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사제 대축일 맞아 알아 본 성인의 인간적인 면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대표하는 분일 뿐 아니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공경받고 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고 있지만 성인의 위대성 때문에 우리와 다른 인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성인의 인간적인 면면들을 그의 스승들의 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편집자]
건강 - 허약한 체질에 지병 달고 다녀
김대건 성인의 집안 생활은 박해시대 여느 신자들처럼 궁핍했다. 양반 출신인 부친 김제준(성인, 이냐시오, 1790-1839)이 단지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그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궁핍한 가정생활 탓인지 김대건은 어린 시절부터 발육 상태가 좋지 않았다. 키는 컸지만 영양 부족으로 인해 가슴앓이와 위장병, 요통, 두통을 달고 살았다. 또 가난에서 오는 병인 황달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신학교 스승인 리브와(1805-1872) 신부는 김대건의 건강을 염려하는 많은 편지들을 남겼다. 그중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1839년 8월 11일자)에서는 "불쌍한 (김대건) 안드레아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늘 위병과 두통과 요통을 앓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카락만 보더라도 큰 두통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18세) 그의 머리카락은 회색이며 흰색이고, 얼굴빛은 노랗습니다. 저는 일찍이 이렇게 추한 머리카락은 보지 못했습니다."
김대건은 청년이 되었어도 지병을 앓은 듯 하다. 그가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15일 서울에 도착했을 때도 바로 병석에 누워 고생한 사실이 반증해 준다.
신학생 시절 - 음치로 고생
김대건 성인은 마카오 신학교에서부터 부제품을 받은 중국 소팔가자를 거쳐, 상해에서 신품을 받을 때까지 르그레즈와, 칼레리, 리브와, 데플레슈, 메스트르, 베르뇌 신부와 페레올 주교 등 7명의 스승에게 신학을 배웠다.
신학교 교수 신부들은 김대건을 비롯한 최양업, 최방제 등 조선 신학생들의 자질을 높이 샀고, 이들의 교육에 애정을 보였다. 이들은 조선 신학생들이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건은 음악에 있어서는 음치 수준이었던 것 같다. 신학교 교장 칼레리 신부는 파리 신학교 트송 신부에게 보낸 편지(1837년 10월 4일자 서한 중)에서 "나의 조선 소년들의 목소리는 매우 깨지고 쉰 목소리일 뿐 아니라, 완전히 음정이 맞지 않는 목소리여서 교회 노래와 성가들을 가르쳐 그것을 좀 고쳐 볼까 한다"며 손 풍금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성격 - 결단성은 있으나 저돌적이고 즉흥적
스승들이 본 김대건 성인의 성격은 호기심이 강하고 무모할 만큼 저돌적이고 즉흥적이었으나 결단성이 있었고,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김 신부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신학교 교수 신부들로부터 '판단력'을 의심받기도 했다.
"그의 판단이 늘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데플레슈 신부는 난처해 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토마스 사이에 균형이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주교의 의향을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리브와 신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9년 8월 11일자 서한 중)
그의 즉흥적인 성격이 화를 부를 뻔한 사건도 있었다. 21살인 김대건이 1842년 12월 27일 책문에서 조선 밀사 김프란치스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어갔다 일주일만에 돌아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매스트르 신부는 이 사건에 대해 리브와 신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1843년 3월 1일자).
"안드레아는 밀사를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전진하지 말아야 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교우들을 만나면 곧 알리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열성에 자극되어 숙고하지 않고 경솔하게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국경을 넘은 그는 어떤 주막에서 조선인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관가에 고발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수호천사가 그를 보호해 주어 그를 1월 6일 제게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건은 매스트르 신부를 비롯한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행동에 있어서 주의 깊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매스트르 신부는 훗날 이 사건으로 "그는 참된 빛에 눈을 열기 시작했습니다."고 회고했다.(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43년 11월 21일 서한 중)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또 김대건이 선장으로 사공 한명과 목수, 농사꾼들로 구성된 12명이 가마니로 된 두 폭의 돛과 배 밑바닥에 구멍이 세 개나 뚫린 조각배 라파엘호를 타고 팔을 걷어붙이고 물을 밖으로 퍼내며 황해를 건너 중국 상해에 도착한 것을 보고는 놀라와 했다. (페레올 주교 ,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0월 29일자 서한 중)
하지만 이러한 그의 성격이 장점으로 큰 힘을 발휘할 때도 있었다. 라파엘 호가 조난돼 영국 선박에 구조를 받고 상해 인근 오송항에 도착했을 때다. 중국 관리들이 그들을 구금하려 하자 김 부제는 "중국으로 오는 조선 배에 대한 법의 조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당신들이 나를 괴롭히면 나도 당신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말썽을 일으키겠다, 중국인들이 도움을 거절하면 유럽인들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상해까지 조금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라파엘호를 타고 왔다.
그의 열정적 성격은 1845년 8월 17일 24살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은 후 사목활동에도 이어졌다. 1845년 10월 충남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한 후 1846년 6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될 때까지 8개월여간 활발한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는 서울 서대문구 미나리골과 무쇠막(서강), 남대문로 쪽우물골과 용인 지역 은인, 터골 등지에서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미나리골 김회장집에서 김대건을 교우 마리아는 "나는 김신부를 만났고 직접 영세와 견진을 받았다. 신부는 키가 컸으며 튼튼한 체격에 발랄한 성격으로 품격이 있는 얼굴이었고, 성사 집전에서 엄격했다"고 증언했다.(79위 시복조사 증거서)
[평화신문, 2001년 7월 8일,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