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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고향의 의미
시인 최의상
1. 고향의 의미
고향은 뿌리다. 뿌리가 있어 줄기가 생기고 잎이 돋아나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뿌리가 없으면 이런 성장과 결실은 없다. 고향은 고향에 남아 있어 일생을 산 사람보다 고향을 떠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친 사람일수록 고향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그리움을 갖고 고향에 돌아온 우리들 눈에 낯 설기만한 고향이 보인다. 고향은 내가 주인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나를 타인으로 대한다. 옛날에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였으나 지금은 한달만 지나도 집 한 채가 지어지고 사라진다. 여기서 느끼는 허탈감은 박탈감으로 번지며 실망하게 된다. 변화의 속도는 다르나 느끼는 감정은 마찬가지다. 정지용 시인이 84년전에 고향에 가서 보고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했다.
84년 전이면 1930년대이며 별로 변할 것이 없는 시대이지만 고향을 떠났다 돌아온 사람에게는 변한 것이 있는 것이다. 이제 10여일 후면 설명절이다. 벌써 마음은 고향에 가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향에 가면 옛날의 고향이 아님을 느낄 것이다. 이런 감정을 깔고 아래 [고향] 정지용 시를 감상해 보자.
고향
정지용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낳고
뻐꾸기 제철을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나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1. 정지용을 소개한다.
정지용 님은 1902년 충북 옥천 하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22년 대학을 졸업하고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과 함께
동인지"시문학" 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김기린, 이효석, 이종명, 김유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이무영 등과 함께 9인회를 결성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 박영희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사망하였습니다.
[두산백과 참조]
2. 정지용 문학의 특징
간단하게 특징을 말 하라고 하면
정지용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는 재주와
절제된 표현이 어색함 없이 잘 구사하는 지혜가 있어
한국 현대시 정착의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3. 정지용 시에서의 고향의 의미
고향을 주제로 쓴 시는 [향수], [녯이약이 구절], [고향]이 있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하면 가곡이나 대중가요를 들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준 시[향수]여서 모든 사람들이 정지용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것이다. 상실된 그리움의 그 고향에 대한 향수인 것이다.
아래에 문학박사이며 초당대교수 배호남의 [정지용 시에서의 고향의 의미] 논문을 소개하니
정지용의 시적 고향의 의미를 깊이 고찰하기 바란다.
[정지용 시에서의 고향의 의미]
배호남 문학박사. 초당대교수
1. 머리말
한국 현대시사에서 고향에 관한 시편들 중 정지용의 「鄕愁」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작품도 드물 것이다. 대중가요로도 노래되어 인구에 회자되는 이 사랑의 기저에는 한국인들의 근대화 경험이 놓여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산업화 과정에 다름아니었으며, 이 과정에서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로 유입된 많은 한국인들은 ‘고향’을 특정한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상실된 유토피아로 기억하게 된다.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후렴구로 대변되는 「鄕愁」의 압도적인 그리움과 회감(回感)의 정서는 이러한 상실된 유토피아로서의 고향을 시적으로 현현(顯現)한다. 독자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리워만 하던 공간이 시 속에서 여러 감각적 이미지들을 통해 펼쳐짐을 경험하는 놀라움. 이것이 정지용의 「鄕愁」가 한국의 대중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용의 시력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러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는 일관되게 지속된 것이 아니다. 1923년 「鄕愁」의 창작으로부터 9년 뒤인 1932년에 발표된 「故鄕」에서 정지용은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고향은 아니더뇨”라고 쓰고 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언술을 가능케 한 것인가. 정지용의 고향의식은 그의 시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변모하게 되는가.
고향을 떠나온 자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향수’는 오래 전부터 문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면 본원적인 향수의 내용과 의미는 달라진다. 근대 이전에는 고향을 떠나는 체험 자체가 지극히 적었고, 일시적으로 고향을 떠났다 해도 다시 돌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귀향’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신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면 원형으로서의 ‘고향’이라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고향 상실은 보편적인 체험으로 바뀌고, ‘향수’는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Utopia)적이자 디스토피아(Distopia)적인 열망으로 변화되었다. 결국, 근대시에서의 향수란 이처럼 명목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고향, 오로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고향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고향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 가족 혹은 이웃과의 유대가 보장되는 ‘공동체’의 공간으로 제시된다. 고향은 근대가 훼손한 가치들이 보존되어 있는 항구적 영원성을 지닌 공간으로 상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문학에 있어서 ‘향수’라는 정서는 근대 체험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적 주체는 향수를 통해 그의 내면에 이상화된 일종의 미적 근대성의 장소를 설정함으로써, 끊임없는 갱신과 자기 파괴의 부정을 통해 유지되는 근대에서 비롯된 ‘정당성의 위기’ 혹은 ‘정체성의 위기’1)를 극복하고 ‘나’의 존재에 확실성을 부여하여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고향을 직접적인 시의 소재로 삼은 정지용의 시는 「鄕愁」, 「녯니약이 구절」, 「故鄕」 세 편을 들 수 있다. 이 세 편의 시를 정지용의 ‘고향시편’으로 분류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녯니약이 구절」은 1927년 1월 『新民』21호에 발표되었고 「鄕愁」는 同年 3월 『朝鮮之光』65호에 발표되었으므로 발표시기로 보면 「녯니약이 구절」이 「鄕愁」보다 앞선다. 그러나 창작시기로 보면 「鄕愁」는 1923년 3월, 「녯니약이 구절」은 1925년 4월로 「鄕愁」가 「녯니약이 구절」에 비해 2년 이상 앞서 창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故鄕」은 1932년 7월 『東方評論』2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세 편의 시를 그 발표시기가 아니라 창작시기 순으로 분석하려 한다. 또한 「鴨川」은 고향을 직접적으로 다룬 시는 아니지만, 정지용의 고향의식이 京都 유학 초기에 어떻게 변모했나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참고로 분석하려 한다.
2. 농촌 공동체에 대한 낙원의식;「鄕愁」의 경우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舊邑의 청석교 바로 옆에 위치한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아버지 鄭泰國과 어머니 鄭美河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은 한가한 농촌 마을이었다. 정지용은 1918년 만 16세에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경성으로 떠나게 된다. 그의 유소년기의 기억은 곧바로 농촌에 관한 것이다. 「鄕愁」에 등장하는 고향의 이미지들은 모두 이때 형성된 기억에 바탕을 둔다. 상술했듯이 「鄕愁」는 1923년 3월에 창작된 것이다. 김학동이 작성한 연보에 의하면 정지용은 1923년 4월 휘문고보에서 지원하는 학비로 京都의 동지사대학에 입학했다.2) 그러니까 「鄕愁」는 정지용이 일본 유학을 떠나기 바로 직전에 창작된 시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식민지 종주국의 옛 수도에 자리한 대학에 영문학이라는 신학문을 배우러 떠나는 만 21세의 청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을까.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鄕愁」전문
시적 화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의 모습을 인간과 자연의 조화, 개인과 가족 공동체간의 유대가 보장된 자족적인 충만함으로 가득 찬 세계로 그리고 있다.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후렴을 따로 놓고 보면, 이 시는 모두 5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연마다 시인의 기억 속 고향을 환기하는 심상들로 가득 차 있다. 1연에서는 우선 고향의 자연 공간이 제시된다. 그곳은 “넓은 벌”과 “실개천”과 “얼룩백이 황소”가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2연은 고향의 겨울밤 풍경이며, 또한 아버지에 대한 회고이다. 3연은 유년기의 동심과 꿈에 대한 추억이며, 4연은 “어린 누의”와 “발벗은 안해”로 대표되는 고향의 여인들이다. 또한 5연은 초라한 세간이지만 단란하게 살아가는 농가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실개천’, ‘얼룩백이 황소’, ‘질화로’, ‘짚벼개’, ‘어린 누의’, ‘발벗은 안해’, ‘석근별’3), ‘서리 까마귀’ 등은 원초적인 토속성의 이미지들로 정지용이 유년을 보냈던 농촌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정감을 제시한다. 또한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4)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농촌의 한가로움과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의 느긋함, “파아란 하늘”과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는” 어린이의 순수한 동심,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의 자연 그대로의 적나라함, “흐릿한 불빛 아래 도란 도란거리는” 포근함과 휴식의 정감 등, 이 시는 그대로 정지용의 유년이 속했던 농촌공동체의 시적 육화라 할 만 하다.
그런데 「鄕愁」는 단순히 지나간 유년을 돌이켜 생각하는 구조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복합적으로 배열된 시간구조를 지니고 있다. 각 연에서 고향의 구체적 심상은 과거시제로 제시되지만 후렴구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마음은 현재시제이며, 또한 앞으로도 고향을 잊지 않으리라는 미래에 대한 다짐이 드러나 있다. 이렇듯 복합적인 시간구조가 가능한 이유는 ‘향수’가 멀리 떨어진 공간에 대한 ‘회감’(回感, Erinnerung)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E. 슈타이거에 따르면 회감은 서사적인 시와는 달리 “서정적인 시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존재하는 방식이다”.5) 회감은 서정시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지나간 것을 현재화하는 힘을 갖는다. 서정시 속에 드러나는 “모든 존재자는 시적 대상이 아니라 상태(Zustand)이다.” 서정시에서 시인은 지나간 것에 대한 회감을 통해 정조가 재현하는 대상을 ‘현재화’한다. 이때 서정시에서 지금 일어난 일과 지나간 일의 구분이 사라지고, “이 양자(兩者)는 서정적인 시인에게 현존하는 모든 것보다 한층 가까이 있다.” 회감(Erinnerung)은 주체와 객체 간의 경계를 지우고, 시 속에서 서정적인 상호 융화(Ineinander)를 가능케 한다. “현재의 것, 과거의 것, 심지어 미래의 것도 서정시 속에서 회감될 수 있다.”6) 회감은 서정시에서 주체가 시?공간의 거리를 뛰어 넘어 객관적 대상 세계와 융화할 수 있도록 해주며, 이러한 융화를 가능케 하는 회감이야말로 서정시 양식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정지용의 「鄕愁」에서 드러난 회감은 보다 구체적으로 유년의 경험과 그에 대한 회귀욕구이다. 익숙하고 친밀한 것들을 다시 불러내고 그리워하는 것, 정지용에게 향수란 근원에로의 복귀이며 공동체의 친밀감에 대한 집착이다. 「鄕愁」에 나타난 ‘고향’이라는 공간은 그러므로 ‘농촌공동체’에 대한 신화적이면서 원형적인 그리움의 공간, 일종의 유토피아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반복적인 후렴을 통해 시인은 ‘고향’이라는 공간을 단순히 과거 시제에만 머무르는 그리움의 대상을 넘어서, 시 속에서 끊임없이 현재화되면서 시적 주체가 융화를 바라는 공간으로 제시하고 있다.
「鄕愁」의 고향은 지극히 ‘조선적인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고” 잠을 청하고, “어린 누의와” “사철 발벗은 안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는 곳이며, 식구들이 “초라한 집웅” 아래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이다. 가난과 육체적 노동이 상존하는 1920년대 조선 농촌의 실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궁핍한 농촌의 구체성은 시적 화자가 지닌 압도적인 회감의 정서 때문에 휘발되어 버린다. 「鄕愁」에서 정지용이 주의 깊게 배치한 여러 수사적 장치들은 1920년대 조선의 평범한 농촌 마을을 아름답고 신비로운 신화적 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실개천이 “옛이야기 지줄”대며 흘러갈 때, 시적 화자는 이 옛이야기를 통해 근원적인 공동체의 설화에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또한, 소의 울음소리를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이라 표현할 때, 우리는 ‘금빛’이 주는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인한 신비감과 함께, ‘게으른 울음’이란 표현을 통해 계량화된 근대적 시간 즉 일분일초가 철저하게 생산성에만 관계하도록 집중된 시간관과는 전혀 다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근대적 시간에 영속하는 공간으로 ‘고향’을 상상하게 된다. 노동하는 어린 누이의 귀밑머리는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이 되고, 밤하늘의 “석근 별”은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긴다. 가난한 농촌 마을의 구체성은 이제 일상의 의미를 뛰어넘어 ‘고향’이라는 공간에 신화적 원형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동양적 전통에서 전근대적인 의미의 낙원은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물질적 풍요로 가득 차고 질병이나 전쟁의 걱정이 없는 선계(仙界)를 의미한다. 무릉도원이 낙원인 이유는 그 공간이 탈역사적이기 때문이다. 「鄕愁」의 고향은 이러한 낙원과 유사하다. 정지용의 향수는 언뜻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공간적인 거리감에 기인하는 것 같지만, 기실 그 회감의 본질은 공간성이 아닌 시간성에 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시절 혹은 잃어버린 삶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1923년의 충북 옥천의 작은 농촌 마을, 수탈당하는 식민지의 소읍이 낙원과 같은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고향을 떠나, 정확히는 유소년기의 충일하고 조화로운 농촌 공동체의 경험에서 벗어나 경성이라는 ‘유사 근대’를 경험한 뒤, 경도라는 식민지 본국으로 진입하기 직전에야 비로소 정지용의 의식 속에서 ‘고향’은 일종의 낙원으로서 발견된다. 그 낙원은 근대적인 삶의 양식에 접근해가는 한 청년이 그의 문학적 자의식 안에서 대항 공간으로 만들어낸, 전근대적 농총공동체가 지닌 조화와 아름다움의 집약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조화와 아름다움은 1920년대 초반 조선의 식민 현실에 눈감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3. 京都 체험이 가져온 현실인식의 변화;「鴨川 과 「녯니약이 구절」의 경우
1923년 4월 정지용은 경도의 동지사대학에 입학한다. 21세의 청년은 이제 일본어로 말하고 일본어로 글을 쓰고 일본어로 사유해야 하는 일상에 맞닥뜨린다. 경성에서 경도로의 위치 이동은 단순히 현해탄을 건넜다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비록 유사 근대라고는 하지만, 경도는 경성에 비해 적어도 50년 이상 먼저 근대를 실현한 공간이었다(경도는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이미 인구 50만을 넘는 대도시로 발전했다). 많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그러했듯이, 이 위치 이동은 정지용에게 근대 체험7)으로의 진입을 뜻하며, 이는 곧바로 삶의 양태의 급격한 변화로 연결된다. 이 변화가 정지용에게 가져다준 지배적인 정서는 바로 ‘시름’과 ‘슬픔’이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가 저물어…… 저물어……
- 「鴨川」전문
이 시 「鴨川」은 1927년 6월 『學潮』2호에 실려 있지만, 시 말미에 “1923. 7. 京都鴨川에서”라고 명기되어 창작시기가 1923년 7월임을 알 수 있다. 1923년 7월이면 정지용이 경도로 건너온지 3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은, 그의 유학 생활이 갓 시작된 시기이다. 그러나 그 3개월 사이, 「鄕愁」와 「鴨川」의 시적 거리감은 크다.
「鴨川」에서 정지용은 스스로를 “젊은 나그네”라고 칭하고 있다. 그는 젊고, 나그네처럼 정처가 없다. 이 나그네가 떠도는 곳은 일본 제국의 옛 수도인 경도를 흐르는 “鴨川(가모가와)”의 고작 “‘十里ㅅ벌”일 뿐이다. ‘鴨川’은 경도라는 도시 속에서도 그나마 자연에 가까운 장소, “역구풀 욱어진” 자리에서 ‘뜸북이’가 울음 우는 곳이다. 뜸북이의 울음소리가 홀어머니의 울음 같다는 표현은 고향을 벗어나 혈육과 떨어져 살고 있는 정지용 자신의 처지를 드러낸 것으로서, 일본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인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8) 그러나 이 젊은 나그네의 시름은 단순히 공간적인 거리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鴨川 十里ㅅ벌”을 “오량쥬 껍질”을 씹으며 배회한다. 이 시적 대상은 그저 정지용의 이국 취향만은 아니다. “오량주 껍질 씹는 시름”이라는 표현은 「슬픈 印象畵」에도 나오는데, 「슬픈 印象畵」는 1926년 6월 『學潮』창간호에 실려 있다. 『學潮』는 재일본 유학생들의 문예지였고 정지용은 이 창간호에 「까? ?란스」를 비롯한 여러 편의 시를 선보이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재일본 유학생 시인들의 이국 문물에 대한 경사는 유별난 것이 아니지만, 정지용에게 있어 ‘오랑쥬 껍질’이라는 이국 취향은 유독 ‘시름’이라는 정서와 강하게 연결돼 있다. 그런데 정지용이 ‘오랑쥬 껍질’을 씹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전근대적 공간인 고향 농촌이 아니라 근대적 공간인 경도(京都)라는 도시이다.
「鴨川」과 「슬픈 印象畵」에서 반복되는 ‘오랑쥬 껍질’은 정지용이 경도 유학 시절 얻게 된 이국 문물에 대한 감각적 상징물이며, ‘오랑쥬 껍질’을 씹을 때 느끼는 시큼함은 “젊은 나그네”인 정지용이 지닌 시름과 슬픔의 미각화(味覺化)다. 그가 지닌 시름의 본질은 단순히 고향을 떠난 젊은이의 ‘鄕愁’가 아니라, 근대적 체험 속에 내던져진 전근대적 인간의 불안감, 뿌리 뽑힌 자의 현실인식이다. 이 현실인식이 정지용으로 하여금 1926년 발표된 「까? ?란스」에서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라는 고백을 가능케 했다. 이 고백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읽어내는 것은 해석의 과잉이지만, 적어도 그의 현실인식이 경도 유학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는 있다. 물론 이 현실인식 역시 “大理石 테이블”이라는 이국 문물에 “닷는 내뺌이 슬프구나!”라는 감각으로 치우쳐버리긴 하지만 말이다.
결국 「鴨川」은 「鄕愁」의 대칭점에 서 있는 시이다. 같은 자연물이라 하더라도 ‘鴨川’은 「鄕愁」의 실개천처럼 정지용에게 “옛이야기 지줄대”지 않는다. 「鴨川」과 「鄕愁」의 차이는 고향과 타향이라는 거리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지용이 ‘오랑쥬 껍질’이라는 감각적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그 감각이 근대 체험이 그에게 가져다준 시름과 슬픔의 구체성이기 때문이다. 이 “젊은 나그네”의 시름에 빠진 식민지 유학생이 방학을 맞아 고향에 잠시 돌아가면 어떤 시를 쓰게 될 것인가.
집 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차저 오는 밤
논ㅅ둑 길에서 불럿노라.
나가서도 고달피고
돌아와 서도 고달폇노라.
열네살부터 나가서 고달폇노라.
나가서 어더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락,
아버지 닐으노니 -
기름ㅅ불은 박이며 듯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대로 듯고
니치대든 어린 누이 안긴데로 잠들며 듯고
우ㅅ방 문설?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듯고,
큰 독 안에 실닌 슬픈 물 가치
속살대는 이 시고을 밤은
차저 온 동네ㅅ사람들 처럼 도라서서 듯고,
- 그러나 이것이 모도 다
그 녜전부터 엇던 시연찬은 사람들이
?닛지 못하고 그대로 간 니야기어니
이 집 문ㅅ고리나, 집웅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듸 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여다 부친 밤한울이나,
이것이 모도다
그 녜전 부터 전하는 니야기 구절 일러라.
- 「녯니약이 구절」전문
상술했듯이 「녯니약이 구절」은 발표시기는 1927년 1월(『新民』21호)이지만 그 창작시기는 1925년 4월이다. 1925년 4월이면 정지용의 경도로 건너간 지 꼭 2년이 지난 때이다. 정지용은 1929년 3월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해 귀국했다. 그의 6년 유학 생활에서 3분의 1이 지난 시점, 그가 잠시 고향에 들렀을 때 쓴 시가 「녯니약이 구절」이다. 이 시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정서는 무언인가. 그것은 바로 “고달픔”이다. “열네 살부터 나가서” 살던 청년의 고달픔, “나가서도 고달피고/돌아와서도 고달폇노라“는 나그네의 고달픔이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는 그의 고달픔을 매우 직접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경도 유학 시절 창작된 정지용의 초기 시는 구체적인 감각에 연동되지 않는 경우 곧바로 직접화법으로 감정을 뱉어내는 경우가 왕왕 있다.
앞서 살펴본 「鴨川」에서도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라는 영탄도 있거니와, 이런 직설은 김기림이 「『鄭芝溶詩集』을 읽고」(『朝光』2권 1호, 1936. 1)에서 내린 “물제비처럼 단아한 감성”이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다. 그나마 「鴨川」은 ‘오랑쥬 껍질’이라는 감각적 대상물이라도 있지만, 「녯니약이 구절」은 그마저도 없이 고달픔의 토로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이 정지용이 그의 고향시편 가운데 「녯니약이 구절」을 첫 시집인 『鄭芝溶詩集』에서 유일하게 누락시킨 이유가 아닐까.
정지용이 첫 시집 발간에 앞서 여러 차례 발표된 시들을 검토하고 수정하여 제목과 배열 순서까지 직접 챙겼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녯니약이 구절」의 누락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며 이는 정지용 스스로가 이 시의 성취를 평가절하했다는 뜻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왜 「녯니약이 구절」은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는가. 「鄕愁」로부터 2년, 무엇이 정지용으로 하여금 고향에 대한 의식을 ‘그리움’에서 ‘고달픔’으로 바꾸게 하였는가.
「鄕愁」와 「녯니약이 구절」의 차이는 시적 화자가 위치한 공간의 차이다. 「鄕愁」의 시적 화자는 고향을 떠나와 있다. 때문에 고향은 꿈에도 잊지 못하는 ‘그곳’, 즉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 유토피아적인 공간이 된다. 반면 「녯니약이 구절」에서는 ‘집 차저 오는 밤’이나 ‘이 집 문ㅅ고리’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시적 화자의 위치가 실재하는 시인의 고향집 바로 그 공간이다.9) 실재하는 고향집이라는 공간은 「鄕愁」에서 보여주는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공간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녯니약이 구절」의 ‘고향집’이라는 공간은 근대를 체험하고 돌아 온 화자에게 원형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곳이다. 「鄕愁」에서는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신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녯니약이 구절」에서는 4연의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대로 듯고/니치대든 어린 누이 안긴데로 잠들며 듯고/우ㅅ방 문설?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듯고”라는 묘사에서 보듯 훨씬 더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鄕愁」의 가족이 신화적으로 채색된 모습이라면, 「녯니약이 구절」에서는 직접적으로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이 구체성이야말로 정지용의 고향의식이 「녯니약이 구절」에 이르러 변화된 지점이다. 정지용은 이 시에 이르러서야 고향의 현실과 고달픔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식한다. 그가 열 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팠듯이,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고달팠다는 사실. 고향의 가족과 친지들이 “그 녜전부터 엇던 시연찬은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보잘것없음의 이유가 바로 고향이라는 공간이 지닌 전근대성 때문이라는 사실. 그가 고향에 와서 마주한 서글픔과 왜소함은 모두 “그 녜전 부터 전하는” “녯니약이 구절”, “?닛지 못하고 그대로 간 니야기”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시에 이르러서야 고향의 전근대성이 그의 의식 속에 들어오는가. 그것은 그가 고향이라는 전근대적 공간으로부터 이탈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짧게나마 근대를 체험한 자이며, 그래서 아버지를 비롯한 고향 사람들에게 “나가서 어더온 이야기를/닭이 울도락” 일러주는 계몽적 주체가 된다. 이 설익은 계몽적 주체의 눈에 비친 고향의 현실, 그가 그리움의 정서로 회감할 때는 감지되지 않던 실재가 이제는 보이는 것이다. “차저 온 동네ㅅ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고향의 이웃들은 정지용의 유학생활을 전해 듣기 위해 그를 찾아온다. 정지용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의 농촌이라는 전근대적 공간에서는 계몽의 주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경제국대학이나 동지사대학으로 대표되는 식민 본토의 근대적 교육의 주체에서 보면 정지용과 같은 식민지 출신 유학생들은 계몽의 대상이기도 했다. 일본 유학생들은 “계몽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 즉 ‘근대’와 ‘전근대’ 사이에서 불안하게 유동하는 정체성”10)을 지녔던 것이다.
정지용의 ‘근대 체험’의 특수성은 바로 고향과의 분리와 거리감이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사적 특수성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 특수성은 정지용을 비롯하여 남들보다 먼저 일본이라는 통로를 통해 근대를 체험한 식민지 유학생들의 내면을 분열시켰다. 식민지 유학생들은 동경(東京)이나 경도(京都)라는 근대적 공간과 조선의 농촌 마을이라는 전근대적 공간을 오가면서, 식민지 권력에 의해 선점된 근대에 대한 선망, 자신이 속했던 전근대적 공간에 대한 환멸과 그리움을 동시에 경험하는 모순에 봉착했다. 이 모순의 시적 육화가 정지용 고향 시편의 마지막 시인 「故鄕」이다.
4. 식민지 지식인의 갈등하는 자의식;「故鄕」의 경우
정지용은 1929년 3월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同年 9월 모교인 휘문고보에 영어과 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부인과 장남을 솔거하여 종로구 효자동으로 이사한다. 조선으로 돌아와 경성에서 근대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유학생의 눈이 아니라 식솔을 거느린 가장의 눈으로 보게 된 고향은 어떠했을까. 1932년 7월 『東方評論』2호에 발표된 시 「故鄕」을 보자.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힌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故鄕」전문
낯선 근대의 도시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불안해하던 시인은 그 불안한 정체성으로 인해 ‘고향’을 처음으로 구체적인 실재로서 인식한다. 그리움을 갖고 돌아온 ‘고향’에서도 ‘타자’가 되어버린 시인은 이제 자신이 그리워하던 고향의 실제적 성격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정지용의 고향의식에는 더 이상 ‘傳說’도, ‘금빛 게으른 울음’도, ‘하늘에는 석근 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고향은 심미적으로 미화되지 않고 객관적인 현실 인식에 의해 포착된 세계로 나타나며, 이 때의 고향은 상실과 고달픔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된다. 이 상실감과 고달픔은 「녯니약이 구절」에서 보이는 고향을 떠나 다른 삶의 양식을 알게 된 자의 고달픔이다.
시 「故鄕」에 이르면 고향은 이제 친숙하지만 동시에 낯선 곳으로 다가온다. 이제 고향은 농촌 공동체의 친밀함이나 유년의 충일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낯선 ‘체험’을 던져주는 곳이다. 고향을 낯설게 체험하는 것은 단지 외면적 풍경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고향은 “산꿩이 알을 품고/뻐꾹이 제 철에 우”는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그의 마음은 “머언 港口로 떠돌”고, 그의 입에서는 “어린 시절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메마른 입술에 쓰디 쓸” 뿐이다. 정지용에게 ‘고향’이 유토피아로 다가올 때에는 그 불변성으로 인한 낯익음과 친근함이 지속될 때이다. 그러나 고향의 변하지 않는 모습은 이미 근대를 체험한 정지용에게는 동시에 낯선 모습으로도 다가오게 된다. 이때의 낯설음이란 식민지 유학생이 지녔던 근대의 시선에 포착된 전근대의 모습, 즉 여전히 계몽과 문명이 결여되어 있는 거부해야할 대상으로서의 고향인 것이다.
이러한 달라지지 않은 고향과 달라진 자아라는 역설은 전적으로 고향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바다 건너 ‘머언 港口’의 생활상을 통해 근대화된 정지용의 눈에는 전혀 변하지 않은 전근대적인 고향이 마침내는 낯설게 다가오고 또 거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시「故鄕」에서 발견되는 정지용의 모습은 근대와 전근대 사이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절망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통스러운 자의식으로 드러난다.
이 자의식를 대변하는 시적 대상이 바로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이다. “머언 港口”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현태탄 건너 일본이 있고, 또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면 근대의 유래인 서구가 있다. “머언 港口로 떠도는”이라는 표현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정지용이 지녔던 모더니티 지향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음은 제 고향 진히지11) 않고”, 즉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고정된 모습도 지니지 못한 ‘구름’이란 시적 대상은, 끝없이 지속되는 변화의 물결이라는 근대의 특성에 순응하지도, 그렇다고 그 근대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전근대적인 전통으로 완전히 회귀해버리지도 못한 채 정체성의 위기에 맞닥뜨린 정지용이라는 근대적 지식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름’처럼 정처없이 방황하는 존재 즉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열망으로 떠도는 존재라는 자의식은, 상실된 고향이라는 전근대적인 가치와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가치인 근대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지속적인 갈등에 놓여 있던 정지용의 내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방황과 갈등은 정지용에게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자기 정체성의 질문에 봉착한 일제강점기의 여러 시인들에게 ‘고향’은 이상향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현실적 공간이기도 했다. 정지용을 비롯하여 백석?이용악?오장환 등과 같은 1930년대의 여러 시인들은 나름의 ‘고향’이라는 정서적?지리적 공간을 설정하며 각각의 독특한 분위기와 인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모색했다. 1930년대의 한국시에서 ‘고향’을 둘러싼 시적 주제는 식민지 지식인의 자기 정체성의 문제, 즉 시인의 자의식이 “어떻게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일그러지고, 부유하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새로운 근대적인 세계에서 유랑하는 존재의 여러 가지 문제적인 모습을 가장 원초적”12)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라는 민족사적 특수성으로서의 억압적 상황 또한 이 갈등 양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간 유학생들, 만주로 떠돌아야했던 유랑민들은 ‘고향’을 회감하고 반추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심점을 찾으려 했다. 이렇듯 ‘고향’에 대한 의식은 일제강점기 한국시의 특수성 속에서 개별 시인이 당대에 추구하던 시적 자아의 정체성의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5. 맺음말
정지용의 고향시편은 그가 이미 1920년대 중반에서부터 근대적 개인으로서의 식민지 지식인의 정체성 문제와 전근대적 ‘고향’의 갈등을 드러낸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그의 ‘고향 시편’에서 드러난 고향의 모습은 한 가지 고정된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정신이 갈등하는 면모에 따라 ‘농촌공동체에 대한 낙원 의식’과 ‘고향 상실의 인식’이라는 지극히 상반된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모순과 정체성의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정지용은 1932년의 「故鄕」 이후 잠시 천주교라는 종교에 의탁한다. 그러나 종교시가 문학적 자의식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자 1938년 이후로 동양적 전통으로 은일(隱逸)하는 산수시(山水詩)로 나아가게 된다. ‘구인회’를 주도하던 모더니즘 시에서 종교시로, 또 거기서 다시 동양적 전통으로 회귀하는 산수시로의 변모는 일견 모순되고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시적 발현의 모순이야말로 정지용의 정체성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갈등의 기저에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고향인 조선의 전근대성을 어떻게 인식했느냐는 고향의식의 변모가 작동하고 있다. 정지용의 고향의식은 다른 일제강점기 시인들이 비해 그 변모의 진폭이 훨씬 컸으며, 그 진폭에 의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그의 시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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