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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고택(=맹씨행단)과 한명회 묘지관광기1부
(관광의 계기)
맹사성 고택과 맹씨행단은 충청남도 관광안내도에서 명소로 널리 홍보되고 있어서 관광대상지로 점찍어 두었다. 한명회 묘소는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이 되어서 언젠가 한번은 둘러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맹사성 고택과 한명회 묘소는 서로 근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이번 맹사성 고택을 둘러보는 길에 같이 둘러볼 생각으로 한명회 묘소를 찾았다.
(맹사성 고택 관광의 시기와 행로)
2021.6.19.일 토요일은 날씨가 무척 쾌청하다고 해서 택일하여 관광길에 올랐다. 6.19일 아침 05시22분에 서울 아파트 단지를 출발했다. 조식과 점심을 준비하고 조수석에는 집사람을 태웠다. 맹사성 고택의 지번주소는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300번지”였다. 이 지번 주소를 차량 내비에 입력시커고 출발했다. 동부간선도로-청담대교-세곡사거리-헌능ic-수원흥덕ic-화성안녕ic-서오산jc-평택대교-43번국도-45번국도-아산시배방읍중리300번지 순으로 찾아갔다.
맹사성고택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07시16분이었다. 서울에서 05시22분에 출발했으니 소요된 시간은 1시간54분이었다. 서울에서 맹사성고택까지의 주행거리는 126km였다.
(맹사성 고택 관광지 내의 구경거리 6종)
처음에는 맹사성 고택과 맹씨행단은 별개의 관광지로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관광지인 줄 알았다.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같은 경내에 있으면서 위치만 달랐다. 맹사성 고택 우측마당에 바로 맹씨행단이(=좁은 의미의 맹씨행단) 있다.
맹사성 고택 관광지 경내에는 모두 6종의 구경거리가 있었다. (1)맹사성 고택 (2)맹씨행단(=맹사성씨가 심은 은행나무가 두 그루인데 그 두 그루 은행나무 아래에 제단을 만들어 여기서 후학들을 교육시켰던 곳.지금은 제단은 없고 은행나무만 있음) (3)세담사(맹유, 맹희도, 맹사성 3대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지내는 사당) (4)구괴정(=삼당사=맹사성,황희,권진의 세 사람의 정승이 앉아서 정사토의와 정담을 나눈 정자라서 삼당사라고도함.그리고 정승 3명이 각각 느티나무 3그루씩을 심어서 모두 9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구괴정이라함) (5)맹사성의 야외 조각상(=맹사성이 소를 타고 이동하면서 피리를 부는 모습의 야외조각상이 있음) (6)맹사성 기념관까지 해서 모두 6종의 구경거리가 맹사성 고택이란 관광지 경내에 서로 이웃해 위치해 있다. 이 6종의 볼거리는 같은 지번인 중리 300번지 내에 서로 인접해 있다. 또한 이 6종의 구경거리 단지를 총칭해서 맹씨행단이라고도(넙은 의미의 맹씨행단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맹씨행단=맹사성 고택의 관광이야기)
맹사성 고택 입구에는 “아산 맹씨행단 ”이란 안내 게시판이 설치돼 있다. 여기서 맹씨행단은 (1)맹사성이 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의미하면서 (2)동시에 맹사성이 후학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장소란 의미로도 쓰인다. (3)그리고 또 맹사성 고택을 포함한 이곳 관광지를 대표하는 명칭으로도 쓰인다는 점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3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았다.
(아산 맹씨행단 입구의 안내게시판 글)
“ 맹씨행단은 조선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의 (1360-1438) 집안이 살던 곳으로 지역 안에는 (1)맹사성 고택 (2)세덕사(맹사성 3대의 위패 모신곳) (3)구괴정(정자이름) (4)맹씨행단이라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쌍행수) 있다.(맹사성 고택등을 포괄하는 관광지의 대표명칭으로도 사용하는 개념이다.안내게시판의 설명문에 따르면)
맹사성 고택은 정면4칸 측면3칸의 工(공)자형 집이다.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둔 홑처마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민가이다.(맹사성 고택을 의미하는 개념이다.안개게시판 설명문에 의하면)
고택 뒤에 있는 세덕사에는 고려말 두문동72현인 맹유, 맹희도, 맹사성의 3대 위패가 있다.(세덕사도 맹씨행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안내게시판 설명문에 의하면)
구괴정에는 (=9그루의 느티나무 정자) 세종 때 황희, 맹사성, 권진 3정승이 각각 3그루씩 모두 9그루의 느티나무를(=괴목) 심었는데 지금은 2그루만 남아있다. (구괴정 정자도 맹씨행단에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다.안내게시판 설명문에 의하면)
맹씨행단은(=쌍행수=2그루의 은행나무)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이라 부른다. 이 행단은 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공부하던 자리를 의미한다”(맹씨행단은 은행나무 2그루를 의미하는 개념이다.안내게시판 설명문에 의하면)
(여기까지가 맹씨행단 입구에 있는 안내 게시글 요지임)
(맹시행단이란 이름의 안내판 글씨임.여기에는 맹사성 고택.좁은 의미의 맹씨행단인 쌍해수 나무.세담사.구괴정 정자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맹씨 행단이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맹사성 고택 이야기)
맹씨행단 안내게시판 글을 읽고 출입문을 지나 맹사성 고택으로 들어면 좌측에는 맹사성 고택이고 우측에는 좁은 의미의 맹씨행단인 은행나무 2그루가 있다.
맹사성 고택이라고 해서 규모가 상당히 클 것으로 예상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정말 소규모의 고택이었다. 넓은 담장안에 조그만 집만 한 채 덩그렁 놓여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또 집 모양이 좀 특이하게 생겼다. 이것이 고려말 때 민가의 모습이란다. 정면 4칸에 측면 3칸의 공자형 집인데 중앙 두칸은 대청이고 좌우측에 온돌방이다.
맹사성 고택 안내게시판 글을 보고 더욱 놀란 것은 이 집이 여말 최영장군의 아버지 최원식이란 분이 지었고 최영장군이 살다가 죽은뒤 집이 비어 있어서 최영장군의 손녀 사위인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씨가 이성계의 정란을 피해 들어와 은거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후 맹사성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계속 살았다는 것이다. 맹사성 고택에 대한 안내게시판 글의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 (맹사성 고택=맹씨행단 안내 게시글 요지)
맹사성고택은 1330년(고려 충숙왕 17년) 2월 무민공 최영의 부친인 최원직이 건축하였고 그 아들 최영장군이 살았다. 1388년 (우왕 14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따른 정란으로 최영이 죽은 뒤 비어 있던 집에 맹사성의 (최영의 손녀사위) 아버지 맹희도가 정란을 피하여 이곳으로 거쳐를 옮겨 은거하였다.
1432년(성종 13년) 1642년(인조 20년) 1814년(순조 14년) 1929년에 각각 건물을 손질하여 고친 기록이 있다. 고택 가구부에 남아있는 고부제와 창호등이 견실한 고법을 간직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귀중한 건축물로 평가된다. 이 집은 공자형 맞배지붕으로 건평은 27.5평이다.”
(맹씨행단 경내에 위치한 맹사성 고택 모습. 전면은 4칸이고 측면은 3칸짜리 집이다.최영장군의 아버지가 지었고 최영장군이 살다가 이성계의 정변으로 최영이 죽자 비어있던 집을 맹사성의 아버지와 맹사성이 살았던 집이라고 함. 맹사성은 최영장군의 손녀사위임.)
맹사성 고택 마당 우측에는 맹씨행단이란 (좁은 의미의 맹씨행단을 의미하는 은행나무 2그루)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다. 600년이상된 나무라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젊어 보이는 은행나무였다. 이 은행나무 안내 게시글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 (맹씨행단 보호수 안내 게시글 요지)
이 나무는 1982년11월1일에 우리 도 나무(충청남도)로 지정된 쌍행수로서 640여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쌍행수 한 그루는 높이 40m, 둘레 5m80cm, 다른 한 그루는 높이 45m, 둘레 8m50cm 로, 사적 109호로 지정된 아산맹씨행단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나무는 세종대왕 때 좌의정으로 봉직하고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1380여년 경에 심은 것이다.
당시 맹사성은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축대를 쌓고 단을 만들었는데 뜻있는 사람들과 강학하던 자리라는 뜻으로 이곳을 행단이라(=은행나무 제단) 불렀다.
한편 이 나무는 200-300년 전부터 싹이 원목옆 사방으로 자라 지금과 같은 거목으로 자라게 된 것이다. 1987년 원목의 구멍 안이 부패하여 외과 수술을 받았다.” (여기까지가 안내 게시글 요지다.)
(맹사성이 심었다는 600년 이상된 은행나무 2그루 모습. 은행나무 아래 제단을 쌓고 여기서 후학들을 가르쳐서 맹씨행단이란 이름이 전래되었다고 함.)
(세담사 이야기)(쌍행수 뒤쪽으로 위치해 있음).
쌍행수(은행나무 2그루) 뒤쪽으로 올라가면 바로 세담사라는 조그만 집이 있다. 맹유, 맹희도, 맹사성 3대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니 매년 종손들이 제사지내는 사당으로 보였다. 아래는 세담사 안내게시글 요지다.
“ (세담사 안내 게시글 요지)
세덕사는 두문동72현인(두문동에서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고려에 충성하고 조선건국을 반대한 사람들) 맹유(맹사성의 조부), 맹희도(매사성의 아버지), 조선조의 정승인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우이다. 맹유는 고려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희도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으로서 충절을 지켰다. 맹사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유명하다.” (여기까지가 안내 게시글 요지다.)
(맹사성 고택 뒷쪽에 있는 세담사 모습. 여기에는 맹유 맹희도 맹사성 3대 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함. )
(구괴정 정자 이야기 )
세담사까지 둘러본 뒤 맹사성고택 좌측 쪽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니 구괴정 정자까지 길이 이어졌다. 70미터정도의 거리였다. 느티나무 숲속에 있는 정자였다. 앞으로는 널다난 들판이 보이고 그 들판 건너편에는 높은 산이 병풍처럼 서있다. 그 산이 배방산이라 했다. 정자 앞에는 삼상당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정자 뒤편에는 구괴정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그래서 한 개의 정자에 두 개의 현판이 붙은 정자인 것이다. 삼상당은 정승 세 분이 정담을 나누는 정자라는 뜻이고 구괴정은 세 분의 정승이 각각 세 그루씩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해서 구괴정인데 지금은 두 그루만 살아 있다고 한다. 아래는 구괴정 정자의 안내게시글 요지다.
“ (구괴정 안내게시글 요지)
이 정각은 조선 세종 때의 정승이었던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함께 느티나무를 3그루씩 9그루를 심은데서 구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600여년전의 이곳은 오봉산을(맹사성 고택의 뒷산) 배경으로 앞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배방산과 복부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금곡천의 맑은 물이 당긴 활 모양으로 흘러내려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승지였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을 지어 읊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일하는 농민을 불러 위로하며 민정도 살폈다.
600여년이란 세월이 흘러 9그루중 7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 하였고 2그루만이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쇠하였던 600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삼정승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도 한다. ” (여기까지가 구괴정에 대한 안내 게시글 요지이다.)
(맹사성 고택 뒷쪽 밖에 있는 구괴정 정자 모습. 이 정자를 삼상당이라고도 칭함. 3정승이 정담을 즐겼다는 의미에서)(3정승이 각자가 3그루씩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구괴정이라 부름.지금은 두 그루만 살아있다고함.)
(구괴정에 지금 살아있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 모습)
(구괴정 가는 길에서 맹사성 고택 전경을 바라본 모습. 고택을 둘러싼 내벽 울타리가 있고 그 밖으로 다시 경내 전체를 둘러싼 외벽의 울타리가 있음. 외벽 울타리 밖에 있는 집들은 동네마을 집들임)
(맹사성 고택 전경을 위에서 바라본 조감도 모습. 맹사성 고택.쌍행수 .세담사.그리고 구괴정으로 나가는 쪽문을 한눈에 내려바 돌 수 있늠)
(맹씨행단의 야외전시장에 있는 맹사성 조각상 구경이야기)
이렇게 맹사성 고택, 맹씨행단(=쌍행수=2그루은행나무), 세담사, 구괴정 정자까지 둘러본 뒤 주차장 뒤쪽으로 있는 맹씨행단의 야외 전시장을 찾았다.
야외전시장에는 1미터 높이의 8각형 받침대위에 원판을 만들고 그 원판위에 다시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맹사성의 조각상을 세웠다. 갓쓰고 두루마기 입고 말이 아닌 소를 탄 노인이 소 위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모습의 맹사성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맹사성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피리를 무척 잘 불었다고 한다. 정승이었지만 가마도 타지 않고 말도 타지 않고 꼭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조각상 받침대는 8각형 벽면에 맹씨행단의 특징과 맹사성 본인의 특징을 기록해 두었다. 8개 벽면중에서 4개 벽면은 고택,세덕사,쌍행수,구괴정 이야기이고 나머지 4개 벽면에는 (1)청백리의 길 고불 맹사성 조각작품 이야기 (2)전세 맹고불 유물인 옥적이야기(=맹사성이 아껴던 피리) (3)흑기총(=맹사성 즐겨 탔던 검은 소 무덤설화) 이야기 (4)청백리의 대평사 고불 맹사성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맹사성이 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이동하는 조각상 모습.)
(청백리의길 고불맹사성 조각상의 작품내용에 대한 벽면기록내용 요지)
이 벽면 기록내용은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맹사성의 조각상 작품에 대한 총체적인 작품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 조각 작품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청백리 고불 맹사성 선생 조형물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의 기본과 청백리의 대명사인 맹사성의 청렴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맹사성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검소한 평상복 차림과 말이나 마차가 아니라 소를 타고 다닌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아울러 대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통해 풍류를 알고 예악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챙백리의 길 고불 맹사성 조각상에 대한 벽면 기록내용으로서 주로 이 조각상의 작품내용을 설명하고 있믐)
(전세 맹고불 유물인 옥적 이야기의 벽면기록내용)
“ 맹사성은 시가와 음률에도 조예가 깊어 조선 태종과 제종대에 관습도감 제조로서 음악을 정비하고 악인(=음악인)을 교육하였다. 항상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서너곡을 연주하였는데 그를 찾아온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맹사성이 집에 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맹사성이 평소 자주 연주했던 옥적 이야기.즉 피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음)
(야외 조각상 벽면에 기록된 흑기총 이야기)
“ 흑기총은 맹사성과 검은 소 설화에 등장하는 검은 소 무덤이다. 설화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맹사성이 산에 오르던 중에 아이들이 검은 소를 괴롭히는 것을 보았다. 맹사성은 아이들에게 짐승이라도 생명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고 꾸짖고 마을로 내려가 주인을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이에 검은 소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고 검은 소는 맹사성을 잘 따랐다.
맹사성은 평생 가마 대신 검은 소를 타고 다닐 정도로 검은 소를 가까이 하였다.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다가 굶어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검은 소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맹사성의 묘 아래에 묻어주고 이를 흑기총이라 불렀다. 현재 흑기총은 경기도 광주시 직동에 있다.” (여기까지가 벽면에 기록된 흑기총 이야기다.) 그리고 맹사성의 묘를 네이버 앱 지도에서 검색해보니 그 주소지가 경기도 광주시 직동 산27번지였다.
(벽면에 기록된 흑기총 이야기인데 흑기총은 맹사성이 아끼던 검은소가 맹사성이 죽은 뒤 사흘을 굶어서 검은소도 따라 죽었다는 설화다.현재 맹사성의 무덤이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데 이 검은소의 묘도 맹사성의 묘 아래에 묻혀있다고함.)
(맹사성이 아꼈다는 검은 소 모습. 이 소는 기념관 앞 마당에 조각상으로 세워져 있음.)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 맹사성의 벽면기록문 :1360-1438)
“ 맹사성은 본관이 신창이고 호는 고불이다. 시호는 문정이다. 맹사성은 1386년(고려 우왕12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기거사인, 우헌납 등을 지냈고 조선의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등 4대에 걸쳐 수원부판관부터 좌부대연 한성윤 대사헌 이조판서 좌의정을 지낸 다음 1435년(세종17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천성이 겸손하여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마중할 때는 문밖까지 나와 맞이하고 높은 자리로 안내하였으며 배웅할 때는 몸을 낮추고 두 손을 모아 인사하였다. 청렴결백하게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음률에 능하여 손수 악기를 만들었으며 피리연주를 즐겼다.
세종대에 우리나라 음악을 정비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연시조인 강호사시가를 남겼다.” (여기까지 벽면 기록문 요지이다.)
(청백리의 대명사 고불 맹사성의 특징을 벽면에 기록한 기록문 내용임)
(맹사성 기념관 구경 이야기 )
이렇게 야외 전시된 맹사성 조각상과 조각상 벽면 기록문 내용을 구경하고 바로 옆에 있는 맹사성 기념관으로 들어갔다. 기념관은 단층인데 내부는 맹사성 유품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맹사성기념관에 전시된 최영장군과의 만남 이야기)
진열된 것 중에서 눈에 띠는 것이 최영장군과의 만남 이야기였다. 다음은 진열장에 전시된 안내 게시글 내용의 요지이다.
“ 맹사성이 다섯 살 되던 해 동네 아이들과 최영의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 이때 최영이 낮잠을 자다 검은 용이 배나무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놀라 잠이 깨었는데, 마침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려는 이아들을 보게 되었다. 이에 아이들을 꾸짖자 모두가 도망쳤지만 오직 맹사성만이 나무에서 내려와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예를 갖추고 정중히 사과를 하고는 물러났다.
최영은 조금전 꾸었던 꿈을 떠올리며 어린 맹사성이 큰 그릇이 되리라 생각하고는 맹사성의 조부 맹유를 찾아가 자신의 손녀와 인연을 맺을 것을 약속하였다. 후에 최영의 손녀와 혼인하여 최영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최영장군과 맹사성의 만남 이야기 내용)
(기념관에 전시된 최영장군과 여말 고려충신 및 맹사성 집안과의 관계도 )
(맹사성기념관에 전시된 태종실록을 보려했던 세종을 말렸다는 직언의 업적)
“ 태종실록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선왕태종에 대한 사관의 평가가 매우 궁금하였다. 이에 세종이 맹사성에게 실록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자 –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가언과 선정만이 실려 있어 다시 고칠 것도 없으려니와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에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맹사성의 말을 들은 세종은 그럴 것이다고 수긍하면서 태종실록을 보지 않았다.”
(기념관에 전시된 맹사성이 세종에게 선대왕 실록을 보지 말 것을 직언했다는 업적 내용 소개)
(맹사성기념관에 전시된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내리는 일에 찬성했다는 사고방식 업적 )
“ 안승선에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명하였는데 – 행사직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한 솜씨가 보통사람에 비해 뛰어남으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세종도) 그를(장영실을) 아낀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비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는 나의 곁에 가까이 모시어서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서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함으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여기까지는 임금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면서 언급한 내용임)
(여기서부터는 맹사성이 임금께 언급한 내용임) 김인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사람에 비해 뛰어남으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세종이) 그대로 따랐다.”(천민출신인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도록 임금께 주청했다는 맹사성의 평등의식을 엿볼 수 있는 업적이라는 것임)
(기념관에 전시된 내용으로서 맹사성이 세종에게 장영실을 높은 관직으로 올려줄 것을 건의했다는 업적 내용임.)
(기념관에 전시된 맹사성 아버지 맹희도는 어떤 사람인가.)
“ 순창군수를 지낸 맹유의 아들이자 맹사성의 아버지로서 호는 동포이고 이름은 맹희도이다. 고려말 한성윤,전교부령,전교령, 수문전제학 등을 지내고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맹유와 함께 두문동 72현중 한사람으로 맹유가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충남서천한산면에 은거하였다. 후에 온양으로 세거지를 옮겼다. 조선이 건국되고 권근이 출사할 것을 간곡히 청했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고 후학을 모아 강론했다. 1750년 영조가 온양행차시 묘소에 제를 지내고 충효세업 청백가성의 어필사액을 내렸다.”
(기념관에 전시된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는 어떤 사람인가를설명하는 안내게시글 모습.)
이렇게 맹씨행단내에서 맹사성고택, 맹씨행단의 쌍행수 은행나무,세덕사,구괴정 정자, 그리고 맹사성조각상과 8면벽의 안내글,맹사성기념관까지 구경을 마치고 주차장 차속으로 돌아와 집에서 가져온 김밥으로 집사람과 함께 조식을 때웠다.
(여기까지는 1부로써 맹씨행단 관광기이고 / 한명회 묘소 관광기는 2부에서 계속됩니다.이렇게 2개의 파일로 분리한 이유는 파일 하나에 올릴 수 있는 사진이 제한되기 때문에 더 많은 사진을 올리려고 부득이 1부,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