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의 ‘얼빠진 얼굴을 하고’
나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다. 바빠서도 싫어서도 아니다.
어느날, 아침 여덟시부터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 정신을 차리니 오후 4시였다. 그 동안에 나는 채널을 한 번도 돌리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네 시까지 텔레비전 앞에 있었다. 나는 울고, 웃고, 화내고, 감탄하고 놀랐다.
요리가 있고, 뉴스가 있고, 한 낮의 멜로디도 있었다. 집 나간 사람을 찾기도 하고, 스튜디오 안에서 헤어진 아내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남편과 “엄마”하고 우는 꼬마를 보았다.
한낮의 멜로디에서는 정숙한 여염집 부인에게 젊은 건축가가 “부인”하고 낮은 목소리로 들이대자 정숙한 부인이 “어머, 이러시면 안 돼요”하고 거절하면서 도발했다. 내 눈에는 도발하는 거로 보였다.
나는 “바보, 우쭐해 하지 마라!”라고 말하면서 다음 날 젊은 건축가 부인에게 어떻게 들이댈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젊고 잘 생긴 건축가가 없는지 헛된 망상을 하는 것이다. 다른 채널에서 뉴스 아나운서가 마치 그린 듯 착실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비행기 추락사고를 보도 했다. 나는 중대한 세상사에 마음을 애태웠다. 그런데 갑자기 유달리 음성이 높아지더니 “가가가케후 씨, 기기긴초르~!”하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아하하 웃었는데 웃음을 그치기도 전에 “그러면 현장으로 돌아가 보죠.”라고 다시 방금 전의 중대한 남자가 무표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나는 천성이 귀가 얇고 확고한 신념이 없는 인간이라서 중대한 뉴스와 가가가케후 씨에게 번갈아 당하자 양쪽이 동일한 비중으로 중대하게 느껴졌다.
아니, 가가가케후 씨가 유달리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혹은 뉴스 해설을 하는 예의 바르고 정중한 아가씨보다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고 너무나도 손쉽게 믿어 버릴 것 같다.
나는 텔레비전을 그만 보기로 했다.
내가 그만 봐도 바보 아들이 텔레비전에 바짝 붙어 있다. 그리고 별안간 요란하게 웃는 꼬락서니를 보면 장래가 불안해진다. 나는 일본에 사는 아이들이 전부 얼간이 표정을 짓는 것은 내 알 바 아니지만 우리 애만은 늠름하고 지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화가 치민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아들은 조금도 지적이지도, 늠름하지도 않다.
학교 여름방학 중에 멀리 헤엄치기 강습이 있었다. 3킬로미터를 한 명의 낙후자도 없이 완주하는 것이 이 학교의 중요한 교육 커리큘럼이며 감동적인 행사다. 부모들은 부지런히 헤엄치는 아이들을 보려고 벼랑과 벼랑 사이에 걸쳐진 다리 위에 우르르 모여든다. 한 무리의 작은 깨알 같은 머리가 나타나자 “으싸으싸”하는 구호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나는 이때 지적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까맣게 잊고 우리 애가 체력만이라도 좋기를 기대했다. 그래서인지 “으싸으싸”라는 구호가 힘차고 기특하고 부지런하게 느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깨알은 차츰 콩만 해지고 구호도 더욱 가까워져서 분명하게 들렸다.
그것은 “소라, 기기긴초르, 가가가케후 씨였다.”
“기기긴초로, 가가가케후씨”로 들릴 때가 “으싸으싸”라 들릴 때보다 월등히 목소리도 높아지고 힘찼다.
그들은 필경 가가가케후 씨에게 필사적으로 격려를 받은 것이리라.
“으싸으싸”는 정통파 뉴스 해설과 같은 것이다.
가가가케후 씨들은 씩씩하게 완주했고 나에게는 일본 의 장래를 짊어질 믿음직한 소년들로 보인다. 가가가케후 씨의 격려를 받은 그들이 환하게 빛나 보였다.
올해 멀리 헤엄치기 합숙에서 학생들은 어떤 광고의 격려를 받았을까? 얼빠진 표정을 하고 무기력하게 텔레비전에 달라붙어 있는 일본의 소년들이여, 광고가 있는 한 너희들은 그렇게 어느날은 어리석게, 어느날은 힘차게 살아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