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앙쑤언빈 베트남 사상첫 금메달안겨
동아일보스포츠에 따르면 리우올림픽 남자사격 10m 공기권총에서 베트남선수가 금메달을
따냈다. 이름은 호앙쑤언빈으로 올해 42살의 노장이다
202.5득점으로 금메달을 쥐었는데 이금메달은 베트남 사상 첫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는 스승과 어깨동무를 한채 역사적 성과를 달성한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감독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영어로 소감을 말했지만 감독님이라는 단어는 한국어로 말했다.
그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만들어 낸 스승은 바로 한국 사람이다
스승인 박충건 감독은 오래 50살로 한국국가대표 후보팀 감독과 경북체육회 감독등을 지냈다
이번 리우에서 10m 공기권총에서 호앙쑤언빈이 금메달을 차지하자 베트남국민들은 감격했다
누리꾼들이 시상식에서 자국 국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는 모습을 캡처해 SNS에 올리고 있다.
페이스북 캡처 박감독에 따르면 베트남의 사격스포츠는 환경이 열악하다
베트남의 정식 사격 선수는 주니어와 성인 선수를 합쳐 2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전자표적을 갖춘 사격장이 없다
그러다보니 올림픽등 국제대회와 같은 환경에서 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문에 박감독은 국제대회를 앞두고 베트남 선수들을 이끌고 한국에서 전지훈련을 해왔다
금메달의 주인공 호앙쑤언빈은 베트남 육군 대령출신이다
2006년부터 본격적인 선수활동을 시작해 10m공기권총 세계 랭킹 6위지만 올림픽 등 국제
대회에서는 좀처럼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10m 공기권총 9위에 그쳤고,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에서도 7위
에 머물렀다. 호앙쑤언빈은 최종 순위가 결정되는 결선에서 욕심을 내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은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날은 욕심내지 말고 안정적으로 경기를 하라는 박 감독의 지시를
따른 끝에 진종오(37·kt) 등 강력한 금메달 후보들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박감독의 금메달 비결은 호앙쑤언빈에게 결선에서 고득점을 노리지 말라는 거였다
방어적으로 경기를 하라고 주문한 것이 주효했다.
그 덕분에 브라질관중의 소음등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경기를 끌고 갈 수 있어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박감독은 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기쁘지만 진종오등 한국 선수들이 입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독일 사람인 울리 슈틸리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한국과
독일의올림픽 축구 경기를 앞두고 지금은 독일보다 한국을 응원하겠다고 말한 것을 봤다며
내게도 같은상황이 올 수 있을까라고 상상한 것이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깜짝 메달을 조국에 선사한 호앙쑤언빈은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베트남 공영방송 VTV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격대회에서 베트남 역사상 가장 값진 메달
을목에 걸었다고 보도했다. 베트남 국민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시상식에서
베트남국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올리거나, 베트남이 상위에 오른 올림픽 메달 순위표를 게재하며
기쁨을만끽하고 있다.
이들은 베트남 국기가 올림픽 메달 시상식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보니눈물이 쏟아
진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AFP통신은 호앙쑤언빈이 베트남 정부로부터 10만 달러(약 1억1130만 원)의 포상금을 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에 따르면 포상금은 베트남 직장인 평균 연봉(2100달러)의 48년 치에
가까운금액이다. 박감독은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이후 베트남 사격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경북체육회 감독일 때 베트남을 방문했다가 호앙쑤언빈 등 베트남 선수 중에 세계적 선수가 될
수있는 원석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며 베트남의 사격 환경은 좋지않지만 지도자로서 도전해볼
가치를찾았다고 한다
사상 첫금메달로 기쁨의 눈물을 만든 금메달도 한국인 스승을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결국 영웅도 시운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으로 명리학자이며 역사소설가인 권우상 글에
잘나타난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처음 상면하는 자리에서 "하루에 대궐을 드나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아는가?" 하고 묻자 한명회는 두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수양대군이 "어째서 두 사람이냐?" 하고 묻자
나으리에게 득이 되는 사람과 해가 되는 사람 두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 당시 대궐에는 하루에 2000 - 3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이 문답으로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가신으로 삼았고,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주도적인 인물로
수양대군이 왕위(세조)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신임을 얻어 영의정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과거시험에 8번
이나낙방하고 권근의 소개로 수양대군이 천거하여 경덕궁 궁지기에 들어간 한명회는 38살의
나이에영의정에 올라 예종 성종 3대에까지 영의정을 지냈으니 대단히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출중한 영웅, 호걸이라고 해도 좋은 스승이나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큰 인물
이 될 수 없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다음블르그
첫댓글 자랑스런 일이네요..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