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색황(色荒)과 금황(禽荒)이 있었다. 대체로 어느 한 가지 일에 미혹되어 정신이 황폐(荒癈)해져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모두 황(荒)이다. 지금 세상에는 오황(五荒)이 있다.
첫 번째는 장황(葬荒)이다. 무릇 길택(吉宅)에서 태어나 살아 부(富)와 귀(貴) 둘을 온전히 누리는 것은 효자라도 부모를 위해 얻을수 없고 자애로운 아버지라도 자식을 위해 이룰 수 없으니, 명운(命運)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장지(葬地)의 경우에는 사람의 힘으로써 도모한다. 하지만 생년 일시, 장수와 요절과 궁달(窮達)이 여기에 관련되어 자애로운 부모라도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택할 수 없으니,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
유독 장일(葬日)의 경우에는 사람의 힘으로써 도모한다. 하지만 금ㆍ구슬ㆍ옥ㆍ비단은 힘 센 장사의 힘으로도 차지할 수 없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뜻대로 얻을 수 없으니, 운수(運數)가 있기 때문이다.
유독 명혈(名穴)의 경우에는 사람의 힘으로써 도모한다. 생사(生死)는 한 가지 이치이고 명운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다만 죽은 자는 속이기 쉽고 썩은 뼈는 공허하고 하찮다고 보아 이리저리 희롱하고 꾀를 부린다. 매장하고 천장(遷葬)하기를 장인(匠人)이 나무나 돌을 가공하는 것 같이 하고, 부귀를 끌어다가 움켜쥐는 것이 마치 한로(韓盧.사냥개)가 꿩이나 토끼를 쫓는 것 같이 해서 차라리 목숨을 바치더라도 후회가 없다.
두 번째는 반황(班荒)이다. 우리나라의 이른바 양반(兩班)은 바로 중국의 사대부이다. 무릇 사대부는 세덕(世德)과 심행(心行), 도의(道義)와 지조(志操), 식견과 문장, 사업과 관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명칭이다. 이 8가지 중에서 2가지가 없으면 사대부가 되기에 부족하고 4, 5가지가 없으면 사대부라는 실제를 상실한다.
지금 사람들은 비록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가문이라 하더라도 모두 8가지 중 5, 6가지를 상실한 채 함부로 사대부라고 칭한다. 더구나 시골의 한미한 집안은 원래 그중 한 가지도 없는데, 망녕된 생각으로 갑자기 사대부 지위를 차지하려고 자녀를 사고팔고 보계(譜系)를 꾸미고 윤색한다. 언어ㆍ웃음ㆍ목소리ㆍ인사ㆍ걸음걸이ㆍ의복ㆍ집기류 등 일체 타고난 참모습을 버리고 양반이라고 분장해서 꾸미니, 눈과 코를 흔들고 뒤집으며 사지와 뼈가 유들유들하고, 말과 행실이 병든것 같고 왕래하는 교유가 마치 미친듯하다.
세 번째는 시황(時荒)이다. 천도(天道)가 변화하여 풍기(風氣)가 바뀌기 때문에 성현 역시 시속을 따른다는 가르침이 있으니, 시속의 숭상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시체(時體)는 30년 만에 조금 변하고, 60년 만에 크게 변한다. 만일 옛 제도를 곡진히 고수한다면 세속을 놀라게 하여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경화(京華)의 저잣거리에서 천박하고 경솔하게 아침저녁으로 뜯어 고치는 것은 일시의 풍습이니, 시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향촌에서 아첨하는 자들은 시속의 풍조를 추구하는 무리를 오로지 사모하여, 언어ㆍ관복(冠服)ㆍ용모ㆍ행동거지ㆍ걸음걸이를 번번이 아침저녁으로 고치는 행태를 본뜬다. 그리하여 아침에 한양의 객(客)을 보면 낮에 걸음걸이를 바꾸고, 오늘 한양에 들어가면 다음 날 읍(揖)하는 자세를 바꾸니, 1년 된 헌 옷이 없고, 3년 동안 묵은 말이 없다.
매번 시관(時冠. 당시 유행하는 冠을 말함)과 시의(時衣)를 갖추고, 시보(時步)로써 문을 나서며, 시어(時語)로써 다른 사람과 대면한다. 뒤돌아보는 행동도 유래가 있고, 누웠다가 일어날 적에도 모두 묘리가 있다며 으쓱거리면서 스스로 좋아한다. 하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고을 경내를 떠나고 싶어 하고, 부유한 사람은 문을 닫고 싶어 한다는 점을 모른다.
네 번째는 교황(交荒)이다. 벗을 사귀는 도리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온 세상이 겉치레만을 추구하여 오로지 교유를 맺는 것만 숭상한다. 교유하는 이유는 도의(道義)도 아니고 지기(知己)도 아니며 정의(情誼)도 아니고 대대로 내려온 교분도 아니다. 다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 이른바 자기보다 낫다는 것은 바로 사는 곳, 문벌, 관작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더러는 도덕이 있는 사람, 학문이 있는 사람, 군자다운 사람이 있으면 교유할 줄 모르고, 단지 경박한 자, 이익을 좋아하는 자, 간사한 자만을 취하여 따르며 어깨를 움추리면서 아첨하며 웃고, 떠돌아다니며 왕래하고, 뇌물을 싸서 보낸다. 혹 한 번 얼굴빛을 바라만 봐도 평생의 영예로 삼고, 몇 통의 서첩(書帖)을 평생의 은혜로 삼는다.
사람과 대면하여 말할 적에 인사말을 할 겨를도 없이 모보(某甫)가 모군(某郡)에 산다느니, 모인(某人)의 자(字)가 모보라느니, 어느 곳에서 방금 돌아왔다느니, 어느 곳의 소식을 조금 전에 들었다느니, 하나하나 세면서 의기양양 거드름을 피운다. 본심이 모두 망하고 환상만 남아 있으며 일생 동안 마음 졸이는 비속한 사람이 되고 백 년토록 권세가의 저속한 벗이 되어 천리마의 꼬리에 붙은 파리가 되려고 하다가 마침내 땅바닥에 팽겨쳐진 뱁새가 된다.
지친(至親)과 의척(懿戚.친척)이나 총각 시절 사귀던 옛 친구와는 마음과 정이 단절되어 오래전에 이미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머나먼 사이가 되었다. 흰머리에 가난한 집에서 유령(庾令)의 문안 편지나 부질없이 끌어안고 지내는 신세이다 보니 명정(銘旌)이 나부끼는 조도(祖道)에도 거경(巨卿)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곡하는 일은 없다.
다섯 번째는 향황(鄕荒)이다. 향교와 서원은 예법을 익히며 서로 간에 어진 품성을 돕는 곳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유자(儒者)의 의관을 차려입고 여유롭게 노닐며 쉬고 있으니, 어찌 선을 권장하며 허물을 경계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덕이 있는 이를 높이고, 대대로 내려온 교분으로 서로 사랑하고, 순박한 풍속을 세울 수 있겠는가. 어찌 내 마음에만 만족스럽지 않을 뿐이겠는가. 또한 후손을 위한 장구한 염려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배불리 먹기 위한 소굴로 삼고, 한편으로는 알력하고 모함하는 장소로 삼는다. 극히 하찮은 원한과 밥 한 그릇 때문에 아버지 친구 분에게 칼을 어루만지고 피로써 갚을 원수에게는 입을 다문다. 남의 장점을 싫어하고 당색을 따져 묻기 때문에 우물에 빠진 죽마고우에게 돌을 던지고 와신상담할 대상에게는 밧줄을 내려서 도와준다.
뜻을 얻으면 달팽이 뿔 위에서 승리하여 개선하는 꼴과 같고, 세력을 잃으면 유수(濡須)가 뜨거운 탕(湯) 속에서 서로 조문하는 꼴과 같으니, 더러는 유생의 통문(通文)에서 집안이 욕을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형틀에서 몸을 망치기도 한다. 말과 웃음이 정성스럽고 흡족하여 인정이 있는 듯하고, 출입이 민첩하고 날래어 권력을 차지한 듯하다. 하지만 필경 얻는 것이라곤 장의(掌議)라는 이름뿐이니, 천고토록 씻기 어려운 치욕이 이미 삼세(三世)의 백골(白骨)까지 미치게 된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마지막 숨이 갑자기 끊어지니, 남을 해친 남은 앙화(殃禍)에 대해 귀신이 이미 눈을 부릅뜬다.
무릇 이 다섯 가지 황(荒)은 세상의 큰 재앙을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기개가 호걸스럽고 뜻이 큰 사람이 더욱 미혹되니, 다섯 가지 황 중 하나라도 몸에 있으면 망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더구나 그중 하나가 있자마자 네 가지 황이 서로 잇따른 경우이겠는가. 참으로 마음을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두려워할 줄 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