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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2 베트남 참전전용사 임동춘 태극무공훈장
조동화의 벗님들!
춘삼월 春三月 새생명이 움트는 만물이 태동하는 희망의 계절 3월이 왔습니다.
춘삼월 듣기만 하여도 포근한 바람과 기분 좋은 꽃향기가 불어옵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삶속에서 아침을 먹고, 아랫목에서 누워서 둥굴 둥굴 누워서 망중한 하다가 오후에 모현공원으로 나가 걷기운동 1만보하고 모현근린생활공원 모종부근 운동기구 있는곳에서 훌라후푸(hula-hoop) 5000회(50분) 역기내리기 60회로 체력연마 했으니, 천연보약 먹은거지요.
오후 늦은시간에 전형무동생 초청으로 최상열회장 조동화 만나 착한아구에서 저녁을 같이 했는데,
자유인 조동화는 1972년4월 베트남 안케패스전투에 무전병으로 참전했던 조동화의 오랜친구 최상열님의 이야기를 하고자 혀.
조동화의 오랜친구 최상열님은 베트남 참전전용사로서 전투수당을 한푼도 쓰지않고 부모님에게 집으로 송금 세동생들 학비로 충당, 동생들과 우애가 대단하였다.
최상열님은 1947년 김제 진봉면 가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후 살아 돌아와 철도에 취직 기관사직무를 수행하여 100만키로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존경하는 최상열님은 친목회를 같이하며 회장을 맡고 있다.
1972년4월 베트남 안케패스전투로 돌아가 맹호기갑연대 2중대 최상열 무전병이 있었으며, 2중대1소대장 임동춘 중위가 안케패스전투 참전하여 장렬히 산화하였다.
임동춘 2중대1소대장은 1949년 전북 김제 부량에서 태어나 김제 죽산고등학교를 졸업후 국군 보병학교 간부후보생 230기로 입교했다.
1969년 8월, 육군 소위로 임관 이후 서부전선 소대장과 제2하사관 학교 교관을 거쳐 1971년 8월 31일 파월되어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2중대 1소대장을 역임했다.
1972년 4월 22일 베트남 638고지(안케페스) 전투에 중위로서 수도사단 1기갑연대 2중대 1소대장으로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1972년 4월 21일은 작전이 개시된 지 10일이 지났으나 2대대의 전투는 답보 상태에 있었다. 22일 08시에 드디어 2중대가 공격의 전면에 나섰다. 10시와 13시에 두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5시부터 개시된 3차 공격에는 ‘도람’작전이 전개되었다. 2명이 1개조가 되어 밀고 올라가는 원시적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안케계곡의 경사도와 나무뿌리, 돌부리 등으로 도람작전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5시 10분의 4차 공격시에는 중대장은 소대장 위치에, 소대장은 분대장 위치에, 분대장은 제일 선두에서 공격하였다. 18시 15분경 드디어 1소대장이던 임동춘 중위가 적의 제1선 진지에 직접 수류탄을 투척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임동춘 중위는 적 B-40 파편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래도 중위는 굴하지 않고 제2선을 향해 계속 돌진하였다. 이번에는 돌진중 적의 저격을 받아 소대원 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중위는 필사의 정신으로 공격의 선두에 서서 적진을 돌파하고 전사하였다. 전사 후 대위로 추서되었으며, 1972년 5월 3일에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조동화의 벗님들!
부질없는 인생길,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면서 천천히 너그럽고 여유있게 한세상 살아가야지요.
다둑 다둑하며 그려려니 웃으며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는것이 현명한 삶이여.
편리하고 아름다운 스마트세상 즐겁게 삶을 여행하자구.
감사합니다.
건강합시다.
<조동화의 오랜친구 최상열님은 철도기관사로서 무사고 안전운행 100만키로를 돌파하여 2004.11.4. 임승수소장님으로부터 철도청장이 보내준 기념패와 표창장을 수여받고 있다.>
<월남참전용사 조동화의 오랜친구 최상열님!
이역만리 월남땅 1971년4.11-4.22까지 10여일간 진행된 안케패스 638고지 탈환 전투에서 제2중대 제3소대장 임동춘 중위가 이끄는 무전병으로 참가, 악전고투를 이기고 하늘의 뜻으로 살아 돌아오신 최상열회장님을 존경합니다.
죽산 출신 제2중대 소대장 임동춘 중위는 1972.4.22. 안케전투에서 사망하였다.
전사 후 대위로 추서되었으며, 1972년 5월 3일에는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고, 육군보병학교에 그의 동상을 세워 후배들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또한 2006년부터 “동춘상”을 제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소대장에게 수여하고 있다.
태극무공훈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무공훈장으로, 전시나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됩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무공훈장으로,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로 여겨집니다
●무공훈장의 등급
무공훈장은 전시나 비상사태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되며, 5등급으로 나누어집니다
-1등급: 태극무공훈장
-2등급: 을지무공훈장
-3등급: 충무무공훈장
-4등급: 화랑무공훈장
-5등급: 인헌무공훈장>
☞안케패스 전투
1. 안케패스 전투의 시작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격전지의 광경을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다.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절박한 상황보고와 포신이 휘도록 쏘아대는 포탄의 굉음, 피아간에 무차별 발사하는 소화기 소리에 엉킨 함성, Gun Ship과 Air Strike의 폭음이 어울어져 험준한 안케패스 일대는 국군의 맹렬한 공격과 월맹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극한상황 곳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월맹의 춘계 대공세가 시작되면서 인근에 있는 콤툼 지역까지도 위협을 받아 왔지만, 유독 맹호지역만은 잠잠했었는데 지난 4월 11일 안케패스의 보루인 기갑연대 제1중대 기지에 월맹군의 세이파 공격을 시작으로 적은 감히 우리 맹호에게까지도 접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거듭 해왔던 관계로 그들의 공격 기세는 대단했었다. 그러나 우리 “맹호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돌파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맹호의 전술기지를 습격하는 첫 시도가 좌절되자, 적들은 발악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638고지 정상에 완벽한 방어진지를 구축함으로써, 중부월남 고원 지대의 가장 중요한 보급로인 19번 로도를 차단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안케패스의 638고지는 수많은 주검들이 쌓이고, 수많은 신화를 만들어낸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안케패스 전투에서 자유의 수호신으로 값지게 산화한 故 임동춘 대위의 용전상은 우리들 가슴에 깊이 새겨져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2. 제2중대 제3소대장 임동춘 중위
故 임동춘 대위는 1969년 8월 30일 갑종 간부 230기로 임관하여, 서부전선의 소대장과 제2하사관 학교 교관을 거쳐 ‘71년 8월 31일에 파월 되었으며, 기갑연대 제2중대 제3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평소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솔선수범하는 모범 소대장으로써 부하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이에 따라 제3소대는 중대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소대였다.
한편 638고지의 쟁탈전이 전개되자, 금명간 제2중대에도 638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출동명령이 내려질 것으로 예견되고 있었다. 당시 제2중대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638고지의 동남방에 근접하여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2중대의 장병들은 요즈음 며칠 동안에 걸쳐 전개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앞으로 제2중대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 중대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중대장 진무웅 대위는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여 소대별로 628고지 주변 일대의 사판을 만들어 놓고 언제 어떠한 명령이 떨어져도 즉각 작전 지역에 투입 작전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도록 지형 숙지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임동춘 중위는 분대장들과 더불어 며칠동안 사판에 축소된 638고지 일대의 주변 능선과 계곡, 그리고 밀림지대와 정글을 구분하고 숙지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임동춘 중위는 실례로 소대원들과 더불어 638고지와 유사한 곳을 찾아 분대별로 전투 훈련을 실시했다.
마침 3월이 ‘분대 전투 완성의 달’이였기에 그들의 훈련은 매우 익숙한 상태에 있었다. 임중위는 공격대형을 갖추게 하여 사격과 기동을 원활하게 연결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공격을 하는데 있어서 지형 조건과 상황 진도에 따라 대형을 융통성 있게 변형함으로써 지휘에 착오가 없도록 실전과 다름없는 훈련을 했다. 임중위는 파월이래 8개월 동안 대소 정글을 누비며 체험한 바 ‘훈련은 전투다’는 진리를 터득했던 것이다. 그는 막중한 임무를 앞에 두고 소대원들에 이 진리를 역설하며 그 어느 때 보다 강도 높은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3. 안케패스 탈환 명령 접수
드디어 4월 19일 제2중대에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일주일 동안 전투한 장병들을 교체함과 아울러 사기가 왕성한 부대를 투입하기 위함이었다. 명령을 수령한 중대장 진무웅 대위는 소대장들을 집합시켰다. 중대장은 전에 볼 수 없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준비명령을 하달했다.
“우리 중대는 638고지 공격을 휘해 명일 14:00에 당 전술 기지를 출발, 제1중대 기지로 인동한다. 각 소대장들은 이번 작전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리라 믿는다. 따라서 전투에 이상이 없도록 필요한 탄약과 장비, 그리고 전투식량과 기타 휴대품을 각개 병사들에게 지급하고 이를 소대장들이 직접 확인하라” 작전에 참가할 때마다 듣는 내용이었지만 소대장들의 마음도 그렇고 얘기하는 중대장의 마음도 다른 때와는 달리 새로운 각오에 차 있었다.
더욱이 임동춘 중위의 두 눈은 유난히 빛이 났다. 평소 훈련을 통해 숙달한 전술 전기와 그 동안의 작전을 통해 얻은 정글 전투의 산 교훈을 십분 발휘, 월맹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제3사단 제12연대의 적과 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에게는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되었으며, 대한 남아의 용맹성을 과시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는 항상 자신감이 있었다. 또한 소대원들도 그의 지휘에 따라 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임중위가 이끄는 제2소대는 중대 내에서도 가장 모범소대이고 중대 자체의 운동경기를 비롯한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평가받았다.
중대장으로부터 출동을 명령받은 임중위는 수령한 제반 장비와 전투식량을 점검했고, 작전에 참가할 소대원들의 건강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명일의 출전준비는 완전무결하게 점검되고, 확인되었다. 그날 밤 임중위의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함에 차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늘 주님의 보호 속에 지내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는 마음이 저에게 자신과 용기를 주어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작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저희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그 어느 때 보다고 막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실 줄 믿고 기쁜 마음으로 나가옵니다. 특별히 작전에 참가하는 소대원들과 전 중대원들을 모두 보호해 주셔서 승전고를 크게 외치며 전원이 귀대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에 맡기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바 대로 이루게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4. 안케패스 전투에 투입
D-Day, 제2중대 전술 기지의 자체 경비병력을 제외한 중대의 전 병력은 소대별로 점검을 마치고 마지막 출동준비에 따른 군장검사를 완료했다. 14:00시가 되었다. 소형헬기 5대가 제2중대를 공수하기 위해 중대 연병장에 내려앉았다. 뿌연 황사먼지가 주위를 덮었다. 1대당 6명씩 제1소대부터 목표지점으로 공수됐다. 임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2번 헬기에 분승되었다. 안케패스 상공을 날면서 눈 아래 전개되는 격전지 638고지를 응시했다.
적진 깊숙이 정글 위를 날아가는 병사들은 누구하나 말 한 마디 없고, 바싹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임중위는 소대원들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고 소대원들에게 무언의 뜻으로 마음을 전하려는 듯 했다. 나중에는 모두들 소대장의 눈에 시선을 모았다. 그들 모두는 그렇게 결속을 한 것이었다. 이때 요란한 금속성이 고막을 울렸다. 임동춘 중위가 타고 있는 헬기를 보고 적이 대공 사격을 가한 것이다.
순간적으로 기체가 기우뚱하면서 우측으로 급선회했다. 적정이 없는 곳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응급 조치였다. 80노트로 날던 헬기는 상당한 긴박감을 느끼고 100노트 정도로 날랐다. 모두들 긴장된 표정이었다. 헬기 기관총 사수 코 큰 녀석이 적의 대공화기 사격지역을 향해 무서운 반격의 불을 품었다. 통쾌한 대응사격이었다. 수 분 후 적의 발악적인 대공사격이 그쳤다. 임동춘 중위는 소대원들을 돌아보고 씩 웃었다. 모두들 미소를 지어 보였다.
16:00시경 5/86명의 중대 전원이 무사히 제1중대 기지에 도착했다. 서쪽으로 꺼져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임중위는 지척에 위치한 마의 638고지를 응시했다. 그리고 가슴에 넣어둔 성경책을 만져 보았다. 밤이 되자 적의 포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122mm, 82mm, B-40 등 임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명일의 격전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얻게될 승리에 대한 만족감에 사로잡혀 최종적인 전투 준비를 마치고 벙커 속에서 밤을 지세웠다.
이어서 22일 08:00시가 되자, 임동춘 중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638고지 우전방으로 바라보이는 제1중대 전술기지 하단부 능선에 배치되어 하루종일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곳은 이미 적의 포화로 초토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제1중대 병사들과 이곳에 증원되어 격전을 벌려온 병사들이 얼마만큼 고전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만 했다.
5. 총공격과 특공대 편성
23일 14:00시를 기해 공격 부대로 선정되어 638고지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던 제2중대, 수색중대, 제1연대 제8중대 등 3개 중대의 협공이 시작되었다. 임중위는 소대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몇 마디 얘기를 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지금의 상황은 우리들의 피를 요구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는 기억해 다오. 항상 연대장님께서 한신 말씀 ‘삶을 구하는 자는 곧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며, 죽음을 결의한 자는 곧 생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할것이다. 지금 이 마당에서 이 한 말씀은 영원히 진리의 말씀이 될 것이다. 꼭 마음속에 간직하고 대한의 남아로써 맹호 용사답게 우리의 맡은 바 임무를 다하자”
훈시를 마친 임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가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인 것을 그 누가 알았으랴!
중대장은 제2소대를 좌로, 제3소대를 우로, 화기소대를 예비로 하여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의 저항은 예상외로 완강했고, 적의 포화는 빗발치듯 했다. 우군의 F-4 팬텀기의 Air Strike와 155mm 곡사포의 우렁찬 굉음이 작렬할 때 정글로 뒤덮인 638고지는 황량한 폐허가 되어 갔다. 동굴은 파괴되고, 바위 덩어리는 병사들의 머리 위로 날았다.
피비린내가 풍기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었다. 임중위는 출동했다. 도저히 정상적인 공격으로서는 교묘히 구축된 적의 벙커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격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예견하고, 결의 찬 음성으로 소대원들에게 “전원 들어라! 현 상태로서 더 지탱한다는 것을 피해만 더할 뿐 전진은 없을 것 같다. 나와 같이 특공대 임무를 자원할 제3소대 용사는 없는가?” 얼마후 소대장 옆으로 모여든 병사는 전령 박영복 병장을 포함한 8명이었다.
결의 찬 표정으로 서로의 손들을 소대장 손에 포개어졌다. 지원 사격을 요청했다. 그리고 평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소대장 전령 겸 무전병으로 지금까지 어느 전투에서나 무전기를 메고 자신의 옆에서 정글을 누비던 박영복 병장을 별도로 불렀다. “이번엔 너는 참가하지 말아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아껴 모았던 돈으로 구입하여 항상 자랑하던 손목시계(시디즌 흑색)를 풀어 주면서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고생만 시켰다. 오늘의 전투는 누구도 그 승패를 예측할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박 병자의 손에 채워 주고 “만약 네가 살아서 무사히 귀국하게 되면, ‘소대장은 대한의 남아답게 이름 모를 타국 산천에서 용감히 싸웠다’고 우리 부모님께 전해 주기 바란다.”
이말을 듣는 박 병자이나 말을 하는 임중위나 두 사람의 눈에는 남 모를 이슬이 맺혔다.
6. 특공대의 투혼
임중위는 아군의 지원 사격이 종료됨과 동시에 자진 설발된 특공대 7명과 함께 9부 능선까지 육박하는데 성공했다. 온 몸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누가 누구인지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만 최후 돌격을 앞둔 병사들의 눈동자 만은 불이 튀기듯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8명의 특공대원들은 스스로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그 순간에도 잊지 않았다.
“설령 우리가 이곳에서 불귀의 혼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정의와 자유를 이 땅에 심어 놓을 것이며, 조국의 명예를 빛나게 만들 것이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돌격 신호가 올랐다. 8명의 특공대는 비호와 같이 일제히 정상을 향해 포복해 나갔다.
특공대장인 임중위는 최선두에서 민첩하고 날쌘 동작으로 적을 향해 달렸다. 책임감이 강하고 믿음이 돈독한 임중위의 눈에는 오로지 ‘적의 벙커를 파괴해야 한다.’는 결의만이 있었다. 드디어 수류탄 투척 거리까지 진입 수류탄 두 개를 입에 빼어 물고 엎드린 자세에서 온 힘을 다하여 벙커를 향해 던졌다. 적의 방어진지 제1선에 있던 벙커 두 개가 비참한 비명 소리와 함께 완파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차별 날아오던 적탄은 임중위의 좌측 대퇴부를 관통했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급히 지혈대를 동여 맨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시 군데군데 구축되어 있는 벙커로 이동했다. 특공대원들도 임중위의 뒤를 따랐다.
30여 개나 되는 적의 벙커는 8명의 특공조에게는 힘이 벅찼다. 다만 그들의 초인간적인 활약을 기대할 뿐이다. 그들은 맹호였으며 더욱이 성난 맹호였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했던 것이다. 개인당 2-3개의 벙커를 정하여 전력투구하였다. 임중위는 혼자 힘으로 5개나 되는 벙커를 폭파시켰다. 하나님도 이러한 병사들의 정의에 입각한 투지에 호응하셨는지 적의 벙커는 완전히 파괴되고 그들의 예봉은 무참히 꺾여졌다.
7. 이국의 별로 산화하다.
故 임동춘 대위의 동상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가 아끼고 귀히 여기던 임동춘 중위는 빗발처럼 쏟아지는 탄우 속에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아니 인간을 넘어선 의지 때문에 그만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영원 속에 높은 뜻을 심고 산화한 것이다.
그는 적의 공용화기 B-40을 가슴에 안은 채 맹호의 기백을 638고지에 심고 거룩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의 희생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맹호를 대신한 것이었으며, 자유와 평화로 향한 인간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같은 고귀한 희생 정신과 용감한 행동으 하루아침에 얻어진 기적이 절대 아니다. 그는 늘 신앙 속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기지에서 만났을 때 보았던 그의 절도 있는 행동에서 우리는 훌륭한 군인상을 보았다. 또한 말없는 미소에서 숨은 봉사자임을 느낄 수 있었고, 부하들에게는 늘 다정했던 그에게서 가정적인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임중위의 사람됨과 그 전공을 높이 찬양하여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1계급 특진에다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나는 우연히 기지를 방문하던 소대 무전병 겸 소대장 전령을 하던 박영복 병장을 만나 볼 기회를 얻었다. 임대위의 사생활을 박병장으로부터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故 임동춘 대위는 진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 매일 저녁 취침을 하기 전에 꼭 기도를 드렸고, 그의 왼쪽 주머니엔 항상 성경책이 들어 있었으며, 1주일에 세 번씩 소대 내에 설치된 기도소에서 신자들과 충실히 예배를 드렸다. 최근에는 소대원 중 60%에 해당하는 23명의 신자를 내기도 했었다. 그의 유품 중에 일기장이 있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연약한 인간이다.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용기를 잃는 수가 있고, 옳지 않는 것을 보고도 뛰어 일어설 힘이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에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 나에게 착하고 바르게 살려는 뜻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시고 도와주시리라......”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멋대로 해내는 고집쟁이 우장이 아니었다. 늘 소대원들과 함께 생각하고 결정했으며, 그래서 더욱 일치된 힘을 얻곤 했었다. 이제 나는 모든 전운이 내려앉은 638의 고지에 서서 우리가 얻은 승리의 통쾌한 흐믓함보다는 그 승리 속에 담겨진 쓰라린 아픔과 눈물이 없이는 듯지 못할 얘기들을 되새겨 본다.
세 번의 상처를 무릅쓰고 임무를 완수한 故 임동춘 대위의 분투상, 부하들을 대신하여, 그들에게 상급자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주고 명예심을 고취시켜 주기 위해 선두에 섰던 그 사나이다운 모습을 되새겨 그려보고 있다. 638에서의 그의 영웅적인 모습은 전 국군의 귀감이 될 것이며, 그의 애국심은 전 국군에게 거울이 될 것이다.
---기갑연대장 대령 김창열---
한국군 베트남전쟁 파병 (Vietnam戰爭 派兵)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습니다.
월남전 한국군 파병 현황 참전 병력: 325,517명, 부상자: 11,232명, 전사자: 5,099명.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South Korea in the Vietnam War, Hàn Quốc trong chiến tranh Việt Nam)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국군 부대를 파병한 일을 말한다. 줄임말로 베트남전 참전, 베트남 참전 혹은 월남전 참전, 월남 참전으로도 불린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베트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대략 5만명의 대한민국군이 베트남에 상주하였고 여러차례 왔다갔다하며 장기, 단기 체류한 대한민국군의 총합은 대략 30만명이다.
베트남 전쟁에의 참전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최초의 해외 파병으로서, 이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부수되어 이루어진 사건이다. 또한 한반도 안보 문제와 관련, 한국군 현대화를 골자로 한 브라운각서(1966년 3월)를 낳았고, 전투에 참전하는 경험을 한다. 반면, 파병된 대한민국군 32만명 중 5,099명의 사망자(KIA)와 11,232명의 부상자(WIA)[1]를 기록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다. 또한 159,132명이 고엽제 피해자로 간주되며[2]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인생무상★
세상사 모든것은 다 덧없고 무상한것
덧없는 인생은 하루 아침 이슬같이 사라지는
그야말로 초로인생(草露人生)이 아닌가
참으로 허무한 것이 인생인것을
백세도 이르지 못하고 죽는구나
그러나 백세를 넘게 오래 사는 사람도
역시 반드시 결국은 죽고 만다.
초대하지 않았어도 저 세상으로부터 찾아 왔고,
허락하지 않았어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간다.
그는 찾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떠나가는 것이다.
그기에 어떤 탄식이 있을소냐?
지금 까지 부를 이룬 사람도 많았고
명성을 떨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부와 명성과 함께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무도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한번 죽지 않으면 안되고,
빛은 한번 어둠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우주의 가르침인 것이다.
일체 태어난 것은 모두 죽음으로 되돌아간다.
사랑하는 처자도 보배도 존귀함도
때에 이르러서는 뒤 따를 수 없다.
무릇 죽음이란 형상이 무너지되
정신만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성인은 육신을 환난으로 여기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배로 여겨서
죽음에 이르기 까지 애착하고 집착한다.
소치는 목동들이 채찍을 들고
소를 몰아 목장으로 몰고 가듯이
늙음과 죽음은 우리들의 목숨을
한시도 쉬지 않고 몰아간다.
이 몸은 살아있을 때나 가치가 있지
들어갔던 숨이 나오지 않으면 곧 내생이요
죽으면 묘지에 묻혀 한줌 흙이 되거나
화장하면 재한줌 되고 마나니
이렇게 무상한 것이 인생의 목숨인데
무엇을 애착하고 무엇을 집착하랴
나의 몸둥이도 내것이 아니어늘
무엇이 내것이구 무엇에 애착하랴
' 버리면 얻게 되고, 가지면 잃게 되는 것인데
얼마나 살거라고 많은 욕심 부리는고
강물이 흘러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사람의 목숨 또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네
참으로 무상하고 무상한것이 사람의 목숨이구나.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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