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일기 지산유고를 좇아서
▣ 일 시 : 2007년 9월 23일(일)
▣ 산행지 : 충북알프스 1구간
▣ 인 원 : 4명
▣ 코 스 : 서원리 - 527봉 - 구병산 - 신선대 - 참샘골정상 - 장고개(15.7km)
* 110년전의 지산유고의 기록을 좇아 다섯달 만에 서원리를 다시 찾았다.
1889년 지산선생은 속리산 자락 상주군 화서면 금천으로 이거 스스로 錦樵山人 칭하고 은둔하였다. 1894년 동학이 창궐하자 제사족들과 천탁산에 들어가 성을 쌓고 집을 지어 피란을 하였고, 錦川洞約을 지어 동비들의 살육과 약탈을 막아냈다.
#지산유고 창의일기 중에서...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五日
二十五日 移陣于俗離下書院 院卽帳內 內洞一經東擾 燒戶未復 傷者甫起 不可住底
삼월 이십오일 陣(진)을 俗離山 아래 書院으로 옮겼다. 書院은 곧 帳內里이다. 內洞(안골)은 東學(동학)의 騷擾(소요)가 한번 지나가 집이 불타서 아직 복구되지 아니하였고 다친 사람들이 겨우(근근히) 일어나(거동하여) 맨 바닥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底:밑저, 맨바닦
·帳內里(장내리)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현재지명)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六日
二十六日 入妙幕 未至數里 聞敵兵追 後三路伏兵 而親監初項 追者不知幾何 而先入者 數十輩 若大隊當頭 則豈有殺 兵數十人 成功者哉 使之奪魄而走 因宿于妙幕
삼월 이십육일 妙幕(묘막)으로 들어가 아직 몇 리 이르지 아니하였을 때 敵兵(적병)이 追擊(추격)한다는 보고를 듣고, 뒤 세 길에 군사를 매복케 하고 몸소 첫 요해 처(목)를 살피니 추격하는 사람들이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수십 명의 무리였다. 大隊(만약 많은 적병)가 들이닥치면 어찌 偵探兵(정탐병) 수십 명을 죽여 공을 이루는 자가 있겠는가? 적병들로 하여금 넋을 잃고 달아나게 하였다. 인하여 妙幕(묘막)에서 묵었다.
·項:요해처. 요충지 ·大隊:군사 50명의 한 떼
·當頭:가까이 들이닥침.· 兵(점병):정탐병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七日
二十七日 踰葛嶺 抵高橋 問宗人秉禧 居喪中 大于壯岩李交河家 堤川召募將李華榮 執富人吳進士 與金都事 載前載後 余心不樂
先發至松面 松面近地 無一人 安業者細細 探得前到十輩 不知何許無名 而逢人必討逐戶 而索可駭 分付中營 捕捉不得 且聞 殺尙州首吏與申 中房云耳 進宿仙遊洞
삼월 이십칠일 葛嶺(갈령)을 넘어 高橋(고교)에 이르렀다.
宗人(종인) 秉禧(병희)를 찾아갔는데 喪中(상중)에 있었고 장암 李交河(이교하)의 집보다 컸다. 堤川(제천) 召募將(소모장) 李華榮(이화영)이 부자인 吳進士(오진사)와 金都事(김도사)를 잡아서 곧 앞서거니 곧 뒤서거니 하니 내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먼저 출발하여 松面(송면)에 도착했다. 松面(송면) 근방에는 한사람의 인적도 없었고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먼저 도착한 10여명의 무리를 찾아서 잡으려 했으나 어느 곳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름도 없으나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집에서 벌하여 내 쫓고 돈이나 물품을 억지로 취하니 가히 놀랄만한 일이라 중영에 분부하여 잡도록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또한 尙州(상주) 首吏(수리)와 申守令(원님)을 殺(총살)하였다고 中房(중방)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전진하여 先遊洞(선유동)에서 묵었다.
·首吏:이방아전.
· :원. 守令. 牧使. 府使. 郡守. 縣令등 지방 관아의 長.
·中房수령을 따라 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
상현서원 앞 주차장에 먼저 도착한 인석형과 산행의 날머리인 장고개에 차를 파킹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삼가터널을 지나자 만수계곡 입구는 버섯 불법채취를 막기 위해 주민이 지키고 있다. 구병리 를 지나 '갈골***'이라는 상호 간판이 눈을 멈추게 하였다. 막연하게 갈령 인근 마을 이라고 추측했던 내 생각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지산 의진은 1896년 3월 26일(음력) 서원리에서 산가 구병 갈곡을 지나 장고개를 넘어 묘막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실제 지명과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丙申年(1896년) 三月 二十九日
二十九日 移住葛谷
삼월 이십구일 陣(진)을 옮겨 葛谷(갈곡)에서 머물렀다.
나는 110년전으로 돌아가 의진의 장졸이 되어 서원리 들머리에서 첫봉우리인 527봉에 오릅니다. 작은 봉우리 둘을 지나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관기의 들녘을 주시합니다. 10시 방향으로 화령 의진이 있는 천탁산이 보이고, 오른쪽 후미로 보은 방면도 돌아봅니다. 동학도의 토벌로 이미 불에 타거나 폐허가 된 장내리와 서원리의 초가 몇채가 눈에 들어옵니다. 뒤를 돌아보니 상학봉에서 시작하는 속리산 서북능선이 묘봉, 관음봉, 문장대, 천황봉, 형제봉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구병산을 향해 걸으며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사위를 살핍니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산속으로 숨어든 의병장과 장졸들에게 위급함이 다가오고.... 진천 방면으로 진출한 참모장 허위는 고종이 벼슬을 내린다는 약속과 선유칙서를 받고, 의병대장인 지산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의진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절박했던 당시의 상황들을 잠시 머리 속에 그려봅니다.
능선 왼쪽은 '입찰지역 버섯채취금지'라는 찢어진 현수막이 어지럽게 걸려 있고, 간간이 몰래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산행을 하는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묻지도 않았는데 벌초하러 왔다고 괜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구병산에 도착하니 적암리에서 올라오는 산객들이 눈에 띠지만 명절 전이라 한가한 산행을 합니다. 구병산을 지나니 수원에서 충북알프스를 하러 왔다는 홀로 산객 한 분을 만나 장고개까지 일행이 됩니다. 신선대를 지나자 능선의 높낮이도 부드러워지고 헬기장을 지나 무명봉에서 방향이 왼쪽으로 꺾이고 고도가 가파르게 낮아집니다. 장고개에 도착하니 철조망에 철망까지 이중으로 설치해 잠시 우회하여 도로에 내려섭니다.
세상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100년이 넘은 이야기를 하는 내가 오히려 어색하기에, 갈골을 지나며 차를 세우고 싶지만 일행이 있어서 다음으로 미룹니다. 만수계곡 피앗재 산장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수원 홀로 산객을 보은에 내려준 다음, 대전에 도착하여 일행과 저녁을 먹고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 에필로그
구병산 정상에서 화령 본진이 있었다는 천탁산 아래 금천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장졸들을 위해 밥을 짓는 아낙들이 분주함이 눈에 선하다. 그 속에는 만삭의 증조모 진주강씨 금천댁도 끼여 있다. 이 곳은 택호가 금천댁이었던 증조 할머니의 친정 마을로 지금도 진주강씨 집성촌이다.
저는 당시 증조모 뱃속에 있던 분의 손자입니다. 한말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이곳을 다시 찾아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면서 그 분들의 결단과 기록이 조금도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 止山 이기찬(1853.10.12~1908. 1.13)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1896년 음(陰) 2월 10일 경북 김천(金泉)에서 허 위(許蔿)·조동석(趙東奭)·강무형(姜懋馨) 등과 함께 거의하여 금릉(金陵)을 점령하고, 포군(砲軍)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무장시킨 후 대장(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동석을 군문도총(軍門都摠)에, 강무형을 찬획(贊劃)에, 허 위를 참모장(參謀將)에 선임하여 진용을 갖춘 후 대구부(大邱部) 진공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관군이 먼저 출동하여 자신의 의진(義陣)의 하나였던 성주진(星州陣)을 공격하고 또한 적이 연합하여 대 공세를 펴게 되자 그의 진공계획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같은 해 4월 황제의 해병(解兵) 명령이 내리자 해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家狀(필사본, 1931. 6월 이강하 작성)
·지산유고(이기찬, 필사본) 제3권 일기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243·24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