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을 원합니다. 어려운 일 없이 무사히 지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하루의 소원이요, 한 해의 소원이요, 일생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바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더 평안한 삶을살고 싶은것이 우리들의 심정이요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 실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예수를 믿고 나서 평안한 삶을 사는 것 아닙니다 . 오히려 더 많은 어려움과 더 많은 시련을 당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했더라면 당하지 아니할 어려움을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당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든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간혹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로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회개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시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 평안함과 안락함보다는 시험과 시련을 주실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시험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하면 안일에 빠지고 신앙이 나태해집니다.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시험과 시련을 주신다 는 진리입니다. 미국에서 물고기를 산채로 대륙을 횡단해서 수송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물탱크에 물고기를 가득 넣고는 수송을 하는데, 워낙 땅이 넓으니 수일씩 운송을 해야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착할 때쯤이면 많은 물고기가 죽어버립니다. 또 살아있는 것들도 신선도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아주 싱싱하게 수송해다가 팔았습니다. 며칠 씩 수송을 했는데도 이 사람의 고기는 싱싱했고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재미도 많이 보았습니다. 다른 업자들이 제발 그 비결을 좀 가르쳐달라고 졸랐습니다. 알고 보니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물탱크의 물고기들 틈에 커다란 문어를 한 마리 집어넣는 것이 비결이었 습니다. 문어가 물고기를 잡아 먹을텐데하고 걱정하겠지만 실은 먹어보았댔자 몇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리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어가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쫒아다니면 물고기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칩니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것이 운동 효과를 내어, 물고기를 싱싱하게 수송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꼭 같습니다. 어려워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의지합니다. 편안하면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께 늘 감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편안하면 별 수 없이 나태해지고 안일에 빠집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편안할 때는 한결같이 영적으로 나태해졌고 무기력해 졌었습니다. 타락했고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때로 시험 혹은 시련을 주십니다. 그 괴로움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2)시험을 주시는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나듯 그리스도인도 신앙생활을 해 가는 가운데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섭리를 하십니다. 신령한 말씀의 양식을 주셔서 먹게 하시고 때로는 운동도 시키시고 훈련도 시키십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하나가 시험 혹은 시련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보다 강하고 보다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시며 동시에 보다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즈음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 자라난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성년이 되어도 독립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과잉 보호 하시지 않습니다. 나약한 신앙인으로 기르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적절한 시험을 주셔서 훈련시키시고 강하게 만드십니다. 저는 어릴 때 보리밭에서 보리를 밟은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철에 파릇파릇 싹이 나는 보리는 사정없이 발로 밟아버립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왜 보리를 밟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보리는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립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가 그대로 자라면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가 없습니다. 100알 정도가 고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습니다. 그러니 올라오던 싹이 꺽여집니다. 그 껵여진 싹이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새로 일어날 때는 처음과는 비교가 알 될 정도로 강한 줄기가 됩니다. 발에 밟힘으로 더 많은 이삭을 맺을 수 있는 강한 줄기로 자라게 된다 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합니다. 시련과 고난의 훈련을 통하여 더 강한 사람, 열매 맺는 사람으로 성숙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시험이란 단어를 잠깐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다른 개념이 우리말 성경에는 시험이라는 같은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마귀가 주는 시험으로 템테이션 이라고 합니다. 이 시험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죄를 지어 넘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 하면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사단으로부터 죄 짓도록 유혹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자합니다. 구원 받지 못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2)하나님 주시는 것으로서 이것은 테스트 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함이요, 성숙케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험은 잘 통과하기만 하면 축복이요 능력이 됩니다. 많은 훈련을 통과할 수록 좋은 군인이 되는 것처럼 많은 시련을 통과할 수록 더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이기고 시험의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런대 시험을 당할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가운데서 갈팡질팡합니다. 이는 시험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의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는 시험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이 사람들이 감당했던 시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원문을 있는 그대로 옮겨보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당하는 시험이 아닌 시험이 너희에게 임한 것은 없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다가 좀 잘못되면 훌쩍훌쩍 울면서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 아픈 마음은 세상에 아무도 모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르긴 왜 모릅니까? 혼자서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연의 경험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별나게 나만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점점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다 겪는 것을 나도 겪을 뿐입니다. 가끔 해산의 시각을 앞에 둔 임산부가 고민을 합니다. "아리고 이거 아이 낳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아이 낳다가 죽는 수도 있다는데..." 이럴 때에 위로할 수 있는 말이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인구의 절반이 겪는 일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인구의 절반이 여자요, 세상 모든 여자가 아이 낳습니다.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하나 끼여 있는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시험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갑자기 시험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불의의 사고를 당하듯이 갑자기 시험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한 시험이 올 것을 미리 예고해주시고 준비하도록 해 주셨다면 시험을 견디기가 그래도 쉬웠을 텐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갑자기 시험을 주시는가. 갑자기 시험을 당하는 것이 여러분만 그렇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얼마나 갑자기 시험을 당했습니까?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최고의 행복의 자리에서 최악의 불행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시험을 당했고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우리가 시험 당하는 그 방법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성도들이 시험을 받았던 방법이고, 또 그들은 그것을 견디어 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험 당할 때 이것은 나 혼자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의 깊게 여러분의 순례길을 살펴보십시오. 거기 맨 앞에 주님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그 괴로움의 길을 따라 걸어간 수많은 성도들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의 시험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괴로움은 도무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고통을 잘 모릅니다만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 힘든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과, 천국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받은 시험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한결같이 여러분의 받은 시험 그 이상의 시험을 당했다고 말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생각합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겠지. 신앙이 깊으면 시험은 더 큰 법입니다. 믿음이 성장할 수록 더 큰 시험을 받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시험은 있습니다. 내가 당한 시험이 성도들이 이미 당한 시험이요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시험입니다. 시험 없이 천국 간 성도가 없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시험의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성도들은 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우리가 당한 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두 번째 약속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미쁘사라고 했습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약속을 지킨다, 신실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 신실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중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습니다. 히 12:5에 약속했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요한복음 10:27,28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당해도 우리를 향한 구원 사역은 변함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다시 말하면 시험으로 우리의 구원이 절대로 실패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험으로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도록 주시는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기가 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이다, 어쩌다 남의 사건에 말려 들었다, 참 애매한 노릇이다 -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속된 말로 재수가 없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절대로 우연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그 사건, 그 시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정말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보게됩니다. 저 자신도 답답하고 괴롭기 한이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되고 어느 성경을 보아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잘못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사건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카센타집사의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시험의 높이를 조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위한 훈련이기에 적절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 당하는 시간, 기간, 또 그 시험의 무게 다 간섭하십니다. 시험의 물결이 높아질 때 그것이 무한정 높아지도록 버려두는 것이 아니 라 어느 정도 높이에 오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시험 당하는 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높이에서 시험의 물결도 멈추게 됩니다. 시험의 시기도 간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 나서자 말자 독자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 아닙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 나선지 삼사십 년 아브라함의 신앙이 성숙할 대로 성숙하고,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 이제는 믿음의 깊은 경지에 들어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만큼 어려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시험의 정도와 시기를 하나님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당한 시험 걈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그만큼 내 신앙도 성장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라고 했습니다. 피할 길이라고 하니 옆으로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시험과 함께 길을 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피할 길이 아니라 사실은 시험 속에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앞이 꽉 막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때로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시험 가운데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실로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낙심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나중 보니 거기 하나님 예비하신 길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길이 없었더라며 우리 인생 여정은 이미 다 끝났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피할 길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험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 시험은 앞이 막혀 있는 골짜기가 아닙니다. 시편 23편 말씀대로 시험을 통과하는 골짜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릴 때 하나님 예비하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결론을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결국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능히 너희로 감당하게 하셨느니라" 능히 우리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모님 가정 이야기 = 3자녀가 다 곁길로 갑니다. = 아버지가 쓰러졌습니다. = 재산에 손해가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 이일로 세 아들이 다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한 여 집사님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 괴로움을 겪는데 거기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한번은 여 집사님을 위로합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묻습니다. "목사님 뮈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목사님,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 하고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딜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라고 하는것이었습니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크고 놀라운 축복,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축복을 꼭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시험을 당하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험은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고 높은 뜻이 있고 축복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시고, 우리를 더 큰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쁨으로 시험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 시험을 당당히 맞으십시요. 그리하여 그 시험과 싸워 이겨 하나님 주시는 축복과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을 원합니다. 어려운 일 없이 무사히 지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하루의 소원이요, 한 해의 소원이요, 일생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바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었음으로 하나님의 축복가운데 더 평안한 삶을살고 싶은것이 우리들의 심정이요 기도제목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 실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예수를 믿고 나서 평안한 삶을 사는 것 아닙니다 . 오히려 더 많은 어려움과 더 많은 시련을 당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했더라면 당하지 아니할 어려움을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당하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든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간혹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죄에 대한 징계로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회개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과 시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 평안함과 안락함보다는 시험과 시련을 주실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시험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하면 안일에 빠지고 신앙이 나태해집니다.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시험과 시련을 주신다 는 진리입니다. 미국에서 물고기를 산채로 대륙을 횡단해서 수송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물탱크에 물고기를 가득 넣고는 수송을 하는데, 워낙 땅이 넓으니 수일씩 운송을 해야합니다. 그러다 보니 도착할 때쯤이면 많은 물고기가 죽어버립니다. 또 살아있는 것들도 신선도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아주 싱싱하게 수송해다가 팔았습니다. 며칠 씩 수송을 했는데도 이 사람의 고기는 싱싱했고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재미도 많이 보았습니다. 다른 업자들이 제발 그 비결을 좀 가르쳐달라고 졸랐습니다. 알고 보니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물탱크의 물고기들 틈에 커다란 문어를 한 마리 집어넣는 것이 비결이었 습니다. 문어가 물고기를 잡아 먹을텐데하고 걱정하겠지만 실은 먹어보았댔자 몇 마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리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어가 물고기를 잡아먹으려고 쫒아다니면 물고기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을 칩니다. 그렇게 도망 다니는 것이 운동 효과를 내어, 물고기를 싱싱하게 수송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이와 꼭 같습니다. 어려워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의지합니다. 편안하면 하나님 잘 섬기고 하나님께 늘 감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편안하면 별 수 없이 나태해지고 안일에 빠집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편안할 때는 한결같이 영적으로 나태해졌고 무기력해 졌었습니다. 타락했고 하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때로 시험 혹은 시련을 주십니다. 그 괴로움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2)시험을 주시는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나듯 그리스도인도 신앙생활을 해 가는 가운데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해 여러 가지 섭리를 하십니다. 신령한 말씀의 양식을 주셔서 먹게 하시고 때로는 운동도 시키시고 훈련도 시키십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하나가 시험 혹은 시련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우리를 보다 강하고 보다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시며 동시에 보다 깊은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즈음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 자라난 아이들이 문제입니다. 성년이 되어도 독립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과잉 보호 하시지 않습니다. 나약한 신앙인으로 기르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적절한 시험을 주셔서 훈련시키시고 강하게 만드십니다. 저는 어릴 때 보리밭에서 보리를 밟은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철에 파릇파릇 싹이 나는 보리는 사정없이 발로 밟아버립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 왜 보리를 밟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보리는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립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가 그대로 자라면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가 없습니다. 100알 정도가 고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습니다. 그러니 올라오던 싹이 꺽여집니다. 그 껵여진 싹이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새로 일어날 때는 처음과는 비교가 알 될 정도로 강한 줄기가 됩니다. 발에 밟힘으로 더 많은 이삭을 맺을 수 있는 강한 줄기로 자라게 된다 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합니다. 시련과 고난의 훈련을 통하여 더 강한 사람, 열매 맺는 사람으로 성숙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시험이란 단어를 잠깐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다른 개념이 우리말 성경에는 시험이라는 같은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마귀가 주는 시험으로 템테이션 이라고 합니다. 이 시험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죄를 지어 넘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다른 말로 하면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 사단으로부터 죄 짓도록 유혹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자합니다. 구원 받지 못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2)하나님 주시는 것으로서 이것은 테스트 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함이요, 성숙케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시험은 잘 통과하기만 하면 축복이요 능력이 됩니다. 많은 훈련을 통과할 수록 좋은 군인이 되는 것처럼 많은 시련을 통과할 수록 더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이 이기고 시험의 과정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는 시험이 찾아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런대 시험을 당할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가운데서 갈팡질팡합니다. 이는 시험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의 의미가 무엇이며 우리는 시험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첫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이 사람들이 감당했던 시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험의 보편성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원문을 있는 그대로 옮겨보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당하는 시험이 아닌 시험이 너희에게 임한 것은 없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연애를 하다가 좀 잘못되면 훌쩍훌쩍 울면서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내 아픈 마음은 세상에 아무도 모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르긴 왜 모릅니까? 혼자서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연의 경험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별나게 나만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점점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다 겪는 것을 나도 겪을 뿐입니다. 가끔 해산의 시각을 앞에 둔 임산부가 고민을 합니다. "아리고 이거 아이 낳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아이 낳다가 죽는 수도 있다는데..." 이럴 때에 위로할 수 있는 말이 한 마디가 있습니다. "인구의 절반이 겪는 일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 인구의 절반이 여자요, 세상 모든 여자가 아이 낳습니다.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하나 끼여 있는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시험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갑자기 시험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불의의 사고를 당하듯이 갑자기 시험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한 시험이 올 것을 미리 예고해주시고 준비하도록 해 주셨다면 시험을 견디기가 그래도 쉬웠을 텐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갑자기 시험을 주시는가. 갑자기 시험을 당하는 것이 여러분만 그렇게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얼마나 갑자기 시험을 당했습니까?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최고의 행복의 자리에서 최악의 불행의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시험을 당했고 그 시험을 이겼습니다. 우리가 시험 당하는 그 방법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성도들이 시험을 받았던 방법이고, 또 그들은 그것을 견디어 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험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시험 당할 때 이것은 나 혼자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의 깊게 여러분의 순례길을 살펴보십시오. 거기 맨 앞에 주님의 발자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그 괴로움의 길을 따라 걸어간 수많은 성도들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의 시험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괴로움은 도무지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고통을 잘 모릅니다만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 힘든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과, 천국의 성도들에게 그들이 받은 시험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한결같이 여러분의 받은 시험 그 이상의 시험을 당했다고 말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어린 성도들은 생각합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겠지. 신앙이 깊으면 시험은 더 큰 법입니다. 믿음이 성장할 수록 더 큰 시험을 받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때나 시험은 있습니다. 내가 당한 시험이 성도들이 이미 당한 시험이요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시험입니다. 시험 없이 천국 간 성도가 없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시험의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성도들은 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오늘 우리가 당한 이 시험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두 번째 약속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미쁘사라고 했습니다. 미쁘다라는 말은 "약속을 지킨다, 신실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 신실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중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습니다. 히 12:5에 약속했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요한복음 10:27,28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일을 당해도 우리를 향한 구원 사역은 변함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다시 말하면 시험으로 우리의 구원이 절대로 실패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시험으로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도록 주시는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기가 쉽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건이다, 어쩌다 남의 사건에 말려 들었다, 참 애매한 노릇이다 -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속된 말로 재수가 없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님께는 절대로 우연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그 사건, 그 시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정말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보게됩니다. 저 자신도 답답하고 괴롭기 한이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되고 어느 성경을 보아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잘못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반드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사건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카센타집사의 이야기)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시험의 높이를 조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우리를 위한 훈련이기에 적절한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 당하는 시간, 기간, 또 그 시험의 무게 다 간섭하십니다. 시험의 물결이 높아질 때 그것이 무한정 높아지도록 버려두는 것이 아니 라 어느 정도 높이에 오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시험 당하는 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높이에서 시험의 물결도 멈추게 됩니다. 시험의 시기도 간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 나서자 말자 독자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 아닙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라 나선지 삼사십 년 아브라함의 신앙이 성숙할 대로 성숙하고,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 이제는 믿음의 깊은 경지에 들어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만큼 어려운 시험을 주신 것입니다. 시험의 정도와 시기를 하나님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당한 시험 걈당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그만큼 내 신앙도 성장했음을 아셔야 합니다.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 기억해야 할 것은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라고 했습니다. 피할 길이라고 하니 옆으로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나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시험과 함께 길을 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피할 길이 아니라 사실은 시험 속에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앞이 꽉 막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때로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시험 가운데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실로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낙심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나중 보니 거기 하나님 예비하신 길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길이 없었더라며 우리 인생 여정은 이미 다 끝났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피할 길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험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 시험은 앞이 막혀 있는 골짜기가 아닙니다. 시편 23편 말씀대로 시험을 통과하는 골짜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릴 때 하나님 예비하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결론을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결국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능히 너희로 감당하게 하셨느니라" 능히 우리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모님 가정 이야기 = 3자녀가 다 곁길로 갑니다. = 아버지가 쓰러졌습니다. = 재산에 손해가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 이일로 세 아들이 다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한 여 집사님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 괴로움을 겪는데 거기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한번은 여 집사님을 위로합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묻습니다. "목사님 뮈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목사님,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 하고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딜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라고 하는것이었습니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크고 놀라운 축복,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축복을 꼭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시험을 당하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험은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고 높은 뜻이 있고 축복의 계획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시고, 우리를 더 큰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쁨으로 시험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 시험을 당당히 맞으십시요. 그리하여 그 시험과 싸워 이겨 하나님 주시는 축복과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