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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 영토를 무단 침공했다. 이번주 24일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만 1년이되는 날이다. 전쟁 초기에는 러시아의 막강한 군사력이 72시간내 우크라이나 영토를 전격적으로 석권하고 우크라이나 조야의 항복을 받아 낼 것이라는 관측이 그럴듯한 전쟁 시나리오 같이 보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러시아가 2차세계대전후 처음으로 지난해 9월에 30만명의 동원령을 내릴 정도로 러시아의 특별군사 작전이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전쟁 1주년에 즈음하여 러시아가 대공세를 펼칠 것이라는 예상이 나돌고 있다. 아무튼 우크라이나는 무인기 등을 이용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러시아의 특별군사작전을 무력화 시키는 데 지금까지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는 이번 겨울 난방용 가스공급을 제한하여 우크라이나를 돕는 서방국가에게 에너지원을 무기화 하여 친 우크라이나 정책을 펼치는 서방국가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려고 했으나 이례적으로 따뜻한 겨울날씨로 이 또한 뜻을 이루지 못 했다. 게다가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징집을 피하려 러시아국경을 몰래 탈출하는 반면 반대로 우크라이나의 젊은 세대들은 우크라이나에 머물면서 나라를 지키고 실지까지 회복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분위기가 외신을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다.
러시아가 전쟁 1주년에 즈음하여 군사적인 대공세후 유리한 전황을 만든 후 우크라이나에 정전 협정을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자국의 주권과 영토를 할양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어떤 정전협상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어 정전협상에 의한 휴전 전망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단기 특별군사작전을 생각했다가 장기적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러시아와 서방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선전을 펼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앞으로 전쟁 양상은 지금으로서는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반도 안보에도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므로 향후 이전쟁의 추이를 예의 주시해야 할 것 같다.
일년 전 러시아의 푸틴이 일으킨 명분 없는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보면서 결과적으로 푸틴이 어리석은 설화의 주인공임을 자청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느님이 이반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었다. 즉 ‘네가 바라는 것의 두배를 네 이웃이 얻게 될 것이다’고 하자 이반은 자기 이웃이 자기 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을 싫어 해 최종적으로 자기의 한쪽 눈을 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위 설화에서 ‘이반’을 ‘푸틴’으로 바꾸어 읽으면 ‘눈에는 눈’ 이라는 동해 보복의 형벌유형을 연상할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눈에는 눈’이라는 개념은 피해자가 충동적으로 가해자에게 무한보복을 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복의 정의로운 상한선을 정한 원시사회의 일종의 규칙이다. ‘눈에는 눈으로’ 해당 성경구절의 전후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가 결론이다.
마태복음의 해당 성경 구절은 아래와 같습니다:
“’눈에서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72시간내 우크라이나가 항복할 것이라는 예상이 당시 지배적인 견해였다. 일반대중은 관념적으로 러시아의 막강한 군사력과 제공권, 반면 핵무기도 없는 우크라이나의 열등한 군사력 그리고 코미디안 출신의 유약한 대통령이라는 지도자 리스크 요인들을 입력하면 전쟁 발발 초기 우크라이나의 완패는 불문가지였다. 요즘 인기몰이를 하는 chat GPT에 물어보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결론이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를 힘으로 굴복시켜 영토도 확장하고 러시아의 군사적 위용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해보겠다는 푸틴의 일거양득 작전은 완전히 빗나가고 이제는 마땅한 출구 전략을 고민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푸틴의 군사력은 진창에 빠져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검소한 국방색 티 서츠를 입고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수도 키에프를 굳건히 사수하며 우방의 원조를 설득하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임전태세를 촉구하는 강력한 국가지도자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피와 땀과 눈물”의 명연설로 영국국민을 다시 뭉치게 하여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 낸 영국의 명재상 처칠 수상이 환생하여 우크라이나를 이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적어도 우크라이나의 지도자 리스크는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이는 임진왜란초기 일본군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해오자 못난 임금 선조가 오직 일신의 안위를 위해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 사건과 대조를 이룬다. 선조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할 때 ‘대가(大駕)가 일보라도 우리땅을 넘어서면 조선은 우리땅이 아닙니다’ 라며 눈물로 막아 선 사람이 만고의 충신 류성룡이다. 여기서 대가(大駕)는 임금의 가마이다.
전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 류성룡은 파직되었고 그날 이순신장군도 마지막 싸움인 노량진 해전에서 최후를 맞았다. 임진왜란 동안 무명의 이순신을 천거해 백성의 추앙을 받게 된 류성룡이 선조에게는 못마땅 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 중 명나라로의 망명을 막아 선 류성룡을 선조가 꽁하게 생각 했을 것이 다.
임진왜란이 있기 2년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정사인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부사인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 분명하다고 조정에 보고한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쥐의 눈을 하고 있어 두려워할 것이 없고 침략할 만한 움직임이 없다고 황윤길과 상반된 보고를 했다. 이와 같이 정사와 부사의 정세 판단이 엇갈리는 가운데 당시 조정은 동인이 득세를 하고 있을 때라 부사인 김성일의 의견을 따라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으로 결론 지었다. 이들이 가져온 일본의 답서는 매우 무례한 말투로 쓰여 있을 뿐 아니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징후가 분명히 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무하고 국론이 분열되었으며 임금이 백성과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박약한 지도자 리스크를 감안하면 이래저래 임진왜란은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대해 군신관계를 요구해왔다. 조선이 거절하자 병자 호란이 일어났다. 청군이 한양으로 입성하자 인조는 강화로 피난하려 했으나 청군의 선발대가 이미 홍제원일대를 장악하고 있어 부득이 송파나루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청군이 남한 산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이 와중에 조정은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양분되어 심각한 적전분열을 일으켰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주전파로 청과 항전을 주장했고 이조 판서 최명길은 주화파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다. 소설 ‘남한산성’의 저자 김훈은 이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 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가능한 치욕이었다.’라고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갇힌 지 47일만에 인조는 곤룡포대신 푸른 베옷을 입고 청나라 태종 앞에 나아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란 세번 큰절을 하는데 한번 절을 할 때 마다 머리를 세번씩 땅에 찧는 행위를 말한다. 삼배구고두의 항복식을 마친 후 인조는 조선국왕의 옥새도 바쳤다. 인조의 항복과 동시에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당시 청나라가 제시한 주요 항복 조건은 아래와 같다: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臣)의 예의를 다할 것.
○명에서 받은 고명(誥命), 책인(冊印)을 바치고 명과의 관계를 끊으며,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것.
○조선왕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청에 보낼 것.
○청이 명을 정벌할 때 조선은 기일을 어기지 말고 원군을 파견할 것.
○조선은 배 50척을 보낼 것.
○성절(聖節,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주(千秋,황후와 황태자 생일), 경조(慶弔)때의 사신파견은 명나라의 구례에 따를 것.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조선은 새로이 성곽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은 기묘년(1639)부터 세폐를 보낼 것.
그 외 청국은 조선을 예속화 하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유물이 될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문제이다. 이 공덕비는 현재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인조가 항복하고 2년이지난 1639년 12월 8일에 세워졌다.
조선왕조 실록에 나타난 비문을 쓸 사람으로 장유, 이경전, 조희일 그리고 이경석 네 사람이 천거되었다. 항복의 치욕적인 비문인지라 모두 비문 짓기를 회피했다. 장유는 ‘온당치 못한’비유를 들어 퇴짜를 맞았고, 이경전은 칭병을 이유로 거부하다 사망하고, 조희일은 일부러 채택되지 못할 글을 섰고, 마지막으로 이경전의 글이 몇차례 수정되어 채택되었다. 비문은 준비되었지만 이를 쓰고 만고에 치욕으로 남을 비석에 새기는 사람을 찾는 일도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비문을 쓰게 된 한성판윤 오준은 후일 수치심에 사로 잡혀 벼슬을 버리고 붓을 잡았던 오른손 엄지와 모지를 돌멩이로 찍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 비문에 새길 사람으로는 처음에 신익성이 차출되었다. 그러나 신익성이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리고 끝까지 고사하였다. ‘듣자 하니 신에게 삼전도비문을 새기라 하셨다. 황송하오나 신은 오른쪽 어깨의 마비증으로 식사 때 수저도 들지 못한 지 이미 반년이나 되었 사오니 다른 사람으로 바꿔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비문을 새기는 일은 여이징에게 돌아갔다. 비문을 짓게 된 이경석, 비문을 쓰게 된 오준 그리고 비문을 새기게 된 여이정은 당시 모두 지조 높은 학자로서 본심과 무관하게 청나라 황제를 칭송하는 비문을 작성하는데 차출되어 자신들이 마음 내키지 않는 일에 연루된 것을 두고두고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삼전도비는 높이 395cm, 너비 140cm로서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여진문자, 뒤쪽에는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아래에 한자로 된 대청황제 공덕비문을 번역한 내용을 좀 길지만 인용합니다:
대청 숭덕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가 우리측이 유대관계를 무너뜨린 일로 진노하여 무력을 행사해서, 곧장 동쪽으로 진격하여 들어오니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우리 과군(寡君,인조)은 남한 산성에 있으면서 봄날에 얼음판을 밟고 서서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듯 마음이 바짝 죄였던 기간이 거의 50일이었고, 동남쪽의 각 도 군사는 계속하여 붕괴되고 서북쪽의 군사는 협곡에 머물러 한발짝도 진격하지 못하였으며,성안에는 식량이 바닥났다.
이러한 때에 대병(大兵)으로 성을 공격하는 것은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날리고, 이글거리는 화롯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인 데도 황제는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무용으로 알고 덕을 베푸는 일을 우선으로 하여 칙명(勅命)을 내려 유시(諭示)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희를 살려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도륙을 하겠다’ 하고 영마(英馬,영아아대와 마부대)등 여러 대장이 황제의 명을 받아 길을 오갔다. 그리하여 우리 과군은 문무 제신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나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늘의 징벌을 불러 만백성이 죽게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는 오히려 차마 도륙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유시 하니 내 어찌 감히 삼가 그 뜻을 받들어 위로는 나의 종묘사직을, 아래로는 나의 생령을 보전하지 않을 것인가’ 하니, 대신이 그 말에 동조하였다. 마침내 수십 기(騎)를 앞세우고 군영 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는 예로서 우대하고 은혜로서 쓰다듬으며 한번보고서 마음을 허여하는 한편 예물을 하사하는 은전이 따르는 신하들에게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우리 과군을 도성에 돌려보내고 남하하던 군대를 불러 정돈하여 서쪽으로 철수하고 백성을 위후하며 농사일을 권장하니 사방으로 꿩들처럼 흩어졌던 사람들도 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닌가?
-중략-
한강 상류 삼전나루의 남쪽은 곧 황제가 주필(천자가 행차를 머무름)한곳인데 그곳에 제단터가 있다. 우리 과군은 수부(水部,공조(工曹)의 다른 호칭)에 명하여 제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다듬어 비를 세워서 영원히 황제의 공덕이 곧 천지조화와 같음을 드러냈으니 이 어찌 우리 소국이 대대로 길이 힘을 입을 뿐이겠는가. 의리가 여기에 근본이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다만, 광대한 천지를 모사하고 밝은 일월을 그리 자니 그 만분의 하나도 비슷하게 하지 못하고 삼가 그 대략만을 기재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숙살 하고 생육하는데
황제께서 그걸 본떠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베푸셨네.
황제께서 동국을 정벌할 제 심만대군으로 우르릉 쿵쿵 흡사 호랑이와 표범이었네.
참가한 군사는 서역사막에서부터 저 북방까지 망라되어
창 들고 돌진하니 그 기백 매섭기도 하여라.
황제는 매우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니
빛나는 열 줄 글은 준엄하고 따스하였네.
처음엔 어리석어 알지 못해서 스스로 근심을 끼쳐드리자
황제께서 밝으신 명을 내려 잠속에서 깨어난 듯하였네.
우리 임금 삼가 승복하고 신하를 거느리고 승복하니
위력이 무서워서 만 아니라 오직 그 덕에 귀의하셨네.
그 마음 황제께 높이 사 은택과 예우가 흡족하였고
얼굴을 펴고 웃음 웃어 무기를 거두셨네.
게다가 하사하신 것은 준마와 가벼운 갑옷이니
서울의 사녀들이 그 덕을 노래하였네.
우리 임금 서울로 돌아간 것은 황제의 배려였고
황제는 군대 거두어 우리 백성을 살리시고
흩어진 우리 불쌍히 여겨 농사 지어라 권하셨네.
국가는 옛모습 되찾고 사직은 새로워지니
마른 뼈에 살이 다시 붙고 얼었던 풀뿌리가 봄을 만났네.
드높은 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세 삼한은 황제의 덕이라.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신 여이징 봉교전
자헌대부 한성부판윤 신 오준봉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 신 이경석 봉교찬
숭덕 4년(인조17,1639년) 12월 초 8일에 세움.
오늘날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고 말의 성찬을 펼치면서 실상은 국민을 편가르기 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오로지 자기가 소속한 당의 입장을 공고히 하는데 열중하여 국가공동체의 정신회복에는 안중에도 없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일주년을 목전에 두고 국가공동체의 정신 회복을 위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의 아픈 기억을 들추어 내어 새삼 반추해 보았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한 말입니다. 싫든 좋든 과거는 우리의 역사입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하여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 정신과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