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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다.>
✠ 하느님의 어린양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부활의 예형
그 무렵 1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2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는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3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5 베드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6 이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어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고 명령하셨다.
마태오 17,1-9
사순 제2주일
「행복은 주님과 함께할 때 찾아와」
너무 외로워서 힘들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늘 외톨이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런 질문을 한 번 던져보았습니다.
“혹시 화장실에서 힘주고 계실 때에도 외롭습니까?”
분명히 화장실 안에서도 혼자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도 않고 또 함께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주고 있을 때 외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외로워서 힘들 때는 집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 내 옆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을까요? 옆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그에 대해 집중하지 않으면 혼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나를 늘 외면하시는 주님인 것 같다면서 외롭고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역시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기도나 묵상 생활을 하지 않고, 성경이나 영적 독서를 통해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으며, 미사나 피정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키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과연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유럽 성지순례를 다니다 보면 중세 수도원을 순례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대부분 도시에서 벗어나서 홀로 고립되어 있습니다. 외롭고 힘든 삶이 가득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수도자들은 이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했습니다. 장소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면서 푹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 푹 빠져 있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이 제자들은 이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게 되지요. 더군다나 그 자리에는 당시 유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아마 천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베드로는 이 자리에 눌러살자는 의미로 초막을 지어서 이곳에서 지내자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긴 이전까지 바쁜 전교 여행을 통해 얼마나 힘들고 피곤했을까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활동하기보다는 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지요. 단지 자신의 욕심이 드러난 말일 뿐이었습니다. 이에 하늘에서는 이런 말이 울려퍼집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한 제자들을 향한 하늘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외침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만 푹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불평불만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향해 제발 주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기를 요청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 집중하면서 푹 빠져 있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면 기쁨과 행복이
제1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까지도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번제물로 봉헌하려고 했던 것은 그만큼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푹 빠져 있는 굳은 믿음을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들에까지 이어지는 복을 내려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은 아브라함처럼 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친아드님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로마 8,32)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질 수 있도록 스스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노력은 일상의 삶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지요.
“거룩함은 특별한 것을 행함을 뜻하지 않고, 사랑과 신앙으로 평범한 것을 행함을 뜻합니다.”
사랑과 신앙을 가지고 평범한 것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더 주님께 푹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푹 빠지는 생활 안에서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님 「오늘의 묵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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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글 하나 더 드립니다~~~
「화는 참아야 할까? 참지 말아야 할까?」
화를 참는 것이 좋을까요? 그냥 표출하는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화는 참는 것이 아니라, 표출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 상대나 붙잡고 표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품고 있는 모든 화를 신나게 겉으로 풀어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아무런 효용이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이성은 마비가 되고 그 후에 극심한 후회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심한 자괴감, 죄의식, 우울증 같은 정서장애까지 찾아옵니다. 몸에도 이상이 생길 수 있지요. 혈압상승, 위경련, 심장 통증 등등....
이는 화를 내는 사람만이 겪는 것이 아닙니다. 화를 받는 사람 역시 비슷한 증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화를 어떻게 표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통제 능력을 상실하면서 화를 표출한다면 분명히 후회만 밀려들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화의 해소는 이해와 화해라고 합니다. “너 때문에 나는 화가 났어. 그러니 용서를 청해.”라고 명령을 내린다면 어떨까요? 아마 더 큰 화만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너를 이해하고 너와 화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내가 지금 화가 나서 많이 힘드네. 나 좀 도와 줄 수 있어?”
이해와 화해에 기본을 두고서 화를 해소해야 합니다. 모두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요?
***<사랑 자체가 지식이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많이 알게 된다(성 그레고리우스). >
사순 제2주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2-10)
「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
わたしの心に適う者。
これに聞け」
(マタイ17・1-9)
“This is my beloved Son.
Listen to him.”
(Matthew 17:1-9)
四旬節第2主日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 イヌン ネガ サランハヌン アドリニ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ノヒヌン クエ マル ドロラ。
(마르코 9,2-10)
「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
코레와 와타시노 아이스루 코
わたしの心に適う者。
와타시노 코코로니 카나우 모노
これに聞け」
코레니 키케
(マタイ17・1-9)
“This is my beloved Son.
Listen to him.”
(Matthew 17:1-9)
Second Sunday of Lent
Matthew 17:1-9
Jesus took Peter, James, and John his brother,
and led them up a high mountain by themselves.
And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his face shone like the sun
and his clothes became white as light.
And behold, Moses and Elijah appeared to them,
conversing with him.
Then Peter said to Jesus in reply,
“Lord, it is good that we are here.
If you wish, I will make three tents here,
one for you, one for Moses, and one for Elijah.”
While he was still speaking, behold,
a bright cloud cast a shadow over them,
then from the cloud came a voice that said,
“This is my beloved Son, with whom I am well pleased;
listen to him.”
When the disciples heard this, they fell prostrate
and were very much afraid.
But Jesus came and touched them, saying,
“Rise, and do not be afraid.”
And when the disciples raised their eyes,
they saw no one else but Jesus alone.
As they were coming down from the mountain,
Jesus charged them,
“Do not tell the vision to anyone
until the Son of Man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2026-03-01「イエスの姿が彼らの目の前で変わり、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
+神をたたえよう。神は偉大、すべては神に造られた。
おはようございます。
今日は四旬節第2主日です。
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と神の母の聖マリア、聖母の配偶者聖ヨゼフ、諸聖人の大いなる祝福がありますように!
また、大天使とすべての天使、私たちの守護の天使が今日も皆さまを見守り平和でありますようお祈り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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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タイによる福音
<イエスの姿が彼らの目の前で変わり、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
そのとき、17・1イエスは、ペトロ、それにヤコブとその兄弟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た。2イエスの姿が彼らの目の前で変わり、顔は太陽のように輝き、服は光のように白くなった。3見ると、モーセとエリヤが現れ、イエスと語り合っていた。4ペトロが口をはさんでイエスに言った。「主よ、わたしたちがここにいるの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お望みでしたら、わたしがここに仮小屋を三つ建てましょう。一つはあなたのため、一つはモーセのため、もう一つはエリヤのためです。」5ペトロがこう話しているうちに、光り輝く雲が彼らを覆った。すると、「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これに聞け」という声が雲の中から聞こえた。6弟子たちはこれを聞いてひれ伏し、非常に恐れた。7イエスは近づき、彼らに手を触れて言われた。「起きなさい。恐れることはない。」8彼らが顔を上げて見ると、イエスのほかにはだれもいなかった。
9一同が山を下りるとき、イエスは、「人の子が死者の中から復活するまで、今見たことをだれにも話してはならない」と弟子たちに命じられた。(マタイ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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チョミョンヨン神父様の「今日の黙想」です。(すみません。書き忘れました。昨日の黙想文もチョミョン神父様でした。)
「幸せは主と共にいるときに訪れる」
あまりにも孤独でつらいという方に出会ったことがあります。自分はいつもひとりぼっちだった、そして今はこの孤独に耐えられない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そこで私は、こんな質問をしてみました。
「トイレで力んでいるときも、孤独ですか。」
確かにトイレの中でもひとりです。誰も助けてくれませんし、共にい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ときに孤独だと言う人はいません。結局、孤独がつらいと感じるのは、何かに集中していない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誰かが隣にいるからといって、孤独ではないのでしょうか。たとえ隣に人がいても、その人に心を向けていなければ、ひとりでいるのと大差はありません。
信仰もこれと似ているように思います。
主がおられないように感じる、いつも自分を見捨てているようだと言って、孤独でつらいと訴えることがあります。しかしそれも、主に深く心を向けていない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祈りや黙想の生活をせず、聖書や霊的読書を通して御言葉に耳を傾けず、ミサや黙想会を通して信仰を育てようとしなければ、どうして主を感じ、主と共に歩む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ヨーロッパ巡礼で中世の修道院を訪れることがあります。それらの修道院の多くは町から離れ、孤立した場所に建てられています。外から見れば、孤独で厳しい生活のように思えるでしょう。しかし中世の修道士たちは、その中で大きな喜びと幸せを体験しました。場所や環境が問題なのではなく、主に集中し、主に深く心を向けていたことが大切だったのです。
主に深く心を向ける私たちとなれますように
イエス様は、ペトロ、ヤコブ、ヨハネだけを連れて高い山に登られました。彼らはそこで、栄光に輝く主の御姿を目撃します。しかもその場には、ユダヤ人が最も尊敬していたモーセとエリヤが現れていました。
まるで天国のように感じ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だからペトロは、この場所にとどまりたいという思いから、仮小屋を三つ建てましょうと申し出たのです。それまで忙しい宣教の旅でどれほど疲れていたことでしょう。もう活動するよりも、ここで休みたかったのかもしれません。
しかしそれは、主の御心を十分に理解していない言葉でした。ただ自分の望みを語ったにすぎなかったのです。そのとき天から声が響きました。
「これはわたしの愛する子、わたしの心に適う者。これに聞け。」(マタイ17・5)
主に深く心を向けていなかった弟子たちへの天の呼びかけでした。そしてその呼びかけは、今を生きる私たちにも向けられています。世のものにばかり心を奪われ、不平や不満の中に生きている私たちに、どうか主の御言葉を聞き、それに従いなさいと招いておられるのです。
信仰と愛によって行うとき、喜びと幸せがある
第一朗読のアブラハムが、愛する息子イサクさえも主の御命令に従ってささげようとしたのは、主に深く心を向けていたからでした。その揺るぎない信仰ゆえに、彼とその子孫にまで及ぶ祝福が与えられました。
もちろん、私たちの信仰はアブラハムのようにはいか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つらいからといって努力さえしない愚かな信仰者になってはなりません。御自分の独り子さえ惜しまず、わたしたちすべてのために引き渡された(ローマ8・32)神様の愛に、深く心を向ける努力を尽くすべきです。
この努力は、日常生活の中で可能です。フランシスコ教皇はこう語られました。
「聖性とは特別なことを行うことではなく、愛と信仰をもって平凡なことを行うことです。」
愛と信仰をもって日常を生きるとき、私たちはますます主に心を向ける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主に深く結ばれた生活の中で、真の喜びと幸せを得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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毎日の福音を読み、愛と信仰をもって復活の喜びを先取りして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聖霊、来てください。
