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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1;5-27. 사람의 의도대로 되어 지지 않는 일과 사건의 처리. 2023. 3. 26.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지난주에 이어지는 같은 내용이지만 다윗으로부터 시작되고 발생된 일과 사건의 처리입니다. 다윗은 늘 선봉에 섰고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사람입니다. 뒤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고 명령만 내기고 옥상을 거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호의를 베풀고 말만하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해결의 현장에 직접 나섰습니다. 여러분, 수치를 왜 당하게 됩니까? 볼기의 구멍이 왜 났습니까? 왜 곡해를 하게 되고 왜곡이 되었습니까? 진심이 왜 전달되지 못했습니까? 얼마나 다윗도 수치스러웠으면 수염이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라고 했을까요? 왜 전쟁이 일어 날 틈을 줍니까? 왜 암몬이 연합하여 공격을 하고 왜 해가 지나서 이스라엘과 싸웁니까? 다윗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전에 잘 감당했던 그 일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내용과 같은 상대와의 두 번째의 전쟁은 출전을 해서 간단하게 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래서 암몬이 아닌 암몬과 연합군으로 형성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로 부터 조공을 받고 화친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방향에 걸림돌이 아니고 도움이 되는 그런 상대가 되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암몬은 또 다시 이스라엘을 상대로 세 번째의 전쟁을 합니다. 봄이 되면서 전쟁이 재개(再開)되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다윗이 이번에도 왕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물론 군사령관이 전선에서 지휘를 하고 있었지만, 개전(開戰)초기에는 늘 전선에서 병사들과 함께 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의 결과를 잊었습니다. 연합군도 없으니까? 간단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요압과 그의 신복과 이스라엘 군대를 암몬과의 전투에 투입했습니다. 중요한 전쟁 이였습니다. 요압 장군과 그의 신복들이 암몬의 군사를 물리치고 중요 요지 랍바를 애워 쌓습니다. 이 요압장군을 비롯한 600명의 용사는 사실 야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전투는 반드시 다윗이 있었고 또 다윗이 있어야 그 신하들이 용기백배 하게 되고 또 어려운 문제 앞에서 다윗에게 물어 해결했던 공동체이었습니다. 다윗이 있으면 그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사람들이 있으면 항상 다윗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항상 문제를 다윗에게 물었기 때문이고, 다윗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친히 하나님께 묻고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터에는 반드시 다윗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무슨 일인지 세 번째의 전투에 왕궁에 남았습니다. 전쟁이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왕궁에 있었던 다윗은 한가했고, 오랫동안 낮잠을 자고 저녁때에 일어났습니다. 국경엔 긴장이 맴돌고 있었지만 왕궁의 다윗은 긴장 없이 엉뚱한 평안을 누렸습니다. 바로 이때에 아주 사소한 일이 생겼고, 그것은 다윗의 생애와 왕국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으로 비화(飛火)되었습니다. 여러분, 일이란 것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무엇이 되려면 이상하게 딱딱 맞아 떨어지게 됩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한 방향을 향하여 가는 것 같이 되어 집니까? 다윗의 일이 그렇습니다. 전쟁 하는데 왕궁에 남았고 잠을 자고 평안 했습니다. 저녁노을이 비치니 궁궐 옥상을 거닙니다. 그런데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할 만한 일을 다윗이 만납니다. 옥상을 거닐던 다윗이 목욕하는 한 여인을 목격하고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여인에 대하여 호기심이 발동하여 물었습니다. 의도적 이었습니다. 여러분, 일이란 것이 이렇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의 충성스런 장수의 아내이고, 더욱이 그 장수가 지금 암몬과의 전쟁의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그 부하의 가정을 돌보아 주고 지켜주었어야 할 책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호기심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다윗의 생애에 회오리가 치고 이스라엘에 암운이 짙게 드려질 징조이었습니다. 여러분, 일이 잘못 되려면 아주 작은 것에서 발생이 되고 그 것을 하찮게 여기면서 큰 일로 발전을 했습니다. 일은 일을 만들게 되는데 작을 때에 도려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키우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일이 문제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다윗은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밧세바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밧세바의 임신 소식을 듣습니다. 당혹스러웠을 것이고, 난감했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허락된 범위를 넘어 제일 사랑하는 부하의 아내와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 자체가 큰 사건이고 큰일이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잘 수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잘 수습하려는 순서를 세상의 방법으로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람과 세상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을 염두 해 두지 못 했습니다. 순서대로 하면 먼저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랑하는 부하 그것도 생명 바치고 최전선 가운데 맨 앞에서 앞장 서 있는 용병 우리아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렇게 하면 왕의 지위와 백성들에게 받아왔던 신뢰와 존경은 한 순간에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깔끔한 수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먼저 두지 못하고 세상과 사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습을 하지만 자기의 허물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은밀하고 깔끔하게 정리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 일이나 사건은 초기에 수습을 잘 해야 또 다른 일과 사건에 메이지 않게 됩니다. 다윗은 사람과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세상과 사람만 막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현장에 있는 장군 우리아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한참 맡겨진 일을 잘하고 있는 우리아를 오라, 가라 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지금의 전쟁은 지고 이기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성을 잃었습니다. 전쟁에 지더라도 이 것만은 막아야 했습니다. 왕의 명령이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우리아가 궁궐에 옵니다. 앞에 놓인 직무가 있지만 지금까지 자기의 주군으로 모셨던 다윗이기에 그리고 다윗 왕이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실수와 허물이 없었기에 왕의 명을 받들고 왕궁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동침토록 유도합니다. 그 것도 한 번도 아니고 이틀이나 연이어서 그 일을 시도하지만 우직한 우리아는 휴가 중에도 야영중인 동료들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왕궁 문에서 잠을 잡니다. 다윗이 깔끔하게 처리 하려고 했던 것이 다윗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11;6-13.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되 우리아가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하여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이르되 오늘도 여기 있으라.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리라 우리아가 그 날에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이튿날 다윗이 그를 불러서 그로 그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니 저녁때에 그가 나가서 그의 주의 부하들과 더불어 침상에 눕고 그의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니라. 결국 이렇게 자기의 문제를 조용히 덮으려던 다윗의 첫 번째의 시도는 이렇게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아의 마음을 주장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아의 마음을 주장 하셨을 까요? 다윗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습니까? 아니요, 허물 가운데 있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허물을 넘어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허물 가운데서 은혜와 복은 오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은 후에 은혜와 은총과 축복이 옵니다. 시온의 대로는 이렇게 열려 집니다. 여러분, 우리의 잘못을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용서와 용납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런데 이 것으로 끝이 납니까? 다윗의 두 번째 시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너무나 엄청난 계획을 합니다.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이려고 합니다. 14-17.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우리아는 순직했습니다. 나 같으면 요압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 번 읽어 보겠는데 우리아는 다윗의 편지를 요압장군에게 그대로 전달을 했고 결국 다윗의 의도대로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전사를 했습니다. 다윗의 지시대로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뒤로 물러난 요압장군과 용사들 때문에 우리아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렇게 명령을 내린 이유를 모르는 요압 장군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아를 잃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맥락을 몰랐습니다. 왕을 뵙기가 민망해서 바로 연락을 취합니다. 18-21. 요압이 사람을 보내 그 전쟁의 모든 일을 다윗에게 보고할 새 그 전령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전쟁의 모든 일을 네가 왕께 보고하기를 마친 후에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요압이 겁이 났습니다. 사람이 중요한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우리아 장군이 어떤 용사인데? 하실 왕만을 생각했습니다. 왕이 참전하지 않았고 이런 음모를 꾸밀 줄 몰랐습니다. 승리의 방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보고를 어떻게 받습니까? 25절. 다윗이 전령에게 이르되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하니라.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을 당연한 듯이 이야기 합니다.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칼을 이사람 저 사람을 삼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밧세바와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요? 26-27. 우리아의 아내는 그 남편 우리아가 죽었음을 듣고 그의 남편을 위하여 소리를 내어 우니라.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이렇게 일과 사건이 끝이 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일과 사건이 매듭이 되는 것 같았고 깔끔하게 일과 사건이 묻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인데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나요?
1. 사건과 일처리에 대한 기준입니다. 깔끔한 일과 사건의 처리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입니다. 세상과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을 좋아 합니다. 어떤 일이나 사건이 발생이 되면 뒤 끝 없이,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만드는 사람에 대하여 능력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사건과 일의 처리는 곧 그 사람의 성격이요 인품 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모습 또한 깔끔한 사람들을 좋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던 일을 만나고 원치 않는 사건에 휘 말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깨끗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사건을 매듭짓는 사람들을 바라고, 그런 사람들을 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은 하찮아 보이는 사안과 조그만 일과 작은 사건이라도, 깨끗하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반 동안 그 바쁜 와중에서도 예수님은 사람 한분 한 분을, 일 한 가지 한 가지를 섬세하게 챙기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은 깔끔하게 처리를 하셨습니다. 어떤 뜻하지 않았던 일과 사건 앞에서도 세상과 사람들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깔끔하게 처리를 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사람을 세워가는 것 에 있어서도 깔끔하고 깨끗하게 처리를 했습니다. 바리세인과 사두개인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들어가실 때에도 반대하는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논 용어까지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재판과 죽임을 당하는 그 때에도 깔끔했고 깨끗했습니다. 당신과 관계된 모든 것에 있어서 깔끔하게 처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우리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일과 사건 앞에서 깔끔하게 처리되기를 바라는 것과 세상이 바라는 것 사이에는 원론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바라는 깔끔함은 사실을 덮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것을 우리, 신앙인이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깔끔하게 처리되는 것 같지만 하늘과 땅이 알고 하나님이 아는 일을 덮어둡니다. 그러면 묻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나중에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세상은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깔끔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함과 깔끔함입니다. 하나님이 인정 하시는 깔끔함입니다. 이는 허물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잘못이 있고 없고의 아닙니다. 사람은 다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허물과 잘못 앞에서 넘어지고 쓰러 졌을 때 바로 그 순간을 어떻게 처리 하느냐? 가 중요 합니다. 이때 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깔끔함이 요구 됩니다. 그래서 잘못과 허물을 은폐하는 데에 이런 깔끔함이 적용 되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 잘못과 허물과 죄의 처리는 일 처리하듯, 사건처리 하듯 하면 아니 됩니다. 잘못과 허물과 죄의 깨끗함과 깔끔함은 아무리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도 일처럼 깨끗하게 정리 되지 않고, 흔적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면 그 뒷감당은 무서운 고통이 되어 자신과 함께 관계가 된 모든 사람에게 되돌아오는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koramdeo, 하나님 앞에서의 깔끔함과 깨끗함입니다. 이 것을 기억해야 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깔끔함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라고 사람들이 원하는 깔끔함이 아닙니다. 땅이 알고 하늘이 압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사건과 일처리를 모두 마친 다윗에게 하나님은 27절에, 우리아의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밧세바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장례도 치루고 밧세바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그래서 왕궁으로 데려 왔고 아내를 삼았으며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만하면 깔끔하게 처리를 했지요? 첫 번째의 시도는 깔끔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죽이는 자리에 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세상이 하는 그 이상으로 모든 매듭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는 깔끔함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행한 그 모든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사건과 일에 대한 깔끔한 처리가 복을 받는 자리에 있게 하고 은혜와 은총을 덧입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코람데오와 죄악과 허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깔끔함으로 처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어떻게 삶을 규정지어야 하는가? 입니다. 한마디로 액션 (ACTION), 행동입니다. 여러분,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unction 하면 action 하라. 응답이 없고 감동이 없으면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응답이 없었습니다. 행동을 해서 응답의 확실한 길을 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세상과 사람들이 하는 방법과 수단으로 행동을 했습니다. 아군과 적군의 전쟁터에서 궁으로 불러들이고 은총을 베푸는 척을 했습니다. 말 안 듣는다고 전쟁터로 우리아를 몰아 붙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없는 곳에 홀로 있게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감동과 감격이 오면 행동하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찬양하고 싶으면 찬양하고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으면 액션하면 됩니다. 감동이 오면 feel이 시키는 대로 하고 복 받을 것 같으면 복 받을 행동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진을 위한 발걸음 속에서 깔끔하게 사건과 일을 처리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의 감동대로 그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결과는 다윗이 행한 그 모든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합니다. 왜 악하게 되었을까요? 감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데 보암 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게 할 자기의 감동에 도취되어서 행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자신의 감동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는다는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복을 받고 약속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행동이어야 합니까? 행동을 규정짓는 액션의 이니셜이 너무나 좋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1. A - all for God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중심입니다. 여러분, 사는 것도 하나님 중심이고 문제 해결도 하나님 중심이고, 깔끔하게 처리함도 하나님중심이고 잘못과 허물에 대한 고백도 하나님 중심입니다. 신앙인의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내 중심이 아닙니다. 내가 깔끔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싸인의 대답을 들어야 깔끔함이 되고 깨끗함이 됩니다. 삶의 모든 것 앞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면 실패와 실수가 없습니다. 잘못을 하고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용서 하시면 구원과 축복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이 키포인트 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이고 다음이 나입니다. 그리고 이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이든지 내가 듣고 보고 느끼는 감동이든지 감동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감동자체가 나쁜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문제는 모든 감동에 하나님 중심으로 반응 하느냐? 인간 중심으로 반응 하느냐? 하나님 중심으로 행동 하느냐? 인간중심으로 행동 하느냐? Action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고 이것이 다시 세움을 입는 가장 빠른 방법이며 비결입니다.
2-2. C-collaboration 상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같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물질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고, 힘도 마찬 가지입니다. 받았으면 나누는 것입니다. 전4;9-12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 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니라. 상 받는 것도 함께 상생입니다. 위기 때에 함께하고 상생하면 쉽게 일어납니다. 평안과 따뜻함도 상생이고 승리의 쟁취도 함께입니다. 우리아와 다윗은 상생이었습니다. 용사와 왕과 백성은 상생입니다. 하나는 우하고 하나는 좌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살고 이웃도 사는 콜라보 레이션 입니다. 모든 것에 co입니다. 그래서 시133;1-3.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선하고 아름다운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과 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상생이 시온의 산과 들에 내리는 헐몬산의 이슬과 같은 복입니다. 함께 연합함과 상생함이 아론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축복의 기름입니다. 상생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2-3. T-trust, 신뢰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용서해주고 복 주실 것을 신뢰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이웃을 신뢰하고 나를 신뢰 하는 것입니다. 목사를 신뢰하고 성도를 신뢰 하는 것 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믿음이 있고, 행복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신뢰는 믿음의 기초 단계입니다. 신뢰가 되어야 믿음의 싹이 생깁니다. 신뢰가 없으면 관계는 무너집니다. 용서하고 용납 하실 것을 신뢰하고 믿고 회개 하면 됩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람을 책임 지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책임지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고 인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포를 풀면서 신나게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1차, 2차, 3차를 갔습니다. 그런데 체질적으로 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육체를 염려해서 누가 책임져 줄 거야? 친구들이 동시에 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들이 책임져 줄게. 다 끝나고 아침에 깨어보니 노숙하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그 위에 백지 한 장이 있었는데 밟지 마세요. 내버려 두세요. 친구들이 책임진다는 것이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라고 모든 분들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상처 받기 싫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고 믿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뢰하고 믿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의 자리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고 영원히 용납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상처받고 상처 받으면서 또 용서하는데 그 중심에 내가 나를 신뢰하고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2-4. I - innovation, 창의적 혁신과 창의적 아이디어입니다. 목회를 해도 마찬가지이고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혁신이 없으면 삶의 현장은 정체하거나 퇴보 합니다. 시대가 급속도로 변했습니다. 여기에 최소한의 같은 보조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방법과 수단은 얼마든지 혁신이 되어야 합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찾는 것이 창의적인 아아디어입니다. 다윗이 지금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창의적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꼬였고, 악수를 두었습니다. 결국은 모든 매듭을 지었지만 하나님은 악한 일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2-5. O - ownership, 주인의식입니다. 주인 의식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고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주님이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그래서 나는 이시대의 주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주인 되었다는 주인 의식입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부평초가 아니고 나그네가 아니고,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비전교회의 주인입니다. 주님이 머리되시고 여러분이 몸입니다. 여러분, 내 인생을 내가 먼발치에서 구경합니까? 구경꾼이 아닙니다. 내 인생을 주님 안에서 내가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은 주님이시고 그 주님 안에서 내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삶을 사는 것입니다.
2-6. N - now 언제나 지금입니다. 나중이 아니고 내일이 아니고 행동은 지금 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그 날의 일은 그날로 족 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금 즉시 실행에 옮기라는 것입니다. 잘못의 고백도 지금입니다. 성공과 축복도 지금 실행에 옮겨야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action star를 원하십니다. 그런 복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언제 어디서나 정직이 최상의 방책입니다. 여러분, 잘못 했으면 사과하고 회개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침 밷지 않고, 정직한 사람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다윗은 정직하지 못했고 정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고 일의 전모(全貌)가 드러나면 지탄받을 것이기 때문이고, 사후 수습은 어려워질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위와 명예는 흔들리고 박탈당할 수도 있고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되는 것이 더 은혜가 되고 더 나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드러나고 까발려지더라도 회복의 여지가 있지만 은폐될 경우에는 악성 종양이 되어 계속 통증을 느끼다가 결국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포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 다른 일을 꾸며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의 의도대로 일과 사건이 매듭지어 지지 않고 더욱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아를 전쟁의 최 일선에, 그 것도 죽는 자리에 일부러 보내서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용서받을 시간을 놓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인 교사의 죄까지 범하게 되고,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의 허물은 아무리 사람이 덮으려 해도 덮어지지 않습니다. 만의 하나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의롭고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허물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회개하고 자복하더라도 그 허물의 값을 치루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된 자리에 올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건과 일처리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더 손을 대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허물과 잘못의 처리는 회개와 애통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정직이 최선입니다. 사11;2절.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는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시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와 방패이시라.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세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 여러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처리하지 않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정직하냐? 아니냐? 이것으로 판단을 하시고 기준을 삼습니다. 정직한 사람에게 땅을 주시고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물과 일을 잘 분별해서 깔끔하게 처리하시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하게 행하시는 그래서 약속의 유업을 계속 이어가시고 땅으로 복을 받으시고 더 좋은 것으로 은총을 덧입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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