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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5장 22-24절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성령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이 마치 외과 의사와 내과 의사의 역할을 하는데 외과 의사인 경우엔 환자들의 외적인 부분을 보면서 치료 하고 내과 의사인 경우에 환자의 내부의 상태를 파악하여 치료하고자 하듯 성령도 때론 인간의 외적인 부분에 대해 치료하기도 하고 내적인 부분에 대해 치료하기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안과 밖 모두를 치료하기도 한다. 성령이 외과 의사처럼 어떤 사람의 외적인 것들 즉 그 사람이 쓰는 말과 그 사람이 하는 거친 행동을 잔잔케 온화하게 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하시고, 또 성령이 내과 의사처럼 그사람의 부패한 생각 좌절과 낙심과 절망의 마음, 깊은 영혼의 상처등을 고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또 그렇게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고쳐내기도 한다.성도를 위한 칼빈주의 해설, 13장 성령의 내재 편 참조
1.성령에 9가지 열매는 믿은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시겠다고 말씀했다. 예수는 그 말씀의 성취자로 오순절날에 성령으로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했다. 이 때 임한 성령은 모인 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했고 모인 그들은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던 예수님의 삶을 지속적으로 현실감과 생동감있는 상태로 능력있게 경험 하였고 예수를 믿는데에서 그치지 않고 예수를 전파하지 않으면 안되며 상황에 따라 목숨까지 위협하는 환경을 초월했다 그들 모두는 예수를 닮아 가려고 하였고 자신의 삶전체를 통해서 일평생 예수만을 자랑하고 예수로 인해서 살았다. 바울은 갈2:20절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묘사한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의 열매들은 예수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묘사라고 말한다. [약간의 편집자의 첨가가 있지만 그의 주장은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성령께서 모든 죄인들의 내적 성품과 외적인 행동들의 모든 것을 전인적으로 치료하여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그것은 성령의 내재하신 결과들이다. 육체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전문의를 만나 고침을 받아 건강을 지속시켜 나가듯 모든 죄인들은 성령의 내재 하신 경험을 통해서
영적 치유함을 받고 영적 회복을 얻어 살아야 한다.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은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 동의한다. 신자가 성령 체험을 했다고 하면 성령의 열매들인 9가지 열매들의 모습으로 표출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예외가 없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해 귀신을 쫒아내고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는 일들을 할수 있을 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너희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귀신이 쫒아나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을 했다. 즉 성령의 내재하심이란 성도의 성화에 밀접한 부분으로 해석해야 한다.
2.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에 9가지 열매입니다
먼저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예수님에 대한 묘사이며 성도들이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가장 염두해 두어야 하는 부분이 되어져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도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인데 왜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것이야 말로 복음의 요체이며 실체라고 말을 하고 있는지를 살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3-14장을 읽어 보면 현재 “터키” 지역이 성경에 등장 하는 지명이 갈라디아입니다 갈라디아는 넓은 지역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구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입어 이 지역 여러 곳을 방문 했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은 200년 전 조선과 같이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설교 할 때 구약의 내용을 쉽게 이해 시켜 예수를 믿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구약 창세기 11장부터 등장한 아브람이라는 인물은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복 주시고자 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고 그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성취 하심 대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며 하나님이라고 사도 바울은 힘차게 전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기 위해 그를 선택했는데 너희들[갈라디아인]도 그 복을 받으려면 약속대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 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에 계시면 다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도 하였습니다.
갈3장 7-9절, 26-29절의 기록은 바로 그런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수 있는데 그것은 구약의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한 내용인데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예수님에 대한 묘사이기에 우리도 성령 안에서 예수를 믿으면 이런 열매들을 맺히는 삶을 살수 있다고 했고 둘째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복은 곧 예수를 모든 사람들이 믿을 때 성취되는 것이며,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고 바울이 주장하는 예수 믿는 삶의 핵심이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로 하였는데 그 복이란 구원과 생명으로 아브라함 개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사모하고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된다면 바로 이런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을 우리들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이방인들에게도 주시는 복이며 오늘날 모든 이방 교회는 이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해주는 것은 교회의 기능인들 길러 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통해 예수의 사랑을 받게 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복된 자녀들과 친밀한 관계성 회복에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 하심은 권능을 받는 것이고, 복음 사역을 할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의 사역과 함께 신자의 내적인 변화, 도덕과 윤리의 변화까지 포함 하는 것이 성령의 권능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이는 교회 사역에만 성령이 역사 하시고 개인의 윤리도덕적인 면에는 장담할 수 없다 라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 않다. 성령은 한 개인 전체의 성화에 개입 합니다.
3.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율법 주의자들
이제 갈라디아 1-4장에 나오는 저주 받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질책 하고 있는 부분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갈5장22-24절이 나오게 하는 원인 제공이 됩니다. 갈라디아인 지역안에 정통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 들어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만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구약의 율법주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할례와 안식일 준수와 여러 가지 구약의 율법들을 준수함으로 인해서 갈라디아인들도 온전하게 예수를 믿을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생활로 돌아 가지 않으려면 율법 준수가 필수적인 일이라고 하면서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반면, 어떤 율법도 폐기 되어야 한다고 하는 율법페기론주의자들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예수는 율법도 완전히 폐기 하지 않았고 오히려 구약의 율법은 더 완성 했으나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지금도 준수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이 허라된 것은 몽학선생이라고 바울사도는 언급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구약의 율법을 당장 폐기하자로 하는 자들의 주장을 방어합니다. 반면에 율법이 믿음의 요체가 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율법을 지속적으로 지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방어하기 위한 말입니다.
바울은 갈2:20절과 함께 이런 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갈5장에 있는 성령의 9가지 열매로 살아가는 예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으로, 성령에 의해, 성령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다른 복음의 저주 아래에 놓이지 않는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갈라디아서를 성령을 전면에 내세워 해석해 볼수 있습니다.
갈1장 4절에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의 몸”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외에 다른 희생제물[짐승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다라는 말입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요구하는 희생과 속죄제물들을 제단과 성전으로 다시 가지고와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서 속죄함을 받아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제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런 율법주의자들은 저주 받을 짓이라고 강하게 반박하면서 갈라디아인들이 거기에 현혹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만약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처럼 유대교에 있었다면, 절대로 예수를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예수를 만난 뒤로 예수의 제자들을 순차적으로 만났다고 말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만난뒤로 그 이후 광야에 있다가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와 사도들를 만났고 그 이후 14년 후에는 바나바와 함께 이방 복음을 위해 나아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헬라 사람 “디도”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유대교의 교리를 어긴것이지만 나는 유대교인이 아니라 예수교인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할례”를 시켜야 유대교에 입교 하게 되는데 바울 자신은 유대교의 사도가 아니라 예수교의 사도이기에 억지로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들이 두렵고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싫어하는 일일지라도 복음이 아니기에 거절했고 행동으로 그렇게 했다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수제자라고 할수 있는 베드로까지 율법주의자들이 꺼려하는 일들에 겁을 먹어서 외식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가감 없이 책망까지 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않는 자들과 식사하다가 야고보편의 제자들에게 발각이 되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사를 하지 않는 것처럼 외식한 것을 책망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베드로야 너는 유대인이면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 하면서 왜 이방인에게 유대인처럼 억지로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동의 하려느냐 그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 암아서 십자가에 죽어 버린 자들인데, 왜 율법에 죽은 자들처럼 살려고 하느냐? 그렇게 베드로의 외식함을 책망했다고 갈라디아인들에게 말합니다.
이 말은, 왜? 모세를 통해 준 율법을 위해 생명을 바치려고 하느냐? 율법에 생명을 던지면서 어떻게 예수를 위해 함께 생명을 던질수 있느냐?
그런 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기에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었지 않느냐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었느냐?
구약의 아브라함도 율법이 오기도 전 430년 전에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믿고 의롭게 되었던 것이 아니냐 그런데 율법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죄없인 예수도 가장 저주받은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만약 율법주의자들에 가담하여 우리도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면 우리는 도무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 된다. 어떻게 저주 받은 사람을 구세주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예수는 율법이 그렇게 정죄하는 십자가에 달려 가장 저주 받은 사람이지 않는가
그런데 율법의 저주인 나무 십자가위에 죽은 예수를 믿으라고 어떻게 말할수 있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저주의 십자가위에서 실제로 죽었으나 3일 후에 부활하여서 율법의 저주를 부수고 자신을 저주한 베드로와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사랑해주시고 사명을 주면서 승천하시고 재림한다고 약속했기에 그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은 430년 이후에 모세를 통해서 온 율법 또 그 축복을 폐기 시키지 못하였다. 약속은 율법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며 믿음도 역시 법 위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 가장 큰 법은 성령의 9가지 열매의 법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하나님이 보낸 약속에 의해 갈4:4절 때가차서 이땅에 오셨다.
자 그럼 이제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서 준 율법이 폐기되고 완전히 필요 없는 것이냐?
아니다. 그 율법은 믿음의 약속인 예수가 올때까지 초등교사였다.
보조교사라는 말이다. 그런데 초등교사의 말을 듣고 진자교사인 예수의 가르침을 모르고 아직도 갈4:10절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우를 범하니”
바울은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의 저주로 들어가려느냐.
바울은
갈5장 5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 예수 안에서 무할례자들도 믿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할례의 짐을 매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바울은
갈5장 16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 성령은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심판이 무엇인지, 예수를 믿게 하고 예수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야 한다
[결론]
갈 5장 22-24절의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라고 하는 말에 동의합니다. 삼위일체 이해를 하게 되면 성령은 곧 예수님이 본체와 같은 분이시며, 성령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오순절이후 지상위에 예수를 믿도록 하고 예수와 함께 살도록 하는 일을 하고 모든 것을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주의자도 문제이고 율법 폐기론자들도 교회안에 있다면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이런 다른 복음은 과거 갈라디아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에 의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이 성경적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사한 일도 역시 논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으로 믿음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됩니다.
성령은 사역자들에게 권능의 힘을 주기도 하지만 성도의 성화에 직접 개입을 하는 일에 주도적입니다. 성도의 성화는 죽음이 올때까지 실행되는 일입니다. 죄없이 살수 없고 죄가 우리를 늘 유혹합니다. 롬7장의 바울이 고백하는 것과 같이 죄의 법이 계속 됩니다. 갈5장 22-24절의 “예수의 아름다운 묘사인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날마다 나의 삶속에서 펼쳐지도록 제일 먼저 일상에서 우리는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이 내 안에 성령으로 함께 내재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현세적인 기복적인 것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인해 내가 더욱더 성화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멘 [인천서구 심곡동 엘림교회 주흥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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