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양재영 (cocto@hotmail.com)
7월 19일, 샌프란시스코의 저스틴 허만 광장(Justin Herman
Plaza)에서 열렸던 그랜대디(Grandaddy)의 공연은 사실 공짜 콘서트가 아니었다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스내플 음료 회사에서 새 음료 출시 기념으로 주관한 이 행사는, 음료수 뿐 아니라 프로모션용 포스터, 심지어 인디 밴드들의 트랙이 담긴 CD까지 공짜로 나눠주어 마음을 뿌듯하게 했지만, 공연 자체는 그다지 즐겁지 못 했다. 오프닝으로 나왔던 이 지역 인디 씬의 간판 밴드인 임페리얼 틴(Imperial Teen)의 예상 밖의 조잡한 사운드는 당황스러웠고, 그랜대디의 리더인 제이슨 라이틀(Jason Lytle)은 컨디션이
나쁜지 사운드 세팅에 문제가 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특유의 보컬과 영롱한 키보드 소리가 바닷바람과 부딪히며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사운드 세팅이나 뮤지션들의 성실성, 청중들의 매너까지 그랜대디의 공연이 실망 그 자체였다면, 질 스콧(Jill
Scott)의 공연은 여러 면에서 이와 대비되는 만족스럽고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흑인 여성들, 특히 20대 이상의 흑인 여성들이 지금 들을 수 있는 음악이 과연 미국 음반 시장에 존재하는가 늘상 의문을 품어왔던 나에게 질 스콧의 공연은 나름의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Who Is Jill Scott?
질 스콧은 에리카 바두(Erykah Badu), 메이시 그레이(Macy
Gray), 켈리스(Kellis) 등과 함께 현재의 미국 R&B/소울 음악을
대표하는 흑인 여성 뮤지션 중의 한 명이다. 히든 비치(Hidden
Beach) 레이블을 통해 작년에 발표되었던 그녀의 데뷔앨범 <Who
Is Jill Scott?>은 재즈와 힙합, R&B의 요소들을 날 것 그대로 유기적으로 섞어낸 세련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사운드와 빼어난 보컬, 탁월한 시적 가사의 조합을 통해 기존의 R&B/소울 음악들과
분명한 차별을 두면서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필라델피아 게토에서 성장한 그녀의 음악에서 힙합의 요소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나, 동향의 힙합 뮤지션들인
바하마디아(Bahamadia)나 이브(Eve)와 달리 질 스콧의 음악에는
고전적인 흑인 음악 장르들에 대한 보다 진득한 애정이 녹아들어
있다. 무엇보다 그녀 음악의 장점은 빼어난 가사와 이를 표현해내는 보컬 능력이다. 고교 교사 출신으로 시인이기도 한 질 스콧은
게토의 다양한 일상들, 특히 남녀간의 사랑과 가족 문제 등 자잘한 소재들을 결코 진부하지 않게 생생하고 수려한 문장으로 표현함으로써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공동체 내의 모든 이들을 끌어안으려 한다. 따라서 그녀의 노래들은, 몇몇 프로듀서들이 똑같은
소재와 표현법으로 기계적으로 써대는 기존 R&B/힙합 음악의 가사들과 전혀 다른 느낌을 담고 있다.
Jill Scott At Berkeley
처음에 질 스콧의 공연 티켓을 예매하면서 이런 저런 의문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공연장이 베이 에리어의 명문 버클리대학교의 대형 야외공연장인 그릭 씨어터(Greek Theatre)이고 티켓 가격이
50불 가까이 된다면 과연 누가 신인급 흑인 여성 뮤지션의 공연을 보러오겠는가 의심을 품은 것은 당연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껏해야 이곳 학교의 학생들 혹은 관광객들이나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여유 있게 공연장에 들어섰던 나는 공연을 기다리면서
서서히 당황하기 시작했다. 1만여 명을 수용하는 관객석은 놀랍게도 공연 시작 30분전인 7시 30분쯤에 꽉 채워졌는데, 청중의
95% 정도는 흑인들이었고, 그들의 대부분은 2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여성들이었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의 공연을 봐왔지만 이렇게 압도적일 정도로 흑인 여성들이 공연장을 꽉 채운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질 스콧이 여성 뮤지션이긴 하지만 미시 엘리엇(Missy
Elliott)이나 팍시 브라운(Foxy Brown) 같은 힙합 뮤지션의 공연에서 여성 청중들은 반 이상이 결코 될 수 없었고 그나마도 대부분이 흑ㆍ백이 뒤섞인 10대들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는 신선한
충격에 가까웠다. 공연 시작 전부터 공연장은 거의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는데, 대화와 관찰을 통해 이들 대부분이 인근의 오클랜드에서 온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임을 알 수 있었다.(오클랜드는
이곳 베이 에리어에서 가장 많은 아프로-아메리칸이 거주하는 도시로 오래 전부터 거대한 흑인 공동체가 형성되어있다) 질 스콧과
같은 레이블에 소속되어있는, 뉴욕 출신의 색소폰 주자 마이크 필립스(Mike Philips)가 오프닝으로 나와서 자신의 백 밴드와 함께
매끄러우면서 훵키한 연주로 분위기를 달군 뒤, 9시쯤에 드디어
그녀가 열광적인 환호 속에 무대에 나왔다. 3명의 관악파트 연주자, 3명의 여성 백 보컬, 그리고 7명의 백 밴드 멤버들이 뒤에서
뿜어내는 화려한 사운드는 분명 막강했지만, 청중들의 눈과 귀를
압도한 건 단연 질 스콧의 목소리와 무대장악능력이었다.
첫 번째 곡인 ‘A Long Walk’부터 마지막의 ‘The Way’까지
그녀는 9곡의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사실 라이브 사운드의 질감은 음반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음반에 수록된 원곡들이 다소
깔끔하고 단아한 느낌에 심지어 힙합의 요소들도 힙합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절제미가 돋보였다면, 라이브에서의 밴드의 연주와 질 스콧의 보컬은 원초적인 훵크와 소울의 아우라를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가령 ‘A Long Walk’는 특유의 라임은 여전했지만 원곡의 점강적인 묘미는 거세된 채 시작부터 훵키하게
몰아치며 분위기를 돋구었고, ‘It's Love’에서는 각 멤버들의
20여분에 이르는 자유롭고 힘 있는 연주가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사운드 뿐 아니라 무대에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그녀의 흡인력
또한 대단했다. 사실 평소에 질 스콧의 CD를 들으면서 탁월한 표현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사가 일반 청중이 듣기에는 다소
난해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일상적인 소재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워드플레이와 ‘가사는 시적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배어나는 글쓰기는 때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질 스콧은 무대에서 탁월한 보컬 실력과 함께 때로는 친근한
설명과 설교를 통해 그녀가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들을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물론 가사의 메시지들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전체적인 곡 선곡과 구성 또한 돋보였다.
첫 번째 곡인 ‘A Long Walk’에서 남녀간의 사랑과 관계에 대한 축복을 한 뒤, 이어지는 ‘Love Rain’, ‘Slowly Surely’에서 남녀 관계로부터 해방된 흑인 여성의 자유로운 삶을 강조하고,
‘One Is The Magic #’에서는 그러한 해방을 통한 자기구원이
흑인 여성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함을 역설한다. 뒤이어 ‘Do You
Remember’와 ‘Brotha’에서는 흑인 남성들에 대해 여성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관계를 맺어 나갈 지에 대해 노래와 일장연설을
통해 진지하게 설교한다. 거리를 방황하는 게토의 남성들에게 흑인 여성과 자기 가족을 진지하게, 여전히 사랑하라고(“I'm Ytill
Your Sister”) 충고하고, 한편으로 절대 거리에서 좌절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라고(“Brotha, Don't Let Nobody Hold You
Back”) 그들을 지지한다. 그리고 ‘It's Love’와 ‘The Way’에서는 이를 통한 진정한 사랑과 남녀관계의 회복을 축복하며 끝을 맺는다. 결국 진솔하게 흑인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와 고민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그에 대한 혜안들을 제시하는 질 스콧에게 관객석을 꽉 채운 흑인 여성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은 너무도
당연한 듯한데, 때론 함께 노래하고 그녀의 일장연설에 대꾸하고
왁자지껄 떠들며 모두들 너무도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문제를 노래와 얘기를 통해 함께 풀어나간 질 스콧의 공연은 말
그대로 흑인 여성들(만)을 위한, 그들의 욕구와 고민을 풀어나갈
수 있는 일종의 해방의 공간 그 자체였다. 마지막 곡인 ‘The
Way’를 부르고 그녀가 무대 뒤로 내려가자,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적인 앵콜 요청이 이어졌다. 어차피 공연 중간부터 모두
일어서서 춤추고 노래하고 떠들며 즐기던 축제이긴 했지만, 10여
분간 앵콜을 요청하는 모습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공연들보다 인상적이었다. 다시 무대에 오른 질 스콧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에
감격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다. 두 달 동안 이어지는 전국 투어지만 이러한 환대는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비장미가 넘치는
멋진 인트로와 힙합 비트 속에 휘몰아치는 관악이 일품인 ‘He
Loves Me(Lyzel In E Flat)’를 마지막으로 2시간여의 공연은 드디어 끝이 났고, 모두들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자리를
떴다.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을 위한 노래
온갖 장르의 음악들이 판을 치는 미국에서 아프로-아메리칸 흑인
여성들을 위한 노래는 참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백인 음악
장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전형적인 흑인 음악 장르들도
대부분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재즈가 게토의 거리를 떠난 지는 너무도 오래된 일이고
힙합 또한 점점 더 흑ㆍ백의 젊은 남성들을 위한 가사와 비트로
채워져 가는 것 같다. 심지어 대부분의 여성 힙합 뮤지션들도 흑인 여성들을 위한 노래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를 통해 남성 소비자들을 유혹하기에 급급하다. 더욱이 오랜 세월(남녀 공히) 흑인들을 위한 음악이었던 R&B/소울도 점차
힙합 속으로 녹아들면서 이제 더 이상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을
위한 노래이기를 거부한다. 힙합과 R&B/소울을 아우르는 몇몇
유명 프로듀서들이 만들어내는 기계적인 비트와 식상한 가사로
무장한 나이 어린 흑인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음악이 10대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을 넘어서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물론 대도시 흑인 거주지역의 클럽에 가면 ‘블랙 페미니즘(Black Feminism)’으로 무장한 언더그라운드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노래는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들은 노예제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흑인 여성들의 고단한 삶에 대해 구술적 전통에
입각해 진솔하게 노래하고 얘기한다. 하지만 주류 흑인 음악 시장에서 흑인 여성들을 위한 노래를 하는 뮤지션들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에리카 바두나 로린 힐의 음악을 들으며 그나마
갈증을 채우고 위로를 받아온 지금의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에게, 질 스콧은 또 다른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는 뮤지션이 아닌가
싶다. 비록 가수로서 질 스콧의 경력은 지금 당장은 일천하지만,
대도시 게토에서 성장한 이 지성적인 여성 뮤지션의 든든한 음악적, 지적 자산은 앞으로 그녀가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 나아가
흑인 공동체 전체를 사랑으로 포용할 수 있는 음악들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음을 낙관케 한다.
미국 사회에서 아프로-아메리칸 여성들의(흑인이면서 동시에 여성이라는) 이중적인 정체성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 자신에겐 부담스러운 짐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힙합을 통해
드러나는 게토 남성들의 불만과 고민에 대해 동정(혹은 동경)을
하면서도, 거기에 여성이라는 무게가 더해지면서 이들 남성보다
더욱 힘든 삶을 살고 있는 흑인 여성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다.
주로 음악과 그 관련요소들을 통해서 흑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상상과 판단을 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금 우리가
듣는 흑인 음악이 대부분 남성 중심의 힙합이나 힙합의 영향을 받은 음악들이라는 사실은 그러한 편견과 무관심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어렵긴 하겠지만, 그래도 질 스콧과 같은 여성 뮤지션들의 앞으로의 성장이 이러한 우리의 무관심에 적으나마 자극과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Jill Scott In Bay Area Set List (7/27, Greek
Theatre At U.C. Berkeley)
1. A Long Walk
2. Love Rain
3. Slowly Surely
4. One Is The Magic #
5. Do You Remember
6. Brotha
7. Gettin' In The Way
8. It's Love
9. The Way (Encore)
10. He Loves Me (Lyzel In E Fla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