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멋모르고 자전거를 갖고 갔다가 끌고 메고 힘겹게 도착한 소매물도 본 섬 정상부. 뒤로 물이 빠지면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등대섬이 보인다.
견내량~통영~거제 학동리~매물도~을숙도~포항
천지에 가득한 가을 기운은 사천에서 고성을 거쳐 통영, 거제로 향하는 지방도 위에 진액처럼 농축되어 있었다. 자전거 안장에 앉아 기계적으로 페달링을 하며 가을의 중심을 관통할 때 햇살은 바퀴 아래서 수많은 파편을 뿌리며 산산이 부서지고, 쾌적한 대기가 온 몸을 부드럽게 보듬어 마치 내 몸과 자전거가 분리된 채 각각 다른 공간을 따로 따로 이동하고 있는 것 같은 환각에 빠뜨린다.
남녘의 쪽빛 바다는 소슬바람에 일렁이며 수평선 위에 드리운 푸른 하늘과 서로의 색을 나눠 그 경계가 모호하다. 시야 가득 펼쳐지다 등 뒤로 사라져가는 풍경이 아쉽지만 해안도로의 모퉁이를 돌면 또 다른 스펙터클이 나타나 가을 바닷가의 감동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견내량에선 충무공, 통영에서 충무김밥에 매혹
견내량을 건너기 전 물통을 꺼내 목을 축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집단가출 자전거 전국일주가 시작된 것이 지난해 이맘때. 출발점인 강화도에서 가을은 오늘처럼 찬란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가을은 찾아왔고 전국일주팀은 강화도로부터 약 2,000km를 주파해 서해를 돌고 바야흐로 남해안의 동쪽 끄트머리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덧 1년이 지났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지난 12개월간의 자전거 여행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가을에 강화도를 출발한 우리들은 태안 안면도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았고, 보령 군산에서 봄꽃을 보았고, 아스팔트가 녹아나던 뜨거운 여름 동안 무안 목포 해남 완도 보성 구간을 질주했다.
차도로만 달렸다면 벌써 포항쯤을 통과해야 할 시점이지만 가능하면 자동차를 피해 해안선을 온전히 잇는 길을 연결하고자 논밭길, 산길, 마을 뒷길, 심지어 갯벌을 횡단하기도 하는 무모한(?) 도전의 결과 주행거리에 비해 전진이 다소 늦었다. 이제 부산을 거쳐 울산, 포항으로 올라가 동해안에 접어들면 또 다시 겨울이 올 터.
견내량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비좁은 해협으로 지금은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왜군을 물리친 여러 대첩 중에서도 큰 승리로 손꼽히는 한산대첩의 시발점. 1592년 왜군이 침략해 온 그해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조류가 강한 견내량에 모여 있던 왜군의 주력 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으로 섬멸, 왜군의 일방적 우세이던 왜란의 초반 전세를 뒤집는 단초를 마련한다.
통영에서는 충무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충무김밥의 특징은 밥과 반찬이 함께 섞인 일반 김밥과 달리 밥 따로, 반찬 따로라는 점이다. 반찬은 무김치와 함께 주꾸미, 홍합, 호래기(꼴뚜기), 오징어무침이 계절에 따라 달리 나오는데 우리가 들른 식당에서는 연중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오징어가 나왔다.
충무김밥의 탄생 스토리는 몇 가지 다른 버전이 있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이 ‘부패방지론’이다. 일반적인 김밥처럼 밥과 반찬을 함께 섞으면 더운 날씨에 상하기 쉽기 때문에 분리해서 만드는 충무김밥이 개발됐다는 얘기다.
초창기 충무김밥의 주요 고객은 남해항로를 오가는 선박의 뱃사람들이었다. 통영항은 예로부터 화물을 싣고 전라도와 경상도를 왕래하는 배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는 곳으로 뱃사람들을 위한 패스트푸드였던 셈이다.
충무김밥은 199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퍼져 서울을 비롯한 여타 대도시에서 충무김밥 간판을 흔히 만날 수 있지만 아직까지 오리지널의 맛을 좇아가지는 못한 듯싶다. 통영에서 맛본 충무김밥은 온기가 살짝 남아 있는, 적절히 찰진 밥과 김의 훌륭한 조화 외에도 오징어무침과 무김치에 무수한 타 지역 아류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내공이 있다.
- ▲ 1 부산~울산~포항 구간의 해안은 대부분 몽돌이나 자갈로 이뤄져 울산을 지나 호미곶을 향하던 중 필자와 정상욱 대원이 함께 코스를 의논하고 있다. 2 이른 아침의 해운대 해변. 오랜만에 찾은 해운대는 고층빌딩들이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거제도는 여느 섬들과 달리 산세가 가파르고 높다. 섬의 북에서 남으로 대봉산, 대금산, 맹산, 계룡산, 노자산, 가라산 등 만만찮은 높이의 산들이 차례로 버티고 섰는데 그 산들의 정수리 부분은 벌써 일부 갈색으로 물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제도는 우리들이 느긋하게 가을을 즐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섬의 남서해안을 따라 이어진 1018번도로는 전 구간이 끝없는 오르막 내리막의 연속. 사천에서 거제도 입구까지 비교적 평탄한 길을 달려왔던 멤버들은 밥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갑자기 시작된 고갯길에서 지리멸렬했다.
고난의 클라이맥스는 구천저수지 부근. 저수지 앞뒤로 해발 400m의 산 2개를 넘어야 했는데 한계령의 축소판 같은 고갯길을 오르며 혹시 지나가는 트럭이 있다면 얻어 타고 싶을 만큼 진땀을 뺐다.
3시간 가까이 페달을 밟아 7개의 고개를 오르내린 끝에 거제도 남동쪽 학동리에 도착했을 때 통영에서 먹은 충무김밥의 열량은 몽땅 소진되어 다시 배가 고팠다. 통영에서 행동식으로 구입해 둔 꿀빵을 두세 개씩 먹고 나서야 기운이 보충되었다.
거가대교 개통 후 통영 꿀방 없어서 못 팔아
통영 꿀빵은 충무김밥과 함께 통영이 자랑하는 먹거리다. 골프공보다 조금 큰 꿀빵은 팥소를 넣어 튀겨낸 빵에 시럽을 바르고 깨를 뿌린 간식 메뉴로 약 50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나 통영의 지리적 조건 탓에 경주 황남빵과 같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얼마 전 개통된 거가대교 덕분에 부산으로 바로 건너가는 길이 뚫리자 거제도의 초입인 통영에도 관광객이 늘어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평일에도 빵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풍경이 낯설지 않고 원조급 유명 꿀빵집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품절되기도 한다.
학동리에서 길은 해안 일주도로인 14번지방도와 합류하는데 이곳도 물론 가끔 고개가 나타났으나 거제도의 산악지대를 횡단하는 1018번도로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다. 게다가 한려해상국립공원을 굽어보며 달릴 수 있는 거제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다. 대부분의 차량이 거제도 북쪽 해안도로로 통행하므로 남쪽 해안도로는 관광객들과 마을 주민의 차량 외엔 교통량이 거의 없어 한적하다.
더 좋은 것은 14번도로와 나란히 구조라, 소현, 신촌, 와현 등 갯마을들을 통과하는 옛길이 있어 작은 어촌 골목을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 망치몽돌해변, 구조라해변 등 해변도 아름답지만 거제도의 남쪽 꼬리에 해당하는 해금강과 외도, 매물도 등 아름답기로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많은 섬들이 쪽빛바다 위에 눈이 시리게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