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면서 매국노 관련 암각자와 비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친일파들이 나온다, 그 중에 비석으로 남아 있는 것과 바위에 이름이
새겨진 곳이 있다.
어떤이는 비석을 없앴으면 하는 이도 있지만 보존하여 친일 파의 행적을 잊지 말자는 이 도 있다,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으면 친일파의 행적이 더 기억 될 것으로도 생각된다.
전남을 답사 하면서 예 전에 찍은 사진에 친일파의 비와 암각자와 보여 소개 하고자 한다.
먼저 윤웅렬인데 윤웅렬은
본관은 해평. 한말의 정치가 윤치호의 아버지이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 1861년 충청감영중군 겸 공주중군, 이듬해 북청병마우후토포사 등을 지냈다. 1878년(고종 15) 통리기문아문참사·남양부사 등을 지내고,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때 도쿄[東京]에서 동양3국의 협력을 취지로 하여 일본 정계와 학계 인물 및 일본체류 중국외교관들이 만든 흥아회의 환영회에 참석했으며, 개화승 이동인의 소개로 일본 조야인사들과 접촉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내각의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아들 윤치호에게 외세에 의지한 것이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으며, 소수의 일본군으로는 다수의 청나라 군대에 대항할 수가 없다는 등 6가지 이유를 들어 실패를 예견했다. 청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능주로 유배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물들을 귀국시키고 대원군을 끌어들여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풀려났다.
1899년 귀족원경이 되었다. 1902년 특진관으로서 평리원재판장사무를 지내고, 이듬해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내장원경사무를 겸했다. 1903년에는 군부대신으로서 원수부검사국총장사무를 겸했다. 러일전쟁 무렵 정계를 은퇴한 후 기독교에 귀의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조선 합병에 공을 세운 친일인물들을 포상할 때 남작의 작위와 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 위 비석은 전남 광주 향교 뒤의 비석이며 관찰사로 비명이 되어 있는데
이 비가 있는 위치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권율 장군 옆에 있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전라 관찰사로 어떤 공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친일파의
비석이 권율 장군 비 옆에 있는 것이 문제다.
▲ 위의 각자는 바위에 새긴 것인데 순천 송광사에 있다.
송광사가 이름 나기에 여기에 왔다가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언제 새긴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송광사를 여러 번 갔지만 이 암각자 10번 방문 만에 보이는 것은
송광사에 있는 여러 자료들을 자세히 보지 아니하고 겉만 보았기에 암각자가 이제 보이는 것이다.
두번째 친일파는 이근호 이다.
이근호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문옥(文玉), 호는 송은(松隱)·규제(奎齊)다.
1878년(고종 15) 3월 과거에 급제하였고, 1887년 승정원 승지, 자산부사를 맡았다. 1888년 좌부승지·부평부사·통진부사로 임명되었고, 1889년 좌부승지, 평안도 영변부사로 발령을 받았다. 1896년 내부 위생국장으로 발령 받았으며, 독립협회 위원으로 뽑혔다. 1898년 경무사에 임명되었고, 대한제국 황성권업장 감독을 지냈다. 이 해 12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개최를 저지하지 못하였다는 사유로 ‘7일 감봉’ 처분을 받고 경무사에서 면직되었으나, 곧이어 법부협판으로 발령 받았다.
일제의 요구에 따라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정리를 담당하였다. 또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이 해 4월에 훈2등 팔괘장과 9월에 훈1등 팔괘장을, 일본 정부로부터 5월에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사회(紳士會)의 발기인·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황태자방한환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해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에 분노한 군중들이 대한제국 고위관리이자 황실 측근으로 일제의 침략에 협력한 이근호의 성북동 별장을 소각하였다. 1908년 대동학회 회원, 기호흥학회 찬무원·특별찬성회원, 흥인학교 찬무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동학회는 1907년 통감부의 유림 회유정책에 부응하여 조직된 친일단체였다. 또한 한성노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대한산림협회에서 명예회원으로 지내다가 1909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09년 활민노동조합소를 설립하였고, 대한흥업회사 특별찬성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통감이 교체되고 내각이 변경된다는 정보를 접하고 농상공부대신이 되기 위하여 일본인 관리에게 뇌물을 주었다. 1910년 3월 이재극 등과 함께 농무조합소를 설치한 후 고문으로 선정되었고, 종묘주식회사를 발기하였으며, 대해어업회사를 조직하였다. 국권 피탈 이후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1월에 조직된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기부금을 내고 유공회원으로 참여하였고, 불교계 중심 기관인 30본산연합사무소 고문을 맡았다. 1917년 친일 성향 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주식회사경성취인소 발기인이 되었다. 1922년 대륙공업주식회사 발기인이 되었다. 1923년 3월 사망하였고, 같은 해 5월에 아들 이동훈(李東薰)이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 위의 비는 광주 향교 뒤편 비석군에 있으며 윤웅렬비와 나란히 있다. 친일파들의
비가 나란히 있어 찾기는 쉽지만 공교롭게도 같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옮기다 보니
같이 있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관찰사를 할 때 비를 세웠다고 생각되지만 그 당시에
는 백성을 위한 공적이 있었다 하여도 매국노라는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 위의 비는 능주향교 비석군에 있으며 능주향교는 하마비를 찾으로 갔더니 여러 비가 있었는데
처음 방문에는 이근호에 대한 비의 존재를 몰랐지만 비석군에 있는 촬영 한 비석을
찾아 보니 관찰사 이근호 비가 있었다.
원래 능주는 능성 이었는데 나중에 능주로 격상되었다,
▲ 위의 비는 광양에 있으며 봄에 가서 비를 보았다. 이근호 비를 보러 간 것이 아니고 울산과 관련 있는 어사 이도재의 비를 보라 갔더니 이근호 비가 있었다.
▲ 위의 비는 고창 읍성 비석군에 있었으며 이비는 이글을 쓸 동안에도 존재를 몰랐지만
집에 가지고 있는 조선선정불망비군총록에서 찾았다.
윤웅렬의 비와 암각자와 존재하고 이근호의 선정비가 있어서 친일파의 이름을 한 번 더 상기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본다.
세번째는 울산과 가까운 지역인 기장 출신의 인물인 이하영의 암각자가 있어서 소개한다.
이하영은
본관은 경주.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琹山). 외아문주사·사헌부감찰·전환국위원을 거쳐 1887년(고종 24) 9월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했으며, 그뒤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이 되었다.
미국은행에서 200만 달러의 차관을 교섭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중상과 방해로 실패했고, 1889년 귀국할 때 정교한 철도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보임으로써 이후 철도부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외아문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회계원장이 되었다. 1897년 주일본특명전대사로 일본으로부터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그뒤 귀족원경·중추원의장을 역임하고 1899년 의정부찬정이 되었다. 1904년 외부대신으로 일본의 국권침탈과 이권약탈에 앞장섰다.
1904년 6월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결탁하여 황무지개간권을 일본에 넘겨주려 했다. 전국에서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고 보안회(保安會)가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보안회 회원 80여 명을 잡아 가두었다. 1905년 법부대신 을사조약 체결에는 대체로 반대했으나, 친일적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1907년 3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암살을 기도했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로 무사했다. 1907년 중추원고문이 되었다. 한일합병 뒤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작위를 받았다.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냈다.
▲ 위의 암각자는 송광사에 있으며 암각자는 칙령. 남여 혁파" 라 되어 있다.
사진상 왼편에 이하영의 이름이 각자 되어 있으며 이하영의 자료는 드문 편이다.
이 글의 내용은 고관 대작들이 사찰 근처를 방문하면 스님들이 람여(지붕 없는 가마)잡이가 되어 서 고관대작들을 모시고 유람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송광사 스님들이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또 한
양반을 매고 가다 외나무다리에 가마를 놓고 스님들이 도망을 가버린 일이 자주발생하자 조정에 알려지면서 남여제도를 폐지하록 하는 칙령을 내리게 한 것을 기념한 기록이다.
위의 사진 자료와 같이 친일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 드물기에 글을 써 본다.
역사적인 인물도 중요 하지만 매국의 이름을 상기하여 다시는 나라 잃는 일이 없도록 하여 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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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