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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자유대한민국은 "이념충돌의 사생아"였는데, 공산주의사상이 먼저 생겨났고, 그것에 맞서다보니 자유민주주의가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으로, 친일파들이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틈타 기회주의적 '생환'에서 이념도구로 챙긴 게 바로 반공과 시장경제였던 것이다.
특히,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변했어도 기득권층은 여전했고, 기득권 수호용으로 내세운 게 바로 색깔론이었다. 공산주의자가 왜 빨간지는 구소련의 피의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고, "낫과 망치"를 붉은 바탕에 그려낸 소련의 적색기가 공산주의자를 상징해서였다. 중국본토에서도 장제스 국민당을 몰아내고 마오쩌둥 공산당이 오성기를 게양할 때 역시 빨간 색이었다.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이어지는 극우정권들에겐 하나같이 선혈이 낭자하여 공포감을 자아내는 빨강색이 반공국시에 아주 좋은 색깔이었고, 또 반대세력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으니, 진짜 남파간첩은 물론 체제에 반기를 드는 모든 국민에게 "아니면 말고"式 색깔 칠하기에 너무나 좋았다. 이와 같은 "아니면 말고"에 그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한국인들은 왜 포악해졌는가?
어린 시절 보았던 '동물의 왕국'이 생각난다. 아니 동물의 왕국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실험이었는데, 상자에 일단의 실험쥐를 몰아넣었다. 첨엔 공간이 넉넉하여 쥐의 무리가 서로 충돌없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살다가, 계속 좁아지는 공간에서 긴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간이 빼곡할 정도로 좁아지니 이제 쥐들은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생지옥으로 바뀌어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해방공간이었고, 북쪽에서 사나운 무리가 인공기를 휘날리면서 소련의 스탈린을 등에 엎고 한반도를 집어삼키려고, 6·25 전쟁까지 일으키니, 먹고사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형제와 부모가 죽어나갔다. 백지와 같은 한민족의 혼에 맑시즘이 젖어들었고, 항일이념과 김일성 독재가 맞아떨어지면서 한반도는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상태에서 정신줄을 놓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한반도의 허리가 잘린 상태에서 사실상 "분할독재"로 상대방의 존재가 타방의 그것을 정당화 합리화한 것이 바로 극우정권의 색깔론인 것이다.
한국전쟁 전 그러니까 해방정국 동안에는 남파간첩, 푸락치 등이 남한에서 어지럽게 준동했고, 이러한 좌익 준동에 박정희 역시 물들어 있었다. 만일 김일성의 불장난이 성공하여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어있다면 박정희 또한 어엿한 정치국원이 되어있으리라. 혹은 김일성의 오른팔 정도 아니면 북에서도 쿠데타를 일으켜 한반도의 1인자로 거듭났을지도 모르겠고...
해방정국 특히 1946~1948의 굵직한 정치사건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고, 또, 극우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 참고할 만하다.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좌익사상이 만연되어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박ㄹ혜 홍준표의 정치적 고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어쨌거나, 김일성은 북한을 기지로 하여, 남한 내의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대구를 "포섭"했고, 박헌영이 남한적화를 위해 남로당을 창당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좌익활동을 극성스럽게 했다. 게다가 한반도 문제에 미온적인 미군정이 일본열도만 챙기면 됐지, 한반도는 지들끼리 알아서 해.. 특히, 유럽재건에 코가 석자라서 한반도가 두동강이 나든 말든 크게 게의치 않았다. 친일파의 부활은 바로 이런 배경에 있었다. 글구 친일파가 애국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미군정은 해방정국의 사회혼란, 특히, 쌀(배급) 정책에 심각한 오류를 범했고, 미군정의 헛점만 노린 박헌영 일파가 민심을 자극하여 부녀자 중심으로 쌀 수령 혼란을 조성하고 경찰진압대로 하여금 발포를 유도하여, 이승만 정권을 곤경으로 몰아갔다.
남로당은 그 이전에 소련의 찬탁운동이 실패하고 위폐사건으로 남한내 정치적 입지가 좁아져서 이를 만회하려고 대구폭동을 야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의 사주를 받아 남한 내의 相殘을 초래한 것. 다시 말해서, 피카소의 <게르니카> 참상이 국내에서 벌어진 것이고, 이후로도 제주4.3폭동, 여·순반란등 제2, 제3의 게르니카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해방정국의 남한은 아수라장이었던 것이고, 좌익과 군경의 대치 속에 죽어나가는 것은 양민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좌·우 서로가 네 잘못입네 하면서 숫자 장난을 하지만, 서로가 악에 받쳐서 부풀리기 사실왜곡 축소 은폐가 난무했는데, 우파의 그것이 정교화되고 특히 박정희 정권 당시 '역사 지우기'가 너무 심했다. 인혁당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가 대표적이다.
어쨌거나, 대구 폭동은 1946.10.1사건으로 기록되고, 제주4·3사건은 1½년 뒤인 1948.4에 일어났으며, 동 사건과 밀접한 그리고 박정희의 좌익경력이 녹아있는 여순반란사건이 같은 해에 이뤄져, 한국전쟁 직전의 큰 사건들이다. 그리고 6.25전쟁의 발발원인과 직결된다.
제주4.3사건은, 그곳에 주둔한 제9연대가 남로당 일색이고, 제주도란 지리적 고립성 때문에, 북한으로선 남한의 또다른 근거지로 굳히기에 좋은 조건을 가졌으므로, 9연대 내에 적극적으로 프락치를 심었던 게 원인이었다.
특히,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5.10 제헌선거 .. 이른바 單選·單政을 저지키 위해 포섭된 9연대의 무장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그것이 성공하면 이승만 정권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미군의 개입으로 4.3폭동은 진압되고, 이후 그 유명한 '빨치산 투쟁'으로 변모한다.
여·순 반란 사건은 여수의 14연대가 주역이었고, 역시 좌익 장교와 사병이 주축이 되어 10.19부터 10.27까지 여수와 순천 일대를 공산당의 9일천하로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남한측 군부반란은 2년 후 전개될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남하에 조응하기 위한 교란책동인 것이다. 이는 박헌영이 김일성에 맞서 남한 내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함은 재언이 불요다.
어쨌거나, 대구10월폭동, 제주4.3사건, 여·순반란사건 등 모두 남로당의 배후조종과 북한의 트로이목마이기도 한 남한군부 내의 '불온한' 군인들이 남한의 체제를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출처] [대구10월폭동,제주4·3사건, 여·순반란사건] by 김용삼 ..|작성자 문사
제주4·3항쟁과 여순사건
앞에서 한국인은 분단을 반대했고, 분단 정부가 들어서면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술했지만, 그런 우려는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제주도 및 여수·순천 지역에서 주민집단학살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 시기 대규모 주민집단학살은 전쟁기 집단학살의 서곡이었는데, 이런 학살은 이승만 정부의 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5·10선거가 진행 중이던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타올랐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약 350명의 무장대는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일제히 공격하고 우익청년단을 습격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경의 초토화작전에 의해 엄청나게 큰 인명피해가 날 것이라는 점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고립된 지역인 제주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제주도당의 봉기는 중앙당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당은 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중앙당에 보고조차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해버렸다.
그런데 이 봉기는 제주도민의 호응을 받았다. 제주도민의 호응이 없었다면 무장봉기는 규모도 크지 않았고 무기도 빈약했으므로 대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처럼 조기에 진압되고 말았을 것이다. 무장봉기는 점차 제주도민의 항쟁과 결합되어 대규모 집단학살이 자행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제주도민의 항쟁이 오랜 기간 지속된 데에는 단선단정 반대가 지니고 있는 호소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장대는 봉기를 일으키면서 도민들에게 “매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무기를 들고 궐기했다고 호소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래서 김구·김규식의 북행을 열렬히 성원했다.
평화의 섬 제주도는 1947년 3·1시위로 6명이 사망한 것에 항의해 제주도청 등의 공무원까지 가세한 3월 10일 관·민총파업에 대해 미군정이 과도하게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험악해졌다.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회(서청)이 들어오면서 대량 검거가 일어나고, 강압조치와 횡포, 강탈 등이 잇따랐다. 특히 서청은 주민들한테 악명이 높았다. 미군정의 이인 검찰총장은 1948년 6월에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 계열에서 바늘로 터친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지적했다.
제주도민은 수백 년간 육지로부터 수탈당했고 괴로움을 겪었다. 그것이 3월 10일 관·민총파업 이후 훨씬 혹독했다. 제주도에는 과거에도 큰 민란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4·3무장봉기는 바로 항쟁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시쳇말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 했는데, 적지 않은 제주도민이 심정적으로 무장대에 기울어 있었다.
주민집단학살은 주로 1948년 11월부터 다음 해 2월 사이에 발생했다. 1948년 10월 17일 9연대장 송요찬은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지역에 통행금지를 명령했고, 다음 날 해안이 봉쇄됐다. 그다음 날 여수주둔 14연대 병력 일부의 제주도 증파 명령이 떨어졌다.
11월 13일 애월면의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25명이, 다른 한 마을에서 50~60명이 학살되었다.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11월 17일 이 대통령이 법적 근거가 불확실한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대학살이 본격적으로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부터 노인네까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자행되었다. 곳곳에서 마을이 불탔고, 한 마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2000년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출범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4·3사건위원회)에 신고된 것만 보더라도, 100명 이상이 희생된 마을이 무려 45곳이고, 제주읍 노형, 조천면 북촌, 표선면 가시마을은 4백여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바다에 수장했다. 산에 올라갔다고 하여 아내나 부모·형제·자식들을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도 자주 일어났다. 인간의 잔인성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주민집단학살이 여러 달 동안 계속된 것은 고립된 섬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10월에 해안만 봉쇄된 것이 아니었다. 제주 지역 언론사 편집국장 등 언론인들이 총살되고 체포되었다. 그와 함께 언론이 통제되었다. 여순사건은 세계 곳곳에 뉴스를 타고 알려졌는데, 제주도에서의 학살은 육지 사람들조차 알기가 어려웠다.
미군은 작전통제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한국군 장비는 미군이 지급했으며, 현지에 미군 고문이 있었다. 그런데도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만 받고 제지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서청 대원들을 경찰이나 경비대 복장으로 갈아 입혀 토벌에 나서게 했고, 서청 총회에서 격려 연설을 했다. 이인이 언급했던 사태의 진상이나 민심 회유는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무공작은 중산간마을들이 이미 초토화되고 무장대도 거의 궤멸 상태에 빠진 1949년 3월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가 5월 제주도를 떠난 후 1,600여 명이 총살당하거나 형무소로 보내졌다.
제주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을까? 4·3사건위원회에는 사망자 10,715명, 행방불명자 3,171명, 후유장애자 142명 등 모두 14,028명이 신고되었다. 이 중 여자는 21.3%인 2,985명이다. 10세 이하는 814명, 11~20세는 3,026명이고, 51~60세는 899명, 61세 이상은 860명이다. 가해자별로 보면, 군·경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78.1%인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 12.6%인 1,764명, 나머지는 기타로 분류되었다. 여기에 미신고자, 신고가 불가능한 자들을 합쳐 4·3사건위원회에서 낸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는 전체 희생자를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산했다. 당시 제주도민의 약 10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한편 여수에서는, 제주도 사태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진압작전으로 여수 주둔 14연대 일부 병력의 출동 명령이 하달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인 1948년 10월 19일 밤 8시경 지창수 상사 등 하사관이 중심이 되어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읍내로 진격해 새벽에 여수를 점령했다. 남로당 군 프락치로 반란이 일어나자 가담한 김지회·홍순석 중위는 군대를 이끌고 20일 3시경 순천을 점령했다. 반란군과 좌익은 광양·승주·구례·보성·곡성 등을 일시적으로 장악했고, 여수·순천 등지에는 순식간에 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으며 진압에 나서 23일 순천을 탈환했다. 24일에는 여수로 진격했으나 실패했다. 26일 대규모 진압작전이 전개되었고, 다음 날 오전에는 장갑차가 시내로 돌입했다. 이틀 동안 진압군에 의해 여수 중심가는 불바다가 되었다. 반란군은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에 들어갔다.
여순사건에서도 좌익과 군·경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다. 반란군이나 좌익에 의해 여수에서는 군 21명, 경찰 72명과 일부 우익인사들이 학살당했고, 순천·보성 등지에서도 좌익한테 많은 경찰이 살해되었다.
이 대통령은 여순사건 진압 직후인 11월 5일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진압 후 정부 조치는 매우 가혹했다. 여수와 순천에서는 각각 수천 명을 학교 건물 등에 모이게 하고 심사를 했던바, 가담자 또는 협력자로 지목이 되면 그 옆의 즉결처분장에서 총살되거나 타살되었다. 특히 여수에서 5연대 장교 김종원은 즉결참수로 악명이 높았다. 여수 만성리굴 부근에서는 1949년 1월 13일 종산국민학교에서 끌려온 125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미군 G-2보고서에는 11월 29일까지 1,700명이 재판을 받아 86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은 비슷한 점이 많다. 14연대의 반란자들은 상부의 지시 없이 무모하게 ‘거사’를 했다. 여순사건의 여파로 남로당 전남도당은 크게 파괴되었다. 많은 주민들이 인민위원회를 지지했는데,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이 한 요인이었다. 여수·순천 등지에서 과도한 진압작전으로 피해가 컸고, 사후처리도 가혹했다. 어느 경우든 힘없는 서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고통을 겪었다.
여수 14연대만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대구 6연대에서도 1948년 11월 초부터 1949년 1월 말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반란이 일어났다. 1949년에는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병력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발생했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으로 대대적인 군 숙청작업이 일어났다. 이미 제주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살해되었을 때 조사는 진행되었지만, 여순사건은 군 내부 프락치 색출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1949년 2월에서 11월 사이에 영관급 6명, 위관급 67명, 하사관 176명 등 352명이 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것은 숙군 작업이 얼마나 크게 전개되었는가를 말해준다. 1948, 49년에 파면된 장교는 각각 18명, 224명이고, 불명예 제대한 사병은 각각 1,693명, 2,440명이었다. 육사 2기인 박정희도 남로당 군 프락치였으나 프락치 관계 정보를 제공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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