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시복시성 기원 특별기획 - 이슬은 빛이 되어 (13) 순교지별로 살펴보는 124위 - 청주교구
세간, 목숨 버려도 천주교 배반 못해
- 원시보는 아내와 자식·친구들이 끌려가는 그를 울면서 따라오자 주님과 동정 마리아님을 만나는 데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며 모두를 돌려보낸다.(탁희성 작)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충청도 지역. 그래서인지 대전교구와 청주교구를 합한 충청도 지역에는 ‘순교성지’가 많다.
청주교구에는 당시 병영이 있던 청주를 중심으로 5명의 순교자가 이번 시복시성 대상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택됐다.
청주지역에서 자라고 순교한 하느님의 종
▲ 오반지(바오로) 순교자는 충청도 진천 반지(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의 집안 출신으로 청주에서 순교했다.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한 그는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도 다 날렸다.
오반지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마흔살이 지나서였는데 그는 이때부터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됐다고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체포돼 진천에 투옥됐다가 청주로 이송됐다.
- 오반지의 묘소. 충청도 진천의 반지 출신인 그는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진천의 지장골로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교회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체포돼 순교했다.
오반지가 옥중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해라.”
그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거한 뒤,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배교를 유도하기 위해 종이를 갖다 주자 ‘배교한다는 말은 쓸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때, 사형 집행인이 달려들어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였다. 1866년 3월 27일, 그가 순교한 뒤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전해진다.
- 옛 진천 동헌터 자리에 들어선 군청종합민원실 모습. 장 토마스 등이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이곳은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터라 할 수 있다.
▲ 장 토마스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경기도 수원 느지지에서 태어났으나 진천 배티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진천 관아로 압송돼 문초를 받았다.
관장이 장 토마스와 가족들을 위협하자 토마스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장 토마스는 청주로 이송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 당일, 그는 그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 “주님을 위해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했다.
장 토마스는 51세의 나이로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청주지역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 원시보와 배관겸 등이 형리들의 계속되는 매질을 이겨내지 못하고 순교한 청주병영(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 형리들의 계속되는 유혹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견디다 생명을 잃었다.
▲ 원시보(야고보)는 충청도 홍주 양인 집안 출신으로 60세가 다 돼서야 사촌동생 원시장(베드로)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시보’는 그의 관명이다.
본래 성품이 어질던 원시보는 입교하자마자 온갖 덕행을 실천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했고, 금요일마다 금식했으며,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했다.
1797년 정사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곧 체포돼 홍주로 압송됐다가 덕산으로 끌려와 두들겨 맞았고, 그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원시보는 병영이 있던 청주로 이송됐는데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이렇게 말했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도록 하게. 이성을 잃고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네.”
1799년 4월 17일, 원시보는 69세의 나이로 이어지는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다했는데 그의 육체가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약 50가족이 천주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해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눠줬던 ▲ 김사집(프란치스코), 온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돼서도 굳은 인내로 참아낸 ▲ 배관겸(프란치스코)도 모두 청주지역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며 쓰러진 순교자들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8일,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