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오픈의 막이 내렸습니다. 관중석이든 기자실이든 모두 "내년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툴툴 자리를 떠났습니다. 2008년 롤랑가로스와 영원히 안녕입니다.
'아비엥또(A bientot)'는 프랑스어로 "다음에 봐요"라는 뜻입니다.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영원한 맞수 로저 페더러(스위스)를 꺾고 역사적인 4연패를 이뤘고, 떠오르는 톱선수 디나라 사피나(러시아)와 맞붙었던 아나 이바노비치(세르비아)는 생애 첫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손에 쥐었습니다.
이 네사람은 테니스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러하겠지만 저에게는 특히 더 기억에 오래 남을 듯 하네요.
처음 취재하는 그랜드슬램으로 프랑스오픈을 택한 것은 붉은 앙투카가 주는 남다른 특별함과 개인적으로 파리라는 도시가 저의 이상향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머리와 가슴 속에 현실과는 다른 자신만의 무릉도원을 꿈꿉니다. 그것은 손에 닿지 않을수록 더욱 기대감이 커집니다. 제게 그 곳은 파리였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말도 안통하고(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안쓰기로 유명하죠) 길 찾기도 불편하고 물가도 비싸며 불친절한 파리지앵으로 고생길이 훤하다고들 했습니다.
신이 가장 기분 좋을 때 파리를 만들었고 가장 기분 나쁠 때 파리지앵을 만들었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더군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는 이곳에 머문 20일 동안 자신의 신념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파리사람들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하는 지를 알기에 다른 사람의 인격 또한 존중하는 것입니다.
테니스를 사랑하면 일년 내내 저축해서 프랑스오픈을 모두 관전하는 게 이사람들의 생활입니다. 연중 15일 휴가를 여름에 몰아 쓰지 않고 롤랑가로스를 위해 올인합니다.
프랑스오픈의 티켓은 60유로짜리 티켓이 암표로 둔갑하면 1000유로(약 160만원)까지 불립니다. 어느 암표상은 1200유로에 판 적도 있다며 자랑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얼굴 두꺼운 것도 신기하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그만큼 테니스에 열광하고 프랑스오픈에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열정이, 이들의 프라이드가 부럽습니다.
지난달 25일부터 어제 7일까지 대회 초반 사흘정도를 제외하면 롤랑가로스에 구름이 끼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어제 여자 결승에서도 빗방울이 계속 떨어졌었지요.
그런데 대회 마지막날인 8일, 오전에만도 찬기운이 느껴졌던 파리에 해가 눈부신 햇살을 비췄습니다. 마치 나달의 우승을 반기기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결승전은 싱거웠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나달의 일방적인 승부였습니다. 초반부터 나달의 무실세트 행보가 매서웠고 그만큼 4연패에 대한 기대도 커지긴 했지만 페더러와 또다시 결승에서 붙었을 때는 박빙의 승부전이 예상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같은 준우승이라지만 페더러의 경기력은 예전 같은 위력이 보이지 않아 씁쓸했습니다. 2세트에서 무너졌던 백핸드가 살아나 처음으로 브레이크에 성공하면서 한세트는 가져오겠지 하는 기대가 생겼지만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작년에 이어 또 우승컵 앞에서 고개 숙인 페더러를 볼 수밖에 없었죠. 저는 보지 못했지만 다른 기자는 페더러가 눈물을 보였다고 하더군요.
시상식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소감을 전하는 페더러는 그러나 유머까지 하며 축 늘어진 어깨에 힘을 주려 했습니다. 관중들 역시 우렁찬 박수와 환호로 패자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허나 나달은 우승자치고는 힘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제 이바노비치의 우승 때는 감격의 도가니에 허우적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으나 나달은 우승이 확정된 후에도 두손을 높이 들고 웃었을 뿐 힘찬 파이팅도 없었습니다.
엎치락 뒤치락 하는 풀세트 혈전이 아니어서 그런지 몰라도 오히려 노박 조코비치(세르비아)와의 4강전에서 더 활기찼던 것 같습니다. 승자의 고독이라 할까요, 마침내 이뤄냈다는 성취감에 돌연 허망함이 느껴진 것일까요.
아무리 김새는 결승전이었다 해도 프랑스오픈의 피날레 무대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큰 자부심이 될 듯합니다.
그랜드슬램 타이틀과 세계랭킹 1위까지 올라 일석이조를 달성한 이바노비치, 범상치 않은 실력과 멘탈로 세계 여자테니스를 이끌게 된 사피나, 그리고 프랑스오픈에 출전한 4년 모두 우승으로 마무리한 클레이의 황제 나달, 정상에서 패했지만 다시 도전이라는 글자를 마음에 새겼을 페더러.
그리고 프랑스오픈 축제에 참여해 혼신을 다해 뛴 선수들의 땀이 어려있는 앙투카를 병에 담으며 롤랑가로스의 문을 나섰습니다.
아직도 코끝에 앙투카의 쾌쾌함이 남아있는 듯 한데 이제는 서서히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아비엥또, 롤랑가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