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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한 해였어. 금년은 정말 위대한 한해야!" 처칠은 43년 마지막날 이렇게 외쳤다고 하지만 확실히 2차대전에 있어서 1943년은 가장 중요한 한해였습니다. 연합군은 승리를 점차 굳혀나가고 있었고 반대로 추축군은 도처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43년 1월 31일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되어 기아에 허덕이던 파울루스와 약 9만 1천여명의 추축군이 결국 항복합니다. 그러나 더 큰 파국은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였죠. 2년간 온갖 신화와 전설을 쌓아왔던 롬멜의 영웅담도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고 43년 5월 13일 튀니지가 함락되어 27만 5천명에 달하는 독-이군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히틀러의 야심찬 대반격이었던 쿠르스크전역 역시 실패로 끝났고 독일군은 더이상 대규모 공세 능력을 상실한채 소련군의 연이은 맹반격에 점점 수세로 몰리고 있었죠. 43년 9월에는 무솔리니정권이 붕괴되고 이탈리아가 항복하여 추축의 한 축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밤낮없이 독일의 대도시들과 산업지대를 마구 두들겼던 영, 미의 전략폭격은 비용대비효과에 대한 끝없는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열세에 몰리고 있던 독일공군을 밑빠진 독마냥 빨아들이며 유럽상공에서의 제공권을 제압해 나간 것은 틀림없습니다.
태평양에서도 42년 6월 미드웨이에서의 참패는 일본 해군에게는 치명타였지만 42년 8월부터 43년 2월까지의 과달카날 쟁탈전을 시작으로 1년반에 걸친 솔로몬 제도에 벌어진 소모전에서 쌍방의 피해는 엄청났으며 여기서 일본의 패배는 사실상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죠.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미국과의 소모전이 얼마나 무모한지 처음부터 인정했던 것임에도 막상 서전의 승리에 기고만장했던 일본은 미국의 반격과 역량을 과소평가하여 일시적인 우위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소모된 전력을 보충하고 전시 생산 능력을 확충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였습니다. 도죠는 뒤늦게야 "참으로 애석하다. 소화 17년(42년)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라고 한탄하였습니다.
더욱이 전략적으로 사수해야할 가치도 없고 지킬 수도, 병참선을 확보할 능력도 없으면서도 군부의 체면과 사기 저하를 내세워 "한치의 땅도 내줄 수 없다"라며 무리하게 병력을 축차투입함으로서 모든 곳에서 비참한 패배와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습니다. 42년말부터 44년초까지 솔로몬과 뉴기니제도에서의 공방전에서 일본은 30만의 병력과 해군, 항공력의 대부분을 투입했으나 13만명이 전사하고 함정 70척 22만톤, 항공기 8천대를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피해였죠. 연합함대 총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마저 43년 4월 18일 전선 시찰을 위해 라바울기지를 출발했다가 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이탈리아 항복직후인 43년 9월 30일 어전회의에서 "금후 취해야할 전쟁지도 대강"을 수립합니다. 더이상 미국과의 승산없는 소모전을 일단 중지하여 향후 반격을 위해 전력을 회복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정하고 이를 위해 전선을 일부 축소하는 한편 뉴기니 서부지역, 버마, 중국, 오가사와라제도, 마리아나 제도 등을 연결하는 소위 "절대국방권"을 설정하여 미군의 반격에 대비키로 하였으나 이미 쌍방의 전력 차이는 너무나 압도적으로 벌어져 있었기에 한낱 잠꼬대같은 소리에 불과한 것이었죠.
붉은 선이 일본군의 최대판도이며 푸른 점선이 "절대국방선". 뒤늦게야 자신들의 역량으로 광대한 태평양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지만 이 역시 비현실적인 것인 것은 마찬가지였고 병력을 재배치할 수송수단도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국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었죠.
※ 사진출처 : http://www.necrosant.net/zbxe/21509
또한 일본의 전시생산은 43년을 정점으로 이미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강철생산은 43년 630만톤에서 44년
에는 460만톤으로, 석탄은 5500만톤에서 4,930만톤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미국에 비한다면 1/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차 생산에서도 일본이 42년에 1,200대를 정점으로 43년에는 790대, 44년에는 295대로 급격히 감소한 반면, 미국은 43년 한해동안만도 약 3만대에 달하는 전차를 생산하였습니다. 또한 42년부터 44년까지 미국이 항모 90척을 비롯해 6,755척의 각종 함정을 건조한 것에 비해 일본은 항모 7척을 비롯해 고작 438척의 함정을 건조할 수 있었습니다. 항공기 생산에서도 일본은 미국의 1/3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러일전쟁당시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멸하여 제해권을 확보했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해군은 여전히 "한방"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채 미해군과의 해상결전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킵니다. 이때문에 정작 해상 수송로의 안전 확보는 완전히 뒷전이 되어 호위를 받지 못한 상선과 유조선들이 미 잠수함의 공격으로 속수무책으로 격침되어 되어 43년 한해만 130만톤이 격침되고 44년에는 270만톤이 격침되어 경제 자체가 마비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초 남방 침략을 시작한 목적이 석유와 주요 자원의 확보였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던 것이죠. 서전의 승리는 온데간데 없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미군 앞에서 일본은 정신없이 끌려다니며 하루하루 몰락을 향해 달릴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42년말부터 남방에서의 전세가 점차 악화되면서 대본영은 지나파견군에 대해 중경에 대한 총공세를 보류시키고 병력을 조금씩 빼내어 남방 각지로 투입합니다. 또한 전력의 보존과 방어에 주력하고 불필요한 대규모 공세를 금지시켰으나 정작 현지 부대들은 공명심에만 눈이 멀어 독단적으로 무리한 작전을 계속 반복하였고 대본영과 육군부는 이를 저지하기는 고사하고 되려 휘둘려 매번 마지못해 사후승인하는 식이었습니다. 중국전선의 일본군은 남방전선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41년말 70만명에서 43년말에는 25개 보병사단, 11개 독립 여단, 전차 1개 사단 등 100만명으로 오히려 확대되어 있었죠.(관동군 제외)
그러나 그 정도의 병력으로도 광대한 점령지를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대도시와 철도를 중심으로 소부대로 분산배치되어 근근히 유지되었고 남방으로 장비와 훈련이 충실한 정예사단들이 지속적으로 차출되면서 그 빈자리는 새로 편성된 사단들로 채워졌으나 장비도 매우 빈약했고(보병으로 머릿수만 갖추엇으나 포병이 없는 부대도 많이 있었음) 훈련도 형편없었으며 간부와 병사들은 노약자와 병약자들이 태반이라 질적으로도 매우 낮았습니다. 게다가 약탈과 학살같은 잔혹행위가 빈번해지면서 군의 기강 자체가 와해되기 시작하여 집단 항명과 탈영이 급증하였고 심지어 반란과 폭동도 각지에서 일어나 지나파견군 사령부가 아무리 엄중하게 대처하여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냉철하게 판단한다면 당연히 점령지를 포기하고 전선을 대폭 축소하거나 아니면 총력을 기울여 전세를 일거에 뒤집거나 양자택일을 해야함에도 일본은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파견군은 "무한 주변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43년 연초부터 제11군을 중심으로 소위 "3대 섬멸작전"을 실시합니다.
전술적으로는 중국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특히 상덕회전 초반의 패배는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고 있던 장개석의 위신을 추락시키는데 일조했으나, 미군의 압도적인 반격에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할 판에 이미 피폐해지고 약체화된 중국군을 상대로 전략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규모 공세작전을 마치 연례행사마냥 실시하여 병력과 물자를 무익하게 소모하는 것 이상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작전과정에서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 약탈, 강간 등 온갖 만행을 저질러 국제적인 지탄을 받았습니다.
43년 2월초부터 3월말까지 진행된 "강북섬멸작전"은 무한과 악주사이에서 활동중이던 중국군 제6전구(사령관 진성)소속의 2개사단(제118사단, 제128사단)에 대한 포위 섬멸전이었습니다. 이들은 국민정부계열의 부대와 공산 유격대가 뒤섞여 있었고 장비와 무기, 훈련도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공격에는 제11군 산하 3개사단(제13사단, 제40사단, 제58사단)이 동원되었고 제13사단이 북쪽에서, 제40사단이 남쪽에서 각각 우회 포위하고 제58사단은 예비대와 추격을 맡았습니다. 2월 10일부터 시작된 공격에서 중국군 제118사단은 일본군 제13사단과 제40사단의 협공을 받아 전멸하였고 이로 인해 제128사단 역시 전의를 상실한데다 휘하 여단장이 내통하여 제128사단장 왕경재가 포로가 되고 사단전체가 전멸합니다. 일본군은 3월말까지 한수와 악주일대의 중국군을 소탕하였고 제40사단은 반격에 나선 중국군 제149사단과 제150사단을 격퇴한후 점령지를 버리고 다시 원위치로 복귀합니다.
일본군은 화력은 물론 숫적으로도 2배이상 우세하여 전투는 일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일본군 발표에 따르면 전사 254명, 부상 890명에 중국군은 8,600여명이 전사하고 2만3천명의 포로를 획득하였으나 진격과정에서 동복의 부족으로 많은 동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4월에는 무한 서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장강의 교통로인 의창의 수송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호북성 서부지역을 침공하여 의창과 동정호 사이의 중국군에 대한 "강남섬멸작전(중국명 : 악서회전)"을 개시합니다. 그러나 진짜 목표는 곡창지대를 약탈함으로서 식량을 확보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호북성 서부지역은 중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에 중국군의 저항도 훨씬 완강할 것이라고 보고 투입병력 역시 강북섬멸전보다 훨씬 대규모였습니다. 제11군 산하 4개사단(제3사단, 제13사단, 제40사단, 제58사단)과 독립혼성제17여단에다 기타 사단에서 임시로 차출된 수개의 독립지대, 1만정도의 왕정위정권의 남경괴뢰군도 동원되어 10만명이상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급한 작전으로 인한 준비부족과 병참문제로 인해 각 부대는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축차적으로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삼협을 향해 진격중인 일본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4월 9월 제40사단 소속의 도다지대를 중심으로 제3사단과 독립혼성제17여단 일부가 공격을 시작하여 중국군 제73군을 격퇴하고 15일까지 동정호 북안을 장악하여 이 지역의 식량을 약탈합니다. 이어서 제13사단과 제58사단이 지강(의창 남동쪽에 있는 도시) 남방에서 중국군 제87군을 격파하였고 5월 중순에는 의창 북서쪽의 서릉협에 도달하여 석패요새를 공격합니다. 삼협의 협곡에 구축된 석패요새는 중경의 관문이나 다름없기에 제6전구 사령관 진성은 수비군인 제11사단에게 절대 사수명령을 내렸고 일본군 제13사단은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중국군의 결사적인 저항과 험준한 지형으로 방어선을 끝까지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삼협을 방어하는 요충지인 석패요새와 사열중인 중국군 수비대.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석패요새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진성은 반격을 개시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돌아 어양관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앞뒤로 포위하려는 형세를 취합니다. 결국 5월 29일 일본군 제13사단은 퇴각을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포위섬멸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제3사단 등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일본은 전사 771명, 부상 2,746명의 피해를 입은 대신, 중국군 3만명을 사살하고 4천명의 포로를 획득했으며 전투기 13대 격추, 박격포 48문, 산포 8문, 속사포 9문 등을 노획하였다고 발표한 반면, 중국은 일본군 2만 5천여명 이상을 살상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일본군은 이른바 창교학살사건을 일으켜 포로와 민간인 등 3만명이상을 학살하고 2천명이상의 여성을 강간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한편, 41년 12월부터 중국 상공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센놀트의 플라잉타이거스는 42년 7월 민간의용비행단에서 "중국항공특별임무대"로 개편되어 인도의 제10공군에 소속되었다가 43년 3월에 중국전구를 전담하는 제14공군으로 독립하였고 중미연합공군은 악서회전에서 지상공격을 실시하여 일본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으나 그들 역시 일본전투기들의 반격으로 많은 손실을 입어야 했습니다.
중국공군의 에이스 주지개. 소련제 구식 복엽기인 I-15로 96식 육상공격기를 격추한 것을 시작으로 총 6.5기를 격추하였습니다. 악서회전동안 제23비행중대의 중대장이었던 그는 P-40을 타고 하야부사 전투기 2기를 격추시키고 1기를 반파하는 활약으로 장개석으로부터 청천백일기장을 수여받았으나 43년 12월 단독비행중 일본전투기 5대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naljava69/60161580356
43년 하반기가 되면서 남방의 전황은 더욱 악화되자 대본영은 "갑호전용계획"을 수립하여 중국전역에서 5개사단을 빼내고 여기에 별도로 제3기갑사단을 비롯해 5개 사단을 언제라도 남방으로 보낼 수 있도록 지나파견군에서 대본영 직속으로 배속시킬 것을 결정합니다. 제11군 역시 휘하 7개 사단중 3개사단을 차출할 것을 명령받자 군사령관인 요코야마 이사무중장은 대규모 병력의 갑작스런 전용은 전선의 균형을 깨뜨리고 중국군의 반격을 초래할 수 있다며 그 전에 한차례 더 공세를 실시하여 중국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반격의 가능성을 제거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상덕섬멸전"을 추진합니다. 공격목표는 호남성 북부의 요충지이자 곡창지대인 상덕이었으며 진성의 제6전구와 설악의 제9전구에 대한 격멸이었습니다. 동원병력은 제11군 예하 5개 사단에서 수개 대대씩 차출하고 제13군에서도 일부 병력을 증원받는 형태로 총 35개 대대 6만정도였고 여기에 공중지원을 위해 제3비행사단의 항공기도 소수 투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중국내 항공전력을 지속적으로 차출하여 남방으로 보내고 또한 손실에 대한 보충도 제대로 되지 않은 반면, 중미연합공군은 나날이 강화되어 43년 중반부터는 중국 상공의 제공권은 점차 중미연합공군측에게 넘어가고 있었죠. 일본군은 10월말까지 양자강 도하를 완료한후 11월 2일 동정호 북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진격하여 호남성을 침공합니다. 여기에 대해 진성은 제6전구 산하 3개 집단군(제10집단군, 제26집단군, 제29집단군)을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고 제74군이 상덕의 수비를, 제18군이 반격을 위한 예비대로서 상덕 북부에서 일본군을 포위 격멸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부대간의 연계가 제대로 되지 않은데다 큰 비로 인한 홍수로 제10집단군의 전개가 늦어져 일본군은 중국군 방어선을 순조롭게 돌파할 수 있었고 11월말에는 상덕을 삼면에서 포위합니다. 당시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후 막 귀국한 장개석은 제57사단장 여정만에게 상덕의 사수를 명령하는 한편 진성을 비롯한 예하 지휘관들에게 "상덕은 중국의 스탈린그라드가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상덕의 구원을 위해 제9전구 등에서 병력을 증원하여 상덕을 공격하는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한편, 중미연합공군 200여대가 총 1800회를 출격하여(이중 상덕으로의 출격은 261회) 진격하는 일본군에 대해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습니다. 따라서 쌍방의 격전은 유례없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중국군은 제5사단장 팽사량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제73군은 병력의 80%이상을 상실하였으며 제44군 역시 제150사단이 사단장 허국장을 비롯해 사단 전체가 전멸하였습니다. 일본군도 제3사단 보병 제6연대의 연대장이 공중폭격으로 전사하였고 제13사단 보병 제65연대는 중국군의 기습으로 연대장이 부상하고 연대는 군기를 불태운후 후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의 피해가 속출하면서 방어선은 무너졌고 11월 22일 상덕은 완전히 포위됩니다. 상덕 수비를 맡은 제57사단 8천명은 여정만의 지휘하에 하천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일본군 제116사단은 공격을 개시했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보병 제109연대장을 비롯해 다수가 전사하며 격퇴당합니다. 11월 25일 일본군은 제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이 직접 진두지휘를 맡아 제3사단과 제68사단을 추가로 증원하여 2차 공격을 개시하여 치열한 혈전끝에 29일 성내에 돌입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군의 방어선을 도무지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요코야마 중장은 무차별로 독가스 공격을 실시하였는데, 일본군은 상덕회전에서 독가스외에도 731부대 요원들을 투입해 페스트균와 같은 생물학무기도 사용하여 7천명이상의 중국군이 사망하였고 일본군 역시 1만명이 감염되어 17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상덕 수비전을 지휘했던 여정만(1902~1955). 그는 마지막까지 분전했으나 압도적인 화력에다 독가스까지 사용한 일본군의 공격에 결국 중과부적으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 명령없이 무단으로 후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2년형으로 경감되었다가 4개월만에 무죄로 석방되어 제74군의 부군장으로 복직하고 이후 제26군의 군장으로 승진합니다.
이후에도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으나 제57사단은 이미 90%이상의 사상자를 내어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하자 여정만은 20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성외로 탈출합니다. 중국군 제10군이 상덕의 구원을 위해 접근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제10사단장 손명근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2월 3일 일본군의 총공격으로 잔존 수비대는 전멸하였고 약 500여명의 부상자들만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상덕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중국군. 상덕회전은 중일전쟁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투중 하나였으며 2010년 침동감독에 의해 "첩혈고성"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www.aboluowang.com/life/2006/0930/15450.html
한편 상덕포위전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군은 호북성 북부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고 비행장과 물자집적소를 파괴하였습니다. 중국군의 압박이 점점 강화되자 요코야마중장은 상덕의 포기와 철수를 명령하여 12월 11일부터 후퇴를 시작합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추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며 상덕을 비롯해 모든 지역을 탈환함으로서 전선은 원래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미 육군성이 일본군의 당초 목적이 "점령"이 아니라 "약탈"에 있었고 중국군의 반격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철수한 것에 불과하다며 과연 이를 "승리"라고 볼 수 있는가, 라고 평가절하하자 중국은 지연전을 통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였고 이후 적극적인 반격으로 전환하여 격퇴시킨 것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양쪽의 주장은 각각 절반씩 맞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일본군이 처음부터 영구적인 점령이 아니라 중국군을 소모시키고 약탈에 목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중국군의 저항이 완강하여 점령지를 확보할 능력이 없었고 억지로 고수할 경우 되려 포위섬멸될 것을 우려해 후퇴한 것도 사실입니다. 중국군이 제대로 저항하지 않고 도주했다면 일본군은 진격을 멈출 이유도, 점령지를 포기하고 되돌아갈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중국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수동적으로 뒤따라가며 점령지를 회복한 것이 아니라 적의 배후로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였고 도처에서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런 점에서 카이로 회담 당시 루즈벨트의 "중국군은 전혀 싸우지 않는다"라는 비판은 명백히 부당한 것이죠.
※ 사실 루즈벨트와 그의 참모들은 중국전선의 상황을 거의 알지 못했으며 매우 단편적이고 편향된 정보만을 접하고 있었는데다 인종적 편견까지 더해져 대중정책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습니다.
< 43년에 전개된 3대 전역의 전개현황 >
그러나 상덕회전에서 중국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를 재현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전사 1,274명, 부상 2,977명에 대해 중국군 사단장 6명을 비롯해 2만9천명을 사살하고 1만4천명을 포로로 획득했다고 주장했으나 중국군은 일본군 4만명 이상을 살상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충분한 준비없이 무리한 작전을 전개한 일본군도 큰 피해를 입었지만 중국군은 사단장 3명이 전사하고 제4사단, 제9사단, 제57사단은 완전히 전멸했으며 제6전구와 제9전구의 손실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타 전구들 역시 그동안 누적된 손실로 심각하게 약화되어 붕괴직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중국군이 약화된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스틸웰이 주도하는 버마탈환작전때문이었습니다. 42년초 자신의 첫싸움에서 일본군에게 완패한채 인도로 쫓겨갔던 그는 버마를 탈환하여 명예를 회복하기를 원하였고 장개석에게 험프루트는 비상통로일뿐 중국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할 수 없으므로 북부 버마를 탈환하여 일본의 봉쇄망을 뚫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개석은 500대의 항공기와 험프루트의 물자를 매월 5천톤으로 늘리는 조건으로(물론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지만) 스틸웰에게 병력을 제공키로 동의합니다.
제1차 버마전역당시 활약했던 손입인의 제38사단을 시작으로 42년 7월부터 인도북부의 람가르훈련소로 공수되어 X군을 편성하였고 추가로 운남 곤명에서 Y군이 편성되어 미식사단으로 재훈련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3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각 전구에서 빼내야 했고 44년 3월 루즈벨트와 스틸웰의 압력에 못이겨 이들을 북부버마에 투입해야 했던 장개석은 그 직후 시작된 일본군 최후최대공세였던 이치고작전에서 아무런 예비전력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는 전선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너무나 궁핍하고 피폐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국토의 절반과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와 산업시설의 대부분을 빼앗긴 상태에서 남은 땅은 척박했고 인구는 과잉상태였으며 여기다 40년 이후 매년 반복되는 가뭄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까지 겹쳐 전국 곳곳에서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합니다. 외부와의 통로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중국은 영, 소가 누리던 미국의 풍족한 원조혜택조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얼마안되는 공장들은 원료부족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가동률은 20%이하였습니다.
전선에서의 사상률은 끔찍했으나 이를 보충하기 위한 징병시스템은 형편없이 낙후되어 심지어 "강제모병대"가 편성되어 마을과 들판을 돌며 마구 납치했고 식량과 의약품의 부족으로 수많은 신병들이 전선에 배치되기도 전에 행군과정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이 숫자는 무려 140만명에 달하였고 중일전쟁기간 동원된 총 1400만명중 약 10%였습니다.
군대는 굶주렸고 전염병까지 만연하여 43년 제5기 2중전당대회에서 군정부장 하응흠은 인도로 파견될 장병들의 신체검사에서 합격한 인원은 22.4%에 불과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탈락된 사람의 절반 가까이는 전염성 결막염이었고 20%가 옴 피부병, 그리고 18%가 신장, 체중부족이었습니다.
데오도어 H. 화이트의 말대로 당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이 그토록 오랫동안 버틴 것이 가장 큰 기적이었습니다. 분명 중국 대륙의 광대한 공간이 일본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민족의 외침을 받아 여러번 정복되었다는 점에서 단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차대전당시 영, 프, 독을 비롯한 전쟁의 주요 참전국들은 모두 중국보다 훨씬 산업화되고 부유한 나라들이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대다수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음에도 전쟁이 장기화되고 쌍방의 봉쇄로 기아에 허덕이자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결국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쪽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청일전쟁, 보다 길게는 아편전쟁이래 근 100여년간 혼란의 연속이었으며 안정을 누릴 잠깐의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낙후되어 있었고 근대전과 총력전에 대한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장개석은 독재를 지향했지만 철권통치를 하며 공포와 압제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있었던 스탈린에 비한다면 정권의 기반은 훨씬 취약했으며 연안에는 국가속의 국가나 다름없는 중공정권이라는 적대적인 위협까지 존재했습니다.(43년이 되면 국공 쌍방의 충돌은 갈수록 격화되었고 중공이 장개석 정권의 전복과 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월등히 우세한 적을 상대로 엄청난 손실을 지속적으로 감수해야 했음에도 스스로 붕괴되기 시작했던 제정러시아나 독일 제2제국과 달리 말기적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전쟁 후반에 오면서 농민들의 저항과 반란이 점점 빈번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이나 정권의 타도 그 자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인내심과 리더쉽은 분명 경이로운 것입니다.
한편으로, 마지막까지 항복하거나 타협을 거부했던 장개석의 지구전략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44년에 오면 중국은 사실상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참 저렇게 고생해서 일본인들을 몰아냈는데 결국에 대륙에서 쫓겨나 쪼만한 섬에 처박히게됬을때 심정이 어땟을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