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 318-터키 이스탄불
6월16일 이스탄불로 왔습니다.차창에 Fenerbahce대학이 눈에 들어옵니다. 2016년4월Fenerbahce sports club의 관련재단에서 설립된 이스탄불의 사립대학입니다.
멀리보이는 성소피아 사원.
이스탄불은 교통체증이 심각하다고 합니. 한국같이 체증이 심하니 장사하는 사람이 빵을 팝니다.
저 빵이 터키의 국민주식 시미트(simit)입니다. 단백하고 쫄깃하며 달지도 않은 시미트입니다
이스탄불입니다.라디오에서 "우스크다라 기데리겐 알데르 비리 안누~" 우스크다라(Uska dara)가 1953년 미국 가수 배우인 어사 키트(Eartha Kitt)가 터키어로 발표하여 빌보드 싱글 차트23위까지 올라가 한국에서도 히트했는데 바로 보이는데가 '우스크다라 '지역입니다.
이스탄불은 터키의 최대의 도시입니다.터키서부에 있는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보르포루스 해협을 가운데 두고아시아와 유럽 양대륙에 걸쳐있습니다.
인구는 2019년 기준15,520,000명으로 터키의 최대도시입니다. 터키의 수도는 앙카라이지만 앙카라보다 더 큰도시입니다. 과거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입니다.
동서양을 잇는 제1대교와 오르타쾨이 모스크(자미), 제1대교는 2016년 터키 쿠테타 미수사건 당시 쿠테타군이 점령했다가 마지막으로 항복했던곳으로 그후 정부에 의해 "7월15일 순교자의 대교" 이름ㅈ이 바꿨습니다. 오르타쾨 이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 후기 바로크양식의 모스크로 스테인 글라스가 아름답습니다.
북동쪽을 찍은 사진으로 왼쪽육지가 파티흐(Fatih)구, 즉 테오도시우스 성벽안의 옛 콘스탄티노폴리스 입니다. 왼쪽 위에 강처럼 보이는 게 금각만(Halic), 가운데 육지는 갈라타 및 탁심. 오른쪽 강처럼 보이는 파로 보르포루스 해협. 오른쪽 육지는 아시아(위스타르)입니다.
도시 주인이 그리스에서 동로마제국, 동로마 제국에서 오스만제국 그리고 터키로 바뀌었습니다. 도시이름도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리고 이스탄불로 바뀌었습니다.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말은 터키어로 '도시(The city)'를 뜻합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 제국 궁전입니다.
화려한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이 궁전은 원래 목조 건물이었지만 1814년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 압둘마지드1세가 1856년에 재건했습니다.
1843년에 착공하여 1859년에 완공했으며 베르샤유 궁전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유럽에서 보낸 수많은 현상품과 호화롭게 꾸며진 사방의 벽돌을 보면 당시 생활을 짐작할수있습니다.
세람르크는 술탄이 공무를 보고 각국대사를 접견하던 장소로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하렘은 왕실가정으로 술탄과 가족이 살았으며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이곳 관저를 쓰다가 1938년11월10일 집무실에서 죽었습니다. 집무실과 침실의 모든시계가 오전9시5분을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개별관광은 불가능하며 가이드관광만 가능합니다.전체부지가 70만m2로 증축과 개축이 이루어져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안에는 사진을 못 찍게하는데 눈에 들어온것이 아리타(有田)도자기입니다.
이리타도자기는 임진왜란때 도공으로 납치한 이삼평(李參平)이 1598년 사가현으로 끌려가 아리타(有田)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백토)를 발견한 뒤 조선식 자기를 제작하였습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히젠 도자기' 시작입니다. 이후 끌려간 도공들이 몰려들면서 아리타는 일본도자기의 본산이 되었고 이삼평은 "일본의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아리타에는 이삼평기념비와 '도공의 신' 이삼평을 모신 이시바신사가 있습니다.
그후 아리타(有田)의 도자기가 고가(高價)로 유럽으로 팔려 나가고 유럽의 귀족들사이에는 아리타도자기의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또한 귀한 조공품으로도 유럽 여러곳으로 전파되었습니다. 바로 돌마바흐체 궁전에 '아리마(有田) 도자기'를 발견했습니다.
이궁전 안에는 사진촬영을 불허합니다.
도시 메트로입니다.
점심을 한국식당을 들러서 오랫만에 한국음식을 먹었습니다.
식당에 나오니 등을 파는 상점
하기아소피아 궁으로 갑니다.
이스탄불의 유서깊은 허브인 술탄아흐멧 광장은 이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적인 관광명소의 중심입니다.
하기아소피아 은 이스탄불의 역사적인 중심지에 있는 아름다운 랜드마크의 하나입니다. "거룩한 지혜"라는 뜻이고 6세기 동로마 제국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
슐탄 아흐멧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박물관인 유명한 6세기 회교사원 하기아 소피아의 내부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슬람인들이 기도하는 모습
이여인은 코란을 읽고있습니다.
이곳을 들어올때는 여자들은 꼭 수건을 머리에 둘러야하고 남자들은 반바지로 못들어오며 신발은 꼭 벗고 들어와야 합니다.
부르 모스크의 안내
이스탄불의 구성곽 동쪽의 위치한 궁전. 메흐메트2세 시기인 1478년에 세워져 1856년 술탄 압둘마지드가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궁하기까지 약300년간 오스만 제국의 정궁이자 디완회의의 의사당이었으며 제국의 인재를 길러내는 고등교육 기관이었습니다.
1922년 오스만제국이 멸망하고 나서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1924년 톱카프 궁전을 박물관으로 공개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톱카프 궁전
정문에 거대한 대포(Top) 문(Kap) 을 뜻하는 톱카프라고 불리게되었습니다.
톱카프 궁전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400년간 오스만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터키 이스탄불의 궁전입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중입니다.
총면적은 70만평(231만m2)이며 벽길이만도 5km나 됩니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 달리 화려하지 않은것이 특징입니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이후에 최초로 지은 궁전은 현재 바예지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군주 메흐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후 현재 이스탄불대학교가 있는 자리에 황궁 터로 정하고 궁전을 지었습니다.
궁전은 세번째 언덕에 세워졌고 이지역에 지은 궁전은 이후에 지은 톱카프 궁전과 구별하고자 구궁전이라는 뜻으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i)' 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술탄이 사용하지 않은 구궁전은 빛의 바랜 하렘의 여인들이 여생을 마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궁전을 세우고 몇년이 지난후 동로마제국 의 성곽이 있었던 첫번째 언덕 북쪽 끝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습니다. 이궁전이 바로 톱카프 궁전입니다.
톱카프 자리한 지역에는 동로마제국이 세운 건축물이 있었으나 톱카프 궁전이 들어서면서 모두 사라지게 됐습니다.
톱카프 궁전은 신궁전(新宮殿)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예니 시라이(Yeni salayi)'라고 불렀으나, 궁전입구 양쪽에 대포를 배치된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톱'은 대포 라는 뜻이고 '카프'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트2세 때까지 약 380여년간 오스만제국이 군주의 정궁이었습니다.
1475년~1478년에 지어진 톱카프 궁전은 1850년대까지 계속 증축되기도 하고 보수되기도 했습니다.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의 딸린 4개의 넓은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습니다.
끝에는 바다가 보이는 전경이 펼쳐집니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이스탄불
이곳에는 박물관들이 있습니다.
옛 갑옷인데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칼과 창.도끼등 전쟁 무기가 전시되었습니다.
옆 박물관에 엄청 많은 관광객이 줄 서있어서 들어가는데만 30분~1시간 걸릴거 같애 입장을 안했는데 그곳에는 바로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며 기적을 나타날때, 광야생활때 늘 지녔던 지팡이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칼'입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기는 아이야 소피아사원. 로마제국의 건축물이라 하여 기독교 문화 유산으로 생각할수있으나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이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당 옆의 4개 기둥이 미나레트라고 합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정교회 대성당으로 세워졌으며 현재는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중입니다.
내부에 들어오니 화려함에 놀라움이 금치 못 합니다.
537년 에서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 총본산이었습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제국에 의해서 점령된 1204년부터 1261년까지 로마 카돌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이후 다시 정교회 성당으로 복귀되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1453년5월29일부터 1931년까지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1935년부터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읍니다. 허나 2020년7월10일부터 에르도안 대통령 지시로 다시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뀌었습니다. 현재는 '히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 The Hagia Sophia Grand Mosque)'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캘리그라피 원판에는 알라, 예언자 무함마드, 4명의 정통 칼리파, 무함마드 외손자이자 알리의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2014년기준으로 터키에서 2번째로 많이 찾는 박물관입니다. 매년 330만명 달하는 관광객이 찾습니다.
문 위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입니다.
탁심은 이스탄불의 명동입니다.
맥도널드가 보입니다.
관광객이 아이스크림집에 모여있습니다.
탁심광장입니다.
1455년 세워졌다는 터키 그랜드바자르입니다. 세계 최고(最古)라는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세계 50대 관광지중 가장 많이 몰리는 곳입니다. 저런문이 22개가 있 습니다. 2013년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찾은 관광 명소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랜드바자르는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2세가 1455년 건설한 "세계 최초의 쇼핑센타"입니다.
일년 방문객수가 9125만명으로 세계 1위입니다.
일행중 터키산 과자, 젤리, 쵸코렛을 사는데 내가 흥정해주니 종업원이 엄지를 내밉니다.
이집에서 석류주스를 시켜먹었는데 옆에서 고기를 굽는 요리사
터키 남자들은 어디가나 모여서 잡담합니다. 부인들은 일한다고 합니다.
요트타고 이스탄불 관광 합니다
이배를 탓는데 눈에 익은 미국 캘리포니아 차량 번호판이 눈에 띕니다. 지금도 내가 탓던 Nissan Quest차량 번호판이 내방에 있습니다.
선상에서 커피를 먹었습니다.
공동묘지
6월17일 짧은 캐블카를 타고 피에로 로티(Pierre Loti)언덕에 올랐습니다.
이곳은 불란서 시인이자 작가인 피에르 로티가 이곳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글을 쓰다 한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당시 불란서에 전쟁이 나서 여인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여인에게 "내가 꼭 돌아오겠으니 기다려주오" 말하고 불란서에 가서 전쟁에 참여하고 전쟁 끝나자 이곳에 와 보니 그여인은 죽었고 그는 이곳에서 그여인을 그리며 글을 쓰며 여생을 보냈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따서 피에르 로티 언덕으로 명했다고 합니다.
첫댓글 피터의 후기를 보고 다시한번 방문한 곳곳을 되세겨봅니다.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는 인솔자말이 부러웠고 자연과 인간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 터키 여행이였습니다. 피터 후기쓰느라 수고했어.~^^
이것으로 터키,두바이 여행기를 마칩니다. I'll be back(터미내이터 버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