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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8 20:08:46
지나가다님:
[박석님: 나의 관점으로는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나’가 바로 견분이고,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생각되어지는 이 세상이 바로 상분이다. 그리고 나와 세상이 나누어지지 않는 ‘그것’이 바로 자증분이다. 보통 때 상분과 견분은 서로 대립적인 것이다. 그러나 깊은 명상을 통하여 상분과 견분이 나누어지지 않는 자증분을 체험할 수 있다. ]
불교에선 "상분과 견분은 대립적이다"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대신에 "연기"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연하여(조건지어져) 함께 일어난다(생한다)".... 상분과 견분이 나누어지지 않는 자증분을 체험했단 말은... 조건지어져 일어난 8식의 고유 성질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8식이 멸하지 않은 상태 그상태는 불교의 선정론에선 한군데를 지칭할겁니다. 당연히 유위의 최상위 경계인 비상비비상처를 말해야 이치상에 맞습니다.
유식은 요가수행을 하는 불자들의 이론입니다. 즉 실참을 통해 정립된 이론으로 알고 있습니다.
관념적 이론 차원이 아니라 본래 수행 차원에서 정립된 이론입니다. 그러하기에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뿐만아니라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유식은 엄청 어렵습니다. 후대로 가면서 여러 설들이 나오고 이해하려면 골이 빠게지는 겁니다.
저는 본래 유식에 학문적인 관심이 없어 후대에 자세한 설들은 알지 못합니다... 후대에 여러설들이 등장했드래도 유식은 불교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불교라 불리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유식설은 불교에서 궁극으로 추구하는 바를 드러냅니다. 유식30송에서 볼수 있듯이 유식성에 머무는 것입니다. 야뢰야식의 전의입니다.
초기불교의 용어를 사용하면 공성에 들어가는 겁니다. 무상, 고, 무아의 통찰입니다. 8식의 멸한상태입니다. 이를 무심이라 했습니다. 초기불교의 선정론에서 멸진정입니다.
[박석님:주객 대립이 사라지는 것, 무아를 체험하는 것, 우주의식과 합일되는 것, 생사윤회를 넘어서는 근본 마음자리를 체득하는 것 등등이 모두 자증분에 대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주객대립이 사라진 상태'에서 주객대립은 불교에선 연기라 했으니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하는 상태, 즉 멸한 상태를 말하겠죠.
이때엔 야뢰야식이 멸한상태이기 때문에 자증분이나 증자증분이니 하는 이름을 붙일수 없는 상태입니다. 상수멸.. 상과 수가 멸한 상태... 8식과 심소, 촉,작위,수,상,사 8식이 멸하니 심소도 멸합니다. 이게 무상의 멸상입니다. 괴멸입니다.
무상의 생,주이,멸상을 통찰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조건지어진것은(연기한것)은 무상한겁니다. 무상한것은 나의 것, 나의 자아, 내가 아닙니다. 이게 무아입니다....
"우주의식과 합일한 것" 이런 표현 속에선 7식의 성질이 드러났다고 전 봅니다.
유식이론에 의하면 7식은 당연히 야뢰야식에서 전변된겁니다.
우주의 영상을 보았다면 안식도, 의식도 관여했겠지요. "근본 마음자리"란 불교적으로 합당하려면 마음이 멸한 상태를 말하겠지요.
이렇게 불교의 입장은 박석교수님이 보는 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박석님:
지나가다님은 유식학에 꽤 정통하시군요. 그렇지만 글을 꼼꼼히 읽으시지는 않는군요. 제가 말하는 자증분은 기존의 유식불교와는 다른 것이라고 이미 밝혔지요.
그것은 기존의 다양한 명상체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인 주객대립의 소멸 상태를 지칭한 것입니다.
우주의식과 합일한 것을 7식의 성질이 드러났다고 보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
근본 마음자리란 불교적으로는 마음이 멸한 상태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마음이 멸한 것을 지각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네요.
지나가다님:
간단히 말씀드리면.... 교수님의 생각하는 자증분, 주객대립의 소멸 등은 불교의 유식불교과는 관계없다는 의미입니다.
명상중에 경험되는 우주의식은 실제의 우주상이 아니라고 전 보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만든 상입니다. 마음이 멸한것은 지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멸한 "상태"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멸진정에 든 상태입니다. 선불교에선 견성이라 이름합니다.
멸진정에 들었다는 건 어떻게 아는가?
전念이 멸하는 순간을 알아차림(기억)합니다. 전염의 멸상을 알아차림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상의 멸상을 알아차림한 겁니다.
멸진정상태에서 들었다가 일어나는 첫번째 의식을 알아차림합니다. 이때의 특징이 무念(공), 무相, 무作(의도가 없음)입니다. 후염의 생상을 알아차렸다 합니다.
즉 무상의 생상을 알아차림했다고 합니다. 기신론에선 이상태를 구경각이라 했습니다.
별유님:
지나가다님!! 궁금해서 묻는건데요? 알아차림은 무엇이 하지요? 의식이 없어도 알아차림이 가능한가요?
아마도 6식이든 7식이든 8식이든 識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알아차림 자체가 불가능하리라 생각되는데 님의 견해는 어떤가요?
지나가다님:
별유님이 물어 보시는 핵심은 불교의 식이 도대체 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마음'에 대해 살펴봐야 합니다.
'마음'이라 이름한것은 그 작용에 의해 존재가 드러납니다. 식이란 '마음'의 한 작용이라 보면 됩니다. 어떤 작용인가?
육체가 외부에 반응하기 위해선 외부의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이 있듯이, 마음 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선 외부 대상을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야 할겁니다. 그걸 '식'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건 대상에 연해서 일어납니다. 이를 '연기'라 이름 했습니다.
육체의 눈이란 감각기관은 빛을 감지합니다. 분별하는 건 형상과 색상입니다.
마찬가지로 유식에선, 8식이 일어나는 조건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눈에서 감지된 형상과 색상이 해설되는 건 그 다음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사과를 보았다면, 관찰되는 게 사과이면, 내가 좋아하는 거구. 지금 먹고 싶다 등이 일련의 과정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8식이 일어나면, 뒷이어 일련의 과정이 일어날겁니다. 일련의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거이고, 그걸 '심소'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느낌이 일어난다면, 그건 受라는 심소가 있기 때문에 수가 일어난 거라 봅니다.
즉 식이 일어나면, 식을 조건으로 촉이 생하고, 촉을 조건으로 수가 생합니다. 이런걸 연기라 이름 하는데, 촉이 일어나는 건 촉의 심소가 있기 때문이고, 겁니다.
다르게 표현 하면 대상에 반연해서 8식이 일어나면, 8식에는 촉,작의,수,상,사라는 심소가 있어 그에 해당되는 작용이 뒷이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한 심소의 작용에 의해서 8식이 드러나는 겁니다. 알아차림이란 마음의 한 작용을 말합니다. 즉 알아차림의 심소가 있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가능한겁니다.
박석님:
지나가다님, 저의 질문은 명상중에 체험되는 우주의식이 왜 7식의 전변이라고 하는가입니다.
저도 유식학 책은 조금 보았는데 어느 경전, 혹은 어떤책에서 그런 이론이 나와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이건 좀 다른 문제로서 저도 유식학을 고대의 훌륭한 학문체계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다른 명상체계의 마음에 대한 설명보다 절대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리고 현대적 심리학이나 뇌생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지나치게 번거로우며 때로는 약간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부분도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 오래전 옛날에 우리의 마음에 대해서 그렇게 집중적으로 탐구한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지금의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실제 우리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되는 면도 많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별유님:
지나가다님!!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유식30송을 오래 전에 공부한 경험이 있고, 이번 기회에 수 차례 다시 정독을 하고, 혜거스님의 강의도 들었습니다.
아뢰야식은 사람이 죽어 몸이 없어져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알아차림의 심소는 설사 몸이 없어져도 있겠지요.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멸상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서요!!
멸한다 함은 6식은 물론 7식 8식등 모든 식이 멸하여 "자성 없음"이 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로서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는 순간, 즉 멸하는 순간 식도 같이 멸하는데 무엇이 있어서 멸상을 알아차리냐는 것이지요.
지나가다님:
우주의 영상은 7식의 드러남이라 보는 건 저의 견해라 밝혔습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있습니다.
"우주의식과의 합일' 이란 표현 때문에 7식의 드러남이라 본겁니다.
이건 산냐, 즉 상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8식이 드러난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의식'이란 용어가 불경이나 논서에 등장하는가.. 제가 모든 경론을 다 읽어 보지 않아서 확답을 할수 없지만, 불교의 교학상 그런 용어가 나올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제가 본 론에서 우주의 영상이란 표현은 본적은 있습니다.
대승기신론인지 원효스님의 기신론소인지 훼갈리지만(아마도기신론소일겁니다.), 우주의 영상을 경험하기도 한다면서... 식의 작용은 불가사의하다고 적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기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세계는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로 구성되며, 어떤 마음으로 조건지어지는가에 따라 해당되는 세계에서 태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불교의 9차 선정론과 세계관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선정중에 행자의 조건에 따라 천상을 경험할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니까야에는 그렇게 부처님께서 설명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천상의 음악을 듣을 수 있고, 천상을 볼수 있다고 나와있고, 신이 있음이 알려진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후대의 유식불교 이후의 유심계열에선(선불교에서도) 선정중에 보여지는 영상은 철저히 부정합니다. 환으로 취급합니다. 유식불교는 철저합니다. 극단입니다. 오직 식이라 하지 않습니까?
선정중에 보여지는 영상은 실제상일수도 있고, 자신이 만들어낸 상일수도 있습니다.
저의 입장은 마음이 만들어낸 상으로 봅니다. 그런 입장이 머물지 않고 계속 가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불교선정론에 의하면, 색계4선 무색계4선, 멸진정 이렇게 9차제정이 있습니다.
선정중에 형상을 갖는 영상을 경험하는 건 색계선정에서 경험합니다.
무색계선정에 들어가면, 형상을 갖는 영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의 9차제정과 유식설을 대비하면... 논사들 마다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나... 무색계선정에서 8식이 드러난다고 보는 유심논사들의 견해가 있습니다. 저의 견해도 그러합니다.
8식이 드러나는 건 무색계선정이라고 봅니다. 요가의 무상삼매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우주의식'으로 이름하는 현상은 우주등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쿤달리니가 상승할때 우주등을 경험합니다.
경험을 해 보면... 쿤달리니는 단회성으로 끝나는게 않입니다. 처음 일어나는 쿤달리니의 출발점은 미추이지만,,, 점점 출발점이 척추를 따라 위로 올라갑니다. 즉 점점 높은 하늘이 경험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7개의 하늘, 9개의 하늘, 14개의 하늘... 심지어는 삼십삼천의 전승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마지막 최고천에선 우주의 영상이 없습니다....
제가 우주의식을 7식의 드러남으로 보는 건 이와같은 전승도 고려한겁니다.
뇌생리학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뇌(세포)의 활동으로 의식이 발생한다. 입니다. 이 전제는 증명된바가 없는 가설입니다. 이런 가설을 토대로 뇌생리학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의식은 뇌세포 활동과 관계없이 고유한 기능을 갖는 entity라고 하면 이제까지 이루어진 뇌생리의 학설을 폐기되어야 할것이 상당할겁니다.
그러면... 뇌과학이 과거와 비교할수 없이 눈부시게 발전한것은..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할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 할수 없는 세계를 좀더 잘 감지할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되어 이전엔 관찰할수 없었던 현상을 관찰할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만, 관찰된 현상들을 정리하고 그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건 결국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섭니다.
유식학은 자신의 마음작용을 관찰하면서 정립된 이론입니다.
현대뇌과학은 얼마나 정교하게 뇌활동을 감지할수 있는 장비를 개발해 내는가에 달려있는데...
유식학은 얼마나 자신의 마음작용을 관찰할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만큼 자신의 마음작용을 관찰할수 있는가는 현대심리학의 기본 접근과도 통합니다.
자 보십시요. 뇌생리학은 유물론적인 접근입니다. 불교나 심리학은 유심론적인 접근입니다. 이렇게 기본 입장이 다릅니다.
전 이렇게 봅니다. 뇌생리학은 현상학적인 관찰에선 많은 성과를 보였지만, 유물론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심리학에 대해선 융의 심리학 이외에는 잘 모릅니다. 개인적으론 유식을 이해하면, 융의 심리학도 쉽게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뢰야식이 사람이 죽어 몸이 없어졌는데도 있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면...... 제가 알고 있기에 유식학에서 야뢰야식이 죽어서도 존재하는 식이다고 설명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8식은 기능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데, 아타나식이라고도 하고 야뢰야식이라고 합니다.
"아타나"의 의미는 '유지,보존'이라고 하는데,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아타나식이라고 하고
아뢰야는 '저장,집착,무몰'의 의미로서, 기억, 업을 저장하고, 7식에 의해 나로 집착하게 하고, 상속되어 흐름이 단절되지 않아 무몰이라 이름했습니다.
'무몰'이란 의미에서 야뢰야식은 이몸이 죽어도 존재한다고 보게 됩니다.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면 불교의 중도에 어긋나는 영속주의의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본래 불교에선 제법무아, 실체성을 부정합니다. 근데 야뢰야식이 이몸을 죽어도 존재한다면 야뢰야식의 실체성을 있다고 볼수 있겠죠.
이건 불교에선 식은 찰나식을 말하고, 전찰나식의 생멸에 연해서 후찰나식이 생멸하여 상속식이 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식은 여러 이름을 갖습니다. 그건 그 이름에 해당하는 기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타나식은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합니다. 죽으면 신체를 갖습니까? 죽으면, 오감각기관을 갖습니까? 당연히 갖지 않습니다.
죽어 이몸을 벌리면, 8식의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기능은 소실되겠죠. 그럼 무슨 기능이 남는가? 뭔지 모르겠지만 남는 기능은 있단 소리겠죠.
행위의 업이 저장된것은 남는다고 보겠죠. 즉 8식도 통채로가 아니라 그중에 어떤 부분만이 남는다는 의미겠죠. 이 부분을 상좌불교에선 재생연결식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도 남는 식을 찰나생멸하는 식으로 전후찰나식의 연기로 상속되는 식입니다. 그래서 " 흐름"이란 표현을 씁니다.
불교의 어떠한 교학에서도 죽은 후에 알아차림에 대해 논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별유님은 무상의 통찰을 잘못 이해 하신듯 합니다. 조건지어진것, 형성된것은 생,주,이,멸 합니다. 이를 무상이라 합니다.
불교의 위빠사냐는 이러한 조건지어진 것, 형성된것의 생,주,이,멸을 알아차림하는 겁니다. 이를 무상,고, 무아를 통찰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일어났다면, 조건지어져 한법이 일어난겁니다. 생한 법은 ,머물다, 달라져 멸해 버립니다. 이렇게 법이 생, 주,이, 멸하는 양상을 알아차림하였을때 무상을 통찰했다고 합니다.
별유님은 멸상을 죽을때로 잘못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별유님:
멸상을 죽을 때로 이해한 건 아니고요, 아뢰야식 혹은 최종적으로 남아있는 식의 소멸로 이해했지요.
최종적인 식까지 소멸되는 순간인데 어찌 멸상을 인식할 식인들 남아있겠냐는 것이지요.
하여튼 나로선 살피지 못한 많은 부분을 세세히 일어주셔서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
첫댓글 그래 맞아..내가 무식한게 아니라..모두가 무식한 거임..ㅡ..ㅡ;
우리같은 사쿠라의 대표주자 박석교수님의 용감한 발언에 위로가 된다는..
그리고 '선정의 체험'(욕계선정말고 층을 뚫고 나간 선정)이 단지 '그런 상태를 체험함'에 그치는 게 아니라 여러 과보가 있구만유..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