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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이 더위 속에서 한 주간도 참 수고가 많았습니다. 저의 집은 오후만 되면 한증막이 됩니다. 그래서 집 아래 숲 속으로 피난을 가서 책을 읽습니다. 집 아래 나무 몇 그루로 이루어진 숲이 있습니다.
그 숲에는 나무들의 종류가 다르고, 그 나무들이 서로 생존하는 모습도 다릅니다.
어떤 나무는 두 그루가 조금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하늘로 쭉 뻗어 있습니다. 마치 형제처럼, 또 어떤 나무는 아주 가까이 붙어서 나무 가지가 하나가 된 나무도 있습니다. 바로 연리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나무가 하나로 보이는데, 자세히 보니깐 밑 둥지부터 두개의 나무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처럼 보였습니다. 연리목도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이런 저런 모양과 형태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숲은 그늘을 만들고, 각종 새들이 날라와서 쉼을 얻고, 먹이 활동을 하고, 수없이 많은 생물들이 둥지를 만들어 살아가는 생명의 연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런 숲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생각을 같이 한다’는 것이지만 이것은 단순히 생각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감정, 태도, 의지를 같이함을 의미합니다. 전인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전인적인 연합을 이루려면 ‘같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젖었다면, 우리는 이 같은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한 마음, 한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4 가지 조건에 의해서 한 마음, 한 뜻, 전인적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1)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무슨 권면을 받았다면
(2)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위로를 받았다면
(3) 만약 우리가 성령님과 영적인 교제가 있다면
4)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를 체험했다면 연합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연합은 우리의 의지나 노력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되므로 오는 위로와 사랑과 자비에 접하게 되고, 성령의 충만으로 말미암아 깊은 교제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성도의 연합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연합을 이루므로 그 결과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2).
하나님과 수직적인 연합을 이룬 사람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평적인 연합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는 십자가의 연합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성도와의 연합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전인적인 연합인데, 바로 십자가입니다. 위로 하나님과 수직적인 연합, 좌우로 성도와의 수평적인 연합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보면 십자가를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들 간에는 잘 지내는 것 같은데 하나님과는 영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과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사람 사이에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먼저 수직적인 연합을 만들고 나아가 수평적인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연합을 이루는 성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수평적인 연합을 이루어내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다툼과 허영을 버리라고 합니다.
3절 앞부분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툼과 허영’을 버려야 합니다.
다툼이 왜 일어납니까?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다름을 서로 인정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의 다름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또 ‘허영’을 버려야 합니다. 허영은 ‘내용 없는 영광이나 자랑’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헛된 영광을 추구할 때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초대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못된 성도가 나옵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요한 사도가 설명하기를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요삼 1:9). 그는 교회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지만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이란 어떤 일이었습니까? 교회의 일꾼들을 공경함이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욕하고 폄하했습니다. 나아가 자신들은 나그네를 대접하지도 않으면서 접대하는 자들을 방해하여 교회로 하여금 손님 접대치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악한 것은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뵙지도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기르다보면 아이들이 건강한 것도 고맙고, 공부 잘하는 것도 고맙고, 아비를 닮아 잘 생긴 것도 고맙고, 부모께 효도하는 것도 고맙습니다. 그러나 자식 간에 불화하고 형제간에 싸우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형은 공부를 잘하는데 동생은 공부를 못합니다. 형이 공부를 못하는 동생을 놀리고 깔보면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은 잘하는 형의 공부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동생이 못하면 형이 가르쳐 주고 언니가 머리가 나쁘면 동생이 도와주면서 형제 자매 간에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형제 밖에는 없습니다. 정말로 외롭고 정말로 고통 당하게 되면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싸우던 형제도 한자리에 앉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를 염려하고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형제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그에 못지않게 교회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음을 받은 형제요 자매입니다. 서로 잘났다고 다툼과 허영을 추구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행위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분열을 낳게 합니다.
2. 대신에 겸손을 추구해야 합니다.
3절을 다시 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다툼과 허영 대신 추구해야 할 것이 오직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겸손한 마음이란 그 당시에는 아름다운 덕목이 아니었습니다. 겸손은 노예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였습니다. 노예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주인에게 온갖 아양을 떨고, 굴욕을 참고 비굴해지는 것을 두고서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겸손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되었습니다. 6절 이하에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을 통해서 겸손이 어떠한 것인지를 새롭게 정의 내려주었습니다.
성 어거스틴과 제자의 대화 가운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날 어거스틴에게 제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의 제일의 덕목이 무엇입니까?”어거스틴은 대답하기를 “겸손이니라” 했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또 묻기를 “ 제 2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겸손이니라” “그러면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니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죽기까지 하신 것이 바로 겸손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는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치고 내일을 위해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아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 경험과 기술, 그리고 지금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릴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그물을 내리러 갔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모여든 백성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실 때에 베드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천국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런 중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처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그 다음에 베드로가 취한 액션이 무엇입니까? 주님 발 앞에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무지와 무가치와 부정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옛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잘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아는 자에게는 겸손이 따릅니다. 이 겸손함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3절을 다시 봅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때에 이사야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갈꼬?”라고 했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의 대답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맨 먼저 일어난 일은 자신의 부정함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 겸손함 가운데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하나님의 부름이 임하여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주변의 -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를 못하는 - 백성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나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3.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 봉사하게 됩니다.
4절을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봄 뿐더러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돌아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섬김 봉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봄 뿐더러” 하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기 전에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일입니다. 이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가장 심한 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마음에 안들고, 미울 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 가르쳐 드릴까요?
예, ‘은혜 받지 않고 목사질 하라’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 목회를 하고, 설교를 하고, 교회 일을 한다고 해보십시오. 고역이고 지옥입니다. 무슨 힘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낙으로 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세워나가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매일 매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고, 교회를 섬기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가까이하며 주님 가까이 머물러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면 별 수 없는 인생이 됩니다. 형편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되어버리고, 추해집니다. 인간은 그냥 놔두면 자꾸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몇 번씩 모이고 교회에 모이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혼자 집에 그냥 내버려두면 자꾸 타락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며 세워가야 합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 묵상을 하면서 자기를 돌아보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않으면 세상에 속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국인 복음전도자로 유명한 ‘워치만 니’라는 분이 어떤 크리스찬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습니다. 그는 다랭이 논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높은 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는 매일 아래 호수의 물을 논으로 길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침마다 그는 언덕 아래에 살고 있는 믿지 않는 이웃이 자기 논의 둘러싸고 있는 제방을 열어 그 자신의 논에 물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얼마동안 그 부당한 일을 묵인해 주었으나 마침내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갔습니다. 매일 뼈 빠지게 물을 날라도 물은 새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 문제를 내어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해답을 찾아내었습니다. 다음날, 그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이웃의 논에 먼저 물을 대주고 그 다음에 자신의 논에 물을 대주었습니다. 바보 같은 짓을 했습니다. 손해를 각오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얌체같은 이웃도 크리스찬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나는 내 주변의 사람,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직장 속에서 연합을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 숲 같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겠습니까?
(1) 다툼과 허영을 버리고
(2) 겸손을 추구하고
(3) 자기성찰을 통해 섬길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전인적인 성도의 연합을 이루어 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