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왜란시 상당한 공을 세운 세력은 스스로 의병을 창의해 저항했던 北人(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
짐)들이다.북인 중에는 남명 조식의 문하생들로 주전 강경파가 많았다.반면에 이황 문하의 남인들은 타협파들
이자 온건파가 많았다.왜란시 북인들의 공은 지대했다.피난하지 않고 남아서 왜군에 저항했으며 분식 조정을
관리했던 광해군과 함께 임진전쟁(1592) 수습을 하는데 최선을 다했다.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광해는 적장자가
아님에도 강경파 大北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그는 왜침이란 재난의 극복을 위해 다른 군주들과 다
르게 개혁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대북내의 대신과 보수세력들(서인)의 반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이유는 평등을 앞세워 귀족들과 토호들을 억제하는 '호패 제도와 대동법' 을 실시하는 것이였
으나,조정의 실세로 같은 편이었던 대북의 이이첨 조차 광해군의 개혁내정과 明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등거
리 외교' 를 반대 했으니 개혁이 순탄 할리가 없었다.서인들은 임진왜란 전후로 동인들에게 정권을 잃고 흐지부
지한 세력으로 전전하다 광해군이 '이이첨,정인홍,허균' 등 대북의 등에 엎혀 '임해군,김제남,영창대군' 을 차례
로 죽이고,이어 인목대비도 폐위시켜 서궁에 유폐하면서 왕족인 능양군과 함께 쿠테타를 일으켰다.
2, 이때도 서인들은 당시 지는 해를 바라보는 親明派들이 많았지만 거사에 明의 지원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그
러나 서인들의 상당수는 明나라 사람보다 더 친명적이었다.대북의 폐륜으로 때가 왔다고 생각한 李恒福 문인들
을 축으로 서인들은 쿠테타를 모의 했다.결국은 거사 동지들과 돈(거사자금)이 문제였다.쿠테타를 일으킨 '김류,
신경진,구인후,최명길,장유,이귀,이시백' 등은 모두 서인의 대두인 '이항복' 의 문하생들도 전통적인 당대의 부자
들 이었다.이들이 새롭게 왕으로 추대한 이는 적통과는 거리가 먼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정원군의 장남인 '능
양군' 이었다.능양군이 군주가 되는 자격으로는 광해가 왕이 되는 경우보다 더 어이없는 경우다.능양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에 몰려 죽고 그 충격으로 부친인 정원군도 홧병으로 죽은 상황이라 능양의 거사 계획은 명분을
만들어 철저하게 준비했다.쿠테타란 거사를 실행에 옮길려면 많은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당시
인조(능양)의 집안은 임진왜란시 활동했던 '신립의 아들 신경진,신경유' 등 평산 申氏가문과 구인후,구굉,구성등
능성구씨 가문의 명망있는 武人 가문들과 인척관계에 있어 반정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쿠테타에는 우선
칼을 잘쓰는 무인들의 역할이 필요했다.저항하는 반대세력들을 물리쳐야 했기 때문이다.
3, 쿠테타의 모의는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을 위시해 西人 들이자 율곡의 문인 '이귀,김류' 를 중심으로 진행되
었다.일찌기 이항복은 광해군 시대에 체찰사를 맡아 서북도(평안도) 관리들 임용을 좌지우지 했다.이때 이항복은
'김류' 를 종사관(비서관및 경호대장)으로 삼았다.당시 김류는 武才가 뛰어난 문인이었다.인조반정을 결행한 대부
분의 참여자들은 모두가 親明派들로 떠오르는 태양인 후금에 적대적 이었고,대대로 토호의 권세를 누렸던 보수파
들 이었다.당시 이항복은 광해와 대북당의 亂政을 개탄하면서 종묘사직을 편안히 할만한 사람은 '김류' 뿐이라고
은밀히 권 했을때,그는 '신경진' 과 의기투합하여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의견을 같이했다.신경진과 김류는 두 사람
의 아버지인 '신립과 김여물' 이 임진왜란시 충주에서 함께 전사했다는 인연이 있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김류는 무인인 '신경진,홍서봉,심기원,이홍립,이중로' 등과 결탁해 자금과 사병(私兵)을 모았다.특히 이귀가 함흥
판관으로 있을때 신경진과 뜻을 통하고 '심기원,김자점,최명깅,장유' 와 함께 거사를 모의를 했다.이귀는 신경진을
통해 김류를 만났고 여러사람들과 논의한 끝에 김류를 거사의 지도자로 삼았다.이어 이거사에 서인인 장단부사
이서,도원수 한준겸,감사 이명도 참여케 했다.
4, 광해군 14년(1622) 평산부사로 부임한 이귀는 때마침 이 지방에 虎患(호랑이에 의한 피해)이 많은 것을 적절히
이용해 신경진과 모의해 거사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나갔다.호랑이를 잡는다는 구실로 지역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군사활동을 할수 있도록 허가 받은 뒤 장단부사 이서와 합세해 일을 꾸미려 했다.그러나 말이 새나가기 전에
일을 서둘러야 했다.그것이 쿠테타 반정이든 또는 義擧든 거사에는 비밀수호와 함께 많은 자금이 든다.이러한 쿠
테타 자금은 당시의 많은 토지를 보유했던 부호들 이였던 西人들이 충당해 주었다.그러나 광해군 15년(1623) 正言
(사간원 정 6품)'한유상' 등은 이귀가 김자점과 함께 다른 마음을 품고 대비를 감씨려 한다고 광해에게 고변했다.
이귀와 김자점은 이율곡과 성혼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고,또 이귀의 딸이 김자점 아우인 김자겸의 부인이
었으므로 사돈간 이었다.한유상등에 의해 모의가 조정에 알려지자 김자점은 이귀의 딸을 궁중에 들여 보냈는데,이
는 당시 광해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있던 '김상궁(개똥이)' 을 포섭하기 위해서 였다.김상궁은 선조때의 궁인으로
선조를 시해하는데 가담했다고 전한다.선조는 동궁에서 가져온 약밥을 먹고 얼마지나지 않아 죽었는데,당시에 약
밥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당시 광해군은 김상궁(개시)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는데,그녀는 이이첨과 더불어 관직들을 마음대로 팔아먹을 정도
로 권력이 막강했고,심지어 광해군 잠자리까지 좌우했다.김자점은 개시와 광해군의 관계를 적절히 이용했고 자점의
의도대로 일은 잘 풀려 나갔다.바로 이때 올린 한유상 등의 상소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묵살 되었다.이럴때 능양군
역시 거사에 필요한 거사자금(군자금)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으나 많은 고충이 따랐다.거사의 날짜는 최명길이
점을 쳐서 정했고,이런 이유로 쿠테타가 성공한후 '최명길' 은 일등공신에 올랐다.거사일은 1623년 3월 13일로 앞당
겨 졌다.
5, 한편 신경진의 아우인 신경유는 북병사 '이괄' 을 설득해 함께 참여하게 했다.거사 사실이 알려지자 대신들과
금부 당상들이 급히 대궐에 모여 들었다.그 시각 광해와 김상궁(개시)과 함께 유흥에 빠져 있었고,궁의 내부에선
군대를 가장많이 지휘하는 훈련대장 이홍립이 내응했다.어떠한 쿠테타나 반정 모의도 내부의 호응자가 없으면
실현이 불가능하거나 성공하기 힘들다.그러기 위해 김자점은 술과 안주를 푸짐하게 준비해 김상궁에게 보낸 것이
다.이때도 반정의 고변이 올라 왔지만 광해는 개시의 말을 듣고 묵살했다.1623년 3월 13일 인조는 친위부대를 이
끌고 지금은 어디인지 알수없는 '延曙驛'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고,반란군 대장격인 '김류,부장인 이귀와 최명길,
김자점,심기원등은 각자 私兵 6~700여명을 거느리고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이 아니다)에 모였다.우여
곡절 끝에 합류한 김류는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북문인 彰義門(서울의 창의문은 아님)을 거쳐 창덕궁 앞에 이르
렀다.여기서 쿠테타 군은 광해 조정의 훈련대장 이홍립의 내응을 받아 돈화문을 부시고 인정전으로 치닫는 한편,
창덕궁안으로 들어가 含春苑의 나무숲에 불을 질렀다.
6, 사전에 이들은 가족들에게 궁중에 불길이 일어나지 않거든 자살하라고 일렀고,이제 반정이자 쿠테타가 성공했
음을 알리고자 궁에 불을 지른 것이다.광해는 달아나다가 내시에게 종묘의 불이 났는지를 확인하라고 했고,불이
났다고 하니 이를 들은 광해는 이씨의 종사가 내게 이르러 망했구나 라고 했다.이어 광해군은 창덕궁 후원의 소나
무 숲으로 가서 내시의 등을 타고 궁성을 넘어 도망쳤다.도중에 정몽필을 만나 말을 얻어타고 '안국신' 의 집에 숨어
들었다.그러나 '정남수' 의 신고로 결국은 붙잡혀 능양군과 인목대비 앞에 꿇어앉게 된다.새벽에 능양군은 돈화문
내에 좌정해 이귀를 호위대장에,김류를 병조판서겸 판의금부사에 임명했다.이때 인목대비는 정릉동 행궁에 갇혀
있었다.능양군은 이귀를 시켜 대비를 창덕궁으로 모셔오라 했다.그러나 대비는 광해군 부자와 이이첨(북인)부자,
이하 여러 흉당(대북세력)들의 목을 자른 후라야 궁에 들어 가겠다며 강경한 자세를취했다.이에 능양군은 광해군
과 함께 서궁에 나아가 大罪를 했다고 역사가들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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