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 ‘복제는 금지다’(La Reproduction interdite, 1937)
1976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나를 사로잡은 시(詩)가 하나 있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는 누구인가’였다.
“이런 사람인가 아니면 저런 사람인가? 그렇다면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애처롭게 우는 비열한 심약자? 이미 승리한 전투를 앞두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패배한 군대, 그것과 나의 내면세계가 다를 바는 무엇이랴?”
1944년 독일 베를린 테겔 감옥에서 작성됐다는 이 시가 35년을 건너와 내 심장에 꽂혔다. 나는 감옥이 아닌 유치장에 갇혀 이 시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부마사태(부마민주항쟁)로 나는 대여섯 평의 방에 수십 명의 시위 가담자들과 함께 갇혔다. 지린내와 땀 냄새가 뒤섞인 데다 숨 막히는 공간은 닭장과 다를 바 없었다. 사방은 깜깜했고 조용하다 못해 적막강산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담장 밖에서 울리면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또 몇 사람이 심한 욕설과 몽둥이, 곤봉이질에 비명을 지르며 처박힐지 모를 길고 긴 밤이었다. 낮에 겪은 통닭구이와 물고문으로 몸은 쑤시고 아팠다. 그도 견딜 만했다. 하지만 옆방에서 고문당하던 친구가 ‘어머니’를 처절하게 부르던 소리를 듣는 일은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심리 고문이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겼다.
학교로 복귀해서도 본회퍼의 시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신학 수업을 하는 내내 본회퍼의 ‘고뇌’와 본회퍼의 ‘눈물’을 먹고 마셨다.
정직하게 말해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한 채 졸업식을 강요(?)당했다. 빈 깡통이었다. 사역 현장에서도 나는 여전히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거룩했지만 뒤돌아서서는 내 그림자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단에서와 강단 밑에서의 이질적인 나를 만날 때마다 나는 사도 바울의 고뇌를 되뇌어야 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랬던 내가 신학교가 아닌 링컨기념관에서 답을 찾게 될 줄이야. 미국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자리한 링컨 좌상 앞에 섰을 때다. 나를 안내하던 친구 장세규 목사가 말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해 보라고. 그때야 알았다. 링컨도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날 장 목사는 링컨의 리더십을 이렇게 설파했다.
“리더는 철저하게 ‘두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리더의 시선은 어떨까요. 그의 눈에 비전이 보일까요. 아니면 파라다이스가 그려질까요. 미안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여요. 캄캄하죠. 실망스럽지요. 금방 우울해져요. 그게 리더의 얼굴이에요. 뭔가를 보았다고요? 그는 망상가이지 리더가 아니에요.
이번에는 사람들을 향해 얼굴을 돌리죠. 사람들이 쳐다봐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쥐고 얼굴은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죠. 소리치죠. 여기 파라다이스가 있다고. 저기 우리의 비전이 보인다고. 어떤 리더가 내가 거기를 다녀와 봐서 안다고 하죠. 그 사람은 가이드이지 리더가 아니에요. 리더는 깜깜한 그 길을 내가 먼저 갈 테니 나를 따라오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실제로 링컨은 잔인했어요. 그것도 어마어마하게요. 전장에서 수만 명의 병사가 쓰러져 죽어가요. 링컨은 끄떡도 안 해요. 저녁이 찾아오죠. 링컨은 부상병을 찾아가 손을 잡고 펑펑 울어요. 낮의 얼굴과는 정반대죠. 슬픔이 가득했어요. 앞과 뒤가 아니라 한 얼굴의 좌우에 동정과 결연함을 같이 새기고 살았어요.”
숨기고 싶었던 내 마음을 들킨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구를 붙잡고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사나이는, 그것도 대낮에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참았던 울음을 숙소에 와서야 쏟아낼 수 있었다. 유치장에서 남몰래 울었던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경찰관이 후려치던 따귀가 있었고 잠을 재우지 않던 수면 고문이 있었다. 온몸이 저리고 아팠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폭풍 같은 밤을 보내고서야 본회퍼를 조롱하고 나를 ‘조롱’했던 질문 앞에 본회퍼의 고백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