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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四十八
임형수(林亨秀) 묘갈명(墓碣銘) - 김수항(金壽恒)
우리 조정에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禍)는 을사년(乙巳年, 1545, 명종 즉위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는데, 을사 사화(乙巳士禍)의 제현(諸賢) 중에서 오직 금호(錦湖) 임공(林公)이 당한 화가 가장 혹심하였다. 대체로 공의 재주가 가장 기특하였고 명성이 가장 성대하였고 특이한 논의가 가장 준열(峻烈)하였는데, 이 때문에 누구보다도 가장 뭇 간사한 자들이 원수처럼 미워하는 바가 되었다고 한다.
공의 휘(諱)는 형수(亨秀)이고, 자(字)는 사수(士遂)이며, 금호(錦湖)는 그의 호(號)이다. 임씨(林氏)의 선계(先系)는 평택(平澤)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낸 임희(林禧)가 비조(鼻祖)이고, 그 후대에 충정공(忠定公) 임언비(林彦備)와 충간공(忠簡公) 임성미(林成味)가 대대로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수군 우후(水軍虞候)를 지낸 임종직(林從直)과 첨정(僉正)을 지낸 임만근(林萬根)과 북병사(北兵使)를 지낸 임준(林畯)이 곧 공의 증조(曾祖)ㆍ조고(祖考)ㆍ선고(先考)이다.
병사공(兵使公, 임준)이 현감(縣監)을 지낸 안동 권씨(安東權氏) 권석(權錫)의 딸을 아내로 맞아 홍치(弘治) 갑술년(甲戌年, 1514년 중종 9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상이 호매(豪邁)하여 범상치 않았으며, 18세 때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2세 때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즉시 천거를 받아 사관(史館)에 들어갔다.
인종(仁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에 요속(僚屬)들을 정밀하게 뽑았는데, 이때 공은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서 인종의 보살핌과 대우를 극진하게 받았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선발되어 호당(湖堂)에서 사가 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이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전직되었다.
명(明)나라의 조사(詔使)인 화찰(華察)과 설연총(薛延寵)이 우리나라에 오게 되자,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 빈사(儐使)가 되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자벽(自辟)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북쪽 변경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무리(武吏, 무관 출신의 수령을 말함)에게 시달리고 있으니, 마땅히 시종신(侍從臣)을 골라 수령(守令)으로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慰撫)하는 책임을 맡겨야 된다.”고 하여, 마침내 공을 회령 판관(會寧判官)에 제수하였다.
그러자 언로(言路, 사간원과 사헌부를 말함)가 공을 그대로 유임시킬 것을 요청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재주가 있으니, 내가 변방 고을에 시험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윽고 공은 고을에 부임하여 마음을 다하여 쇠퇴한 시책들을 가려내고 깨끗하게 다스려 조잔하고 고달픈 주민들을 소생시키자, 변경의 오랑캐들도 또한 공의 덕을 칭송하여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하면서 반드시 공을 “대야(大爺, 어르신이라는 말임)”라고 일컬었다. 뒤에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러 가는 사신(使臣)이 있게 되었는데 야인(野人)들이 우리나라의 사신을 만나 얘기를 하다가 공이 살해당한 일을 언급하자, 탄식하고 애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공은 다시 조정에 들어와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고 곧이어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으며, 누차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와 응교(應敎)와 전한(典翰)에 전직(轉職)되었다.
갑진년(甲辰年, 1544, 인종 즉위년)에 중종이 승하(昇遐)하고 인종(仁宗)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공은 이때 임금의 명을 받들어 대행왕(大行王)의 지문(誌文)과 시책(諡冊)을 지어서 올렸다. 그 이듬해에 (을사년에) 인종이 또 승하하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는데, 공은 군기시 정(軍器寺正)으로서 도감 낭청(都監郎廳)을 맡아 산릉(山陵) 만드는 일을 살피었고, 얼마 후에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었다가 한 해를 넘긴 뒤에 파직되어 돌아오니, 섬의 주민 모두가 공의 은혜를 고마워하여 서로 공이 타고 가는 수레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당시 모후[母后, 문정 왕후(文定王后)]가 임조(臨朝, 조정에 임하여 국정을 처리하는 일을 말함)하였는데, 간신(奸臣) 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기회를 틈타 정권을 훔쳐 쥐고서 사류(士類)들을 대대적으로 해롭게 하다가 정미년(丁未年, 1547, 명종 2)에 이르러 정언각(鄭彦慤)이 벽서(壁書)를 올리어 옥사(獄事)를 일으킴으로써 사류들을 일망 타진(一網打盡)할 계책을 꾸미는 바람에 일시(一時)의 명류(名流)들이 그들의 계략에서 벗어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정언각은 평소에 공의 강직한 점을 시기(猜忌)하여 진복창(陳復昌)과 힘을 합치어 윤원형에게 들러붙어서 공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하였다. 공을 처음에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으나, 정언각이 또 유독 가죄(加罪)하기를 청하니 염중(簾中, 발을 친 안. 곧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말함)에서 특명으로 공을 사사(賜死)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공은 바야흐로 나주(羅州)의 이사(里舍)에 거처하고 있다가 후명(後命, 죄인에게 사약을 내림)을 듣고서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게 집에 들어가 두 존인(尊人, 부모)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어린 아들을 불러다가 뒷일을 잘 처리하도록 타일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느긋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는 평일(平日)과 같았으며, 마침내 사약(賜藥)을 마시고 죽으니 그해(1547년 명종 2) 9월이었고, 나이는 겨우 34세였다.
그 일을 들은 자들이 공을 아는 사람이건 알지 못하는 사람이건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선조(宣祖) 초(1567년 선조 즉위년)에 이르러 맨 먼저 을사년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설원(雪冤)하였는데, 이때 공도 또한 예전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공은 사람됨이 활달하고 준수(俊秀)하여 풍의(風儀)가 멋지고 기개(氣槪)를 숭상하였으며, 소탈하고 시원스럽게 행동하여 자잘한 관습이나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 높고 뛰어난 행동과 보기 드문 식견은 곡유(曲儒, 곡학 아세(曲學阿世)하는 유학자를 말함)가 감히 가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으니, 목숨을 끊을 무렵의 한 가지 절조(節操)만 살피어도 알 수가 있다.
이미 일찌감치 사한(詞翰)으로써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또 궁마(弓馬)에도 솜씨가 있어서 재능이 눈에 띄게 드러났으며, 어떤 일에 시험을 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공을 국기(國器, 나라의 큰 일을 맡길 만한 인물)로 추중(推重)하였다.
또 담론(談論)이 비범하고 참신하였으며 해학(諧謔)에도 뛰어나서 남들로 하여금 솔깃하여 귀를 기울여서 듣게 하였다. 그러나 못된 자를 미워하고 간사한 자를 배척하는 일에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으며 그 말씨가 늠름하여 뼛속까지 사무칠 정도였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禍)를 당하게 된 것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이 공과 기미(氣味)가 똑같지 않았으나 공을 허여(許與)하고 사귄 계분(契分)이 유난히 깊었으며, 매양 공을 ‘기남자(奇男子)’라고 칭찬하였고, 만년(晩年)에 이르러 번번이 공을 그리워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사수(士遂, 임형수)와 함께 마주앉아 얘기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김 선생(金先生)도 또한 공이 원통하게 죽은 일을 슬퍼하여 단가(短歌, 시조(時調)를 말함)를 지었는데 공을 동량(棟樑)의 재목에 비유하였으니, 이에 나아가 공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공은 문장(文章)이 준일(俊逸)하여 그 사람 됨됨이와 같았는데, 저술한 것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없어지고 유집(遺集) 1권(卷)만이 세상에 전해진다.
아! 하늘은 이미 공에게 탁절(卓絶)하고 기이한 재능을 주어놓고서는 도리어 또 저 물여우처럼 못된 자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여 그들이 공을 죽여서 없애는데도 그대로 놔둠으로써 공의 재능을 끝까지 모두 쓸 수 없게 하였으니, 아! 정말 얄궂은 노릇이다.
그러나 공론(公論)이 정해지는 것은 백년이 지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공의 청명(淸名)과 직절(直節)이 간책(簡策, 사서(史書)를 말함. 간책(簡冊))에 환하게 드러나 시일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성대해지니, 어찌 공에게 유감(遺憾)이 될 수 있겠는가?
공의 배필(配匹)은 정씨(鄭氏)로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인 임구(林拘)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후사(後嗣)가 없으며, 맏딸은 이극성(李克成)에게 출가하고, 작은 딸은 유경진(柳景進)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외손(外孫)으로서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낸 이경운(李卿雲)은 이씨(李氏, 이극성) 소생이고, 유완(柳捖)ㆍ유탁(柳琢)과 참봉(參奉) 유평(柳玶)은 유씨(柳氏, 유경진) 소생이다.
유씨가 실지로 공의 제사를 모시는 사람이고, 공의 시문(詩文)을 수습(收拾)한 사람은 유평(柳玶)이다. 공의 외후손(外後孫)들은 매우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장지(葬地)는 나주성(羅州城) 서쪽의 흥룡동(興龍洞)에 있는 선영(先塋) 곁에 있는데 묘도(墓道)에 오래도록 비석이 없었다. 지금 호남 병사(湖南兵使)로 있는 민섬(閔暹)도 또한 공의 미생(彌甥, 누이의 손자)인데 개연(慨然)한 감정을 흥기하여 공장(工匠)을 모아 빗돌을 만들었고, 유씨의 손자(孫子)인 참봉(參奉) 유응수(柳應壽)가 천리나 되는 먼 곳으로부터 나를 찾아와 글을 지어달라고 매우 부지런히 부탁을 하였다.
나는 공에 대하여 내가 오랜 뒤에 태어나서 만나볼 수 없는 아쉬움을 품었고, 일찍이 유응수의 부탁으로 공의 유사(遺事)를 찬차(纂次, 편집 자료를 모아 순서를 매김)하여 유집(遺集) 안에 덧붙였으므로, 지금 이 부탁에 대해서도 또한 사양하지 않고 명(銘)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저 못된 자들은 누구이길래 어진 사람을 죽이고도 후련하게 여겼을까?
복(福)이 눈초리를 채우지도 못한 채 그 뼈가 이미 가루가 되었으니,
그 자들의 무덤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냄새나고 더럽다고 침을 뱉네.
이 사람이 묻힌 언덕은 아름다운 명성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아서,
영특한 풍도(風度)와 시원스러운 기개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니,
그 누가 이곳을 지나면서 공경하지 않겠으며 그 누가 눈물을 뿌리지 않으랴?
나의 붓이 도끼를 대신하여 간사한 귀신들을 경고(警告)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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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林亨秀 墓碣銘[金壽恒]
我朝士林之禍, 極於乙巳。 而乙巳諸賢, 惟錦湖林公受禍最酷。 蓋公才最奇, 名最盛, 持論最峻, 以故最爲群姦所仇嫉云。 公諱亨秀, 字士遂, 錦湖, 其號也。 林氏出平澤, 以高麗領三司事禧爲鼻祖。 其後有忠定公彦脩、忠簡公成味世爲名臣。 水軍虞候從直、僉正萬根、北兵使畯, 寔公曾祖、祖、考也。 兵使公娶縣監安東權錫之女, 以正德甲戌生公。
幼豪邁不凡。 十八, 擧進士。 二十二, 擢大科, 卽薦入史館。 仁宗在東宮, 妙簡僚屬, 公爲侍講院說書, 甚被眷遇。 選授弘文館修撰, 賜暇湖堂, 遷兵曹佐郞。 詔使華察、薛廷寵來, 蘇陽谷世讓爲儐使, 辟公從事。 朝議以北邊饑荒, 民困於武吏, 宜擇遣從臣, 以責撫摩。 遂除公會寧判官, 言路請留之, 中廟不許曰: “此人有文武才, 予欲試邊郡。” 公至則竱心爬櫛, 凋瘵以蘇, 蕃胡輩亦頌德歸化, 必曰“大爺”。 後有進貢野人, 遇我國使臣, 語及公殺死, 嗟惜不已云。
入爲吏曹佐郞, 陞正郞, 屢遷司憲府掌令、司諫院司諫、議政府舍人、弘文館校理・應敎・典翰。 甲辰, 中廟昇遐, 仁宗嗣位, 公承命製進大行誌文及諡冊。 明年, 仁宗又上賓, 時事一變。 公以軍器寺正爲都監郞, 視作山陵。 俄出爲濟州牧使, 踰年罷歸, 一島懷其惠, 相與攀轅涕泣。 時母后臨朝, 姦臣元衡輩乘機盜秉, 大鏺士類。 至丁未, 鄭彦慤上壁書起獄, 爲網打計, 一時名流無得脫。 彦慤素忌公勁直, 與陳復昌合勢蝨附元衡, 所以擠公死者, 無遺力。 公始命絶島安置, 彦慤又獨啓請加罪, 簾中特命賜死。 公方居羅州里舍, 聞後命, 請金吾郞, 入辭二尊人, 呼幼子敎戒處置後事, 辭氣陽陽如平日。 遂就死, 是年九月也, 年僅三十四。 聞者識與不識莫不痛惜。 後二十年, 而爲
宣廟初元, 首雪乙巳誣枉, 公亦復舊官。
公爲人倜儻俊偉, 美風儀尙氣槪。 疏宕自喜, 不拘拘小節。 然其卓行曠識, 非曲儒所敢幾, 觀於臨命一節, 可知已。 旣早以詞翰鳴世, 又長於弓馬, 才猷英發, 靡試不宜, 當世推爲國器。 談論超爽, 善於諧謔, 使人灑然傾聽。 至其嫉惡斥邪, 無少顧避, 其言凜凜刺骨, 終以是賈禍。
退溪李先生與公氣味不同, 而契許特深, 每稱“奇男子”。 至晩年輒思之曰: “安得與士遂相對乎?” 金河西先生亦傷公冤死, 作短歌, 以棟梁材譬之, 卽此而可以知公矣。 公文章俊逸如其人, 所著散軼, 有遺集一卷行于世。 嗚呼! 天旣畀公以絶異之才, 乃又生彼鬼蜮, 一任其斬伐, 使不得究其用, 吁其異矣! 然公論之定, 不待百年, 其淸名直節, 著在簡策, 愈久而彌盛, 烏足爲公憾哉!
公之配鄭氏, 有一男二女: 男曰枸, 縣監, 無嗣。 女長適李克成, 次適柳景進。 外孫內資正卿雲, 李之出; 琬, 琢, 參奉玶, 柳之出。 柳實主公祀, 收拾公詩文者, 玶也。 外裔甚蕃, 不盡記。
公葬在羅州城西興龍洞先兆之側, 墓道久闕顯刻。 今湖南兵使閔暹, 亦公彌甥也, 慨然興感, 爲鳩工治石。 柳氏孫參奉應壽走千里求余文甚勤。 余於公有曠世之感, 嘗以應壽之託, 纂次公遺事, 以附集中矣。 今亦不辭而爲之銘。 銘曰:
彼何人斯, 僇賢自快? 福不盈眥, 其骨已碎。 有過其墓, 唾其臭穢。 孰與斯丘? 芬芳未沬。 英風爽氣, 颯乎如在。 其誰不式, 而不涕灑? 我筆代鉞, 以警姦鬼。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