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지구상 인구 약 70억 된다고 한다,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 유교, 그 외도 잘 모르는 종교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그 못지 않고 믿거나 믿지 않거나 세상을 살아 가는데는 별 차이가 없다. 어느 종교나 그들의 신앙을 기초로 하는 교과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이란 책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는 베스트 중에 베스트이다, 전 세계 호텔에도 거의다 비치 되어 있으니 말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르 구분 할 수 있는데 예수 이전과 이후라고 보면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고 인간이 그 계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약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 그러니까 우리네 단군신화라고 해석하면 된다,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큰일날 소리지만, 신약은 예수 사후에 마가, 마태, 누가, 요한, 순으로 쓰여졌는데,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마태복음이 첫 머리에 수록 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순서에 따라 읽다 보면 줄거리가 가면갈수록 뻥튀겨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마가 복음에서는 예수가 고향에 돌아와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자,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예수를 미친 사람에서 예언자로 칭하며,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말로 마무리 된다. 이런 이유로 위 4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서로보고 배껴서 ?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뻥쟁이로는 의사였던 루가가 가장 뛰어난 성경작가 일 것이다. 성경이 아람어 히부리어로 쓰여?다가 그 당시 국제어였던 그리스어 회랍어 로마어 그리고 영어 우리말 번역 이런식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잘못 전달 된 것도 있을 것이고, 엉뚱한 번역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또한 예수가 실제로 전도 활동은 한 것은 일년 반 정도이며, 예수가 33세에 죽음을 당한 나이는 알렉산더 대왕의 죽은 나이와 맞추기 위해 만들어 졌다는 설이 있다,
기독교 교과서인 성경 보다는 해설서는 수 없이 많아 한 구절을 놓고도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쉬운 예로 예수가 12살에 예루살렘에 축제에 갔다가 돌아 오는 이야기 이후 전도 생활을 시작 할 서른 살 사이에 공백은 어디에도 없어 그 사이에 인도에 가서 수행을 하고 돌아 왔다는 설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도 지방에 예수와 마리아의 무덤까지 있다는 설까지. 예수가 형제가 있었냐는 문제도 천주교에서는 독생자로 보고 개신교에서는 야고보등 마리아 남편인 요셉의 자식들이 있어 형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않고 마호멧과 마찬가지로 예언자로 인정하고 있다.
예수를 신으로 보느냐, 인간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초기 기독교에서 피를 부르는 논쟁이었다. 결국 인간으로 왔다가 신으로 갔다는 주장이 최종 승자가 되고 말았지만,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은 말로 하느님과 예수는 동격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 곧 하나님은 한분이기 때문에 마호멧은 신의 전달자 곧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 기독교에는 야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게 그 소리지만, 이슬람에서도 모세, 오경은 받아들이고 있다, 뿌리가 같으면서도 오늘날 저렇게 싸우는 것을 보면 형제가 사이가 틀어지면 남보다 더 나빠진다는 우리네 속담이 생각난다.
예수가 아버지 없이 무정자로 태어 났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다 아는 이야기 이고, 일설에는 유대지방에 파견 되었던 로마 병사와 마리아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예수의 생물학적 친아버지 무덤이 현재 독일에 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천벌 받을 놈, 지옥에 갈 놈이라고 하겠지만, 석가, 예수, 공자, 여기서 소크라데스는 빼고, 삼대 성인만큼 인류에게 좋거나 나쁘거나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 세분이 자신을 추앙하는 교를 만들라고 한전은 없다. 세 분 사후 추종자들이 만들어 여기까지 온 것이지. 공자만 놓고 보더라도 공자를 본적도 없는 맹자가 논리를 만들어 한나라 통지 이념으로 계승 시킨 것이고, 예수를 본적도 없는 바올이 기독교 이론을 만든 것이지. 부처님 역시 자기 자신도 믿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전 세계인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록이 예수 이전 이후로 표기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독교 문명이 우리 구석 구석에
들어와 있음을 누구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예수는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일단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제주란 개념을 빼고 물론 이천년 전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과 다름 없을테지만, 초상화로 우리가 자주 보는 예수의 모습은 실제와는 분명 다를 것이다. 부처님의 모습이 시대의 상황과 다르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상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수가 태어 난 곳을 유대 땅, 갈릴리지방인데 차별 받는 곳,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사촌간이니 요한과 예수의 촌수는 육촌간인가, 하여튼 인척인것로 성경에서는 쓰여있다.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요한의 집에 머물었던 것은 아버지 없는 사생아를 집에서 낳기는 뭐해서 피신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상상해보면 아비 없이 태어난 예수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12살 때 예루살렘 축제에 아버지 어머니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삼일만에 예수를 잃어 버려 ?을러 갔다는 구절은 사흘씩이나 잃어 버린 것을 몰랐다는 이야긴데 상상이 가지 않는가, 예수가 말구유에서 태어나 아주 가난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여관에 방이 없어 그런 것이지 실제로는 그렇게 요셉의 생활이 어렵지 않다고 설명하는 설도 있다. 그 이유로는 요셉이 목수라는 전문직 종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 축제에 자주 갈 수 있었다는 것은 옛날로 치면 심심 산골에서 한양으로 나들이를 갔다는 것인데 그게 쉽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수가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것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글을 읽을 줄 알았지만, 직접 글을 쓴 기록은 간음한 여인을 구하는 사이에 땅 바닥에 무언가 쓰셨다는 기록이외는 없다. 예수 또한 의붓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목수일과 이런 저런 기술을 전수 받아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열심히 하루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층민들의 어려운 삶을 이해하고 분노 했을 것이다. 예수가 공생활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 되는데이 과정이 재미있다.
신약의 맨 처음 부분이 족보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족보라는 게 우리나라만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 족보라는 게 사실 거의 짝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은 우리가 더 잘 알지 않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을 가진 게 조선 중기를 지난 시점인데 양반 아닌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이럴진데 실은 거의가 상놈의 후손인데 그걸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지의 유비가 한나라 황제의 후손이라고 뻥치고 이 뻥이 먹혀 촉나라를 세우는 믿거름이 된 것을 보면 뻔한 가짜인 줄 알면서도 속임수가 먹히는 걸 보면 명품을 좋아하는 이유을 알 것 같다.
사실 예수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은 틀림 없겠지만 다윗왕과 솔로몬의 후손이라는 것은 유비가 자신을 직접 뻥친것과는 다르겠지만, 후세 성경 작가들이 지어낸 게 분명할 것이다. 예수와 세례자 요한과는 삶의 태도가 처음 부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이 경건주의자라면 예수는 실사구시 먹고 마시고 욕설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술주정 뱅이임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처음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인데 이로서 현재의 개신교 신자들이 술을 금기시 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세례자 요한은 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살았다라고 쓰여진 것을 보면 존경받을만한 사람임은 분명하나 사랑 받는 사람은 아니었던 게 아닐까?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성경작가들은 무척 고민스러웠을 것이다. 구세주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망설엿을 것이다. 이걸 기가막히게 뒤집는 구절을 소개 하겠다. 마태복음 11장, 사실은 예언자 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너 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길을 미리 딱아 놓으리라 하신 말씀은 이 사람을 가르킨 것이다. 분명히 말하자면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 보다는 크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랜드 러셀의 내가 기독교를 믿지않는 이유란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예수가 시장하여 무화과 나무 열매를 먹으러 나무에가 보니 열매가 없어 무화과 나무에 저주를 하여 무화가 나무가 죽어 버린 구절이 있는데 실은 계절이 무화과 열매가 열린 시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굿은 무화가 나무만 죽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태복음 18장 9 절, 마르코 9장 42절 루가 17장 1 절 죄의 유혹 이란 구절에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목에 연자멧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지는편이 오히려 날 것이다.
사람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는 사람은 두손과 두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 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던 그것을 빼어 던져버려라 이렇게 잔인한 것이라면 믿지 않겠노라고,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기독교 인구는 늘어나고 거리 거리에는 십자가 늘어가고 있지 않는가? 공자 유교의 논리가 가장 성한 나라가 조선이고, 불교 가장 성한 나라 중 하나가 한반도 아닌가. 이제 기독교가 가장 번성한 나라가 한국임에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드 부분에서는 약해도 소프트 부분에서는 감히 한국인만한 나라가 이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김일성 주체사상 마저도 이 땅에 젊은이들이 북 보다도 더 정교하게 만들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어 권력이 된 후 성경은 사제들의 전유물이 되어 일반인들은 성경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의사들이 독일어 영어로 처방전을 내어 일반인들이 알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라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구교에서는 루터가 죽을 때 얼굴 모습이 악마와 같았다고 전해져 내려 오는데 아마 의도적으로 만든 이야기가 분명 할 것이다. 이렇게 기득권이란 게 무서운 것이다. 유대교의 이단이 천주교이고 천주교의 이단이 개신교다. 현재 기독교인들은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한다. 통일교는 또 어느 교단을 이단이라고 만들까? 서구 문화의 이해는 성경을 모르고는 설명하기가 힘들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 불교가 젓어 들어있고 삼국지나 열국지를 읽어야 사자성어를 아는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성경을 한 번 쯤 읽을 필요가 여기에 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게 되는데 그 징표로 할례 즉 포경 수술을 받아야 했다. 자손의 번성
은 하느님께서 책임지시기로 하고 태어나면 8일 안에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이 할례는 사도 바올의 시대에 와서 이
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되는데이 과정에서 예수의 직계 제자들과 바올과 논쟁을 하여 사도 바올이 논쟁의 승자가 된다. 왜 이런 끔찍한 계약을 맺게 되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포경 수술을 받게되면 며칠동안 무척 힘들다는 것은 해 본 사람은 다 안다. 현대에 와서는 굳이 포경 수술을 하지 않는게 좋다고도 하고 성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꼭 포경 수술을 해야 된다고도 한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여기서 할례의 끔찍했던 구약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구약 창세기 34 장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과 레아 사이에 디나라는 딸이 태어났는데 상당한 미녀였던 모양이다. 디나가 나들이 나갔다가 가나안 족장의 아들에게 검탈 당하게 되는데, 이를 알게 된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를 다짐한다. 검탈을 하고 버린 것이 아니고 족장의 아들은 디나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는데 이런 걸 보아서는 검탈이 아니라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 한 건데 사랑을 이루기 위해 검탈이란 과속위반을 일부러 한게 아닐까? 하여튼 청혼을 받은 후 야곱의 아들들은 거짓으로 청혼에 응하고 그 조건으로 할례를 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믿고 족장의 부족은 모두 할례를 하고 아파서 끙끙 거리고 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은 칼을 들고 쳐들어가 남자란 남자는 싹 죽여 벼렸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하느님과의 약속을 이렇게 비겁한 방법으로 사용하다니 누이를 검탈하고 버린 것도 아닌데.
성서를 읽어 보지 않은 분들도 다윗과 골리앗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목동 소년 다윗이 적군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넉 다운 시킨 이야기.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어느 정도 정착하고 왕조가 시작 되는데 다윗은 사올왕의 딸 미가와 결혼하여 다윗왕조의 시작 된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세종대왕을 가장 훌륭한 왕으로 생각하듯이 다윗을 가장 훌롱한 왕으로 생각한다,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만 보아도 짐작 될 것이다. 다윗은 초기에 왕의 사위가 되고도 사올왕의 의심을 받아 고초를 많이 ?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취임식 때 성기를 드러내 보이는 짧은 옷을 입어 왕비 미가의 질책을 받고 그녀와 동침을 하지 않고 많은 후궁들로부터 배다른 자식을 많이 두게 된다.
다윗 왕이 어느 날 왕궁에서 산책을 하다가 밖을 내다 보는데 목욕하는 여인을 바라보게 되는데 그녀의 목욕하는모습에 상사 병을 앓는다, 다윗은 왕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그녀와 간음한다, 강제적인 것도 있었겠지만, 남편을 전쟁에 떠나 보내고 적절하던 차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그런 관계였던 것같다. 그녀의 이름 밧사바, 남편은 우라야, 다윗과 밧사바의 밀월 관계는 달콤하지만 결국 밧사바가 임신을 하니 이 문제를 어찌할꼬, 다윗은 음흉한 계략을 꾸민다, 전쟁에 나가 있는 우라야를 휴가내어 집에 돌아와 아내 밧사바와의 동침하도록, 이 알리바이 계획은 우직한 우라야가 지금 모두 전쟁에 나가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만 그런 즐거움은 가질 수 없다고 거절하여 실패한다,
다윗은 귀대하는 우라야에게 비밀봉합서신 한 장을
사령관에게 전하는데 그 비밀 서찰에는 우라야을 가장 치열한 전선으로 투입하여 죽게 만들라는, 우라야는 자신을 죽이라는 서찰을 들고
귀대하여 결국 사지에서 죽는다. 다윗과 밧사바는 우리 기준으로 보면 돌로 쳐 죽여도 시원치 않는 사악한 놈년이 아니겠는가? 아
불쌍한 우라야 조국을 위해 몸 바쳤건만, 이런 썩을 놈을 왕과 마누라 떼문에, 참 망할놈을 세상이다. 다윗과 밧사바와의 간음하여
낳은 자식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다,다윗은 약40년 간 왕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유대인의 하느님은 자신만 믿으면 이렇게 썩을 놈을 왕도 만들고 솔로몬 왕도 만들어 주시는데 안 믿고 베기겠는가?
구약에서는 모세, 신약에서는 예수. 삼국지로 치면 제갈공명과 조조가 주인공인 것 처럼 이 두 사람이 가장 중요한 포지션일 것이다.하느님께서는 계약을 참 좋아 하시는 것 같다. 유대인의 선조 아브라함과도 계약 하시더니 모세와도 계약하시는 걸 보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이다. 진도 앞 바다가 갈라진 것 처럼 홍해 바다도 갈라졌던 모양이다, 이집트에서 고생하고 있던 동족을 이끌고 홍해를 탈출한 것이다. 성서에서 모세란 이름은 물에서 건지다란 뜻이라고 한다. 12부족 가운데 레위 가문에서 태어난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손에서 자라 성인이 된다, 모세 나이 40세가 되어 우여곡절 끝에 사막으로 도망가 미디안 족의 제사장 딸 심보라와 결혼한다.
모세 나이 80이 되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는 유대 민중을 가나안으로 이주 시키라고, 모세가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 가다 야영 중 하느님의 습격(사탄의 습격이라고도 주장하는 설도 있음)을 받는다. 모세가 할례를 그 사이 안한 것인지. 아니면 모세의 자식들이 할례를 안한 것인지 하여튼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위기 상황에서 모세의 아내 심보라가 부싯돌로 모세의 성기를 잘랐는지 아들들의 성기를 잘랐는지 할례를 하여 위기 순간을 넘겼다고 성서는 전한다. 모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동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떠나는데 그 과정은 생략한다. 모세는 말더듬이었다고 전한다.
태생적 말더듬었는지. 아니면 이집트 왕궁에서 자라 모국어를 잃어 버린 것인지. 양설 다 맞는 것인 것 같다. 모세는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내 세운다. 모세를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 중에서 하느님을 직접본 유일한 사람이니까? 호렙산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십게명을 계약한다.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만나고 사십일이나 지난 것, 예수가 사탄의 유혹후 사십일간 광야에서 헤맨 것, 유사하지 않은가? 물론 모세가 본 하느님의 모습은 정면이 아니라 뒷 모습만 보았다고 기록 되어 있다. 모세가 이끌었던 이주민은 장정만 60만명이었다고 하니 가족 까지 합치면 200만명 정도라고 추정 된다.
이 많은 유민을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었을 것이다.법의 재정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을 것이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재판관을 세우라는 조언을 해 준다. 이 법을 만드는 과정이 지금 처럽 입법 기관이 있는 것도 아닐테고,또 그 법이 네가 뭔데 그래라고 한다면, 어떻게 집행 될 수 있겠는가? 가장 효울적인 방법은 여기에 모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자 봐라 여기에 계약판이 있다. 하느님과 약속한 증거물 누가 반대하겠는가? 시나이 산에서의 40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민중에게 나타나 하느님을 직접 뵙고 증거물을 가지고 나타난 모세 민중을 믿게 하고 이런 게 바로 지도자다,
설사 그게 사기라고 하여도, 물론 이 기만성은 개인적 이익을 탐하지 않을 때 빛나는 법이다.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통일 시킨다는 것, 이해가 가리라. 모세는 속 썩이는 동족을 이렇게 달래서 시나이 광야에서 40년간 유랑한다. 가나안 땅, 요단강 건너기 전 에리고란 곳에서 120세로 동족을 압제자에서 구출하여 해방 시키지만, 가나안 땅에는 눈으로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이런 인물이기에 영화나 소설로 끊임 없이 우리의 사랑을 받는 것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 이집트 왕(파라오)를 나쁜 사람으로 여기지만 실은 이 이집트 왕 파라오는 랍세스 2 세로 이집트가 가장 번영을 누렸던 시대의 뛰어난 왕이었다. 그래서 송사는 양쪽 말 다 들어 봐야 안다.
구약의 유다는 지금의 유태인의 적자다, 신약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예수의 12제자 중 한사람, 배반의 대명사다, 어떤면에서 신약의 유다는 억울한 칙면이 많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외경 정식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다 복음에 의하면 유다가 예수를 배반 한 것은 처음부터 예수의 계획에 의한 지시에 순응하였다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를 기록한 것만 보아도 마가 복음에는유다의 후일담이 없다. 그 다음 마태복음서에는 배반한 것에 대해 뉘우치고 자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이르면 내장이 터져 나와 비참하게 죽은 걸로 묘사되어있다. 점점 이야기가 부풀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억울한 신약의 유다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고 구약의 유다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유다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넷째 아들이다. 야곱은 첫 번째 여인에게 10명의 아들 두 번째 여인에게서 두 아들을 둔다. 두 번 째 여인의 소생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사람이란 사랑하는 여인의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같다. 사랑이 지냐쳤던 것일까? 배다른 형제들한테 싸가지가 없게 굴었던 것 같다. 잘난척하는 요셉을 골탕 먹이려던 형들은 요셉을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동물에 잡혀 먹혔다고 거짓말로 둘러댄다. 팔려간 요셉으로 인해 모세가 동족을 구하기 까지 40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이집트를 통치한 이집트인이나 종살이를 한 유대인들이나 같은 종족이다. 요셉이 꿈 해몽으로 총리까지 오르게 된다. 가뭄으로 인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오게 된 형들과 만나게 되고 요셉은 동복 동생 베나민을데리고 오라고 한다. 길을 떠나 올 때 아버지
야곱에게 꼭 베나민을 데리고 온다고 약속하고 요셉에게 오게 되는데, 요셉이 배나민을 인질로 삼으러 하자 유다가 나서 고향에 계신
아버님을 위해 베나민은 안되고 자신이 인질로 남겠다고 요셉에게 말하게 되고 그때서야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형제는 만나게
된다. 여기서 자기를 버리는 유다가 야곱의 적자가 되는 계기가 된다.
성경 바이불 성서 구약과 신약 이 방대한 분량을 읽어 본다는 것이 큰 마음 먹지 않으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하느님이란 존재를 믿는 기독교인과 그저 소설 읽어 보듯이 보는 사람과는 느낌이 다른 것이고,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성경을 하느님이 쓰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사람이 ?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지만,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 한다면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불지옥에 떨어뜨리거나 죄를 주는 하느님은 아닐 것이다. 구약의 과정도 죄짓고 나쁜 짓하는 사람을 적자로 삼고 살려 내시는 것만 보아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만큼 십자가가 많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유럽을 가 보아도 십자가가 이렇게 반짝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언제 부터인가 우리나라는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반기는게 십자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불과 200년도 안되는데, 종교라는 것이 기복사상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좀 지나친 게 우리의 현주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종교간의 갈등이 없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사찰에 칩입하여 불상을 깨뜨리거나 목탁을 깨버리고, 불을 지르는 몰지각한 짓을 하긴 하지만, 이렇게 극성스럽게 하느님을 찾는 것도 신앙심 이전에 우리네 국민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뜨겁던지 차던지, 구약의 경우 읽기에 지루한 부분도 있지만, 상당 부분 흥미진진하게 읽을 거리가 많다. 심하게 말하면 각권 떼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누구를 기다릴 때 소설 읽듯이 읽으면 재미도 있으려니와 지루함도 덜을 수 있어 일석이조다. 그냥 성경을 읽기 보다는 안내서를 참조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미리 안내서를 보고 떠난 것과 그냥 가서 보는 것과 차이가 있듯이, 사실 성경 해설서는 수 없이 많다, 골수 기독교 해설과 비판적인 것, 양쪽 다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헌령 비헌령이듯이 어떤 구절도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것은 동서고금 같은 이치다.
어느 종교건 독자적인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서로 미워하면서 담듯이. 기독교라고 예외일 수 없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당으로가 그 곳 주민들이 믿었던 바알신(농사의 신)의 일부를 받아 들였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브라함 이전의 인류문명의 시작 스메르 문명도 히다히트 문명도 면면히 이어와 받아 들였을 것이다, 문명 문화 서로 전하고 그걸 더 잘 받아 들이는 것이 이치다, 우리가 일본에 문자를 전파했다고 우쭐대는 것, 이런 유치한 생각은 진작 버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치면 우리가 중국에게 배워온 게 하나 둘인가, 그걸 받아 들이고 소화하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분명한 것은 종교란 게 애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언가 만들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만든 것이지.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가 중동 지방에서 출발한 것은 사막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었을까, 낯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사막속에서 누군간 의지하려는
마음이 신을 창조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고 사람이
하느님을 만들은 게 아닐까? 엄밀히 말해 불교는 기독교와는 본질상 다르다, 부처 자신이 자신을 절대로 믿지 말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말하는 자는 모르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는 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불교에서는 시주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에서는 십일조 헌금 또는 연보라는 이름으로 신자들에게 헌금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자발적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강요가 있다는 것도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십일조라는 유래는 어디서부터 시작 된 것인지 살펴 보기로 하자. 창세기 아담의 아들 카인과 아벨이 태어난다. 카인은 곡식을 하느님께 바쳤고 동생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을 예물을 드린다. 하느님께 곡식을 예물로 올린 카인은 하느님으로 부터 외면을 받고 아벨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하느님은 육식 예물을 더 좋아 하신 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제사장 살렘왕 아비멜렉에게 예물을 올린다. 12지파의 조상인 야곱이 하느님께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주면 예물을 올리겠다고 소당을 친다. 이 경우가 보통 우리네들이 내 소원을 이루어주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하는 경우다. 야곱의 첫 여인 레아가 르우벤, 시몬, 레위, 유다를 낳고 두 번째 여인라헬(레아의 동생) 실은 야곱이 처음에 사랑한 여인은 라헬이었다. 이 자신이 생산을 못하자 자기 몸종을 시켜 단과 남달리를 낳고, 레아도 질세라 자기 몸종으로 하여금갓과 아셀을 낳게하고, 다시 레아가 잇사갈과 즈불론을 낳고, 열받은 라엘이 요셉과 베나민을 낳는데, 야곱이 죽기 전 요셉이 낳은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그러나까 손자를 아들로 만들고 요셉은 12지파에서 빠진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입성한 후 12 지파에게 땅을 나눈다, 여기서 레위지파는 땅을 배분 받지 않고 제사직을 맏는 대신 나머지 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는다. 이게 십일조의 시초가 되는 부분이다. 십일조를 히브리어로 아이사르라고 하는데 십분의 일을 바치다란 뜻이라고 한다. 그 당시 우상 숭배자들도 십일조를 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십일조란게 기독교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십일조란 개념도 정확히 십일조가 아니고 유동성이 있었고, 나눈다는 개념이지 바치라는 개념은 아니었다. 그 당시 십일조의 품목은 옥수수, 기름, 참께, 대추, 야자,밀가루, 소, 말, 당나귀, 개인적으로 내기도 했지만 집단으로 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십일조 형태는 그리스 로마 중국등에서도 비슷한 제도가 행해졌다. 원래는 돈으로 내는 것은 금지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레위지파에게 내는 십일조가 진행과정에서 변질되어 레위지파는 결국 떠돌이가 된다. 현재에 와서 십일조 개념의 근거는 말라기를 근거로 하는데, 이게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여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은 경우 구원 받은 해방감을 느기지 못하고 두려움 속박되어 지낼 것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이런 경우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께 대한 순종을 구원과 해방을 추구하기 보다 10분의 1이라는 숫자에 집착하여 그것을 이루었을 때의 느끼는 해방감을 순종의 기쁨으로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부분은 조성기 소설가가 쓴 십일조에서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공인 된 후 서기 400년 되어서 십일조 제도가 탄생하고 교회는 급속히 타락의 길로 들어서 스스로 황금이란 우상 숭배 그렇게 하느님이 경계하던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근본 취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눈다는 의미로 생겼던 것인데 이게 변질되어 헌금을 안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것 처럼 사기를 치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종교 개혁을 한 것인데 오히려 신교가 헌금에는 더 광분하고 구교는 헌금을 그렇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다. 우리나라 어느 교회고 성당까지 포함해서 십자가를 설치하지 않은 교회란 상상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원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수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자신을 처형 하기 위한)를 지고 올라가는 장면이 신약에서 나오는 것은 거의가 알고 있다. 우리가 드라쿠라 영화나 악마와 싸울 시 십자가로 퇴지하는 장면들은 많이 보아 십자가가 악마를 퇴치하는 효험이 있는 것 처럼느끼고 있는데 실은 십자가 이렇게 사랑 받게 된 것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나서 부터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래 아버지와 선술집 여인 헬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 났다, 아버지가 죽은 후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가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정적 막센티우스와 서기 312 년 10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하 게 되는데 전쟁 전 십자가의 환영을 보았다고 한다, 이게 십자가였는지, 아니면 해가 질때 생기는 해무리였는지 는 알 수 없지만, 그 때 까지 박해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인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콘스타틴누스는 태양의 신 아폴로 숭배자였다, 이슬람 교는 금요일이 예배일이다, 안식교인들은 예배일이 토요일, 일반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는데 실은 이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들고 하루 쉰다는 의미로서 알고 있는데 선데이란 말이 해란 말이라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니까 태양 숭배일이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예배일이 된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가 국교가 된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그 때 까지 믿어 왔던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함께 믿어도 좋다는 의미의 종교 중 하나였던 것이다. 콘스타틴누스는 자기 아들과 후처가 간통하였다 하여 아들과 후처를 죽인다. 그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한 것은 예수를 믿어서가 아니고 통치술로 받아 들인 것이 주된 이유였던 것이다.
조지 부시가 이락을 침공시 내걸었던
전쟁신 그리스도의 원형이 콘스타틴누스다, 이게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평화를 원했던 예수를 박해를 풀어 주는 대신
전쟁의 깃발을 들게 만든 장본인이 콘스탄틴누스 황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니케아 종교회의 기독교가 자유를 얻은 대신 영혼을
팔아 버리는 시초라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기독교가 더욱 타락하는 시기는 서기 500년 서기 1200년
면죄부를 팔고 사제들이 부를 부를 축적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그 사이 아리우스파와 반 아리우스파의 피비린낸나는 노선 투쟁이
생긴다, 예수를 하느님과 같이 볼 것인가 하느님과는 대등하지 않게 볼 것인가? 최종승자는 반아리우스파가 승자가 된다, 이게 소위
삼위일체다, 성부와 성자, 성령, 이 논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 정립되고 이단교였던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모는
가해자의 입장이 된다. 서기 4 세기 까지는 십자가는 그리스도 교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시 생각하지 않았다.
기원 후 예수만큼 영향을 많이 끼친 인물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만 보아도 그 피해를 짐작 하고도 남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의 역사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수도 그 당시의 사람이었음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 자신도 율법을 지킨 유대인이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 성경도 원본은 없다, 수 없이 변해 내려온 사본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 고쳐서 전해 내려 온 것이다. 신약이 탄생 한 것은 예수가 4세기가 넘은 이후이고 그것도 지금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예수 사후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는 치열한 논쟁이었다. 양자설, 하느님께서 양자로 받았들였다는 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예수는 요셉과 마리아에 사이에서 요셉의 정자를 받아 태어나 세례를 받아들임으로서 하느님의 양자가 되었다고 주장함, 이 설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과는 다른 두 하느님이라는 설 때문에 배척을 받게 된다, 가현설, 예수는 인간이 아니고 처음부터 신인데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느님의 예정 된 계획으로 십자가에 희생되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설, 이 설은 예수가 철저히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만민을 속죄하기 위해 희생양이 되었다는 소위 부활론에 밀리게 되어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고 다시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셨다는 설이 최종 승자가 되어 오늘날의 기독교이 논리가 된다.
부활이 없으면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겠는가? 이 걍력한 메시지는 사도 바올의 주장이다, 이 부활론은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을 예수 탄생일 보다 더 중요하게 행사를 치룬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인들 중 실제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30%도 안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부터 탄압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우리가 아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로마가 그리스도를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 신봉자들이 이제 까지 로마가 믿어 온 다신교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까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현세만 믿었지 내세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초기에는 그렇고 그런 교들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박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당 부분 과장 된면이 있다, 물론 순교자가 생기고 네로시대에 치안의 불안을 그리스도교인에게 뒤집어 씌우기는 했지만, 우리가 상상하던 그런 끔찍한 박해는 아니었다. 예수가 하느님이고 하느님이 곧 예수라는 이 논리는 사실 받아들이기 쉽지는 않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나 보다 못나서 받아들이겠는가?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구약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교는 믿음으로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니 하여튼 믿으면 구원 받고 복도 준다는데 안 믿고 베기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9원 보다는 1원을 보태 십원을 주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영통신법이 있으니 모두들 명심하라......
첫댓글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영원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변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도할수있다. 그렇다면 이세상에 만약 변하지 않는게 있다면 그것은 영원하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에 보면〈에너지 불변의 변칙〉이라는 게 있다. 모든 존 재는 형체는 변할지라도 그 본질인 에너지는 변치 않는다는 방법이다. 우리의 생명 에너지도 그와 같다. 생명 에너지는 불변이다. 생명(love) 은 영원한 것이다. 그것 이 바로 우리 마음의 본질이다.
우리의 본체는, 본질과 핵심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정신이고, 바로 우리의 영혼이다. 영혼을 중요시하고 마음의 법칙을 따르는 자만이, 진정 행복과 풍요와 성공을 쟁취할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나 덧없는 허공을 향해 헛발질하는 우를 범하지 말지어다.
경암선생님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