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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 1-7절
우리의 자녀들인 이민 2세대들이 자라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의 관문이에요…….. 내가 누구냐 하는거죠. 코리안이냐 어메리칸이냐?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어느날 특별히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 그들에게 새로이 굳어지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코리안 어메리칸이라는 복합적 정체성이에요. 다행히 우리 2세들은 적응력이 좋아서 대부분 코리안으로서 어메리칸으로서 양쪽의 좋은점을 다 수용을 합니다. 이중 문화의 장점을 누리는거죠. 그러면 벌써 사람의 폭이 달라집니다. 그릇이 달라져요. 리더쉽도 생기고 적응력도 강해집니다. 사물을 보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세계관이 달라집니다. 거기다가 부모님들이 가졌던 믿음의 열정을 간직하고 산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요셉이나 다니엘 에스더 같은 세상을 이끄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줄을 믿습니다.
자 그런데 이 정체성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너무나 중요해요. 무엇보다 영적인 정체성이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고 깨닫고 가슴에 품고 살아야합니다. 왜냐면 이 정체성의 확실한 인식이 내 인생을 끌고 가기 때문이에요. 내 생각을 지배하고 말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하고 내 믿음생활과 내 인생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성경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많은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 빛의 자녀다. 정말 많은 말씀을 주세요.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실이 알라는거에요. 또 그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가치관을 가지고 그 모습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서 사도바울이 가졌던, 그의 영적인 정체성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롤 모델입니다. 그러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그 뜨거운 영적 정체성의 파워가 오늘 우리의 심령에 뜨겁게 전해 지기를 축복을 드립니다.
먼저 1절을 다시한번 같이 읽으실까요? 본문의 Key Verse입니다. 시작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자 이 짧은 본문 1절 속에에는 그의 영적인 정체성의 모든것이 다 들어가 있어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다 들어가 있어요.
자 먼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을 딱 한마디로 표현을 해요.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상징적인 한 마디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하는거에요. 나는 누구인가?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제일먼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야” 스스로 답하는거죠. 또는 누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럴때에,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렇게 대답할 준비가 늘 되어 있는거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거에요.
몇일전 산책을 하면서 보니 꽃들이 사방에 활짝 피었더라고요. 딸한테서 사진이 왔는데 워싱턴 dc는 벚꽃이 만발했어요. 한국도 아마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한창일 것입니다. 이 꽃들을 보면서 꽃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어요. 꽃들은 대개 꽃말을 가지고 있죠? 개나리는 희망입니다. 장미는 사랑이고 백합은 순결이지요. 특이한것도 있더라고요. 빨간 봉선화는 “날 건드리지 마세요.”
이런 저런 꽃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꽃들 모두다 자기를 상징하는 꽃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를 상징하는,,, 꽃말같은 그런 말은 무엇일까?” 내 이름 말고, 목사라는 신분 말고, 내 스스로 나를 생각할때에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것, 또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며 가장 먼저 떠 올릴 수 있는것.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를 상징할만한 그것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 정체성을 나태낼 뚜렷한 상징적인것들을 가지고 계십니까?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어요. 내가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이 질문 앞에 섰을때에 가장 먼저 자신을 상징하는 표현을 종이라고 한것입니다. 우리 성경에서 종이라고 표현한 단어를 원어로 보면 크게 두가지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는 디아콘이란 단어에요. 신분이 자유로운 일꾼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둘로스란 단어에요. 이는 노예란 표현이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종이란 단어가 바로 이 둘로스에요.
여러분 이 둘로스란 표현은요? 무엇보다 소속에 관한 문제가 일차적입니다. 내가 누구거냐 하는거죠?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문제인거에요
여러분 당시의 노예들은요,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매여 있는 존재였습니다. 내가 내것이 아니었어요. 주인것이었어요. 심지어 그들의 생명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어요. 주인의 것이 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위하여 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주인을 위하여 죽는것이 영광 이었어요. 생명이 그러하니 다른것은 두 말할것도 없어요. 자신의 모든것은 다 주인의 것이었어요. 심지어 자기가 낳은 자녀들 마저도 다 주인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주인의 처분에 다 맡기고, 주인만 바라보고, 주인을 위하여 평생을 사는 거에요. 그런데 세상의 주인들은 노예들을 학대하고 아용하고 자기 욕심 차리는 주인들이지만 하늘의 주인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종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그 종들을 위하여 오히려 목숨까지 주신 그런 주인 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둘로스란 이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그런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 전적으로 드려진 자신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소개하고 자기 신분을 상징하는 첫번째 단어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자신있게 고백을 하는거에요. 서신서 곳곳에 그렇게 자신을 말하고 있어요.
또 성경에 나타난 그가 쓴 수 많은 고백을 보면 그 종의 고백이 말로만이 아닌것을 알 수가 있어요. 특별히 빌립보서를 보면 이런 고백들이 나와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긴다” 그 정도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주님이라는거에요.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주님만이 나의 참 가치라는거에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는것이다” 나의 최고의 희망은 내 바램은 주인 되신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돌아갈 존귀함이라는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종이란 말이 특별히 모세같은 지도자나 오늘날 목회자같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지만, 오늘 사도바울이 자신을 향하여 쓰고 있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말하는거에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의 모든것은 생명까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모든 성도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종으로서의 고백인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도 말씀하죠? “너희도 그들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에요. 이 고백이 이 시간 우리가 주님 앞에 올려 드리는 뜨거운 참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두번째 우리가 살펴볼 사도바울의 영적정체성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는것입니다. 넌 뭐냐? 내 존재의 역할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종은 종인데 보통종이 아니라는거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워 주시고 보내신 그런 존재라는거에요.
사도란 말은 어떤 특정한 사명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자란 뜻이에요. 사명자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열두제자를 특별히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서 바울 바나바 그리고 에수님의 아우 야고보 등에게도 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쓰인 사도라는 말은 그런 의미로 쓰인 말이에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존재의 가장 큰 가치가 무엇인가?” 바로 사명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자라는거에요.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하나님 사명의 위임을 받은 대리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9절을 보면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씀하세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하여 사명자들을 세우십니다. 사명을 주시고 그들을 보내시어서 사명을 수행케 하세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바로에게 보내셨어요. 이렇게 말씀 하셨어요. 출애굽기 3장 10절입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가라” “내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보낸다”
열왕기상에 나오는 엘리야를 아합왕에게 보내실때도 마찬가지에요. 그때도 말씀 하세요. “아합에게로 가라 그리고 너를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사명자로 보내신거에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위로 어둠의 세상을 향하여 보낸 사명자들입니다. 여러분 모든 성경의 주인공들이 다 사명자들이었어요.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고 세우셔서 사명의 자리로 보낸 사람들이에요. 모든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다 자신을 향한 그 사명을 생명을 걸고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에스더는 여자이지만 우리에게 책임있는 사명자의 감동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페르시아에서 타국살이를 할때입니다.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에 앉았어요. 그때 하만이라는 놀은 관리가 그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온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고 계략을 꾸밉니다. 유일한 길은 왕후인 에스더가 왕에게 간청을 하여서 어떻게든 살아남는것 밖에는 없는데 왕후도 왕의 부름이 없을때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못합니다. 에스더는 이미 한달 이상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한 상태였어요.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지금 황후가 된 에스더의 존재의 가치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는거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명의 자리가 아니겠느냐 하는것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 삶의 자리의 의미를 깨답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모든 동족들에게 나를 위하여 삼일동안 금식하게 하옵소서. 나도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의 모든 자리가 하나님의 사명의 때를 위함 자리임을 믿습니다. 이땅에 살아가는 우리 존재의 가장 큰 가치가 바로 이 사명을 위한 거에요. 우리는 모두 그렇게 부름받은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본문 5절이 말씀하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오늘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이 사명자의 뜨거운 심장의 박동이 함께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명자로 부름받은 정체성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고 나아가 하나님의 이름이 높요지는 복의 주인공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번째 사도바울의 뚜렷한 영적 정체성은? “나의 존재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거에요. 나의 한 평생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나의 모든것을 다 바쳐서 감당해야할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복음증거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가장 큰 이유가 복음증거라는거에요. 그러기에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 복음증거가 바로 자신의 최고의 존재 목적이라는거에요.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 24절을 보면 그는 죽음이 예견된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여정 앞에서조차 이런 고백을 해요. “나의 달려갈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 은헤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도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니”
오늘본문 2절부터 4절까지 그는 이 복음에 관하여 설명을 합니다.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한것이고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복음을 말합니다. 같이 읽을까요? 시작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한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할까? 인간들이 타락하고 에덴의 동쪽으로 좆겨날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기로 계획하셨어요. 인간이 느끼는 독생자 아들이라는 최고의 사랑으로 우리 눈 높이에 맞추신거에요. 하나님 기준으로 볼때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그 아들을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냥 죽게 하신것이 아니고 우리 죄짐을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어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능력으로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천국의 계단을 그렇게 오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좆겨난 그 동쪽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동문을 열어 놓으시고 밤이고 낮이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모시고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실때에 우리는 그 천국의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바뀐 사람들이에요.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로 바뀌었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늘에속한 사람으로 바뀐거에요. 그렇게 존귀하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입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의 사랑을 한 순간이라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넘어질 수도 있어요.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픔과 눈물에 잠길때도 있어요. 때로는 그 사랑이 멀리 까마득하게 느껴질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사랑을 우리가 잊지않고 기억하고 그대마다 주님께로 나의 눈을 돌리고, 나의 손을 내밀고 내 마음을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언제 어디서건 우리 손을 잡아주십니다. 일으켜 세우시고, 세워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망을 주시고 은혜에 빚진자의 삶을 반드시 살게 하세요. 나를 살린것이 복음이기에, 나도 그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게 되는것입니다. 나를 회복시킨것이 복음이기에 나도 쓰러진 누군가를 회복시킬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거에요.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것이 복음이 되었기에 내 존재의 가장 큰 이유도 복음증거가 되는거에요.
지난달 중순, 중동의 어느 지역에 성경번역 전문선교기관인 위클리프 사무실에 괴한들이 들이 닥쳤어요.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선교사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 당했고 사무실 내 모든 장비와 책, 번역 자료 등이 불타버렸어요. 다행히 하드 드라이브에 담겨있던 8개국 언어 번역 프로젝트의 작업물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목숨을 건진 선교사들이 있었어요. 또 마침 그 자리에 없어서 변을 피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발표했습니다. “그동안 진행해 왔던 8개언어 복음서 번역을 위한 프로젝트에, 두배로 더 헌신하겠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 주님만이 내 삶의 이유입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것이 나의 삶의 가치에요. 복음증거가 나의 존재 목적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살았고 주님께서는 그를 본 받아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의 일생을 이끈 이 영적인 정체성이 여러분 심령에 충만히 넘치어 남은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이끌어 나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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