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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첨(李詹)은 홍주(洪州) 사람이다. 공민왕이 9재(九齋)에 행차하여 경서[經義]를 시험 본 후 이첨 등 7인을 급제시키고 이첨을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제수하였다.
3번 옮겨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소를 올려 말하기를, “사전(史典)의 법은 오래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제후가 사적인 역사서가 없고 국가의 지(志)는 왕실에 보관해 둘 뿐이었습니다. 그 후 삼사(三史)가 계속 나오게 되자 여러 나라들도 모두 사관(史官)을 두어 당대의 일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본조에서는 통일 이래로 포폄(褒貶)으로서 기록할 만한 일이 항상 많아서 사관이 붓으로 기록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한 세대가 바뀐 이후에야 편찬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실린 내용이 단지 해가 흐린지 밝은지에 대한 기록뿐이고, 선왕이 행한 정사의 행적이나 무릇 국가에서 출척(黜陟)한 규정 같은 것은 관청에서 간혹 잃어버리기도 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저 일의 형적(形迹)이 이미 명백히 밝혀졌다고 해도 자기의 이목(耳目)을 모두 믿을 수는 없습니다. 사신(史臣)이 궐내에서 보고 들으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서생(書生)들은 언사가 졸렬하고 어눌한데다가 사람들 또한 정상(情狀)을 고하지 않기 때문에 물러나서는 아득하여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훌륭한 말과 착한 행동이라도 다시 전해지게 되고 사견(私見)까지 덧붙여진 연후에야 주워 모아 실록(實錄)을 만드니 시비(是非)가 뒤섞여버려서 후세가 되면 바로잡을 수가 없게 되니, 어찌 이것이 다만 천지(天地)의 죄인이겠습니까? 또한 전하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역시 사신(史臣)의 죄도 아니며, 사신을 멀리한 과실이기도 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임금의 행동은 반드시 쓴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임금의 언동(言動)을 좌우의 사관이 모두 기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신을 가까이 두시고 언동(言動)과 시위(施爲)를 모두 기록하게 하십시오. 또한 여러 관사에 명하여 일을 갖춰서 보고하게 한 다음에 기록하게 한다면 기재(紀載)에 분명 실수나 오류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께서 눈으로 보고 느끼시고 스스로를 갈고 닦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옛 제왕 중에는 안일하게 지내면서 능히 나라를 통치했던 이는 없다고 합니다. 문왕(文王)은 매우 바빠서 식사할 겨를이 없었고 선왕(宣王)은 항상 정료(庭燎)를 설치하였습니다. 두 임금이 백성에게 마음을 쓴 것이 이처럼 부지런했기 때문에 후손에 전하는 공적이 멀리 이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흥(中興)의 대업은 더욱 빛났습니다.성주(成周)를 창시하고 이어갔고, 도리에 맞는 군주가 되어 후세 임금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성심을 다해 나라 일에 힘쓰며 어전에서 정사를 들으셔서 재상으로부터 여러 유사(有司)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언(進言)하여 각기 그 직무를 아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정(民情)이 위에 전달될 수 있었고, 일이 막히지 않아 나라가 태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일을 처리하게 되면서 스스로 사견(私見)을 가지게 되면서 이르시기를, ‘신하의 말은 나의 지혜만 못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상벌(賞罰)을 주는 것이나 제도의 존폐를 〈전하의〉 신충(宸衷)에서 결단하시고 자문을 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치란과 정치의 득실에 대해 여러 관리들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직접 정무를 보시고, 재상에서부터 대사헌(大司憲)·육부상서(六部尙書)·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사의 득실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게 한다면 태평성대의 다스림이 거의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소한 공적을 계산하고 비교하거나 세세한 잘못을 따지고 지적하는 일 같은 것은 유사(有司)의 임무이지 전하께서 마땅히 하실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최근 겨울에 우레가 치는 변고를 만나자 이르시기를, ‘이는 백관이 직무에 게을러서 정사와 형벌이 밝지 못한 것에 대한 응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관사에 명하여 날마다 좌목(坐目)을 써서 차자(箚子)의 형식을 갖추어 보고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시려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몸으로써 가르치는 자는 따르지만, 말로써 가르치는 자는 반박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에 조회를 여시는 것을 백관에게 보이신다면, 누가 감히 관청을 비워놓고 녹봉만 타먹으면서 자신만 편안하고자 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필시 장차 질병이나 사고를 칭탁하고 전하를 속이려는 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니,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다 죽이실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고공사(考功司)로 하여금 각사(各司)의 근태(勤怠)를 살피게 하고,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해가 뜨면 모으고 정오가 되면 해산하게 하시며, 그중 법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헌사(憲司)에서 규찰하여 다스리도록 하십시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문왕·선왕의 성헌(成憲)을 본받아 왕위에서 안주하지 마시고 정사를 게을리 하지 마시어 여정(輿情)을 통달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라서 매월 6아일(六衙日)에는 6부(六部)·대성(臺省)의 관원이 직접 정사를 보고하게 하고 또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가까이에서 모시게 하였다.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이금강(李金剛)은 재물을 탐내고 주색을 좋아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 하을지(河乙沚)의 옥정아(玉頂兒)를 빼앗았고, 또 조운하는 기일을 늦추었다가 배를 표몰(漂沒)하게 만들었다. 헌부(憲府)에서 그를 탄핵하려 하자 지신사(知申事) 염흥방(廉興邦)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이금강이 뇌물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고 했는데, 헌부에서 어떻게 탄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금강이 과연 뇌물을 바쳐 죄를 면했다. 후에 사재(四宰)에 제배되었는데, 간관이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자, 신돈(辛旽)이 이첨에게 말하기를, “어찌 금강의 고신에 서경하지 않소?”라고 하였다. 이첨이 말하기를, “어떻게 서경할 수 있겠소? 내 부친과 조부께서 영동정(令同正)을 지내셨으니, 나는 정언(正言)이 된 것으로 만족하오.”라고 하니, 신돈이 묵묵히 말하지 않았다. 후에 지통주사(知通州事)로 좌천시켰다가 불러서 다시 정언으로 삼았다. 우왕(禑王) 초에 헌납(獻納)으로 승진하였고, 정언 전백영(全伯英)과 함께 상소하여 이인임(李仁任)·지윤(池奫)을 처형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좌천되었고 전백영은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되었다. 얼마 후 하동(河東)으로 장류(杖流)하였다가 용서를 받아 종편(從便)되었다. 이후 문하사인(門下捨人)·전리총랑(典理摠郞)을 거쳤다. 창왕(昌王)이 즉위하자 사헌집의(司憲執義)가 되었는데, 당(唐) 태종(太宗)의 제범(帝範)을 써서 바치면서 말하기를, “왕은 깊은 궁궐에서 높이 거주하기 때문에 듣는 것이 모자라고 보는 것이 막히므로, 허물이 있어도 듣지 못하고 빠진 것을 보충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북과 목탁을 설치해두는[設鞀樹木] 까닭은 헌체(獻替)를 도모할 것을 생각함이고,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비우는 것은 충성스럽고 바른 말을 기다리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충성스러운 자가 그 마음을 쏟아 붓고 지혜로운 자가 그 계책을 다하게 되면, 신하는 거리를 두지 않게 되고 임금은 한쪽만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어리석은 군주는 그렇지 않고 스스로를 성스럽다 하면서 간언을 거부하기 때문에 대신들은 녹을 아까워하며 간언하지 않고 소신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여 간언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대로 거칠고 사납게 굴면서 스스로 덕(德)은삼황(三皇)을 겸했고 공(功)은 오제(五帝)를 넘어선다고 생각하며 몸을 망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 책을 얻어 읽어보았는데, 인주(人主)가 스스로 경계하고[飭躬] 교화를 열어주는[闡化] 도리, 현자를 구해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방법, 사악함을 제거하고 자만하는 것을 경계하는 교훈이 그 안에 실려 있습니다. 신이 지금 부족한 자질로 간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니, 비록 신이 천위(天威)를 범하는 것을 무릅쓰고 항변하며 극간(極諫)하더라도 어찌 이 책 밖에 벗어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만기(萬機)나 되는 정무를 보시면서 잠깐 짬이 나실 때 열람해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이첨(李詹)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전임되었다가 우상시 경연강독관(右常侍 經筵講讀官)으로 바뀌었고, 공조(工曹)·예조(禮曹)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얼마 후 밀직대언(密直代言)에 제배되었는데, 이때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가 상서(上書)하여 아뢰기를, “인사(人事)가 아래서 움직이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답합니다. 재이(災異)의 이유는 아무렇게나 생겨나는 것이 아닌데, 덕(德)이 반드시 상제(上帝)의 마음에 부합되지 않고, 정사가 반드시 여망(輿望)에 적합하지 않으며, 형벌과 포상이 반드시 바르지 않고, 임용(任用)이 반드시 마땅하지 않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冤抑]이 반드시 풀리지 않고, 재용(財用)이 반드시 헛되게 낭비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게 아니라 괴이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괴이한 것을 좋아하면 중용[中]을 잃고 중용을 잃으면 조화롭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천지의 기(氣)가 순조롭지 못한 이유입니다. 소위 기이한 것은 석씨(釋氏)를 말합니다. 석씨는 몸을 깨끗이 한다면서 인륜을 어지럽히고 산림(山林)으로 도망쳐 들어가니 이것 역시 하나의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화복(禍福)의 교리는 요망함이 매우 심한데, 교리에서 이르기를, ‘범채(梵采)를 장황(張皇)하게 하면, 요사스러운 이변을 누를 수 있다.’고 하므로, 향을 계속하여 내려주었고 공억(供億)을 매우 많이 했으나 천재지괴(天災地怪)가 없어지거나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교리에서 이르기를, ‘우리가 복을 빌면 능히 사람들을 장수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여, 엄청난 돈을 아끼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축수(祝壽)하게 하였는데, 100살까지 사는 효능을 볼 수 없었습니다. 교리에서 이르기를, ‘우리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면 지옥(地獄)을 부수고 낙토(樂土)에 태어난다.’라고 하지만,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이 없으니 낙토와 지옥을 본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교리에서 이르기를, ‘지겸(地鉗)이 반응하는 것은 금찰(金刹)과 보탑(寶塔)을 설치하면 제압할 수 있다.’라고 하지만, 삼대(三代) 이전에는 석씨가 없었으므로 무엇으로써 제압했는지 알지 못하는데 옹희(雍熙)의 치세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또 그 법에 이르기를, ‘〈사람이〉 서로 낳고 기르는 도리는 금함으로써 소위 청정적멸(淸淨寂滅)을 구하라.’고 하였으나, 그 무리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얹혀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으니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아아! 이 법도를 행하는 자는 입을 다물고 산에서 살며 짐승들과 함께 무리지어 살아야 가한데도 민간에 섞여 살면서 풍속을 해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께서 중흥하셔서 비록 선왕의 법을 따른다고 해도 오히려 없애거나 더해야 할 것인 있을 텐데 하물며 이 세상을 그릇되게 만드는 매우 괴이한 것을 더 좋아해서 축출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어찌하여 탑을 쌓는 공사에 농민이 노동해야 하며, 선승(禪僧)을 부양하는 데 돈과 곡식을 소모해야 합니까?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랫사람이 필시 더 심하게 좋아하게 되는 법이니, 우리 백성이 점점 석씨에게 빨려 들어가서 항산(恒産)을 버리고 군부(君父)를 배반할까 두렵습니다. 옛날에 양(梁) 무제(武帝)는 동태사(同泰寺)에서 3번이나 몸을 바치고[捨身] 부고(府庫)를 탕진해 가면서 부도(浮屠)를 섬겼으나 죽어서 정거(淨居)하며 껄껄 웃는 소리는 천고(千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께서는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삼았고 신돈(辛旽)에게 현혹되면서 이 교(敎)를 깊이 숭상하였지만 끝내 복을 누리지는 못하셨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음사(淫祀) 또한 괴이함이 심한 것인데,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마땅히 섬겨야 할 바가 아닌 귀신에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삼대 이후 정도(正道)가 행해지지 않자 천하 사람들이 서로 귀신을 두려워하고 요사스러운 것에 현혹되었습니다. 집에서는 무사(巫史)가 되고 백성들이 제사[祀]에 빠져버리면서 부모의 신(神)을 풀숲에 버리고 이름도 없는 귀신에게 아첨하면서 섬기고 있습니다. 아아! 신(神)은 예(禮)에 맞지 않는 제사는 흠향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감격(感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면서 상제의 마음에 부합하여 천재(天災)를 막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사악한 기운이 뭉쳐서 음양(陰陽)이 도를 잃어서 여름에 서리가 내려 풀을 죽이게 하고, 일식(日食), 성변(星變), 바람과 우박, 홍수와 가뭄이 해마다 들지 않을 때가 없으니, 하늘이 경고를 보이는 것이 지극합니다. 이것은 모두 인심(人心)과 풍속(風俗)이 바르지 못하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언로[天聽]를 회복하시고, 출가(出家)한 무리들을 몰아서 본업으로 돌아가게 하며, 오교(五敎) 양종(兩宗)을 철폐하여 군영(軍營)에 보충하십시오. 안팎의 사사(寺社)는 모두 소재지의 관사에 소속시키고, 노비와 재용(財用) 또한 모두 분속(分屬)시키며, 무격(巫覡)은 먼 곳으로 추방하시어 경도(京都)에 있지 못하게 하십시오. 사람들마다 가묘(家廟)를 설치하게 하여 부모의 신을 안치하게 하고, 음사를 근절하시어 명분 없는 소비를 막으십시오. 금령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삭발하는 자는 죽여 용서하지 마시고, 음사(淫祀)하는 자도 죽이고 용서하지 마십시오. 논자들은 이르기를, ‘이 두 가지 폐단은 뿌리가 깊고 꼭지가 굳어 갑자기 혁파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만, 전하께서 중흥하시고 법제를 일체 새롭게 하는 마당에 어찌 주저할 있겠습니까? 만약 혁파하신다면 요순(堯舜)의 다스림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미미한 신(臣)에게 위임하시고 참언(讒言)을 듣지 않고 전적으로 금령을 시행하신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모두 혁파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소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 마침 김초(金貂)가 장관(長官)을 능욕했다고 하여 순군(巡軍)에 하옥되었는데, 죄가 태형(笞刑)에 해당되었다. 왕이 김초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일찍이 상서(上書)하여 불법(佛法)을 저훼(詆毁)한 자인데, 죽이고자 하나 죄명(罪名)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첨이 말하기를, “우리 태조(太祖) 이래 역대로 불법을 숭앙하여 믿어왔는데, 지금 김초가 그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선왕의 성전(成典)을 허무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죄를 준다면 구실이 없다고 걱정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렇다고 하면서 형조에 명하여 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형조에서 김초의 죄가 가볍다고 하면서 지체하고 처결하지 않자 왕이 더욱 노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변론하여 구제해 준 덕분에 단지 장관을 능욕한 죄만 받았다. 하루는 왕이 경연(經筵)에 나아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론하다가 당 태종(太宗)이 재차 고구려[高麗]를 정벌하려 했을 때 방현령(房玄齡)이 표문을 올려 간언했다는 말에 이르자 이첨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에 대해 신하로서의 예절을 잘 지켜왔습니다. 옛날 양 무제(武帝)가 후경(侯景)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을 때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가서 보니 조정과 저자가 무성한 풀숲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신이 이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에 후경이 잡아서 문초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옛날에 번성했을 때와 같지 않지 않아서 웁니다.’라고 하니, 후경이 그를 의롭다고 하면서 석방하였다. 당 현종(玄宗)이 안녹산(安祿山)의 화(禍)를 피하여 서쪽 촉(蜀)으로 가 있었는데, 우리 사신이 가자 현종이 기뻐하며 친히 시(詩) 10운(韻)을 지어 하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역사책[簡編]에 실려 있어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원(元) 말기와 같은 때에는 북쪽으로 상도(上都)를 옮겨 오히려 삼가 달려가 문안한 것은 신 등이 직접 보았던 바입니다. 그러므로 신하의 예절을 굳게 지키는 것은다른 나라가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명〉 천자의 조정에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신하의 예절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김사형(金士衡)이 또한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먼 구석에 치우쳐 있고 산천도 험하지만 만약 제후로서의 법도를 삼가 지키면 누가 감히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이첨(李詹)이 〈군주의〉 아홉 가지 규범[九規]를 아뢰기를,
“첫째는 덕을 기르는 것[養德]입니다. 삼대(三代) 때 인군(人君)은 반드시 사(師)·부(傅)·보(保)의 관리를 두었는데, 사는 교훈으로써 인도하고 부는 덕의(德義)로써 돕고 보는 임금의 몸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서경(書經)』에서 이르기를,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를 두는데, 이 삼공(三公)은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며 음양을 고르게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역경(易經)』에서도 이르기를, ‘행동을 과감하게 하고, 덕을 기른다.’고 하고, 또한 이르기를, ‘언어를 신중히 하고 음식을 절제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일이 매우 가까우면서도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 음식과 언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언어가 천하에 있어서는 무릇 명령과 정교(政敎)가 되니,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 모두 신중하게 한다면 반드시 합당하여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먹는음식이 천하에 있어서는 무릇 재화[貨財]와 비용[資用]이 되므로, 사람들에게서 봉양받는 모든 것을 절약한다면 적당하여 손상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기르는 도리를 미루어 덕을 수양한다면 천하를 교양하는 것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도 근본이 없어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구하는 것은 알아도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을 알지는 못하고, 과실을 지적할 줄은 알아도 덕을 수양하는 것을 알지는 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경연관(經筵官)을 사(師)로 삼았으니, 마땅히 부(傅)·보(保)의 직임도 맡겨서 무릇 궁중의 언동(言動)과 복식(服食)모두를 경연관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실없는 말[戱言]과 지나친 거동을 때마다 간언하여 그치게 하고 일마다 잘못을 바로잡게 한다면, 가히 기질(氣質)을 함양하고 덕성을 도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매사를 염려해야 하는 것[慮事]입니다. 신이 듣건대 기미[幾]라는 것은움직임이 매우 작은 것이지만 선악(善惡)이 여기에서 나누어집니다. 대개 사람 마음이 미미하게 움직이면 천리(天理)가 응당 드러나게 되고, 사람의 욕구 또한 그 사이에서 싹이 터서 움직이게 됩니다. 『서경』에서 이르기를, ‘기미를 생각하고 〈그런 후에〉 편안함을 생각하라.’라고 하였고, 또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때를 생각하고 기미를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역경』에서 이르기를, ‘일을 할 때는 처음을 잘 도모하라.’라고 하였고, 또 ‘기미를 생각하라. 그렇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일에는 선후(先後)가 있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정밀하고 상세해야 함을 말합니다. 일과 물건[事物]이 잘 접촉한다고[應接] 하더라도 오로지 아는 분야에 더욱 성찰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일[事]이 질서를 잡게 되고 물건[物]이 조화롭게 되며 예악(禮樂)이 흥기하고 귀신(鬼神)이 감응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이와 반대로 될 것입니다. 아아! ‘염려하지 않고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라는 말은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아뢴 것이고, ‘선(善)을 생각하여 행동하십시오.’라고 한 말은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경계했던 것입니다. 지금 소신(小臣)이 아뢰는 이 말 역시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므로,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잘 헤아려 주십시오.
셋째는 허물을 고치는 것[改過]입니다. 『역경』의 익괘(益卦) 상(象)에서 이르기를, ‘군자는 선(善)을 보면 실천하고 허물이 있으면 고친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사람이라면 누구든 허물이 없겠습니까마는 허물이 있어도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은 없습니다. 옛날 성탕(成湯)은 허물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았고 공자(孔子)는 이르기를,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인주(人主)는 만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일국의 영화를 누리므로, 교만과 사치에 빨리 이르고 음란과 방탕이 쉽게 옵니다. 혹시라도 이를 잘 살피지 못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대신이 불가하다고 하면 마땅히 잘 살피시고 자기 것을 버리고 따르셔야 합니다. 만약에 억지로 그 말에 따라 ‘임시로 그렇게 하자’고 하면서 끝내 하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인색한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행하셨는데 성헌(省憲)이 불가하다고 하여도 잘 살피시고 자기 것을 버리고 따르셔야 합니다. 만약에 억지로 그 일을 따라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다.’라고 하면서 중지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꺼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허물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고, 그 허물을 고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옛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고쳤고, 지금의 군자는 허물이 있으면 그대로 둔다. 그대로 둘 뿐만 아니라 그 허물에 대하여 변명을 만들어 낸다.’라고 하였습니다. 자하(子夏)는 이르기를, ‘소인은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꾸며댄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털끝 하나라도 인색하고 꺼리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허물을 좋게 꾸며내다가 결국에는 잘못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그 마음 두실 곳을 삼가셔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근본을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만물의 근본이요, 만물은 또한 각기 스스로 근본이 있습니다. 한 개인으로 논하자면 몸은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오상(五常)으로 말하자면 효와 제(悌)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입니다. 천하국가(天下國家)로 논하자면, 성(誠)은 구경(九經)의 근본입니다. 또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농사는 백성을 기르는 근본입니다. 유자(有子)가 이르기를,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확립되면 도(道)가 생긴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무릇 예(禮)는 사치하는 데서 잃게 되고, 상(喪)은 쉽게 여기는 데서 잃게 되니, 그 근본은 바로 검소하고 슬퍼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인(仁)은 일시적으로 변통하는[姑息] 데에서 사라지고, 효(孝)는 너무 사이가 좋아서 예의가 없어지는[狎褻] 데에서 어그러지니, 그 근본은 사랑과 공경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인군이 반드시 근본을 돈독하게 하여 말폐를 억제한 이후에야 백성들이 투박(偸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법을 세워 폐단을 없애심으로써 새로운 정사를 펼치시니, 유사(有司)는 요역(徭役)을 덜어주고 음사(淫祀)를 금하도록 하는 의견을 아뢰었고, 또한 3년상을 행하여 마침[終]을 삼가는 의리를 돈독하게 하였지만, 검소하고 슬퍼하는 기풍이 진작된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전하께서는 죄수들이 억울하게 갇혀 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여러 번 관대한 은혜를 베푸시고 또한 안팎에 명령하여 비로소 가묘(家廟)를 설치하게 하여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를 권장하였으나 그 사랑과 공경의 결실을 도대체 알지 못하겠습니다. 법제의 부류도 이러한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무릇 윗사람들이 아랫사람을 부리게 하는 것은 믿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야말로 인군의 대보(大寶)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국대비(國大妃)께서 아직 건강하시어 병이 없으시니, 전하께서는 진실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시며 문왕(文王)과 같은 효를 행하시면 백성이 감화되어 공경할 것입니다. 평상시의 공어(供御)는 줄이도록 힘쓰시고 나아가 쓸데없는 낭비를 없애시며, 이에 급하지 않은 업무를 정지하시면 검소한 기풍이 일어날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효신전(孝愼殿)의 초상[遺像]이 엄연하니, 오르내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슬픔을 일으키신다면 조상을 애도하는 교화가 행해질 것입니다. 검소함과 슬퍼함, 사랑과 공경은 바로 상례(喪禮)와 인효(仁孝)의 근본이고, 신(信)이라는 한 글자는 검소함과 슬퍼함, 사랑과 공경의 근본이라 하겠습니다. 법제 중에서 미처 행해지지 못한 것은 몸소 행하시어 솔선해야 마땅한데, 금석(金石)처럼 굳게 하고, 사시(四時)처럼 믿음직스럽게 하며, 근본을 돈독하게 하는 교화에 힘쓰시고 말폐를 억제하는 법령을 행하면 가볍고 화려한 습속은 변할 수 있을 것이고, 뒤죽박죽하고 그릇된 풍속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여 주십시오.
다섯째는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것[謙己]입니다. 하늘의 도는 이지러지면 차고 더하여지면 덜어지는 법이고, 사람의 도는 넘치는 것을 싫어하고 조금 모자라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괘(卦)를 순서대로 할 때 대유(大有) 뒤에 겸(謙)으로 그것을 받게 하였습니다. 옛날 명철한 군주는 낮추면서 스스로를 다스리고 비우면서 만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높은 데 있어도 위태롭지 않고 가득 차도 넘치지 않아서 국운[國祚]을 길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와 반대인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매번 말씀하실 때마다 반드시 먼저 이르시길, ‘나는 불민하고 책도 읽지 않았으며 일에 경험도 없으니, 아는 것이 얼마나 충족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야말로 스스로를 알고 계시는 것이고 다른 이에게 자만하는 과실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니 사람들 역시 누가 선(善)을 가지고 즐겨 아뢰지 않겠습니까?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으니, 이 마음은 왕으로써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아직도 현릉(玄陵, 공민왕) 때를 기억하고 있는데, 정언(正言)이 되어서 ‘보평청(報平廳)에 나오시고 사관(史官)을 가까이 하십시오.’라는 소(䟽)를 갖추어 아뢴 적이 있습니다. 당시 토목공사를 일으켜서 영전(影殿)에 백성들을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는 펼쳐보지도 않으시고 반드시 이 일일 것이라 억측하시고 노기(怒氣)를 매우 강하게 띠셨습니다. 그러나 펴보시고 그것이 다른 일이었으므로 도리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루한 유자(儒者)의 얕은 말인 줄 굳게 알았을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기는 하셨지만, 이처럼 물정을 거꾸로 예측하여 적중하지 않았으며, 선한 말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였는데, 이것은 곧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다잡아 교만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겸손하게 굽히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으시면 겸손하고 또 겸손하게 되어서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바른 길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여섯째는 인을 베푸는 일[施仁]입니다. 인(仁)이라는 것은 천지가 만물을 살리는 마음으로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것입니다. 그 요체를 논하자면 오상(五常) 중 하나이고, 그 작용을 논하자면 사랑의 이치이며, 그것을 베푸는 방법을 논하자면 친친(親親)으로부터 백성을 어질게 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등분이 있는 것이니 뒤섞여서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나의 잘못은 〈너무〉 인자하다는 것에 있다.’라고 하시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것은 진실로 천지가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마음이고, 백성이 영원히 의지할 근본이지 과실이 아니다.’라고 봅니다. 다만 우유부단함과 과단성의 차이일 뿐이니, 비유하자면 인자함은 길의 시작이고, 우유부단함과 과단성은 두 갈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자함을 따라가다 과단성으로 나가면 수작 부리는 것에 적절하게 대응하게 되어 미혹되는 것이 없을 것이며, 우유부단함으로 들어가면 매사에 대응할 방법을 모르게 되어 끝내 잘못 시행하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인자하신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계시므로 일을 바르게 규율하는 의(義), 적절히 표현하는 예(禮), 시비를 가려내는 지(智)를 겸하여 행하시어 하루에 해야 할 많은 일들을 과단성 있게 해내신다면 백성은 편안하고 만물은 번성하여 사방에 수역(壽域)이 열릴 것입니다. 옛날 요(堯) 황제가 높은 덕을 밝혀서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고 백성을 공평히 하고 치세를 이룩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인을 베푸는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齊) 선왕(宣王)은 그의 공적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였는데도 집 앞을 지나가는 소 1마리를 차마 죽이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인이 순서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근본을 이미 잃었으니, 어찌 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요 황제를 본받으시고 제 선왕을 경계하여 우유부단함을 버리고 과단성을 취하시면 인을 베푸는 순서가 뒤섞이지 않을 것이고 인자함의 길이 어긋나지 않아 덕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째는 부류를 비교해보는 것[比類]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일찍이 정관(貞觀)의 다스림에 뜻을 두어 『정요(政要)』를 읽으신 것이 지금까지 2년입니다. 무릇 만물은 그 부류가 있기 때문에 비교하여 보면 서로 크게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종(太宗)이 돈황공(燉煌公)이 되었던 것은 전하께서 정창군(定昌君)이 되었을 때와 같고, 정관 원년(627)은 바로 전하께서 즉위하신 첫 해와 같습니다. 옛날 〈당 태종 때〉와 비교하면, 사형(死刑)이 태반이나 감소한 것은 곧 전하의 인자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로 황천(皇天)을 두려워하고 아래로 여러 신하들을 두렵게 여긴 것은 바로 전하께서 자신을 겸손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학사(學士)들을 데려다가 문적(文籍)을 강론한 것은 곧 전하께서 경연을 하시는 것이고, 황충(蝗蟲)을 여러 마리 삼킨 것은 바로 전하께서 가뭄을 걱정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쟁(諫諍)을 즐겨 듣는 것은 전하께서 구언(求言)하는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몸과 마음을 다해 지혜를 짜내어 실행하는 것은 〈당 태종 때〉 방현령(房玄齡) 같은 자가 있어서입니다. 지금 장막[帷幄]에서 전략을 세워 앉아서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두여회(杜如晦) 같은 자가 있어서입니다. 번거롭고 바쁜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대주(戴胄)와 같은 자가 있어서였고, 간쟁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는 것은 위징(魏徵)과 같은 자가 있어서였으며, 탁한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기르며 악행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것은 왕규(王珪)와 같은 자가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태종이 무덕(武德, 618~626년) 이전부터 사방을 경략하면서 전투에서 승리하여 공적을 취한 것은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와는 다릅니다. 또 수(隋)의 변란을 없애고 당 황실을 초창(草創)한 것은 전하께서 유일한 성씨로서 다시 〈왕업을〉 일으킨 것과는 다릅니다. 정관(貞觀, 627~649년) 연간에는 해마다 사형으로 처단한 자가 겨우 29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은 형벌에 걸려든 자가 많습니다. 〈당 태종이〉 홍문관(弘文館)에서 강론하면서 어떤 때는 한밤중까지 계속했지만 오늘날의 경연은 열기도 하지만 열지 않기도 합니다. 전하께서는 자신을 겸손하게 하시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과 사람들의 여망이 부합되지 않는지 염려하신 데서 나왔습니까? 전하께서 가뭄을 근심하는 것이 과연 만물을 잊고 병이 들 때까지 하셨습니까? 〈당〉 태종은 말년에 간언하는 것을 자못 싫어하는 뜻이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구언하시면서 과연 이와 같지 않으셨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아뢴 일은 천리 밖에서 마치 얼굴을 마주하면서 말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과연 방현령과 같습니까? 인의(仁義)를 권려하며 시행해서 크게 효과가 있었던 것이 과연 위징과 같습니까? 얼굴을 찌푸리는 것에 상관없이 간쟁하는 것이 과연 대주와 같습니까? 한마디 말로 인주를 감동시키는 것이 과연 왕규와 같습니까? 지금 이 부류와 비교해 보고 크게 차이나는 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 태종 말년에 위징이 상소하여 정관 초의 상황과 비교하여 잘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논한 것이 무릇 10조입니다. 오늘날은 곧 정관 초기이고, 오늘 이후는 곧 〈당 태종이〉 마무리를 잘 해내지 못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시작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지만 마무리를 잘 해내는 사람은 드물다.’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당 태종과 더불어 누가 낫다고 보십니까? 태종은 영명했지만 위징의 말은 이처럼 간절했다는 것을 신이 삼가 비교해 보았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잘 재량하십시오.
여덟째는 정사를 밝게 하는 것[明政]입니다. 상벌은 국가의 큰 권력입니다. 상이 공에 합당하면 천만 인을 권장할 수 있고 벌이 죄에 합당하면 천만 인이 두려워할 것이니, 너무 지나치게 행해진다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 현명하고 어진 왕이 조정에서 관작을 주고 저자에서 형을 집행할 때 반드시 대중과 함께 했기 때문에 상을 받은 자가 임금을 어질다고 하지 않았고 벌을 받은 자가 주상을 원망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공죄(功罪)에 합당하였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공도(公道)가 나날이 사라져 선한 일을 한 자라고 해서 꼭 상을 받지는 못했고 악한 일을 한 자라고 해서 꼭 죄를 받지는 않게 되자 베푸는 바가 혼탁해지고 시비가 어지러워졌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고금의 득실을 거울삼아 마음을 공평하고 바르게 갖는 것을 저울을 다루듯이 하므로 이곳은 낮고 저곳은 높게 되면서 달라지는 것이 있지는 않으므로, 상을 받은 자는 초목이 봄볕을 받은 듯이 스스로 생장하고 조화되며 자연스럽게 될 것이고, 벌을 받은 자는 온갖 풀이 가을 서리를 만나 저절로 마르고 시들어도 하늘이 침묵하듯 도태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賞)을 천명(天命)이라 하고, 형(刑)을 천토(天討)라고 합니다. 하늘이 상벌의 권력을 인군에게 주었다는 말은 인군이 된 자가 하늘을 대신하여 행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 천도(天道)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오늘날 사람들이 큰 득실이 없는 일을 두고 ‘동쪽도 좋고 서쪽도 좋다.’라고 하는데, 신이 삼가 생각하기를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것은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떠들어대며 사람을 속이려는 것일 뿐입니다. 무릇 천하의 이치는 공과 사가 있을 뿐이고, 천하의 도리는 선과 악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양립하여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향기로운 풀과 누린내 나는 풀, 얼음과 숯이 상반되는 것과 같은데, 이들을 두고 통칭하는 것이 옳습니까? 어떤 사람에 대해 논의하면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어떤 공이 있으니 상을 줄 만하지만, 어떤 죄가 있으니 벌을 줘야 한다.’고 한다면, 인주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공이 작고 죄가 크면그를 벌해야 옳고, 죄가 작고 공이 크면 그에게 상을 줘야 옳습니다. 그리고 공과 죄가 서로 대등하면 그것을 비교하여 정밀하게 따지고 나서 결단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줄 때에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마시고 과단성 있게 할 것을 힘쓰신다면 ‘동쪽도 좋고 서쪽도 좋다.’라는 말은 저절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그 해로움의 근원을 막고 이익의 근본을 여시며, 벌을 잘 드러내어 위엄을 보이시고 상을 밝게 하여 감화시키시옵소서. 그러면 위엄이 서서 악한 자가 두려워할 것이고, 감화가 행해져서 선한 자를 권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홉째는 왕업을 보존하는 것[保業]입니다. 국가는 소중한 보배[重器]인데, 얻기도 매우 어렵고 지키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덕을 닦고 인을 행함으로써 선왕의 왕업을 보존해야 할 따름입니다. 무릇 왕업을 보존하는 방법은 다른 게 아니라 큰집[巨室]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여기에 큰집을 가지고 있는데 장차 자손에게 전해주어 끝없는 규모가 되게 하려면 반드시 그 집터를 단단하게 하고,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 하며, 마룻대와 들보를 튼튼하게 하고, 그 지붕을 두껍게 덮으며, 울타리를 높게 치고, 빗장과 자물쇠를 단단하게 잠가야 합니다. 완성하면 또 자손 가운데 어진 사람을 선택하여 조심스럽게 지키게 하고 날마다 보살피고 달마다 살펴보아서 기운 것을 받쳐주고 허문 것을 보수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면 천백 년이 지나도 허물어지는 곳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백성은 나라의 집터이고, 예법은 기둥과 주춧돌입니다. 대신은 마룻대와 들보이고, 모든 관리는 지붕입니다. 장수는 울타리이며 군사[甲兵]는 빗장과 자물쇠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아침에 염려하고 저녁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인군은 조종의 성법(成法)을 삼가 지켜야 하는데, 안일하게 행동하여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참소와 아첨으로 인해 훼손시키지 않는다면 왕업은 대대로 이어져 무궁할 것입니다. 만약 안일하게 놀며 즐기다가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참소와 아첨 때문에 그것을 훼손한다면 신의 노여움과 백성들의 원망을 사 결국은 패망해 버리고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감히 옛 일을 끌어오지 않고 위조(僞朝)의 일로써 말씀드리기를 청합니다.
가짜 왕 신씨(僞辛, 우왕)가 시기심 많고 광포한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왕씨가 불운한 때를 당하여 우리의 소중한 보배를 훔쳐내어 함부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행했습니다. 또 국력을 헤아리지 않고 명분도 없이 군사를 내어 대국과 틈을 만들었으니 죄가 가득차고 악이 쌓여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가짜 왕 신씨가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공손히 하고 법도를 삼가 지켜서 대신이 회군한 힘과 정책의 공을 빌리지 않았다면 천명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전하의 오늘도 또한 기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기를, ‘은(殷)이 거울삼아야 할 것은 멀지 않으니, 바로 하후(夏后)의 치세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성조(聖祖)의 성헌을 따르고 위조의 패망한 전철을 경계하셔서 중흥의 대업을 보존하시고 후세의 기초를 다지신다면, 인도(人道)가 아래에서 순응할 것이고 천변(天變)은 위에서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였으나 어떤 일로 인해 계성(桂城)에 유배 되었다가 얼마 후에 석방되어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이 뒤부터는 본조[조선]의 기록으로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