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9.6.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창 27:1~4
*제목; 창세기 읽기(31) 눈이 어두워
1. 이삭 집안의 비극
아브라함으로 시작한 믿음의 가풍은 이삭을 거쳐 에서와 야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집안의 갈등이 심화되고, 급기야 형제가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일까? 오늘 ‘1절’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27:1)
이삭이 “눈이 어두워” 졌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육신적인 의미도 있지만, 영적이고 혼적(마음적)인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가정의 화목과 질서가 무너지니, 하나님의 복이 밖으로 다 흘러내려가 버리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가정이 아름답게 진행되려면 두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는 아버지의 역할이다. 성경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가정에 복은 전달하는 “축복권”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가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가정에 하나님의 복이 선포되지 못하게 된다. 아내는 가장이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아버지가 그냥 출근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아이들이 문 앞에 나와서 아버지의 축복을 하게하고 출근하도록 해야 한다. 축복한 아버지는 스스로 그가 선포한 축복의 대상자가 된다.
어머니는 “기도권”이 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자녀들의 삶과 가정을 세워간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대부분의 기도의 용사는 다 어머니(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선지자 안나 등)였다.
먼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적으로 어두워진 자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죄를 인식해도 그 일을 그대로 행해나간다. 진정한 비극이다.
다음은 사람의 인지적 사고나 생각 혹은 마음은 참으로 연약하고 어리석다.
인지행동이론에서 사람에게는 “인지적 삼재(cognitive triad)”가 있다고 한다.
이런 인지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상황을 비관한다. 상황을 바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못하고, 부정적으로만 상황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부인한다. 그러니 늘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신한다. 그러니 어찌 희망이나 기쁨이 있을 수 있겠으며, 현실의 어려움들을 어찌 극복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니 이런 사람들은 “우울(증)”을 앓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인지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Beak’의 이야기처럼 이런 사람들은 상황을 잘 못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판단의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 ‘Ellis’에 의하면 일정한 ‘비합리적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부정적인 체계를 세우고 그 생각에 복종(?)하는 것이다.
어째 되었던 사람이 이리 어리석다.
2. 이삭 집안의 갈등
오늘 ‘이삭’이 그랬다. 앞의 인지 삼재 중 어디에 속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를 수도 있지만, 틀림없는 것은 ‘눈이 어두워져’ 사물을 바로 평가하지 못했다.
가정의 가장이 이렇게 어리석음 가운데 있으니, 집이 바로 세워질 리가 없다. 그러니 집안에 갈등이 자리 잡는다. ‘5~6절’을 보자.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창 27:5~6)
이삭은 에서와, 리브가는 야곱과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왜 이리 가족 간의 갈등이 심화된 것일까? 그래서 결국 형제간에 원수가 되는 상황을 낳게 된 것인가?
첫째는 이미 말했듯이 ‘가부장적 전통’ 가운데에서 ‘가장’이 바로 서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둘째 부모의 편애가 자녀의 갈등을 조장한 것이다.
셋째 서로간의 소통의 부재가 이런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 ‘부모’가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바로 세워야 하고(아이들은 가르친 대로가 아니라 보여준 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 됨의 위치(삶의 바른 지표와 모델로서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다음 자식에 대한 편애는 자녀들이 ‘내 새끼’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더 예쁘고 좋은 새끼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면 모두가 존귀하다. 그러니 모두를 공평하게 키울 수가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끼리 왜 이래?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 아냐?”라는 우스개 말이 있다. “가족끼리”라도 아니 가족끼리는 더욱 더, 서로간의 소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맏이로서의 힘듦, 둘째로서의 서러움, 부모의 의무과 고통, 등등. 이런 귀한 시간이 있었다면 이 가족이 이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먼저는 ‘하나님과의 소통’, ‘하나님의 가정됨’의 출발점이지만, 이런 ‘가족 소통’의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이제부터 꼭 하나님을 모시고 가정예배의 소통을 누리시길 바란다.
오늘 이삭의 집안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가정이 타산지석처럼 귀한 교훈을 얻어, 참되며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갖추시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이 설교는 창세기 27장을 바탕으로 이삭 가정의 비극을 조명하며, 가장인 이삭의 영적 및 인지적 어두움이 어떻게 가족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는지 분석합니다. 설교자는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는 축복권을 행사하고 어머니는 기도권을 지키는 등 각자의 신앙적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부모의 편애와 소통 부재가 형제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음을 지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안으로 가족 간의 대화를 제안합니다. 궁극적으로 이 설교는 가정예배를 통해 하나님 및 가족 구성원과 올바르게 소통함으로써 신앙의 가풍을 바로 세울 것을 독려합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한 어리석음에 있음을 경고하며 건강한 가정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