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익선동한옥마을-운현궁-수운회관
-함께한 사람들...똑소리 밀레 별사탕 사즐 언제나나는 요한 첼시
첼로 팽이 푸른수풀 황토비비(존칭 생략 가나다 순)
종묘는...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등재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말하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태묘는 태조의 묘(廟)
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 : 종묘의 神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종묘 즉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
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해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영녕전은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正中)에 추존조사왕(追尊祖四王)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 제도(昭穆制度 :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시는 제도)라 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 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 사직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
는 송경(松京 : 松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현재의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역사문화 해설사의 안내로 우리가 몰랐던 종묘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 앞으로 2년 후 완공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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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정문 앞 공원의 월남 이상재 동상.
이상재(李商在, 1850년 10월 26일 ~ 1927년 3월 29일)는 대한제국 의정부 총무국장 직책을 지낸 정치가이다.
충청남도 서천군(태어날 당시에는 한산군)출신으로 고려 시대 학자 겸 정치가 이색의 후손이다. 조선후기,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개화파 운동가였으며, 일제강점기 조선 시대의 교육자, 청년운동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자는 계호(季皓), 아호는 월남(月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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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선동 한옥마을 골목의 멋집 할머니국수집.
10여분 대기하다가 별관에서 점심식사.
▲ 커피숍에서 남자 넷의 사다리 타기. 영예의1등(?)을 차지했다.20,000원이 일등 ㅠㅠ
오랜만의 사다리 타기여서 인지 현기증이... 후유증이 아주 오래 갈 듯.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오진암 터. 현재는 모 호텔이 들어섰음.
20여년전 남북조절위원회가 열렸던 곳이다. 이후락과 북한 박성철이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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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가 바로가기 | 종로 익선동 지켜낸 '주택청부업자' 독립운동가 아시나요 -
▲ 올 때 마다 변하는 익선한옥마을 골목길.
일제시대 주택업자인 정세권에 의해 조성된 한옥마을이였으나...지금은 이곳 골목길은 젊은이들의 뷰 포인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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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사적 제257호.
고종의 등극으로 대원군이 된 이하응은 사가를 증축하여 운현궁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대원군은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등 개혁사업을 추진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는 이 궁에서 납치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
가기도 했다.
당시 운현궁에는 창덕궁과 가깝게 왕래할 수 있는 임금 전용의 경근문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이 있었고,
담장 안에는 아재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이 있었으며, 선조인 은신군과 남연군의 사당과 영화루도 있었다.
현재는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궁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으며, 전 동양방송(TBC) 방송국에도 일부를 넘겨주어
대원군이 즐겨쓰던 아재당이 헐려 나가, 지금은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이노당·노락당 만이 남아 있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사로 쓰이는 양옥집은 1910년 이후 대원군의 손자 준용의 거처였으며,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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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회관의 총무부장이 자청해서 수운회관과 독립운동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 역사문화 나들이에 함께하신 님들, 혹시 과부하 상태는 아니겠지여??
다음 역사문화도보에서 반갑게 뵈옵기를.../이같또로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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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로 미술 전시장
▲ 인사동 모 갤러리를 찾았다.
모녀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안내 데스크에는 작품 설명을 하는 분의 부군이 앉아 있다.
설명을 하는 분은 북한사의 족두리봉과 인수봉이 주제로 작품을 그렸다. 외국의 명산도 다녀 왔다고 한다.
그만의 기법으로 그린 인수봉이 눈길을 모았다.
첫댓글 종묘역사문화도보를 통해 우리의역사를 다시금 공부하게 해주시고 자세한 후기와 사진까지 뿌듯하고 좋은추억의 하루를 선사해주신 로따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보며 조상들의 지혜를 느끼곤 하지요.
그래서도 역사문화 탐방은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구요.
역사 도보를 마련해 주신 로따님 감사합니다.
잠자고 있던 머리의 뚜껑을 열어 주시어 더욱 감사합니다.
뇌를 회전 시키여 역사속에 빠져 드는 느낌도 참으로 좋았답니다.
기억 창고 속에 있던것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아 공부느 지속적으로
해야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익한 도보길이었습니다.
함께한 길벗님들 모두 진지하게 참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머리 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실감하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온고지신은 귀한 감성이기도 하구요.
로따님 역사 탐방 후기에 사진과 자세한 부연 설명은 어제 다녀왔던 길을 되짚어 보는 기쁨을 주셨네요.~
열정적으로 진행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수백년의 시간 여행에 푸른수풀님~ 즐겁고 보람차셨나 봅니다.
함께 걸으며 이야기도 나누어 귀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역사문화도보를 통해
역사를 알고 문화를 즐기고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손주들과 함께 오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로따님.^^
서울은 물론 각 지역을 살펴 보면 모두 역사와 문화 창고이지요.
학교에서 미쳐 배우지 못한 산 교육을 손주들에게 현장 공부시켜 보셔요.
운현궁은 안국역에 내려서 조금만 걸으면 되는데도 사십년을 넘도록 서울에 살면서도 탐방하지 못 했어요ㆍ
언제나 유익한 걸음을 열어주시는 로따님ᆢ
내년 봄에는 저도 손자를 데리고 다시 한 번 어제 걸었던 그 길들을 걸을 생각 입니다ㆍ
늘 고맙습니다ㆍ
내년 봄에 손자 데리고 가시어 해설도 해주셔요.
정말 산교육이 될겁니다.할머니 짱~대접 받을 거예요.
진즉에 알았으면 저 자리에 끼어보았을텐데 아쉽네요.
다음을 기대하며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