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케시의 첫 인상은 '부조리'였다. 나는 내가 택시 기사에게 바가지를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기차역에서 내리니 내게 황급히 다가온 택시 기사에게 트렁크를 건넨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가려는 리아드 주소를 말하자 그곳은 엄청 먼 곳이라며 내게 100디램(약 15,000원)을 요구했는데 알고보니 택시로 10분 남짓의 거리였다. 80디램으로 깎아서 나름 안심하고 있던 나는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으로 택시에서 내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사가 근처에서 서성이던 청년과 뭔가 대화를 하더니 그를 따라 가라고 하는데, 약 500m 정도를 안내하고는 다시 그녀석이 100디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는 못준다고 싸우다가 결국 40디램밖에 못준다고 버텼다. 돈을 받아든 청년은 내게 싸늘한 표정으로 '땡큐'라고 하더니 뒤돌아서 가버렸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아랍 특유의 두꺼운 나무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청년 한 명이 미소를 띄며 나왔고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숙박비가 거슬렸다. 이비스 호텔에서 묵을때 틀림없이 택스가 1유로가 될까말까였는데, 택스로 무려 4유로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무슨 택스가 이렇게 많냐고 하자, 더듬더듬 원래 그렇다고 말하는데 따지려다가 말았다. 베네레 닷컴에서 소개할 때 깨끗한 객실과 스마트하고 친절한 직원이 있는 리아드라고 하였는데 어느 것 하나도 충족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방도 지나치게 소박했다. 마라케시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속았다는 생각만 드니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어서 마라케시 관광을 마치고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다. 나는 직원에게서 지도 한 장을 얻어 가려다가 돈을 내라기에 그냥 됐다며 길을 나섰다.
리아드의 두꺼운 문을 열고 나서자 다시 마라케시는 별천지였다. 두꺼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좁은 골목길로 스쿠터가 쉴새없이 다니는데 그 소음이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매연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스쿠터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골목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옜다. 거리는 스쿠터와 노점상과 지나는 행인들로 뒤엉켜 있었다. 뒷덜미를 파고 드는 묘한 쾌감이 들었다. 마치 내가 미지의 세계로 툭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움켜 쥐고 마라케시 속으로 서서히 걸어들어갔다.
<모로코에 정말 많은 현대차들. 차례로 베르나, 산타페, 스타렉스. 베르나는 택시로 이용되고 있었다. 스타렉스는 관광객 수송용으로. 홍하고 헤어진 이후로 부쩍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 것일까? 달리는 차에게서 위안을 많이 받았다. >
난 쫓기고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페스에서 마라케시로 왔으니 또 좋은 여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감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사실 페스에서 출발할 때 홍을 만나고서 기대를 많이 했었다. 더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죽으란 법은 없구나, 하고 스스로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석이 갑작스레 아플줄이야. 지나치게 아쉬워할 필요도 없었고, 왜 아프고 난리냐고 따질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인연이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너는 혼자 떠나 왔잖아.
쿠투비야 모스크의 모습.
하지만 있으려다가 갑자기 사라진 동행에 대한 결핍일까. 나는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랬다.
저만치에 수상한 청년들이 몰려있으면 지나가기가 부담스러워지고, 한 청년에게 '제마 엘프나 광장'이 어디있는지를 물었는데 모른다고 하자 맥이 풀렸다(제마 엘프나는 마라케시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이것은 마치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광장이 어디있냐고 묻는 것과 같은 정도였으니 그 녀석의 무성의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쿠투비야 모스크의 모습.
원거리에서 바라본 모습도 일품이다.
조금더 와일드해져도 괜찮을까? 아니야, 그래도 여기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해.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하지만 이건 너무 수박 겉핥기 식인걸. 그렇다고 갑자기 모로코에서 없는 친구를 어떻게 만드나?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재보아도 답이 안나오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은 홀로 떠나온 내게 기인한 것이었으므로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사항들이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안전하게' 여행을 완수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나는 그렇게 나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다른 행인에게 물어서 찾아간 제마 엘프나 광장. 너른 광장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서인지 바닥이 매끈매끈할 정도였다.
바닥에 저런 병들을 늘어놓고 뭔가 게임을 하는 모양인데, 우리나라 유원지에서 총쏴서 인형 떨어뜨리기하는 게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광장에 오기전에 급히 '맛없는 햄버거'로 저녁을 떼운 데다가 그들의 호객행위를 견딜 재간도 없어서 그저 멀찍이 서서 사진이나 찍는 도리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모로코에 온 이후로 입맛을 급격히 잃어 아침은 과일, 저녁은 컵라면으로 떼우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내가 좋아하는 시장 사진. 저 말린 과일들도 참 맛이 있었을거 같은데... 다가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있는 것이 사진에 다 보인다. >
<저기가서 점원이 먹어보라고 건네주는 과일을 먹으면 끝장이다. 사야된다. >
정말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 제마 엘프나 광장이었다. 정말 맘만 먹으면 밤새면서 놀 수 있는 곳일테지만, 한가지 요소가 빠져있었다. 친구가 없기에 그 모든 것에 다가갈 수 없었다. 나에게 마라케시의 '제마 엘프나'는 단지 30분이면 둘러보고 끝낼 수 있는 '시끄러운' 장소에 불과했다.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던 때에 어둑한 카페에 둘러앉아있는 사내들이 눈에 띄었다. 다들 앞에 음료 한잔씩을 주문해 놓고 홀로 앉아 티비를 시청하고 있었다. 묘한 동병상련의 감정이 들었던 것일까?
<옥상에 위치한 숙소에서 바라본 쿠투비야 모스크, 그리고 여전히 연기가 나는 곳이 제마 엘프나 광장이다. 웬 연기가 저렇게 나나 하고 당시에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광장에서 음식 만들때 나는 연기가 사진에 찍힌 것이었다. >
<이른 아침의 마라케시. 밤의 마라케시보다 훨씬 상쾌하고 나를 기분좋게 만들어 주었다.>
사실 전날밤 12시가 가까워오는데도 스쿠터의 굉음이 줄어들지 않아 방안에 앉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바깥의 쪽문까지 닫고 보니 의외로 방음이 되어서 비교적 잘 잘 수 있었다. 아침을 1층 아니면 옥상 어디서 먹겠냐고 어제 그 청년이 물어서 '에라, 고생이나 좀 해라'하는 심정으로 옥상으로 가져오라고 시켰다. 가져온 바게뜨와 딸기잼, 그리고 커피가 참 별로였다. 그냥 형식적으로 한 조각 먹고 나서 그대로 짐을 챙겨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모로코 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스쿠터.
전날 내가 바가지를 썼던 것과 같은 종류의 그랑택시. 구형 벤츠 택시는 모두 그랑택시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모로코는 중고 벤츠들의 집합소였다. 이 곳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인기없는 중고차는 택시로 화려하게 부활하여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표를 끊으니 40분 정도 기다리라고 한다. 멀뚱하게 서 있다가 한 사내가 dslr 가방을 들고 있는데 그 모양이 신기하여 말이나 붙여보자 하는 심정으로 다가가 '카메라 가방 이뿌네요.' 그랬더니 카메라 가방 아니고 렌즈 가방이라며 렌즈를 꺼내 보여준다. 나도 질세라 '아, 그러냐.'하며 나의 니콘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었다. 카메라 가지고 몇 마디 하다가 행선지를 물으니 나와 같은 '에싸위라'라고 한다. 그는 이태리에서 온 사나이 '니콜라'였다. 그 역시 홀로 모로코를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같이 버스타고 가며 말벗이나 하자고 했더니 좋다고 한다.
갑자기 나의 여행이 달라졌다. 여행이 더욱 흥미로워졌다. 도대체 이 친구와 같이 다니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버스가 출발했다.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첫댓글 결국 마케라시에서는 그들에게 돈만 잔뜩 뜯기는 사태가~~원래그런건지?아님 외국인에게만 그런식으로 대하는걸까요??
여행에서 혼자가 편할때도 있지만 함께 그여행지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즐기려면 동행이 절실하게 필요하더라구요..
갸들은 거기 서있다가 하나 걸리면 하루 벌어먹는 시스템인듯요. --;
전 워낙 겁이 많아서 절대 혼자서는 여행 못가는 체질이라 소년님의 나홀로 모로코 여행을 존경해왔는데 역시 이런 어려움이 있었군요. 그래도 저 모스크도 정말 아름답고 야시장도 흥미진진해서 다녀오신 보람이 있을듯 ^^ 이태리 친구와의 다음 여정도 기대됩니다~
앗, 오늘은 마일드한 댓글을... 저도 지금은 조금 후회하고 있어요. 좀더 험블하게 막 다녔어야 하는거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이태리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혼자 마구 돌아다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또 동양인은 다르려나.. 쩝..
에고 정말 코 베어가는 마라케시군요~
이리 덤태기를 씌우면 위축될 수 밖에 없을 거 같아요~
매력적인 도시인거는 분명하지만 가기는 무섭네요~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하루는 너무 외롭고
동행이 있었음 좋겠단 날이 꼭 었더라구요~
웬만한 여자 아니고서는 혼자 다니기는 조금 버거울듯 하네요. ^^;
여행내내 위축된 모습 늠 안습... ㅠㅠ;; 리아드에서 고용한 개인가이드를 썼던 때가 그리웠겠어요 (역시 돈이 좋은 것... ㅠㅠ;;)
택시를 탓으면 목적지 앞에 내려줘야지 왠 500m 전방에서 내려주고 길잡이를 세운답니까, 참내...ㅠㅠ
차라리 지도를 하나 샀으면 마라케시버전 서울광장도 못찾는 사태는 없었을텐데요 쩝~~
니콜라를 만나 든든하고 활기찬 여행이 되었기를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