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강진만을 내려다 보고 있는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찾아본 후 석산이라는 만덕산 귀퉁이를 돌아 나와 다시 강진읍 남포로 나가 칠량면을 거쳐 대구면으로 향했다. 원래 목표는 강진만으로 달려 내려가 대구면에 위치한 정수사를 둘러보고 다시 마량면으로 내려서 그곳에서 일몰을 보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시 장흥해안을 따라 곡성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갯벌을 보며 천천히 내려간 턱에 정수사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5시반이 다 되어서 이었다. 정수사는 의외로 계곡에 자리학 있어 벌써 주위가 컴컴해 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니 커다란 비가 두 개가 보인다. 이 비는 임진란 전승으로 이끈 염걸 장군의 전승기적 비이다. 이 비에 참배를 하고 바로 주차장에서 보이는 정수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어두워 지기전에 빨리 돌아봐야 하는 급함을 안고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정수사 입구 축대를 올라 경내로 들어선다. 가을이면 빨간 단풍이 흐트러지고 또 바닥엔 상사화가 빨갛게 물든다는 정수사의 마당엔 공사하다 남은 진흙이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사찰 전체에는 잔돌이 깔려있어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조심스럽게 걸어 다녀야 한다.
[천태산 등산로 입구에 정수사가 자리하고 넓은 주차장이 준비되어 있어...]
[주차장 위쪽 좌측엔 퇴은당염걸장군전승기적비와 우측엔 운계천기대사의적비가 자리하고...]
염걸 장군은 1545년(인종1년) 강진군 칠량면 율번(栗邊)에서 출생했다. 율번은 목암, 월송과 함께 칠량면 단월리에 속한다. 율번 마을은 1789년 <호구총서>에 기록된 28개 마을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단월리 3마을 중 가장 먼저 설촌된 것으로 보인다. 자는 국충(國忠), 호는 퇴은당(退隱當)으로 기마와 궁술에 출중하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구강포(九江浦, 현구십포)와 정수사 사이에 쳐들어오는 적을 두 아우 서(瑞)와 경(慶), 외아들 홍립(弘立)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섬멸했다.
왜군이 강진만을 경유해 이곳으로 들어왔던 것은 고려청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선 수백 척이 구강포에 들어오자 수백 개의 허수아비를 바닷가에 세우고 의병들이 후퇴하는 척 위장 전술을 펼쳐 정수사 골짜기에 매복해 유인된 적 수천 명을 소탕했다. 이후에도 염걸 장군은 의병장의 명을 받아 장흥 회령진과 몰운대(沒雲臺), 광양의 왜교성(倭橋成) 싸움에서 왜선 수백 척을 격파하는 등 연이은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몰운대에서는 이순신의 셋째 아들 면을 살해한 적장 '馬希雍馬多齒'를 체포하기도 했다.
가을이면 열리는 강진청자축제때 수군 허수아비가 등장하는 이유를 이곳에서 찾았다. 왜군이 정자도료를 차지하려 강진만으로 처들어 왔을 때 위장전술로 염걸장군이 허수아비를 수백개 만들어 세워놓아 초병과 의병들이 많음으로 오인하게 해 사기를 올려 적들을 물리치었다 한다. 임란의 영웅 염결장군 허수아비작전 역사재현이라는 강진청자문화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염결장군의 사충신묘는 지방문화재 36호로 지정되 칠량면 단월리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천태산 등산로 안내판...]
[주차장 바로 위로 넓게 자리한 정수사 경내...]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천개산(天蓋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구군지(舊郡誌)에 의하면, 805년(애장왕 6)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도선은 827년(흥덕왕 2) 영암(靈巖)에서 출생하였고, 842년 승려가 되었으므로 그 연대에는 다소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계곡을 중심으로 양쪽 언덕에 묘적사(妙寂寺)와 쌍계사(雙溪寺)의 두 사찰을 건립하여 묘적사에는 천불상(千佛像)을 봉안하였으나 중세에 이르러 화재로 소실되고 없다.
쌍계사는 수정사(水淨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동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529년(중종 24) 중창하면서 정수사라 하였고, 1574년(선조 7) 성운(性雲)이 중건하였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대파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종인(宗印)이 현감 강유(姜諭)의 시주로 중건하였고, 1664년(현종 5)에는 능우(能佑)가 중수하였다. 1706년(숙종 32) 처사(處士) 이득종(李得宗)이 당시의 현감이었던 김중려(金重呂)의 협력을 얻어 중수하였고, 1794년(정조 18) 왕명으로 고금도(古今島)에 있는 관왕묘(關王廟)를 이 절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조선 말까지만 하여도 강진 부도의 사암(寺庵)들을 관장하는 수찰(首刹)이었으나 차츰 퇴락하다가 6·25 이후 공비들에 의하여 소실되었으며, 뒤에 사찰 승려들이 지방민의 협조를 얻어 중건하였다. 1991년에는 요사를 지었고, 1995년에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나한전·산신각·종각·산문(山門), 요사채 등이 있다. 산문 밖은 임진왜란의 격전지로 유명하며, 남쪽으로 3㎞ 떨어진 곳에는 고려청자 도요지인 당전리가 있다. 고 백과사전 에서 알려준다.
[축대를 바로 오르면 우측엔 범종각이 정면엔 대웅전이 자리하고...]
[정수사 범종각엔 아주 작은 동종이...]
[정수사 작은 동종의 용뉴(龍紐)...]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 아름답게 ...]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
[정수사 대웅전...]
[정수사 대웅전 안내문...]
[정수사 대웅전 현판...]
[정수사 종무소...]
[...]
[...]
[...]
[궁금하게 만들어 놓은 옹기탑...]
[정수사 도조사(陶祖祀)엔 무명 도공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굳게 닫혀있는 도조사...]
[정수사 부도전...]
[광융당(光隆堂)이라 쓰인 부도가 눈길을...]
[...]
[정수사 옆 천태산 등산로...]
[정수사 천불전...]
[떠나며 올려다본 정수사 경내...]
[정수사 종무소...]
[정수사 해우소...]
[언덕위엔 새로 지은 요사채가...]
[...]
[정수사 경내가 아름답게 보일 때는 가을이란 것을 알려주는...]
[당전 저수지를 돌아...]
정수사 경내를 돌아보며 걸린 시간은 정말 너무 할 만큼 빨랐다. 30분도 안걸려 한 바퀴를 돌았으니 과연 무었을 보았다 하리요?. 그러나 해가 떨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만나기 어려운 날씨에 일몰을 찍어보려 바쁘게 큰길로 나가 대구면을 지나 마량 쪽으로 달려 보았으나 벌써 해는 수평선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대구초교를 지나 바로 구수리 앞 큰돌섬이라고 쓰인 곳으로 들어가 삼각대를 꺼내본다. -<끝>-
첫댓글 가보기 힘든 작은 사찰이지만 이글들을 읽고 나면 언젠가는 꼭 한번 찾아보리라는 결심을 굳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