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아일랜드 기행 26 / Afternoon Tea
Afternoon Tea
스코틀랜드의 바람을 타서
차 한 잔을 마신다
거기 브리튼Britain의 미소와
약간의 근심을 섞어 마시면
나의 핏줄 속으로 들어간 북방의 바람소리는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될까
내 몸속을 떠돌던 이역의 바람소리는
햇살 밝은 날 밖으로 나와서
솔즈베리 대평원의 풀잎을 흔들고
아일랜드의 포도알에 스미고
더러는 별을 흔들다가 남은 바람은
어느 가난한 영혼의 발을 씻는가
한두 방울의 눈물을 섞어
헐벗은 목숨들의 상처를 씻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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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Afternoon Tea
정말 오후였고
깨끗한 시간이었고
차 한 잔이 생각나는 시간
스코틀랜드의 영광을 둘러보고
‘세인트 마가렛 교회’의 사랑과 기도를 둘러보고
꿈꾸는 왕실의 미래를 들여다보고
달빛과 맞서려는 영화를 보고
저 일어서는 사자와
성스러운 유니콘과
수많은 기사들이 전장에 두고 간 창과 검을 둘러보고
성채를 둘러보는 동안 시간이 모르게 흘러
정말 오후였고
정말로 흠 없는 시간이었고
정말로 차 한 잔이 생각나는 시간
우리 일행은 군사박물관 옆 건물의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나누었다 이름하여
‘afternoon tea’
코리언의 여정이란 대개 쉼을 잊은 여정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이천칠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소화해야 했고
지치지 말아야 했으며
휴식을 몰라야 했다
그래야 했다
한 곳에 조용히 앉아 쉬는 휴식을 잊은 여정
휴식을 잊은 생은
휴식이 찾아오면 차라리 당황스러운 것
그랬기에
바람 속을 앉아 오랜만에 만난 휴식이
뜻밖이고 놀랍고 유쾌하고 즐거웠다
아니, 휴식을 잊은 코리언에게
그것은 가슴속을 스미는 신성의 시간이었다
쉬지 못한 삶을 쉬어간다는 것
잊어버린 휴식을 되찾아온다는 것은
도난당한 보석을 되찾아온 느낌
너무 많이 잊은 삶이
잊은 것이 있어도 잊은 줄을 모르던가
‘afternoon tea’
그레이트브리튼 사람들의 티타임은
오후 네 시와 다섯 시 사이
정오는 진작 지났고
아직도 저녁식사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먼 시간
그 외로움을 한 잔의 차로 달래며
멋과 여유를 누리는 시간
그러나 우리는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에 차를 마셨다
그래도 행복했다
나는 차를 마시는 일상의 습관을 모르는 사람이라
처음에는 그저 한 잔의 차에 섞은
하이랜드의 바람소리를 마시다가
나중에는 차 한 잔을 마시는 사람들의
풍경을 마시고
미소를 마시고
마지막에는 나도 기어코 한 잔의 행복을 마셨다
마시는 기쁨은 행복하고
바라보는 즐거움은 은근했다
도토리처럼 추위 속을 앉아
북방의 바람을 마시는 일은 달콤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그마한 케이크 한 조각과 scone
꼬챙이에 꿴 치즈 한 조각과 빵 한 조각
웃기로 초콜릿을 얹은 과자 한 개
그리고 따끈한 커피 한 잔
저 빅토리아 시대의
멋진 사교와 생활의 여유가 담긴 시간
에드워드 시대 상류사회의 교제와
은밀한 사랑과 우정을 닮은 시간
그리하여 비록
초대 받은 피아니스트의 반주는 없었어도
‘little tea time’은
조용했고 아늑했고
바람 속을 앉아서도 행복했다
애프터눈 티를 처음 발명했다는
베드포드 7대 공작부인 안나 마리아
안나 마리아의 식탁이 아닌들 어떠랴
엘리자베스 시대의 찻잔과 복색이 아닌들 어떠랴
조용한 오후의 조촐한 한가로움을
저마다의 무릎 위에 한 잔씩 얹어 놓고
우리는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행복감에 젖었다
내가 마신 것은 한 잔의 차가 아니라
한 잔의 행복
한 잔의 안식
성 밖을 부는 에든버러의 바람소리
그리고 떠도는 자의 알 수 없는 설레임
회개할 죄도 따로 없어
마음 놓고
마음 놓고
낙원을 불러놓고 수다를 떨던
에든버러 성에서의 짧은 티타임
우리는 차를 마시기 위해
처음 자리에 앉을 때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