반가운 광경을 여기 백련암에 와서 처음 보았다. 여태까지 절하는 것은 많이 보아 왔지만, 앉아서 두 손을 빌고, 빌고 소원 성취를 하는 기도는 처음이었다. 내가 기웃기웃 하고 있으니까 기도하다 말고 먼저 말을 건넨다. 들어오라고. 괜찮다고. 내가 있어서 못 들어오느냐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법당 안 사진을 몇 번 찍었다. 그리고 옛날 할머니마냥 기도하는 모습을 고이고이 간직하며, 슬그머니 내려 왔다. 법당을 향하여 인사하고 내려 왔다. 날씨가 뜨겁다. 지금도 사람 발길 닿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이런데 와서 절을 지어 놓고 산 그 옛날 사람들이 정신이 아늑하다.(2006.06.18)
응원전,
토고와의 응원전, 1대0으로 당하다 후반에 동점골과 역전골을 넣었다. 경기 내내 뒤지고 있을 때는 우리나라가 한 골 만회하기를 고대하고 응원하였고, 이천수와 안정환 선수가 한 골 한 골 넣을 때는 열광하기도 하였으나 2002년 월드컵보다 못한 것이 있었다. 그 땐 짜릿짜릿한 전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만한 감동이 없다. 왜 그러지, 왜 그러지...
두 아이,
우리 수아랑 지아 두 녀석을 키우며, 행복을 느끼는 일이 많다. 바라보기만 하여도 기쁘고, 즐거운 행복을 가져다 준다. 자식이란 다 그런 건가. 난 큰 아이보다도 아기였을 때를 회상하곤 한다. 척 내 품에 안겨서 놀던 아기...
곤지암초등학교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부모 모습을 매일 보며, 아이들을 키우는 힘을 느끼고 있다. 자녀에 대한 무한한 사랑, 두 자녀 손을 꼭 잡게 하는 엄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서로 쑥스러운지 남매가 손을 떼어 놓는데, 다시 달려 와서 두 손을 꼭 쥐어 주며 데리고 들어간다.
나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몇 주 전부터는 우리 아이들에게 하듯이 내가 먼저 인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바라보든가, 무심히 보고 말더니 이제 어느 녀석은 먼저 인사하기도 하고, 먼저 보고 손을 흔드는 녀석도 보이고, 상긋상긋 웃는 녀석도 보인다. 아직도 수줍어서 고개를 밑으로 돌리며 오는 녀석도 있고. 아이들이 희망이다.
프랑스전,
새벽 4시,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전날 일본전을 보고, 새벽 1시 호주전을 포기하고 잤다. 호주전도 관심이 많지만, 한국전이 더 중요하니까.
다행히 3시 반 경에 눈이 떠진다. 생각보다 정신이 또랑하였다. 나 혼자 몰래 볼 요량으로 엄마 방에 들어갔다. 텔레비가 켜지지 않아 나와서 거실 텔레비를 켰다. 프랑스전 중계방송, 4시 맞춰 논 알람이 그 때 울린다. 수아랑, 지아랑, 제 에미는 거실서 자고, 단단히 마음먹고 벼르고. 수아 눈이 또렷하고, 제 에미도 또렷하다. 지아 녀석은 딱 감고 자서 모르고. 늦은 시간, 동점골에 다들 신명이 나서 좋기는 한 모양인데, 학교 가면 졸려서 어떡하나...
아드보카트,
다부진 체형, 등소평만한 단신, 얼핏 보아서는 나폴레옹 닮은 데가 있나 보다. 나폴레옹, 고대 로마의 부활을 꿈 꾸었던 서양 사람, 히틀러도 그 부류, 암튼, 아드보카트를 보고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짧아서 그럴까, 아마 거의 그럴 것이다.
요즘 월드컵, 16강 꿈을 꾸고 있다가 오늘은 무참히 깨졌다. 배구나 탁구, 골프 경기에 이렇게 열광한 적이 있었을까? 16강을 이룬 호주 감독 히딩크를 보며 무한히 신뢰하는 버릇은 어떻게 된 것일까?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듯 그런 기분은 언론이 만들어 낸 허상 때문이 아닐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세뇌되고, 나도 히딩크와 아드보카드 감독이 싫지만은 않으니... 문제는 문제다, 보통이 아니고.
4년 전,
어제는 우연히 별 볼일 없이 탄천종합운동장에 갔다 왔다. 거기에서 4년 전 월드컵 16강을 응원하였던 운동장이다.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며, 일렬로 도열해 있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의자를 바라보며, 벌써 4년이 흘러갔구나, 세월이 빠름을 무상하게 느꼈다. 4년 전, 내가 여기서 우리 가족과 함께 응원을 하였던 곳이다. 저만치서 역동적인 물결이 밀려오면 나도 기다렸었다. 파도 타기 응원은 심리를 묘하게 하고, 포르투갈과 골차기로 승부를 갈랐던 장면이 떠오른다. 홍명보 선수가 치켜든 두 손과 환희가 생각난다. 응원석의 관중들이 들썩였던 광경이 생각난다. 오늘도 그 자리에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고, 생생한 대형 화면 빛이 요란한 음향 소리 타고 여기 있는 사람들 기분을 치켜 논다. 그 때는 욕망과 다른 꿈이 있어서 살만 하였었다. 고달프지 않고 사는 게 편안하였었다.
우울증,
요즘 장마철이라 궂은 날이 많다. 비가 내리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냥 업무적으로 그렇고, 사는 게 그렇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욕망이 나를 적극 지배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업무는 그런대로 내 자신이 이겨 나갈 수 있는데, 그냥 생기는 욕망은 내가 나를 어떻게 할 방도가 없는 것 같다. 그냥 생기는 욕망, 그 욕망에 사로잡혀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욕심이라서...
이런 애들,
학교에 오래 몸 담아 왔다. 그 동안 여러 학교에서 근무해 봤는데, 올해 곤지암에 와서 이런 애들도 다 있구나 하는 걸 느낀다. 참, 잘 알 수 없는 애들이다. 어떻게 한 생전 이렇게만 살까. 공부는 뒷전인 채, 놀기만 하려 하니 학교 교실이 늘 소란하다. 어떤 이는 날 두고 학습 지도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 점이 참 어처구니 없기도 하다. 내 생각이 틀리거나 잘못일지도 모르지만, 요런 생각을 다 하여 보았다. 이 애들은 학교가 있어서 고마워해야 할 아이들이라고. 학교가 있기에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지, 학교가 모자라거나 없으면 어림도 없이 학교 학생 축에도 끼지 못할 애들이라고. 다른 학교에서 어쩌다 가끔 있을 수 있는 학생이 여기는 전수 다 그렇다고 봐야 하니. 요즘은 수요자 중심의 학습자 우선 시대라 하기도 하고, 교육 서비스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여긴 학교가 있어서 고마워해야 할 학생들이 대다수인 것이다.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 들으려고도 않고,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도 안 되고, 관심도 없고, 가만히 있거나 떠들거나, 장난만 하는 학생, 세상에는 아이들 종류가 참 많기도 하다. 나는 이런 학교도 있다는 것을 이 이 학교에 와서 처음 알았고, 이런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도 교사로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이런 학교에서 근무도 해 보고, 이런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해 보는 것도 교사로서 갈 길이 아닌가 해서이다.
공부만 전부는 아니다 해도 공부 조금이라도 하였으면 좋겠고, 많이 모자라는 인성 제대로 되어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할 줄 알고, 사람답게 사는 우리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무엇부텀 시작해야 하나.(2006.06.27, 5교시, 1-7반 교실에서)
기말 시험 공부,
기말 시험 준비하는 요즘 우리 애 둘을 보시고, 할머니는 저 애들 어떻게 사느냐고 걱정이셨다. 시작부터 지아가 제 언니보다 더 열심히 하고 수아는 조금 느긋하였지만, 본격적으로 시험 공부에 매달리는 지금은 두 애 모두 눈이 뻘겋게 되었다. 나는 일찍 자고, 애 에미는 두 애들 봐 주느라 늦게 자고, 한참 자고 어떻게 해서 깼는데, 수아 공부하는 소리가 낭낭하게 들린다. 시계를 보니 4시, 나는 하도 걱정이 되어 들어가 자라고 타이르지만, 애는 안 잔다고 그대로 공부만 한다. 걱정이 되어 달래도 안 듣는데, 저는 저대로 잘 알아서 하는데 내 성화가 속상하다는 표정이고, 저도 그럴 양이었는지 겨우 4시 반에야 불 끄고 들어갔다. 오늘 학교 공부는 어떡하나, 걱정이 많아서 아침에 일찍 나오며, 애 에미에게 수아 아침 밥이나, 다른 거라도 무엇이고 꼭 먹이고 보내라고 타 일렀다. 지난 번 시험 때는 저렇게 하다 첫날 수학 시험을 망쳐버렸다. 꼬박 밤샘하고 무슨 정신력으로 셈수를 꼼꼼히 할 수가 있겠는가. 전혀 풀 수 없는 한 문제만 빼고, 나머지는 다 아는 문제였는데도 더하기, 빼기 실수가 많았다고 제 입으로 말할 때 참 속상하였다. 요번 시험 수학 보긴 전 날에는 일찍 자야 할 텐데, 저 녀석 성격에 일찍 자지도 않을 것 같고, 애비로서 걱정만 늘 하고 있는 것이다. 한참 자야 할 아이가 밤새 꼬박 새우니, 나는 우리나라 학교 교육에 시비가 많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다. 국가 경쟁력 어쩌구, 저쩌구 하며 학교 경쟁을 도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우리 애 둘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그 걸 보여 주고 싶다. 그러잖아도 죽이는 공부 판에 경쟁력 운운하여 어떡하자는 것인가. 지금도 애 죽일 판인데...(2006.06.28.)
속상해서,
뭘, 모르는 애들이 저기 저렇게나 많이 있다, 지금... 어떡하나, 나는... 말문이 막혀서... 저 애들은 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나는 못 알아 듣는다고 소리만 치고... 평생 그렇게 사는 거냐며 야단만 치고... 착하기는 한데, 인성이 모자라는가. 내가 모르는... 저 애들은 저 애들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고, 그늘 없는 애들 표정 보면 진짜 저 나름대로 잘 사나 부다. 저 애들이 내 말에 웃기나 하는 걸 보면...(2006.06.28)
룅겔,
언제인지 고안하였다가 경기도 창안품 대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늘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여태 룅겔로만 알고 쓴 글자가 틀리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알고 있었고, 당연하게 그렇게 쓴다고 생각하던 글자였다. 교감선생님 결재하다 지적이 되었다. 검색해 보고 사전 찾아 보니 링게르는 링거의 잘못이란다. 링거는 어떤 사람 이름이라고 최태중 선생님이 말해 주고, 아예 룅겔은 사전 표제에 없어서 더 기가 막혔다. 외래어 표기법이 바뀌어서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링거 주사기, 나만 틀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다 맞게 알고 있었다. 일제의 잔재였는지, 분명 룅겔 주사기라 쓰던 것인데...(2006.06.28.)
2, 3억,
올 봄방학 때쯤, 우부장님이 아파트를 보러 다니잔다. 양지마을로 무조건 옮기란다. 손해 볼거 없다고, 무리해서라도 옮기라고. 우리는 별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어서 두 아파트 보다 그만 뒀다. 따져보니 이자 부담이 만만찮은 것이다. 38평형을 5억 3천에서 5천이면 구입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8억 얼마에 근 9억이 다 돼 부르는 모양이다. 부르는 게 값이라고 몇 달만에 2, 3억 뛰어 오르는 아파트 값이 제 정신인가. 재운이 자꾸 비껴 가는데, 속상한데다 더 속상하게 시중 금리가 오른다고 하고, 값은 천정 부지로 뛰고, 암튼, 판교 청약을 기다렸다가 해 보고, 안 되면 어디로 한 번 뛰어야 할 것 같다. 두 아이들 크고, 집이 비좁고 갑갑해서 속상할 때가 많이 있다.(2006.06.28.)
에미 생일,
매번 우리 집 에미 생일은 유별하였다. 생일 표시된 달력이 넘어오기만 하면 얼마 전이거나 말거나 닦달하기 시작한다. 어느 해는 달력을 넘기기도 전에 내 앞을 가로 막아 서서 언제 며칠이 자기 생일이라고 못 박아 놓기도 하였다. 대개 하는 말은 “자기 생일을 아느냐?” 거나 “뭐 해 달라구, 뭐 사 달라구...” 하는 식이었다.
어느 핸가는 내 생일을 나나, 에미나 둘 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넘어 간 적이 다 있었고, 어느 해인가는 나는 아는데, 에미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서 내 생일을 어떻게 하나 두고만 보았더니 그 날을 그만 그냥 넘어 가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언제나 너그러워서 그 걸 그냥 모르느냐고 하며 생일 지난 다음 날인가 말하였었다. 아마 무안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두 차례나 빼 먹은 생일이어서 나는 지금 두 살 더 어리고, 젊어서 좋기는 하다고 웃으며 지내기도 하였다.
오늘, 에미 생일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귀고리 타령인 에미와 범한프라지 일지슈퍼를 가는데, 생일 선물로 귀고리를 사달라고 말해서 지나는 김에 그렇게 해버렸다. 귀고리를 고르는데 비슷비슷하였다. 짧은 거, 긴 거, 늘어진 거, 치렁치렁한 거, 디자인이 다양한데 내 봄에는 어느 거나 비슷비슷하였다. 귓볼에 달고 다녀도 나는 여자들 귀고리에 신경 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금은방 문 닫을 시간도 늦어지고, 아무 거나 고르면 된다고 윽박질러도 요 것, 조 것 꿰어보고 걸어보다가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어제는 두 애에게 에미 생일 날 선물 준비해 놓으라고 일렀다. 두 애는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할미는 이게 되느냐시며, 조촐한 선물을 샀다시며, 에미가 좋아할지 모르겠다시며, 사 오신 선물 보따리를 보여 주셨다. 게다가 내 면 속옷 한 곽도 있었다. 내가 내 선물은 왜 사셨느냐며 에미 옷을 보니까 여러 가지였다. 여 봐라, 할머니는 엄마 선물 미리 사셨다. 나는 두 애 들으라고, 에미 선물 준비를 잊지 말으라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였다.
아침부터 에미는 투정이었다. 미역국을 안 끓여 준다고. 나는 언제 이런 걸 잊어버렸나. 생일날 생일백이로 제일 강조하여 둔 것인데, 이번에는 그만 잊고 말았다. 허둥지둥 대어 미역을 찾아 내고 봉지를 뜯어 바가지에 물 붓고, 에미는 안 된다고만 신경질 투로 여러 번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되는데 안 된다고 하니 그래도 안 되는 게 아니어서 그냥 끓여 볼 양으로 물에 푹 담갔다. 나중에는 나 하는 짓이 안 되겠는지 쇠고기가 있어야 하는 거라고 핀잔 비슷하게 말하였다. 아하, 그래서 안 된다고 하였구나. 나와 엄마는 그 생각하여 그만 두었다. 그러다가 그러면 왜 자기가 안 끓이느냐, 낳아 주신 엄마 생각하는 미역국이지 하니까 에미가 그 말에 아무 말은 못하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에미 심술이 너무 되게 되었다. 어쨌거나 오늘 나는 일찍 들어간다.(2006.06.29.)
1-8,
내일이 시험 보는 첫날, 5교시 시험 공부를 시켰더니 공부하자는 학생이 한 명도 안 띤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눈치 없이 만화 책 읽는 학생들이 몇 명, 무슨 게임을 하려고 하는 여학생들이 몇 명, 처음부터 이어폰 꽂고 있는 여학생들이 몇 명, 휴대폰 게임 만지작거리는 학생들이 몇 명, 아예 뒤돌아 앉아 떠들 궁리만 하는 학생들이 여기, 저기 몇 명씩이다. 도대체 내일이 시험 보는 날이라는 걸 아느냐고 다그쳐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마는지 관심도 없고 들은 체도 안 한다. 그냥 떠들고 맥할(매칼, 맥칼) 없이 1시간을 보낼 뿐이다. 시작 종 난 지가 언젠데 늦게 들어오는 것은 예사고, 오늘 5교시도 많이 늦었다. 요새 소문에 종이 돈 놓고 퍽치기라나, 뭔가 한다는 나쁜 소리도 들린다. 지금도 책상을 팡팡 치는 소리가 들려 윤일이와 종욱이 두 애를 불러내 지도하였다. 풍문에 들린 소문이 바로 너희들 아니냐고 다그치자, 이들 말로는 오늘 셋째 시간에 카드를 놓고 100원짜리 따먹기나 맞기 놀이를 하였노라 하지만 두 녀석이 실실 웃는 폼이 심상치는 않다. 놀기 좋아하는 녀석들이라 말썽은 늘 있어 왔지만, 둘 다 착한 심성은 갖고 있어서 악의적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하다 싶었다. 늘, 늘 공부 안 하는 녀석들, 그 1-8반이 지금 전부 다 여기 있소이다.(2006.06.30.)
개구리 소리,
오늘, 저녁 8시 반 무렵 물 뜨러 나갔다. 몇 해 전부터인가 물 주는 시간을 줄이더니, 또 더 줄여서 좀처럼 물 받아오기가 쉽지 않았던 데다. 나는 이 물을 근 10여년 넘게 먹어서 물맛이 들었는데, 급수 시간을 줄여 불편해서 아예 효자쉼터 물을 떠다 먹곤 하였다. 불곡샘터 물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제한 급수로 다른 방도가 없어서였다. 오늘은 불곡샘터로 맘 먹고 나섰다. 어두컴컴한데 사람들은 몇 없고 물은 철철 넘친다. 그 동안 내가 안 다닌 후로, 물 공사를 하였다고 어느 아기 엄마가 와서 말하는데 오늘은 물살이 너무 뻗치도록 셌다. 아기 엄마가 물을 어린 애에게 먹여야 해서 물 뚜껑을 사용해도 되냐고 말 걸어 와 얼른 그게 무슨 대수냐며 건네 주었다. 한두 살이나 될까 말까한 아들에게 먹이고 애 엄마도 꼴깍꼴깍 마신다. 애 엄마가 물을 마시는 사이 나는 애 엄마가 안고 있는 아가 볼을 손등으로 살짝 비볐더니 베시시 웃는 아가의 모습이 얼마나 이쁘고 귀엽든지, 밤에 보는 아가 천사였다. 물맛이 달았는지 아기 안은 애 엄마 뒷모습은 엄마 천사같이 보였다. 불곡샘터 바로 위로는 산, 그 산에서 개구리 소리가 여러 군데서 나는 거다. 저번, 전라도 곡성에 갔더니 개구리 소리가 진동하였다. 사방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 뉴욕 필하모니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향보다 더 복잡하고 불규칙한데도 더 조화로운 소리여서 나는 그 날 밤 그 개구리 소리로 매우 황홀하였다. 개굴개굴 개구리 소리, 전라도 곡성만치는 아니지만, 오늘 개구리 소리가 있는 여기서는 얼마나 행복한지 누가 알기나 하나.(2006.06.30.)
6/30일,
유월 그믐날, 학교 생활이 조마조마하긴 하였지만, 오늘은 형사가 다녀 갔다. 먼저 번에도 형사가 들락날락하였는데, 그것은 중학교 다닐 때 발생한 일이어서 우리와 무관하긴 하였었다. 그렇지만 요번에는 좀 심각한 게 아니다. 금품 갈취 같은 폭력이고 무슨 상납 같은 연결고리였다. 무지막지하게 생겨 먹은 이**(3-1) 복학생, 광주경찰서에 피해 학생이 와서 진술서 쓴 게 10명 가까이나 된다고. 복학생 때문에 학교 다니기가 힘들다고 하였다는데, 그렇잖아도 설문지에 종종 올리는 복학생에게 괴롭힘 당하는 학생은 없는지, 있는지 끙끙대다가 그냥 저냥 6월까지 왔는데 생활 지도가 거기까지 못 미쳐서 재학생들을 괴롭히는가 보다.
진**(2-1), 겉으로는 반듯해서 학생회장감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잠시 며칠 착각을 하였다. 2학년 부장에게 말 붙여 보니 그게 아니다. 그러더니 오늘, 담뱃불로 제 짝궁 팔뚝에 진무르게 하고 괴롭히는 처사가 매우 괘씸한 학생이었다. 나는 조**이라는 학생이 가엾었다. 노예 할아버지, 노예 청년, 요새 소식 판에 회자되어 그 생각이 나서 더 가엾었다. 내가 생활지도를 잘못하고 있어서 저능아 학생들이 당하고 학교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일이 살펴보는 내가 더 필요하고 아쉬운 날이었다.
잠수해 있어서 나타나진 않았지만, 눈치껏 아는 것만 해도 두세 건 정도는 검찰에서 기소 유예 처분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있는 것 같다.(2006.06.30.)
양지마을, 38평,
어제 늦은 시간, 단 둘이 차 안에서 나눈 얘기는 이 번 여름 방학 때 양지마을 38평, 일을 저지르라는 것이다. 봄방학 때보다 2, 3억 오른 아파트 가격이 아쉽고 더 부담스럽지만, 손해를 보고서라도 일을 저질러야 할 것 같다.
판교,
우리엄마는 어디 다니시는 걸 꽤 좋아하신다. 제 엄마가 공부시킨다며 데리고 간 수아를 풍덕고로 데리러 갈 일 있어서 같이 나가자고 말씀드렸더니 얼씨구나 하신다. 어디든 같이 나가면 참 좋아하셔서 나는 모시고 나가려고 노력을 한다. 이 날도 수지 풍덕고로 갔다. 한 낮이라 여름 날씨, 차 안이 후덥지근하고 무척 더웠다. 창밖을 내다보시며 좋아하시는 모습이시다. 오리역 지나 고가에서 오른편으로 돌면 수지로 가는 길, 조금 지체, 고가 지나 풍덕고로 들어갔다. 학교에 주차한 차량이 많다. 그 날은 정보화 관련 기능 시험을 보는 날, 오가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전화로 수아를 내려오게 하고, 에미가 나온 김에 할머니 멍멍이탕을 사 드리면 어떠냐고. 수아는 페르마 학원 앞에서 내려 주고, 판교 청국장 집으로 갔
다. 가는 길이 저 번에 달리던 길과는 아주 딴판이게 달라져 있었다. 판교지구 철거 이전에 와 보고서 7월에 다시 와 보니 철거는 다 된 모양이고, 생존권을 박탈당한 원주민들이 빨간 천에 검은 글씨나 하얀 글씨로 직직 갈겨 쓰고, 못 살겠다고 절규한 현수막이 여기 저기 붙어 있고, 작은 허수아비가 길 양편에 몇 군데 서 있어서 아무렇게나 방치한 느낌이 들었다. 토지공사나 주택공사, 성남시청 홍보물은 으리으리하고, 길 양 편에 높게 쳐진 가로막은 돈이 많이 들어가 보여 아주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효자촌 아파트에 분양 받고 와서 산 지 10여 년이 넘었다. 이사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아이 둘 키우며 쭈욱 눌러 살았는데, 그만 요즘 들어 평형 많은 아파트와는 값 차이가 부쩍 늘게 되었다. 여태 살면서 한두 번은 옮겼어야 맞는데 그냥 저냥 산 것이 이 꼴이 되었다. 우선 두 아이가 크니까 비좁고, 갑갑하다.
나는 판교 분양을 노리고 기대를 하고 있는데, 워낙 분양 열기가 높은 데라 장담할 수 없지만, 우리 집의 형편상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오래 기다린 보람이 다가오지 않을까 하고 산다. 나는 판교에 간 김에 이런 기도를 다 하였다. 너무나도 분양 소원이 크기 때문이다. 나이에 걸맞게 산다는 것, 그것이 현실적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택 바로 지나 판교 청국장집에 도착하였다. 나는 이 집을 수년 동안 가끔 들려 먹은 곳, 변함 없이 맛도 그대로이고, 집도 그대로이다. 판교는 다 철거 되어 변하고 있는데 여긴 몇 십 미터 앞에 두고 분당 가까운 저 쪽과는 아주 딴 판이다. 청국장 두 그릇을 시켰다. 에어컨 바람이 차다. 안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왔다. 너무 추워하시는 엄마를 위해 밖에 지어 놓은 방이 더 따뜻할 것 같아서이다. 두부 한 접시가 나오고, 맛깔스런 배추김치가 한 접시, 양념장 한 종지가 얼른 나온다. 엄마께서는 아침을 너무 많이 먹어,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배부르다시며 좋아하시는 청국장을 앞에 놓으시고도 맛있다며 꿀맛같이 드시지는 못하셨다. 자못 기대했던 눈치가 아니어서 나는 서운하기도 하였지만, 진심은 청국장을 사 드려 정말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나도 그렇게 배 고픈 상태는 아니어서 밥 한 그릇을 비우기가 다른 날과 다르긴 하였다. 어느 다른 날 다시 와서 맛있게 엄마 사 드려야지 하는 심정으로 밥숟갈을 떴다. 그래도 엄마랑 먹는 밥이어서 양이 많아도 싹싹 맛나게 다 비울 수가 있었다. 돈 들인 거는 아까워서라도 어지간하면 다 비우시는데 이 날 엄마는 밥 반 공기도 다 못 드시고, 좋아하시는 청국장도 절반가량 남기셨다.
청국장집 바로 앞 길에는 빛깔 좋은 참외와 굵은 토마토를 파는 아주머니랑 많은 애기를 나누었다. 집에서 농사짓는 과실을 갖다 파는 아주머니, 판교서 20여년 정도 사셨다는 아주머니, 작년만 해도 수지서는 몇 시간 만에 다 팔렸는데, 여기서는 훨씬 그만 못하다며 아저씨가 말을 안 들어 여기서 장사한다고. 참외는 단단하고 토마토는 완숙되어 굵고 컸다. 가끔 등산객들이 팔아 준다고. 토마토 반쪽을 쪼개니 정말 천연 사탕가루가 녹은 것 같이 보였다.
고기리 방향으로 가서 저 번 가다 못 본 이경석 묘소를 볼 요량이 들었다. 엄마는 너무 좋다 하신다. 제법 비알이 긴 고개를 넘어 가며 안동 김씨 가족 묘소 자리를 보며, 내려 가다 보니 이경석 묘소이다. 영의정, 지금 송파에 있는 삼전도 굴욕 비문을 쓴 어르신네 묘소. 예전에 여기는 산골 중에 산골이었을 산이 포장 도로가 생기고, 산 위로는 고압 전선이 뻗쳐 있고, 묘소는 왕릉처럼 크고, 넓고 가문을 중시하는 후손들 손을 많이 타서 묘역이 대단하였다. 묘역까지 가는 데 풀길이 아주 좋게 되어 엄마랑 걸어보니 행복하다. 아기 메뚜기가 팔짝팔짝 뛰는 풀길이다. 비문에 써 있는 글씨가 전각 글자체,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품위가 손상되지 않았다. 같이 누워 계신 부인은 전주유씨시다. 나는 이 분들께 큰절을 올렸다. 나와 엄마는 작은 향나무 그늘 아래 한참 동안 풀밭에 누워서 있었다. 무슨 새소리가 들리고, 뻐꾸기 소리도 나서 내가 제법이고 잘 하는 두 손을 옹그려 입에 대고 그 뻐꾹새 흉내를 내었다. 푸른 하늘이 넓은 것보다는 온통 숲이고 산이었다. 한유하게 엄마랑만 누워 있는 시간, 내가 엄마랑 오늘, 이 묘역에서 한유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니, 참 행복하기만 하였다. 길 건너 바로 아래 농가로 가 보았다. 폐가처럼 보이긴 하지만 아직도 사람 사는 흔적이 비치는 집이라 살곰살곰 들어섰다. 입구에 밤나무 꽃이 무수히 떨어져 있고, 빛깔 좋은 채송화가 포동포동하였다. 장독대 쪽으로 살금살금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것처럼 기척이 없다. 그래도 남의 집 안 마당에 들어서니 민망하여 도로 나왔다. 예전 농가를 보고 좋아서 들여 논 발걸음이었다.
엄마랑 모처럼 시간이 되어 나왔다. 나는 엄마 손을 잘 잡는다. 나는 참 행복하였다.(2006.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